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충남 당진에 있는 버그내 순례길을 걸었다.
버그내는 삽교천 하류, 당진시 합덕읍·우강면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
한국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었다.
척박한 길을 걷는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나 자신과 대화하며 묵묵히 걸었다.
당진시가 13.3㎞에 이르는 버그내순례길을 조성한 건 2010년 즈음이다.
순례길은 성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 솔뫼성지에서 시작한다
이 길은 한국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이 피흘리며 걸어가던 곳이었다.
솔뫼성지(1)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지 솔뫼성지에 도착했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이다
솔뫼성지의 소나무는 곧게 뻗은 소나무가 없다.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현장을 지켜본 소나무들이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굽어 오른 탓일 것이다.
솔뫼성지(2)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장소다.
그래서 이곳은 ‘한국의 베틀레헴’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한 뒤 버그내 순례길은 의미가 더욱 깊어졌다.
솔뫼성지(3)
2004년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 안채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생가 앞에는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들은 생가 앞에서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를 바쳤다.
솔뫼성지(4)
12사도상이 반겨주는 솔뫼 아래나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아레나’라는 말은 현대적 의미로 원형 경기장이나 원형공연장을 뜻하는 말이다.
솔뫼 아레나에서는 야외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며, 1,200명이 앉을 수 있다.
합덕전통시장
솔뫼성지에서 약 2㎞를 걸으면 합덕 전통시장이 나온다.
과거 '버그내장'으로 불렸던 곳이다.
공개적으로 천주교를 믿을 수 없던 시절, 신자들은 시장에서 만나 소식을 묻기도 했다.
신자들이 남의 눈을 피해 만나 안부를 묻고 정보를 나누며 신심을 다지던 곳이다.
뚝방길을 걷다
장터를 지나면 합덕제가 나온다.
합덕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로, 연꽃이 만발해 연지(蓮池)라고도 불리웠다.
지금은 저수지가 논으로 변하여, 제방만이 남아있다.
순례길에서 가장 여유롭게 자연을 느끼며 걷기 좋은 구간이다.
합덕성당(1)
합덕제 인근에 합덕성당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섞인 고풍스런 건물이다.
1899년 초대 본당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현 위치에 한옥성당을 건축하였다.
그 뒤 7대 주임 패랭(白文弼) 신부가 1929년 현재 건물인 고딕 양식 성당을 새로 지었다.
합덕성당(2)
천주교 신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된 내포교회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지상에서 계단 양쪽에 일렬종대로 자라고 있는 반송이 둘러씨고 있다.
합덕성당의 부속건물 앞에 옹기종기 앉아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합덕성당(3)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성당도 수난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 주임 신부인 페랭 신부가 공산당에게 체포돼 순교했다.
성당의 뒷마당에 페랭 신부 순교비가 있다.
우리들은 순교비 앞에 모여 '한국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를 드렸다.
합덕제 중수비
방죽길을 따라가면 방죽 끝 대합덕리 농가의 밭둑에 8기의 비석이 있다.
제방의 서쪽 보수할 때의 기록을 적어둔 중수비다.
그중 최고의 것은 1767년(영조 43)에 세운 연제중수비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데 모아놓았다고 한다.
버그내 순례길을 탐방하려면 물고기 이정표만 따라가면 된다.
‘버그내순례길’을 뜻하는 ‘ㅂㄱㄴㅅㄹㄱ’을 써넣은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코스의 대부분이 드넓은 평야지대로 그늘이 없다.
복자(福者) 원시장(베드로), 원시보(야고보) 우물(1)
이 우물은 성동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샘으로 알려져 있다.
1792년 내포 출신 첫 순교자인 원시장과 원시보를 기리는 장소다.
사촌지간인 원시장과 원시보는 각각 1793년, 1799년 순교했다.
복자(福者) 원시장(베드로), 원시보(야고보) 우물(2)
원시장은 천주 신앙을 끝까지 고백하다가 1793년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사촌형제인 원시보 야고보 역시 1799년에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우물은 이 땅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마셔온 생명의 샘이요, 영혼의 쉼터이다.
무명 순교자의 묘(1)
이곳은 순교자. 교우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무덤들은 원래 마을 어귀의 대전리 언덕에 산재해 있었다.
1972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파묘, 이장되었다.
두상이 없는 유골들이 많았고, 썩어 부서진 묵주와 십자가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 성 손자선 토마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명 순교자의 묘(2)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신리-거더리는 1866년 병인박해로 초토화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교우촌의 자취가 초라한 봉분과 함께 이렇게 남아있다.
화려한 성당이나 잘 꾸며진 성지보다 이곳 묘지에서 유난히 발길이 안 떨어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 앞에 머리 숙여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였다.
오래전에 흙속에 묻힌
당신의 눈물은
이제 내게 와서
살아 있는 꽃이 됩니다.
당신이 바라보면 강산과 하늘을
나도 바라보며 서 있는 땅
당신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던 임을
나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민들레가 되고 싶은 이 땅에서
나도 당신처럼 남몰래 죽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이해인 <무명의 순교자 앞에> 부분
신리성지(1)
무명 순교자 묘에서 1.8㎞를 걸으면 신리성지가 나온다.
19세기 중반 지금의 신리성지 일대는 조선 최대의 천주교 교우촌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40여 명이 순교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신리성지를 로마제국 시절 지하교회인 '카타콤바'에 견주는 이유다
신리성지(2)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다.
그는 내포지방 천주교 유력자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였다.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하였다.
철근을 잘라서 만든 녹슨 십자가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상징이다.
신리성지(3)
신리성지는 ‘한국의 카타콤바’라 불린다.
로마시대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으로 숨어들었던 모습과 닮아있다.
양팔을 벌린 예수님의 품안에 안긴 세 여인들이 아름답다.
신리성지(4)
순교미술관 옥상엔 철근을 잘라 만든 철 십자가가 있다.
메마르고 초라한 십자가지만 경건함이 느껴진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세 여인들의 머리 위로 성령이 내려오는듯 하다.
거더리공소
신리성지에서 녹둑길을 건너 0.9km를 걸어가면 거더리공소가 나온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는 이곳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으러 온 포교들에게 스스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주교와 두 신부들이 감금되었던 집은 박해 이후 공소로 사용되었다
검은 표지석 하나만 서 있을뿐...방치되다시피한 모습이 참으로 쓸쓸하였다.
거더리마을의 폐가
거더리마을의 집들은 규모가 꽤 크고 부유한 티가 났다.
그러나 대부분이 낡고 폐허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진전이었다.
마을의 이름처럼 거덜나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세거리공소
거더리공소에서 신리성지로 다시 나와 반대쪽으로 0.8km를 걸어간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3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판공 때는 본당 신부가 머물면서 성사를 베풀고 푸짐한 음식을 나누었다고 한다.
동네 할머니께서 시집왔을 때는 이곳에서 미사를 했다며 우릴 반겨주셨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건물에서 모진 고통을 느꼈을 천주교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하흑공소
다시 신리성지로 돌아와서 버스를 타고 하흑공소로 갔다.
하흑은 '아랫 검은돌'을 뜻힌다.
본래 마을 안에 있었으나 1980년대 길이 생기면서 현재의 자리에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하흑공소는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1월 순교하였다.
첫댓글 사순절에 선조들의 치열했던 신앙의 삶을 생각해 보며
나 자신의 나태하고 무감각해진 마음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갔던 곳인데 시간내서 또 가봐야겠습니다
역시 총무님의 감성과 글솜씨 대단하십니다.
이번 순례관련 글을 쓰는데
아무래도 여기 내용을 표절해야 할것 같습니다.
좋은 글은 나누어야 하니까요. 용서하시어요. ㅎㅎ
신리성지(1)에서 9세기는 19세기의 오타 아닌가 ㅎ
앗, 실수입니다. 수정해 놓겠습니다
다니엘의 순례기가 송천월보를 빛내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