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김덕령과 광주 충효동 왕버들

광주호 끝자락에 왕버들 세 그루가 봄기운을 담뿍 받아 연녹색을 뽐내고 있다.
마을 우물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음터로 알려진 마을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의 참패로 왕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하자 지방에서는 의병과 승병이 일어나 왜군을 기습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파죽지세의 북진을 저지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대표적인 의병의 활동으로 영남지방에서는 곽재우가 호남에서는 고경명이 일어나 선비와 양반, 그리고 백성들이 일체가 되어 책과 호미를 던지고 칼과 창을 잡아 구국의 선봉에 섰다.
이 때 나이 26세의 김덕령도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장군 휘하에 들어가 전라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의 강권에 따라 귀향했다. 그 후 형 덕홍은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전사하고 그 이듬해 8월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1593년 11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3000여명이 운집하여 곽재우와 함께 권율 장군 휘하에서 영남서부지역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번 적을 크게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했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난이 평정되었으나,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반란군의 무리로 보고되어 체포되었으며, 선조의 친국을 받게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였으나 선조는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장독을 견디지 못해 29세의 나이로 옥사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병활동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도 은신하여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 죽음을 면할 길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춘산곡(春山曲)을 남겼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 있거니와
내(川) 없는 이 몸에 불이 나니 무엇으로 끌꼬?
형의 억울한 죽음을 듣고 동생 덕보는 세상을 등지고 무등산 자락 풍암정에 은둔하였고, 부인은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왜군에 쫒기다가 보리암 앞에서 절벽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그 후 현종 2년(1661년)때 그의 억울함이 풀려 관직에 복구되었으며, 숙종 4년(1678년) 벽진서원에 배향되고, 1681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정조 12년(1788년)에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가 내렸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 충효리라는 비석을 세워 김덕령 장군의 삼형제와 그의 부인 흥양 이씨의 충절을 기리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一松一梅五柳(소나무 한 그루, 매화 한 포기, 왕버들 5 그루)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왕버들 세 그루만이 김덕령 장군의 나라 사랑하는 충성심을 세월의 흔적에 담아 새긴 채 늠름하게 자라고 있다.
김덕령 장군 형제들이 어릴 때부터 오르내리면서 미래의 꿈을 만들어 간 이 나무를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 후세들은 숲 옆에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형 덕홍, 아우 덕보, 부인 흥양 이씨 등의 충(忠)•효(孝)•열(烈)을 배우기 위해 충효동정려비각을 세웠고, 이 나무를 ‘김덕령 나무’라 이름 붙였으며, 나라에서는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2012. 10. 25)하여 보호 하고 있다.
위치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천연기념물 제539호(2012. 10. 25 지정
나무나이 : 470년
나무높이 : 9~12m
나무둘례 : 5.95~6.3m
사진촬영 : 2016.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