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금산교회가 있다. 당시 그 지역의 일대 부호였던 조덕삼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경상도에서 온 이자익이라는 청년을 자기 집의 마부와 머슴으로 사랑채에 두고, 미국 남장로교 Lews Boyd Tate 선교사(한국명:최의덕)로부터 복음을 받아 금산교회를 개척하고 자신의 재산을 들여 교회를 지었다.(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 이자익이라는 사람은 글을 몰라 지주 조덕삼씨의 아들한테 글을 배우고, 어느 덧 자기 집 주인 조덕삼씨와 같이 세례를 받고, 지주 조덕삼장로와 머슴 이자익목사의 흐뭇하며, 감동을 주는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용화 마을은 전주로 가는 길목과 금산사로 가는 길목으로 정읍과 김제 읍으로도 가는 교통요지였다. 이 용화마을에 지주 조덕삼(故 조세형 국회의원 할아버지)은 馬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마방은 말을 타고 다니던 손님들이 말을 메어놓고 자고 가는 한 마디로 말 여관이었다.
이자익은 경상도 남해도 출신으로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적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육지로 나갈 것을 결심한 그가 하루는 육지 하동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 선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를 하고 선장의 호의로 하동까지 갔다. 하지만 하동에 도착했어도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시 전라도 남원읍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주로 해서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금산사로 유명한 절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제일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인들이 조덕삼에게 알리자 조덕삼은 그 소년을 사랑방으로 인도하였다. 이자익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서 그의 딱한 모습을 본 조덕삼은 당장 일감을 그에게 주었는데 바로 마부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이자익은 열심히 일했다.
과거에는 “두정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세워진 동기가 아주 은혜로웠다. 당시 금산에는“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분은 전주지방에서도 큰 소리를 칠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합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양반과 천민의 구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분명할 때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전주 선교부를 오가면서 성경을 배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드리며 신앙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등은 금산교회에서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테이트(한국명:최의덕)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다. 최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에게 영수(지금의 전임 전도사 역활과 비슷함)로 임명하였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주인이며 부자인 조덕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다
점점 교인이 늘어나고 이 두 사람도 학습, 세례를 다 받고 어느 정도 교회가 커지게 되자 교회의 일군인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교인들이 모여 1908년 장로를 선출하게 됐다. 주인 “조덕삼”과 주인집의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다. 대부분 교인들은 조덕삼 지주가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때 조덕삼은 최의덕(테이트)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고 앞자리로 나갔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의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선출해 준 일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자요 주인인 조덕삼이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집의 마부요 머슴인 이자익을 그 교회에 첫 번째 장로로 선택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이자익이 자신의 머슴이며 마부지만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선택이 된 날부터 조덕삼은 이자익을 얼마나 겸손히 받들어 섬기는지... 너무나 잘 섬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자집의 머슴이며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금산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 이때 조덕삼은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여기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와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덕삼은 대지만 내어 놓은 것이 아니라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제각을 매입하기도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남녀가 따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교회당을 기역자(ㄱ)로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회당이 완성되자 1908년 당회장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 하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그 다음 주일부터 여성들을 위해 따로 좌석이 마련되어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여성도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남녀를 구별하는 장소에 커튼을 걸쳐 놓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볼 수 없도록 했다. 목사가 설교하는 강대상 쪽에도 역시 목사가 여자들을 볼 수 없도록 커튼을 쳤다.
이러한 소문이 금산리 마을뿐만 아니라 원평까지 전해지자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교인이 증가하자 테이트 당회장의 사회로 장로를 다시 선출하게 되었다. 이때 지난번에 낙선되었던, 지주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금산교회는 말할 것 없이 금산리에 사는 주민 모두 좋아했고 교회는 더욱 부흥돼 갔다.
선교사가 없을 때부터 설교한 이자익장로의 설교에 조덕삼장로는 은혜를 받고 그를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전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지원하기로 하였다. 금산교회는 또 한번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금산교회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자 최대진 목사를 초대 목사로 초빙하였다. 그 후 1915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임실에서 목회하다던 이자익목사를 금산교회 제2대 목사로 청빙을 한다. 이렇게 해서 머슴으로 금산에 왔던 이자익이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1924년 9월 13~18일까지 함경도 함흥 신창교회에서 13회 총회가 열렸는데 총대는 117명이었다. 투표결과 43세의 젊은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자 총대원들 모두가 놀랐다.
한국 교회사에서 새벽기도회를 처음 실시했던 길선주목사도 부총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낙마하였는데, 연소한 이자익목사가 총회장이 되다니 놀랄 수밖에....
그뿐 아니라 이자익목사는 분규가 나는 교회마다 해결사 목사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 후 그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보고, 아예 총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기에 해방 후 1947년 33차 총회를 소집하고 총회장을 선출 할 때 신선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켜오면서 다른 주의 종들은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했던, 그를 두 번째 총회장으로 선출했고,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판학이 문제를 일으켜 51명 재학생들의 진로를 원활하게 수습할 분은 이자익목사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34차 총회장으로도 다시 선출되어 장로교회 총회 역사상 재선하는 총회장도 없었는데, 3선[13회,(1924) 33회,(1947) 34회(1948)]은 초유의 일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쳤는데 배우는 학생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었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충남고등성경학교를 발족시켜 이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으로 신학생들에게도 잘 가르쳤던 것이다.
조덕삼장로의 후손은 조덕삼은 금산교회의 2대장로가 되고, 그 아들 조영호도 금산교회 장로가되고, 손자 조세형도 장로가 되었다. 故조세형장로는 국회의원으로 3선 국회의원과 몇해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토록 아름다운 기록을 남긴 일은 참으로 드문일이다.
조덕삼장로는 임종 때에 이자익목사를 부르고 자식들에게 금산교회와 이자익목사님을 대대로 잘 섬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그 때 이자익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6살에 고아가 된 떠돌이를 받아 주어 예수 믿게 하고 장로로 세워 신학 공부시켜 목사되게 하신 장로님, 내가 이런 장로님을 다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장로님 내 생명이신 장로님!”하는 눈물의 기도는 한국교회를 울렸다.
금산교회 설립자 두분의 후손 소개
조덕삼(1867-1919)-아들:조영호장로(독립운동가)
-손자:조세형장로(전 국회의원)
-증손:조성훈집사(무학교회)
이자익(1882-1961)-1924,1947,1948년(장로교 교단분열 혼란기)
1924년 9월 13~18일까지 함경도 함흥 신창교회에서 13회 총회가 열렸는데 총대는 117명이었다. 투표결과 43세의 젊은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되자 총대원들 모두가 놀랐다.
한국 교회사에서 새벽기도회를 처음 실시했던 길선주목사도 부총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낙마하였는데, 연소한 이자익목사가 총회장이 되다니 놀랄 수밖에....
그뿐 아니라 이자익목사는 분규가 나는 교회마다 해결사 목사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 후 그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보고, 아예 총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기에 해방 후 1947년 33차 총회를 소집하고 총회장을 선출 할 때 신선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켜오면서 다른 주의 종들은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했던, 그를 두 번째 총회장으로 선출했고,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판학이 문제를 일으켜 51명 재학생들의 진로를 원활하게 수습할 분은 이자익목사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34차 총회장으로도 다시 선출되어 장로교회 총회 역사상 재선하는 총회장도 없었는데, 3선[13회,(1924) 33회,(1947) 34회(1948)]은 초유의 일이었다.
이자익 목사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쳤는데 배우는 학생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었다고 술회했다. 일찍이 충남고등성경학교를 발족시켜 이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으로 신학생들에게도 잘 가르쳤던 것이다.
조덕삼장로의 후손은 조덕삼은 금산교회의 2대장로가 되고, 그 아들 조영호도 금산교회 장로가되고, 손자 조세형도 장로가 되었다. 故조세형장로는 국회의원으로 3선 국회의원과 몇해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토록 아름다운 기록을 남긴 일은 참으로 드문일이다.
조덕삼장로는 임종 때에 이자익목사를 부르고 자식들에게 금산교회와 이자익목사님을 대대로 잘 섬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그 때 이자익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6살에 고아가 된 떠돌이를 받아 주어 예수 믿게 하고 장로로 세워 신학 공부시켜 목사되게 하신 장로님, 내가 이런 장로님을 다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장로님 내 생명이신 장로님!”하는 눈물의 기도는 한국교회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