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일가족 4명 살해 패륜 사건 발생 ← 아내와 딸, 부모 등을 잔인하게 살해한 김모(42) 씨가 30일 충북 옥천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다.
돈 때문에 처자식은 물론 노부모까지 살해한 40대 패륜아의 범죄행각이 드러나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30일 충북 옥천경찰서는 처자식 살인 용의자 김모씨(43.구속)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자신의 노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85)와 어머니(75)를 숨지게 한 혐의를 추가 확인했다. 김씨는 지난 27일 옥천군 옥천읍 자신의 아파트에서 부인(35)을 흉기로 수십차례 찔러 살해하고 이를 목격한 딸(3)도 목졸라 숨지게 했다. 그는 또 2년 전에도 부모가 살고 있는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주택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부모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4년 숨진 부인과 결혼한 김씨는 총각 시절 착실하게 모았던 1억6000여만원을 부인과 함께 소주방, 다방 등의 사업에 투자했다. 그러나 사업은 여의치 않았고, 모아뒀던 돈도 대부분 날렸다. 이 때부터 가정불화도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착실히 공장 등에 나가 일을 해 왔으나 사업실패로 돈이 떨어지면서 부모들이 살고 있던 자기 명의의 집에 욕심이 났다. 결국 집에 불을 지르기로 결심한 그는 범행 2개월 전부터 휘발유 3ℓ를 구입한 뒤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다니면서 범행시기를 노려왔다. 범행 하루전날 부모 집을 방문해 뒷문의 시건장치를 해제해 둔 뒤 2006년 6월10일 새벽 1시20분께 이 문으로 들어가 휘발유를 집안 곳곳에 뿌리고 창문을 통해 휘발유가 뿌려진 소파에 불을 붙였다. 화재 현장에서 구조된 김씨 부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3일 만에 모두 숨졌다. 화재 당시 김씨는 "집에서 누군가 담을 넘어 나온 뒤 불이 났다"는 이웃 주민들의 진술에 따라 방화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그의 부인이 "집에 같이 있었다"고 증언해 혐의를 벗어났다. 결국 김씨의 노부모 사망사건은 신변을 비관한 노인 동반자살로 결론나는 듯 했다. 허리통증으로 수술까지 받았던 어머니의 고생이 컸다는 그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목적했던 대로 집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나 가정 불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씨는 부모를 살해한 이후 부인과의 불화가 더욱 심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월급이 150만원이었는데 (부인은)100만원 이상을 옷 사는데 썼다"고 진술했다. 부인을 살해한 범행 당일에도 부인은 술에 취해 있었다. 특히 부인이 사업에 실패한 것이 부모 살해의 동기가 됐다는 생각 때문에 김씨 부부의 갈등은 더욱 커졌고, 결국 지난 27일 새벽 1시께 부인이 잠든 사이 흉기로 수십차례를 찔러 살해했다. 또 아무것도 모르는 딸(3)도 이 장면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하는 등 그는 직계 존비속 4명을 잇따라 연쇄 살해했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태연히 "새벽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목욕탕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와 딸이 숨져 있었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등 단순 강도살인 사건으로 위장하려했다. 김씨를 잘 아는 사람들의 그의 이러한 패륜 범죄행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옥천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공장과 막노동판에서 착실히 일했다. 결혼 전까지 그가 모은 현금만 1억6000만원이나 된다. 2남4녀의 막내인 김씨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부모를 살해한 이후에는 심적 부담때문에 형제들도 만나지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부모님을 죽인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며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부모와 처자식을 살해하고도 죄의식도 없이 태연히 유족행세를 한 용의자의 뻔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두 사건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연습까지 했던 것으로 김씨의 진술을 통해 밝혀졌다"고 말했다. 처자식 살해 혐의로 구속된 김씨를 조사하던 경찰은 2주일 전, 2006년 김씨 부모 집 화재 사건당시 김씨를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한 주민의 제보를 받고 그를 추궁한 끝에 범행 전모를 밝혀냈다.
[1983년] 필리핀 아키노 51회 생일맞아 20만명 반정부 시위
아키노(Aquino Jr., Benigno Simeon, 1932~1983)의 1973년 대통령선거 출마 의사가 확실시되자 1972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 아키노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아키노는 이후 8년간 구금되었는데, 1977년에 공산당을 돕고 마을의 연장자 한 사람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근거 없는 범죄사실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80년 마르코스는 사형선고를 감형시켜주었고 아키노가 미국에서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3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하버드대학교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계엄령이 해제된 지 2년이 지난 1983년 아키노는 국민에게 약속한 대통령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고국으로 향했으나,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 트랙을 밟으려는 순간 경호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아키노의 죽음은 정부개입의 의문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반정부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립조사위원회는 1984년 10월, 이 암살이 군 참모총장 파비안 C. 베르 장군이 꾸민 군사적 음모라는 결론을 내렸다. (empas) /Google
[1977년] 홍수환 4전5기 신화
홍수환(오른쪽)이 공항에 나온 어머니와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1977년 11월27일(한국시간), 신설된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 위해 파나마로 날아간 홍수환 선수가 링 한켠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상대는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파나마의 신예복서 헥토르 카라스키야였다,
3년전 남아공 더반에서 벤텀급 챔피언 자리에 올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홍수환으로서는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면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1회 난타전이 끝나고 2회가 시작되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의 무차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거푸 4번이나 쓰러졌지만 홍수환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3회 공이 울리자마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로프쪽으로 몰아 양 훅과 어퍼컷으로 혼을 빼놓더니 커버없이 로프에 기댄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레프트훅을 작렬시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있는 카라스키야의 턱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3회 48초. 그것으로 끝이었다.
프로복싱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던 4전5기의 신화는 이렇게 이뤄졌다. 열광하던 2만여 파나마 관중들의 침묵 속에서 홍수환은 예의 입심을 또 한 번 과시했다. “어머니 정말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1970년]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청계천변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은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철저히 조사하여 그 개선방안을 노동청(지금의 노동부)에 제출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해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곧바로 설문지를 돌려 노동실태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 진정서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전태일은 11월 13일 동료들과 함께 피켓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그날 시위는 원천 봉쇄되고 말았다. 이에 전태일은 자기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을 감행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채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며 항의하던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유신체제로 치달으며 살벌했던 독재 치하의 1970년대에 선구적인 노동운동을 벌였다./브리태니커
[1959년] 임화수 반공예술인단장, 희극배우 김희갑 폭행 ← 임화수에게 전치 1개월의 부상을 당한 후 입원 중인 김희갑씨. 1959년 12월 5일 촬영한 사진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폭력단의 거물이며 반공예술인단 단장인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세군데나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화수는 1959년 11월 27일 서울 충무로3가에 있는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쇼 출연과 관련해 항의하는 김희갑씨를 구타,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혔다. 김씨는 사전에 출연을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공예술인단에서 자신의 양해없이 국도극장에서 열릴 시민위안공연에 장기간 출연한다고 일방적으로 광고한 것을 항의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관할 중부경찰서는 이 사건 가해자가 반공예술인단의 단원인 박호라고 발표,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있다가 김씨가 기자들에게 내막을 폭로하자 뒤늦게 임화수를 입건했다. 동대문일대 깡패 출신이며 전과3범인 임화수는 당시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등의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연예인들을 정치적인 시민위안공연 등에 강제 출연시키는 등 온갖 횡포와 폭력을 자행했으나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조선
[1954년] 제2차 개헌(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 부결
1954년 오늘!
국회 민의원 2백여명이 투표를 실시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에 대한 투표다.
투표 결과 135명이 개헌안에 찬성했다.
재적의원 3/2에 해당하는 136표에 한표가 모자라는 숫자로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헌법개정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사사오입을 도입하면 203명의 3/2는 135명이라는 자유당측의 강력한 주장이 제기된다.
마침내 헌법개정안은 부결된지 이틀만에 번복돼 개헌안의 가결이 선포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개정안 변칙통과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YTN
[1953년] 극작가 유진 오닐 사망 ←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1953년 11월 27일 미국 보스턴의 한 호텔. 극작가 유진 오닐이 불행했던 말년을 마감하며 내뱉듯 말했다. “제기랄,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죽다니...”
그의 말마따나 그는 유랑극단 배우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뉴욕의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방, 열차, 무대 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극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1912년부터 손이 마비돼 사실상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그는 대표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 등 총 63개의 작품을 세상에 토해내며 단순한 오락거리에 불과했던 성인연극을 수준 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연극을 상업적으로도 성공시켰다. 그사이 퓰리처상을 4번이나 받고 미국 극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며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오닐의 말년은 깊은 좌절감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세월이었다. 10여 년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던 무력감도 그를 괴롭혔지만 3번째 부인의 학대와 3자녀의 온전치 않은 생활도 그의 비극적 인생관에 끼어들었다. 40세에 자살한 장남과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차남, 더구나 막내딸은 오닐과 동년배였던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 그를 분노케했다./조선
[1950년]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 (1950.11.27∼12.11)
장진호 전투는 미 제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미 해병 제1 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쳐 치른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하였고,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달하였다.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미 제1해병사단에게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미 제1해병사단 2개 연대에 투입된 부대는 4개 사단이었다. 이로써 장진호 전투가 전개되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유엔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철수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11월 30일 미 해병사단 주력은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에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하였다.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계속하여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중공군은 미 해병 2개 연대에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에 대하여 종전의 4개 사단에다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측에서는 공수 철수를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 때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와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 때 해병대는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전사 2,500명과 부상 12,500명이 손실당했다. 이에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 때의 피해로 유엔군의 한반도에서 철수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중공군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자료 출처: http://www.mnd.go.kr/mnd/sub_home/Imhc/subpub_15.htm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전쟁통계 (자료 인용, 한국전의 10대 전투)
[1927년] 도살풀이춤의 명무(名舞) 김숙자(金淑子) 출생
1927. 11. 27 경기 안성~1991. 12. 23 서울.
6세 때 아버지 덕순(德順)에게 판소리·가야금을 익히고 입춤·진쇠춤·제석춤·터벌림춤·깨끔춤·올림채춤 등을 배웠다. 예로부터 남사당패와 걸립패 등 특수예인집단이 많이 활동하던 안성에서 보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대의 명인 조진영(趙鎭永)에게서 가무(歌舞)를 배웠다. 17세에 조선총독부에서 보낸 위문대에 들어가 만주일대와 남방군도(南方群島)를 순회공연하면서 승무·한량춤·입춤 또는 판소리나 악극(樂劇)에서 주역을 맡았다. 28세에 대전에서 무용학원을 경영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경기무속과 도살풀이춤을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1976년 무속춤을 발표했고, 1990년 도살풀이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모든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정적(靜的)으로 맺어주거나 긴장상태로 제자리춤을 추는 것이 그녀 춤의 특징이다. 긴 수건을 휘날릴 때면 자유와 환희가 보이고 수건자락을 여미며 목젖놀음을 할 때면 한(恨)과 슬픔이 묻어나오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브리태니커
[1921년] 시인 김수영(金洙映) 출생
1921년 11월 27일 태어남 / 1968년 6월 16일 죽음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 몰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자식을 볼 때에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 김수영, <나의 연애시>
김수영은 특히 문학의 현실참여와 관련하여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이래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면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이 담긴 참여시를 썼다. 그의 문학적 경향이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뀌면서, 작품 세계 역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또 세련된 간접표현에서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순수참여문학논쟁에도 참여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활력을 깨치는 무서운 폭력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라고 규정하고 자유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고자 노력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 이은관(李殷官) 출생
1917. 11. 27 강원 이천~.
1931년 철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 〈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 〈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 〈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 〈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신불출 만담일행'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41~45년에는 무대생활을 했다. 1946년에 대한국악원에 입단했고 '민요국극단'을 조직·운영했는데 이때 주로 〈배뱅이굿〉을 공연했다. 1968년 국악협회 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1992년 현재 학원장을 맡고 있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를 맡고 있고, 1984년 10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김경렬·김경선 형제에게 전수시키고 있다. 원래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 〈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10년]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 순국 ←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이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경술국치에 항거, 단식하다 1910년 11월 27일 순국했다. 184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고산현감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고, 이듬해인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던 때 다시 관직에 나선 선생은 시종원 부경으로 광무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개와 말까지도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 있는가"라고 통곡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후 선생은 일제가 회유책으로 전한 은사금을 거부하며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데도 적을 토벌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데도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는 죄를 지었다"며 24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조선
[1901년] 노벨상 제정 ← 노벨상의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
노벨상이 1901년 11월 27일 제정됐다. 노벨상이 제정된 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선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물리학상 뢴트겐(독일), 화학상 호프(네덜란드), 생리·의학상 베링(독일), 문학상 프뤼돔(프랑스), 평화상 앙리 뒤낭(스위스). 각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메달과 함께 4만3000달러의 상금이 수여됐다. 지금은 상금 5천만엔 짜리 교토상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액수였다.
그러나 뜻밖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우선 시상자인 오스카르 2세 스웨덴 국왕이 시상식 참석을 거절했다. “이처럼 막대한 상금이 외국인들에게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유에서였다. 스웨덴 학계는 “국내 연구비도 없는 판에…”라며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노벨상의 가장 큰 역설은, 물론 폭약으로 번 돈이 인류평화를 위해 쓰인다는 그 드라마틱한 전변이다. 또 하나는 처음엔 가족과 조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것. 그러나 만약 노벨이 ‘국적 불문’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스칸디나비아 조그만 나라의 집안 잔치로만 끝났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니트로글리세린과 검은 폭약을 혼합한 다이너마이트를 포함, 평생 355개의 특허를 획득한 이 거부가 노벨상을 구상한 것은 55세 때인 1888년, 형 루드비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잘못 안 프랑스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란 제목으로 오보한 데 충격을 받으면서였다./조선
[1878년] 영국의 화가 오르펀[Orpen, Sir William Newenham Montague] 출생
1878. 11. 27 아일랜드 더블린 스틸오르건~1931. 9. 29 런던.
강한 개성을 지닌 초상화로 유명하며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정부가 인정한 공식 미술가였다. 오르펀은 더블린 시립미술학교와 런던의 슬레이드 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뉴 잉글리시 아트 클럽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으며 1900년에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초상화들에는 마네의 영향이 보인다. 〈마네에게 바치는 경의 Homage to Manet〉(1909, 맨체스터 시립미술관) 같은 풍속화도 그렸는데 이 작품은 당대 영국 미술계의 유명인사들이 마네의 유명한 초상화 아래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평화회담의 공식화가로 지명되어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1919~20, 런던 대영제국전쟁박물관)을 그렸다. 오늘날에는 부담없고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경박한 화가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대에는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1918년 대영제국 상급훈작사작위를 받았으며 1919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01년]스웨덴 천문학자 셀시우스(Celsius, Anders) 출생 ← 셀시우스, 18세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초상화(부분)
1701. 11. 27 스웨덴 웁살라 ~ 1744. 4. 25 웁살라.
전세계적으로 쓰이는 섭씨 온도 눈금을 발명했다. 1730~44년 웁살라대학교의 천문학교수였고, 1740년 웁살라 천문대를 세웠다. 자신과 다른 사람이 1716~32년에 관측한 북극광에 대한 316개의 관측기록을 1733년에 출판했다. 라플란드에서의 자오선 측정을 주장했으며, 1736년에 이를 위해 조직된 원정대에 참가해 지구의 양쪽 극이 약간 평평하다는 뉴턴의 이론을 증명했다. 1742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에 그의 온도계에 대해 기술했다. 다른 연구로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새로운 거리측정법에 관한 논문 Dissertatio de Nova Methodo Distantiam Solis a Terra Determinandi〉(1730)·〈지구의 모양을 알기 위한 프랑스에서 행한 관측에 대한 연구 De Observationibus pro Figura Telluris Determinanda in Gallia Habitis, Disquisitio〉(1738) 등이 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파병 제창 ←십자군이 세운 국가(12세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 모인 기사들에게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지켜달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점점 강성해지는 이슬람교의 보호자,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자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 이후 몇몇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고, 모험가나 광신자들로 조직된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여기에 가세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내몰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고 약탈당하는 등 전쟁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1270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륙한 직후 대부분의 군사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8년 피지서 승합차 전복 한국인 4명 숨져
2002년 부시 미 대통령, 한국 여중생 2명 사망과 관련해 사과표명
2000년 노르웨이 오슬로-베르겐 간의 세계최장(24.5km) 고속도로 터널 ‘라에르달 터널’ 개통
1995년 윈도95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2.0 최종 버전 출시
1991년 최첨단 `신경망 칩` 국내 첫 개발
1990년 존 메이저 영국 재무장관, 보수당 당수경선에서 당선
1990년 싱가포르 새 총리에 오작통 취임
1989년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별세
1984년 미국 FBI, 통일교 박보희씨 납치소동
1983년 필리핀 아키노51회 생일맞아 20만명 반정부 시위
1983년 나카소네 일본수상, 중의원 해산
1983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이탈리아 도착
1983년 우루과이 30만 반정부시위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예정지 충남 천원군 흑성산으로 확정
1982년 나카소네 내각 출범
1978년 관광객 유치 100만명 돌파
1978년 부산 자유시장 화재. 점포 1,031개 소실, 50억 피해
1978년 북경서 사상처음으로 자유요구 데모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964년 한국, 대만과 우호조약 체결
1962년 교통부, KNA를 취소하고 대한항공(KAL)에 취항권을 부여
1961년 유엔, 식민지 독립선언 이행상황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9년 효창공원 국제축구경기장 착공
1955년 소련, 서베를린 자유시화(自由市化) 제안
1953년 이승만 대통령 대만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28일)
1953년 부산 대화재. 건물2천여동 소실
1951년 휴전회담, 30일간 잠정적 군사경계선 확정 합의. 전전선(全戰線)에 공격중지령
1950년 중국군 60만 한국전 개입
1950년 대한적십자사 창립
1946년 주48시간 노동제 실시 발표
1945년 강원일보 창간
1943년 카이로선언 채택(12.1 발표)
1940년 홍콩 영화배우 이소룡 출생
1925년 제1차 공산당 사건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알렉산더 둡체크 출생
1921년 최초의 신문-잡지 기자단체인 무명회 결성
1920년 미국대통령에 하딩 당선
1919년 일본-불가리아 평화조약 조인
1894년 일본의 사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출생
1598년 임진왜란 종식(선조 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