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다. 죽여준다.”
죽음의 의식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죽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 이 원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무신론자는 ‘아멘’이라고 하지 않고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고 합니다. 교토 시절만 해도 나는 신 없는 이방의 사람으로 주님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나만의 일이 아닐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죽겠다고 하고 슬퍼죽겠다고 하고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에는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살기죽기’라고 하지 않고 ‘죽기 살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To be or not to be” 햄릿 대사도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고 번역하는 사람들.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 이야말로 메멘토 모리의 철학적 종교적 민족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라티어로 말하면 의미심장한 철학적 언어요 종교적 잠언으로 들리고, 한국말로 좋아 죽겠다고 하면 속된 생각, 부정적 의미로 생각해온 것이 우리의 과오였던 것입니다.
남의 나라 말에는 자기가 죽는 것과 남을 죽이는 것이 확연히 구별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를 보세요. 죽는 것은 ‘사(死)’고 죽이는 것은 ‘살(殺)’이지요. 일본말로는 죽는다 ‘시누’이고 죽이는 것은 ‘고로스’입니다. 영어는 ‘die’와 ‘kill’, 불어는 ‘mourir’와 ‘tuer’지요. 그런데 유독 한국말에는 그렇게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면서도 ‘살(殺)’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죽인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할지 모르나 ‘죽인다.’는 ‘죽다’의 사역동사였던 것입니다. ‘먹다’와 ‘먹이다’처럼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널 죽인다.’ 고 하지 않고 ‘너 죽을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순수한 ‘살해(殺害)’에 해당하는 말은 한자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감동적인 순간,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순간, 한국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인다.’, ‘죽여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때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짜리의 종교적 충동을. -- 이어령 교수. 초대문화부장관
*** ‘메멘토 모리’ 이는 언제나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느 한 순간도 죽음과 멀리해서 살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도 대화의 주제로 삼기에 꺼리는 주제요, 금기어로 통합니다.
그러나 마냥 피할 수는 없습니다. 푸념하듯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하는 말들은 입에 붙이고 삽니다. 어찌할 것인가? 죽음이라는 확실한 실체가 있는데 없는 듯 묻어두고 살 것인가.
언제나 죽을 수 있고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삶을 진지하고 경건하게 살게 됩니다. 길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기에 유한한 인생, 사망 아래 있는 인생은 긍휼과 자비로 부르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 김영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