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 "1059"의 체신청 개청 100주년에 대한 유필계청장의 인터뷰 내용에서 [한국근대화 상징인 갑오경장이 우정국에서 시작 됐습니다. 이는 근대 100년 역사와 우정사업이 함께 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는 내용을 보게 되는데 , 본인의 짧은 소견으로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연설명이 생략된채 포괄적인 표현으로 갑오경장이 우정국에서 시작되었다는 史實的 인용은 "갑오개혁 자체가 우정국이 주체가 되었다" 또는 " 갑오개혁은 우정국에서 태동되어 이루지게 되었다" 는 역설적 견해로 들리게 된다.
다들 알고 있는바와 같이 갑오경장(갑오개혁)은 동학운동(동학란)이 원인이 되어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되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면서 김홍집.박영효 등이 주축이 된 친일성향 정권이 "사회 및 문물" 제도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3차에 걸쳐 단행한 것을 말한다. (1차개혁:1894.7.27~12.17 / 2차개혁:1894.12.17~1895.7.7 / 3차개혁:1895.8.24~1896.2.11)
따라서 한국 근대사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 우정사 측면에서 한국의 우편재개 실시 시점이 갑오개혁 진행 시기 중 일 뿐, 우정과 갑오개혁 또는 우정국과 갑오개혁은 직접적인 매체이거나 관련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갑오개혁 시기에 우리나라의 관제에서 "우정국"제도는 없었다. [우정국에서 시작되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혹여 근대우편 도입 시점인 1884년 "우정총국"에서 시발된 "갑신정변"을 일컬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는 대단한 착각이요 착오가 된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개혁운동의 정체로 보아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나, 갑신정변은 정권 창출을 전제로한 성공하지 못한 구테타일 뿐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유청장의 첫마디인 "근대화의 상징인" 표현으로 보아 갑오개혁을 지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갑오경장이 우정국-우정국 표현은 관제상의 제도적 기구 지칭 보다는 우정이라는 총체적 개념으로 표현했다 할 수 있지만- 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지 그 연관성과, 이렇듯이 표출한 유청장의 우정사관에 대한 깊은 뜻을 이해 할 수가 없어 무척 혼란스럽다.
첫댓글 갑오개혁과 우정창시의 연관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그리 된 듯 합니다. 선생님의 지적이 날카로우십니다.
오선생님의 말씀이 백번 맞지요. 그저 방송용멘트를 하려다 보니 그리 되었겠지요..
잘 모르시는 분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바로 이것이 역사의 왜곡이 아닐까요? 갑오개혁과 우정창시는 아무리 꿰어 맞춰 보아도 관련이 없습니다. 이부분은 서울체신청장 또는 원고 작성자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혼동한것이 아닌가 추측 됩니다. 그렇다해도 갑신정변을 근대화의 상징이라 함은.....좀 우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