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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종 원문보기 글쓴이: budha
11. 쿤달리니 명상
1) 쿤달리니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종교 및 수행 과정에서 나오는 가장 핵심적이고 실제적인 종목이며, 인간에게 잠재된
초월적, 신비적 에너지로서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성되지 않은 상태로 잠들어 있다.
이 에너지가 어떤 수행을 통해 깨어나면 황홀경을 겪게 되고 비젼을 보게 되어 그 사람의 몸과
마음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쿤달리니의 힘은 지구 중력과 상대되는 것으로서 위로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이 교조나 성자들이 누린 초능력 내지는 신통력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이다.
이 쿤달리니의 각성법은 여러가지 조건으로 각 종교의 비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이다.
이 에너지가 각성되면 우선 먼저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성으로 부터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데,
성교시 사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됨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오르가즘이 몇십배 강한 엑스타시를
경험하게 된다 쿤달리니를 상징하는 표징들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도처에서 수없이 수없이
찾아볼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 상이나 선악과나무를 휘감고 있는 뱀, 힌두교의 춤추는 시바상, 히포크라테스의 문양, 불상 머리의 육개상, 용의 승천, 샤아마니즘의 신수 등이 바로 이 쿤달리니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이 쿤달리니 힘의 전체적인 메카니즘은 인간의 꼬리 뼈에 잠들어 있는 성력(성 호르몬)이 어떤
방편을 통해 깨어나 척추를 타고 각 에너지 센터(챠크라)들을 거쳐서 정수리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이 에너지가 정수리에까지 이르면 두뇌활동이 활성화되고 일반인들에게 사용되지 않는 두뇌의 여러
부분들이 깨어나서 활동하게 되어 초자연력의 발현과 삼매를 체험을 하게 된다.
옛부터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성자, 신인, 진인, 초인, 붓다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러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시키기 위한 수행법은 지금까지 한번도 일반인들에게 공개 되지 않았고, 그 문헌도 매우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상징을 통해 전해져 왔기 때문에 마치 쳐다만 볼 뿐 건너갈 수
없는 깊은 강물처럼 인상지어져 왔다.
쿤달리니란 인간 내적 기관에 잠자고 있는 무한한 잠재적인 힘이며 쿤달리니 에너지의 출발 위치는
미골(회음)이다. 여성신체의 경우에는 자궁경부에서부터 그 에너지가 출발한다.
전통적 요가수행의 용어를 빌리면 물라다챠크라로 총칭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지라도 보통사람들 누구에게나 그 힘은 미미하지만 작용되어지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미 기경 팔맥은 존재하며 사람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이 활동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쁨, 공포, 깊은 슬품, 충격적인 감정일 때 전율이 온다.
이러한 전율 또한 쿤달리니 에너지의 발현이다.
에드가케이시는 자신은 투시력의 근본을 알고 싶었다.
물라다챠크라 부위에서 정액이 남자의 성선을 통해서 꼬리뼈로 몰려가서 빛으로 변해
척수속을 통과해 가는것을 느꼈다. 게이시와 같은 사람은 기도가 확장되어 다만 그것을 확실하게
인식 할 뿐이다.
폭탄을 깨뜨리거나 억압한다고 해서 터지지 않는 것처럼 쿤달리니라는 것도 동면하는 에너지인데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뇌관을 때리는 불가, 선도, 또는 요가적 기법이 당연히 필요하다.
요가에서 말하는 슈숨나, 이다, 핑갈라 세가지 나디와 일반 선도에서 말하는 약론(소약, 대약)의
미려, 협척, 옥침이라고 불리우는 세가지의 중요한 기도(구멍)와 대비되어 진다.
또한 선도,도장서적에서는 「규」와「만」. 즉 항구라고도 표현해 놓았다.
항구에 배가 드나들듯이 이 구멍에 물이 들락날락한다 항구에 물이 들어오면 그 물을 막바로
상승시키지 않고 일단 미려에 가둬야 한다. 선도에서 말하는 축기와 같으며 선도에서는 이것을
얼음이나 기체로 자주 변화 시켜 재구성 시키는 과정이 있다.
발기했을 경우 섹스의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쿤달리니 에너지의 출발점인 회음으로
간다. 그 발기된 에너지가 사정되지 않고 오래 지나가면 몸이 자연히 건강해진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할 때 노수에 잠자고 있는 일곱개의 챠크라를 모두 차례로 모두 차례로
깨어나게 한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상승하면서 각 챠크라의 뒷면을 연다.
챠크라는 구체로 형성되었을 때 정확하게 챠크라라고 부른다. 마치 복숭아 씨앗이 완전히 복숭아로
되었을 때처럼 잘 익은 챠크라가 된다. 그래서 호흡하는 사람이 복부나 미간에 황금빛의 구슬이
보이는 것이 정확한 챠크라가 형성 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을 때는 두뇌의 개화가 마치 동면하던 꽃이 피어나듯이 잠자고 있던 두뇌
영역이 서서히 개화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올라갔을때 뇌의 뒷면 우측이 폭발되면 그것은 감성적인 에너지로 발달되고
뇌의 좌측이 폭발되면 이지적인 에너지로 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을 때 우리가 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폭발로 일어나서 실제 요가에서 말하는
천개의 꽃잎이 개화되는 것을 말한다. 아주 미묘하고 황황홀홀하게 아름다운 꽃들이 어떤 사람은
미려부에서 또는 가슴, 두뇌 등에서 계속해서 꽃이 피었다가 졌다가 한다.
실제적으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런 향기는 도교의 경전에도 구체적으로 향이 이름까지 나온다. 꽃이 반드시 피어져야, 이것이
올바른 쿤달리니 에너지의 각성이다. 이것은 현재의식도 꿈이 상태나 무의식도 아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음과 에너지의 복합상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
의 공통적인 초기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물라다라 챠크라(회음)에만 쿤달리니가 잠재되어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각기
진화의 정동에 따라서 일곱개의 챠크라에 조금씩 잠재 되어 있거나 각성되어 있다고 말 할 수있다.
만약 물라다라챠크라와 스와디스타나챠크라에 쿤달리니 에너지가 모여 있다면 그 사람은 다분히
성적욕구가 충만한 성적인 사람일 것이며,
만약 마니푸라에 있다면 운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아나하타에 있다면 예술에 관심이 있을 것이며,
비슈다나 아즈나에 있다면 이지적인 것에
사하스라라에 있다면 종교적인 것이다.
만약 그가 성적이거나 운동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이지적이거나 종교적이라면 모든 챠크라가
각성되어 있는것이며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다.
실제 각각의 챠크라가 각성되었을 때 꽃이 피어나야만 한다.
개화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다.
사하스라라가 열리면 새로운 의식이 생겨난다.
모든 챠크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의식이 열린다.
우리의 의식은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의식이라고 말할수 없다.
쿤달리니란 신비적이거나 잠들어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휴면하고 있는 에너지가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즈나를 각성시키는 것이다.
럭비나 축구선수는 마니퓨라가 발달되어 있다.
일반적인 생활도 쿤달리니와 무관하지 않다.
무료한 산책인데 매혹적인 아가씨가 지나가면 물라다라에 약한 충격이 주어진다.
일반인의 경우에 있어서 음악을 하거나 시를 쓰는 사람은 아나하타가 다른 챠크라 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사하스라라가 개화되지 않은 보통 사람은 독립적이지 못하다. 감각에 주로 의지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각에 종속된 의식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주위의 영향에 따라 국부적으로
강력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정도에 따라 처음에는 몇십가지,
몇백가지, 몇천가지 의식이 형성되며 비젼이나 신비감이 느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감각의
변형일 뿐, 그것은 수행상의 낭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
단전에 빛이 보이면 소약이라고 착각한다. 머리속에 꽃이 피면 비전에 취하지만, 이것에 취해서
동일한 감각을 반복하면 이것은 세월이 지나갔을 때 수행자에게 덧없는 실망감을 안겨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선도책에는 빛의 구슬이 보이면, 그것을 아주 좋은 것이고
궁극적인 것으로 기술해 놓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으로 이런 과정은 무수히 많다.
박사과정의 열배, 백배, 천배에 해당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 구체적인 과정이 뚜렷하고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면 그 책의 저자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안다". 이런 말은 애매모호한 말이다.
2) 쿤달리니 각성 형태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어 각각의 챠크라가 열리면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독심술,
예지능력 등과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자신의 꿈이 구체적인 현실로 일어나게 된다.
예언, 영감에 찬 시, 천계의 음악 등을 듣게 된다. 쿤달리니 각성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전생을
명료하게 볼수도 있으며, 정확한 꿈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기존 종교의 진언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옴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다.
안반수의 호흡법의 형태는 아즈나챠크라를 각성시킨다.
화두선도 역시 아즈나 챠크라를 각성시킨다.
우선 프라나가 미간에 고정되어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안분수의와 마찬가지다.
화두선보다 안반수의가 유리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유는 공기의 출입에 대해서 이미 안반수의가
세밀한 감각을 얻는데 있다. 화두선 수행자의 경우는 공기가 인체에 접촉하기 이전의 상태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그렇게 되어졌을 때 화두선 수행자의 경우는 오랜 기간 호흡관찰로 이미 부분적으로
챠크라가 각성되어 있기 때문에 폭발력이 화두선보다 미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꿈을 맞추고
타인의 길흉을 이해하기도 하며 본인과 타인이 전생을 보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도
없다. 사람들마다 성향이 다 다르다. 에너지의 개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진화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란 산스크리트어로 동굴 또는 코일을 의미한다.
쿤달리니란 동굴 깊은 장소등을 의미하는 쿤다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도랑을 파거나 구멍
을 팔때도 쿤다라고 부른다. 쿤다는 두뇌에 어떤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잠자는 뱀을 상징한다.
뇌의 주름을 쿤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쿤달리니가 잠 잘 때는 샥티의 힘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발현될 때는 두르가, 락시미 등으로 불린다.
어떤 때는 실제로 꼬리뼈에서 뇌로 까만색의 뱀이나 파란색의 뱀이나 여러 가지 색깔의 뱀들이
실제로 꼬리뼈에서 부터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것이 쿤달리니 현상의 정확한 전조이며 어떤
경우에는 전설적인 동물인 용이 보여지는 수도 있다.
용이 꼬리뼈에서 뇌로 상승한다. 기독교 전통세서 비젼의 길이나 천국에 이르는 계단이 나오는데,
이것은 스슘나 나디를 통한 쿤달리니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쿤달리니의 상승과 성령의 은총이 십자가로 상징된다.
쿤달리니가 뱀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이 아니다. 실용되어지는 에너지가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쿤달리니 각성시 보여지는 뱀은 일반적인 뱀이 아니다 마치 호랑이가 영물이라든지, 신선들과 같이
등장하듯이 뱀은 쿤달리니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
많은 수의 수행자들의 눈에 대낮에 뱀의 형상이 보여지는 것이 실제의 현상이다.
사람들이 뱀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쿤달리니에 대해 두려워 하는 것, 뱀이 용이 되는것,
뱀이라는 동물에게는 거대한 진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호랑이나 여우나 이런것은 오래살 수
있지만 승천하거나 진화하는 경우가 없다. 처음에만 쿤달리니 에너지가 수직으로 상승을 하지만
나중에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경우, 수평으로 회전할수도 있으며 짧은 순간에 다양한 회전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는데 뱀은 자유롭다.
주변에 뱀이 있을 때 신비적인 의식에 잘 들어갈 수 있다. 고대의 수도승들이 뱀을 문양으로 많이
사용하고 갖고 다니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성호를 긋는 것도 아즈나나챠크라, 아나하타챠크라에 손을 댄다.
초기 기독교는 아즈냐는 예수가 쿤달리니 수행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 맥이 끊어져 버렸다.
물과 불의 세례는 이다와 핑갈라의 기도를 여는 것을 말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말하는 모든 영적인 삶은 쿤달리니와 연관되어 있다.
니르바나, 해탈, 모크사, 구원, 깨달음이 모든것이 쿤달리니와 연관되어 있다.
3) 쿤달리니의 각성 방법
탄트라 비젼에 의하면 쿤달리니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는 어떤 수행자의 프라나야마에 의한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하타요가 수행, 또는 보편적인 아사나 요가를 통해서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한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선행되어 수행 할 것이 있다.
앞의 경우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현한다손 치더라도 쿤달리니의 지복과 실익은 잠깐이고 부작용과
좋치 않은 깔리 상태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이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티요가적인 방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깊은 쿤달리니의 수행으로 들어가려면 상당히 많은 정도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개인적으로 발현하게 되는데 단순한 에너지에 의한 쿤달리니 각성이라면 별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정신적이거나, 영적으로 변환 되었을 때는 최소한 동양의 종교들에 관한 종합적인 통찰력이
어느정도 각성 된 후라야 깊은 쿤달리니 수행의 의미가 있다.
호흡 등을 통해 쿤달리니를 계속하다가 그것이 깊어졌을 때 일반적인 종교의 이해력이 깊지 않은
사람은 정신적인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현상은 하다가 그만두면 되지만 모든 고정관념이 뿌리채 뽑혀 나갈 때 겪는 정신적
충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쿤달리니를 들어갈 때는 쿤달리니 천계 혹은 성중의
지도를 받는 비젼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쿤달리니 에너지의 체험을 이야기 할때 많은 사람들이 지복이나 축복감을
말하지만 그것은 처음의 경우에만 그렇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과 체력적인면이 견딜 수 있는
한 까지 그렇다. 그 사람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신의 에너지로 바뀌어 가는 경우에 육체적 정신적
많은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으느 어떤 운동선수가 기록을 갱신하기 위한 하드
트레이닝을 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사람도 있다.
타고난 체력을 지닌 사람은 심한 운동을 해도 거뜬하게 견디 수 있지만 보통사람은 근육통을
느끼듯이 「고피 크리슈나」의 경우에도 그런 부작용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쿤달리니 각성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째방법은 탄생과 더불어서 오는 것이라서 일반인들은 이런 것을 통해 얻을 수 없다.
태어나자마자 쿤달리니가 각성이 되는데 쿤달리니가 각성된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첫번째 방법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작용이 전혀 없다. 부모들이 모두 그 부작용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탄생을 통해서
부모들이 고도로 진화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초인사회는 몇세대를 거친 후에는 저절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스슘나나 이다, 핑갈라, 나디가 이미 각성되어 있는 탄생이 있다.
이것은 결국 탄생의 시기부터 그의 고도한 기능이 활성화 될 수 있다.
예수가 늘 강조했던 "거듭나야 한다"는 말도 이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에 어떤 아이가 완전히 쿤달리니가 각성된 상태라면 그 아이를 성자라 부를 것이다.
만약 완전히 쿤달리니가 각성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아바타르나 신의 화신으로 불러질
것이다 십대 사춘기 청소년의 경우 꼬리뼈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우는 요즘 사회에 드물지
않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쿤달리니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것이 나이가 든 후에는 매우
발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가치관도 없고, 그러한것에 관해 말해주는 사람이나 책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해 버리고 묵살해 버린다.
몽고반점, 꼬리뼈 부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 특이한 사람도 있다, 보기 흉할 정도로 튀어나온 사람이다. 몽고반점이 있는 것은 쿤달리니가 많이 퍼져있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은 쿤달리니 소질을 많고 갖고있는 물질문명 속에 파묻혀 이것이 묵살되어 왔으므로,
그것을 발현시키는 사회적 인식이 중요하다.
우리민족은 할아버지가 아이들의 꼬리뼈를 만저보고 이 아이가 장수 할 것이라는 것을 점쳤다.
영재 교육이야 말로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상태라면 매우 완숙미를 갖는 형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런 제반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런 모양이다라고 단순히 넘길 수 있다.
가령 꼬리뼈가 뜨겁다거나 가끔 이런 상태에서 꼬리뼈를 생각하면 힘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쿤달리니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날때부터 쿤달리니가 각성된 아이는 매우
사색적이고 전반적인 삶이 진화된 상태로 펼쳐진다. 이런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의 부모들은 단지
탄생의 통로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런 아이는 부모들과 더불어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머리 깍고 출가하는 청년들이 있는데, 이런것도 잠재적인 쿤달리니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아이가 부모들과 더불어 산다해도 그는 단지 자신을 손님처럼 생각하는 경우이다.
소풍을 가더라도 가족들과 따로 떨어진다. 술집 아가씨들 중에서도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성장기에 극단적인 성의식으로 흐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태어날때부터 발달된 극단적으로 감성적인 이런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꽉 짜여진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학교생활 같은 것을 견딜수가 없다. 그래도 스슘나가 열린것은 괜찮다.
그러나 핑갈라나 이다, 특히 핑갈라가 열린 사람은 도저히 짜여진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전과범일 경우에도 매우 착한 사람이 있다. 집안이 부유한데도 도벽이 있거나 이상성격의 사람들,
과대망상증 , 이런 사람들이 그 예다.
오래된 범죄벽을 갖고 있는 사람 한쪽은 좋은 쪽으로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흐르고 한쪽은 각
챠크라가 단절되고 불균형적인 상태에서 에너지가 흐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전화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뇌를 오랫동안 사용하며 이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는 뇌에 전기 에너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의 푸라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쿤달리니는 바람이다. 처음에는 물과 불과
전기적인 형태이지만 나중에는 바람의 형태로 슉슉하고 흐른다.
물을 불로 끓이면 기체가 된다. 전기적인 코드를 통해서 그 바람을 끌고 다닌다.
전기가 그 길잡이가 된다. 나중에는 바람으로 분다. 모든것을 태우면 바람이 된다.
바람안에 무수한 에너지가 있다.
왜 무심이 되는가?
쿤달리니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소라면, 일반 육체 기관은 화력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뭔가를 태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미 본능적으로 기화를 알고 있다.
성적인 욕망이 충만 되어 있을 때 몸의 상태는 탁하고 둔하지만 섹스를 통한 뒤에는 뭔가가 연소된
뒤의 가벼움과 상쾌함을 느낀다.
뭔가가 기회된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태어날때부터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달된 아이는 매우 성숙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는 점점 자기 자신의 사명과 삶의 목적을 서서히 자각하게 된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요기나 각성된 아이를 낳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초월적 존재나 지고한 존재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이다.
두번째 만트라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쿤달리니 각성의 두번째 방법은 지속적인 만트라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쿤달리니뿐만 아니라 소주천, 대주천, 양신수행까지도 만트라를 통해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파워풀할고 부드럽고 위험부담이 없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와
수련이 필요하다. 고성 가는쪽, 건봉사에서 아미타불을 30년 염불해서 30명이 육신등천해서 절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만트라를 통해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려면
첫째 요가나 탄트라를 아는 구루, 선정으로 이끌수 있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 스승이 적합한 만트라를 주기 때문이다. 만트라를 끊임없이 수련하면 고위 에너지를 점점
개발하게 되며 일반인들과 다른 고도의 선정과 삼매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그 파장이 끝까지 전달되듯이 만트라를 반복하면 소리의 힘이 순간순간 뭉쳐져서 우주의 바다, 영혼의 바다에 큰 진동을 낳게 된다. 여러분이 만트라를 백만번, 일억번 반복하게 되면 뇌 속의 모든
영역에 스며 들어서 모든 체들(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을 정화하게 된다.
만트라는 각 챠크라에 진동을 일으킨다. 만트라를 수행하면 쿤달리니가 아주 체계적으로 완성된다.
이 만트라를 호흡과 조화시켜서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숨을 멈춰서 하고 들이마시면서 하거나
내쉬면서 하기도 한다. 만트라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가 물라다라에서 결집되어
쿤달리니가 발현된다.
세번째 타파사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고행이란 정화의 한 방법이다. 쿤달리니는 인격적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호흡수련이나
기공테크닉과 근본적으로 틀린 점이다. 올바른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생했을 때 3년에서 5년 사이면
그 사람은 어떤 신비적인한 부분에 특수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그것이 예지력이거나 창조적인 분야에 말이다.
타파사는 무의미한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쁜 습관을 없애고자 할수록 그 나쁜
습관은 더욱 더 달라붙게 된다.
그것은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뭔가를 할려고 했을 때 그 습관은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고행을 해서는 안된다. 바스토리카 호흡법이나 쿰박호흡을 강하게 하는 것이나
결제중에 용맹정진하는 것이 바로 타파사이다. 이것은 구도중의 나약함이나 의지를 방해하는 습관을
근절시키는 방법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쾌락이 삶의 제일원칙이라고 부르짖으면서 사는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타파사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물질 문명의 즐거움이나 안락 호화로움 따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이 만족되면
오히려 우리의 뇌와 감각 체계는 무척 약해지고 우리의 의식이 퇴행되고 제한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촛점이 맞추어진 타파스는 폭발력을 강하게 얻을 수 있다.
그때 구도자는 저급한 욕망과 직면하게 된다.
카르마를 정화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싯디들이 나타난다.
쿤달리니 천계에서 온다. 이때 수행자는 부분적 초감각이 일어난다. 생각만으로도 타인을 지배할 수
있으며 생각을 물질화 시킬수도 있다.
이런 타파사 수행의 초기에는 악한 에너지가 나타나지만 일반인이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파워풀한 에너지가 발현된다.
강한 폭발력이 있는 쿤달리니란 외부 세계의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이다.
네번째 약초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네번째는 특별한 약초를 사용한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아사디라고 한다. 식물도 쿤달리니 체계로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사디는 마약의 의미로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아사디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데 가장 빠른 방법 중에 하나인데 극히 제한된 소수인들에게만 그렇다. 육체의 기질을 변형시키는 일단의 식물이나 동물(녹용)이 있다.
이 식물의 특수한 요소가 부분적으로 쿤달리니를 각성시키게 되지만, 이 약초들은 스승이나 엄격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안된다. 부작용이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약초는 선택적으로
이다와 핑갈라를 급격히 각성시킴으로써 정신적인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
고대 인도의 베다 문헌에 보면 소마사라고 불리는 물질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소마는 칠흑같은
어두운 그믐날에 선택해서 뽑은 칡넝쿨로부터 축출된 쥬스이다.
이것을 마시면 비젼을 보게 되고 의식의 각성이 일어난다. 페르시아인들은 호마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미나 아프리카는 이런 성분을 지닌 버섯을 알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마리화나나 하시시를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영적인 각성상태를 줄수
있다. 세계 각 지역에서 여러 시대에서 이와같은 식물을 정확하게 잘 사용하게 됨으로써 정화된
구도자는 성스러운 존재들을 볼 수 있고, 영계 선계를 볼 수 있다.
유체 또는 아스트랄체를 이탈시킬 수 있다. 물론 이런 경험은 환상적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실제
상황을 볼수 도 있다. 그래서 삼마디로 몰입할 수 있게 되고, 쿤달리니 각성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같은 상태에서는 인간의 성적인 본능이 완전히 제거된다.
아사디를 통한 쿤달리니 각성은 물의 흐름이다.
다섯번째 라쟈스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심리를 개발함으로써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하는 방법으로서 우주적 초월의식과 더불어 개인의
의식을 몰입 시키는 방법이다. 마음의 집중을 통해 각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마음을 집중하려고만 한다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념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프라나야마를 통해 각성시키는 방법
물이나 불은 폭발할 기운이 없다. 강한 폭발은 전기를 통해 일어나는 각성이다.
복근 호흡연정관은 쿤달리니를 일으키는데 불을 준비한다. 쿤달리니 각성의 정석은 강한 열이
발생하고 나서 물이 발생하고 다음에 전기적인 형태로만 체험되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하루종일 전기적인 전율과 몸의 1미터 반경내에 전기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하루종일
느낄수 있다. 이것이 쿤달리니 각성에서 가장 필요한 경우이다.
대쿤달리니는 우주적인 자장의 합일상태이다. 소쿤달리는 인체 내의 전기에너지가 순환되는 것이다.
호흡 수련을 하는 도중이나 프라나 수련 도중에 얼마간은 강한 에너지의 순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이렇듯 에너지가 순환되는 상태에서 수행자가 프라나야마 수행에 특징적인 여러가지 좋은 상태들을
경험할 수 있다. 온몸에 에너지가 충만하다거나 특이한 프라나들로 인해 여러가지 우수하고
신비적인 실제 에너지의 상태를 맛볼 수 있는데 이러한 상태가 어느날서부터 갑자기 전신의 기운이
떨어지거나 항상 졸립고 피곤하며, 삶의 의욕과 생기가 한꺼번에 사라질 수도 있다.
프라나야마를 오래 수련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상태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으면 이때 수행자 자신은
어리둥절해질 수가 있다. 수행자는 프라나야마를 통해 신비와 경이를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상태에서 수행자의 수행에 관한 의지와 신념에 부정적인 의식이 발생 할 수 있으며 좀더 심한 경우
심신이 피폐해지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프라나야마의 기법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 선도에 경우에 있어서 수행자가 일반적인 조식의 형태를 오래 수행하다보면
용호비결의 어떤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여러가지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하루에 대변과 소변을 각각 15회씩이나 본다.
입안에 엄청나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덩어리가 코와 입안에 고이게 된다.
복부에서 좌엽을 통하는 과정에 길을 걷다가 실신할 정도의 심한 고통이 일어난다.
이런 것은 맥이 열릴 때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당황스럽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고통이 수주일 씩 갈 수도 있고 몇시간에 그칠 수도 있다.
선맥은 별로 부작용이 없지만 나머지 맥이 열릴 때는 갑작스런 고통의 상태가 발생한다.
육체적인 통증은 주로 쿤달리니 통로인 미골이라든가 옥침 아즈나 챠크라에서 강한 고통이
발생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육체적인 통로를 뚫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고통스런 것이 아니고
그 고통이 끝날 경우에는 세상이 모든 쾌락을 한데 몰아다 놓은 듯한 환희심, 고급한 선정감
열반락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깊은 법열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마약보다도 수십배 강한
강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자잘한 쾌락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다시 앞의 상태를 경험 할 수
있다면 뼈를 태우는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 것이다.
깔리상태가 있다면 두르가도 존재하듯이 고통은 언제나 황황홀홀한 쾌감을 숨겨 놓고 있다.
첫댓글 .............() ~나무 관세음 보살~
옴마니 반메훔
나무 불 나무 법 나무 승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온누리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하소서. 나무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