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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 文珠蘭 ( 본명 : 문필연 文必蓮) 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 본인이 고백한 실제 출생: 1951년 음력 5월생
문주란의 아버지 문기봉씨는 당시 서면 택시회사라는 운수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부산에서도 알아주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문주란은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지내었다.
그러나 세 살 되던 해 문주란은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아직 말도 잘하지 못하고 걸음마를 배울 무렵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문주란은 이후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곧 재혼하여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동생이 태어나자
그 녀는 더욱 외로움을 타고 우울해졌다.
가족들은 그 녀가 노래를 참 잘했지만 누군가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하면
이상하게 골을 내는 특이한 성격이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천에 하나 있기 드문 매혹적인 저음의 가수 문주란.
그녀가 음치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었다면 믿어질까?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녀는 항상 음악 시간에는 기가 죽어 있어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 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허스키에 분위기 있는 저음이었기 때문에 동요나 음악 교과서에 있는 노래를 부르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 점수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오락회가 열리면 문주란은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유향가요를 멋지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상 대여섯 곡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고
그녀가 노래 부를 때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진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다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문주란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일때 아버지의 사업이 급작스레 부도를 맞았다.
항상 유복하게 살던 그녀와 가족들은 어쩔 수없이 옹색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과 함께 갑자기 다가온 환경의 변화는 문주란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중학생 때 문주란은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을 교지에 발표하는 문학소녀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문주란은 동네에 공연온 유랑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가족들 몰래 유랑극단을 따라가 계속해서 꼬마가수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고
일당 50~80원씩 받으면서 극단생활을 했다.
얼마후 극단생활에 싫증이 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온 문주란을 2년 동안 근신 시켰다고 한다.
1965년 문주란은 부산 MBC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인 '톱싱거대회'에서
「보슬비 내리는 거리」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후로도 부산에서 열리는 공개방송마다 나가 모든 상을 독차지 했다.
그녀는 접어두었던 가수에의 꿈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고 집안의 가족들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1966년 문주란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서울로 향한다.
문주란은 언니의 집에서 묵었고 그녀가 가수로 데뷔한 후에는 언니가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이 때 그녀는 작곡가 백영호를 찾아가 가수로서의 테스트를 받았다.
문주란의 음색에 반한 백영호는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그녀는 지구 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이때 그녀의 원래 나이보다 좀 어리게 소개되었다고 한다.
'특수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쉰듯한 저음이면서도 노래가 부드러워서
서구적인 음율에 맞는 고급스러운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문주란을 발굴한 백영호의 견해이다. 문주란은 「동숙의 노래」로 데뷔하여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미자와 비교될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1966년 9월 처음 발매된 문주란의 데뷔앨범은 발매가 되자 마자 2만여장이 팔려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미자의 「잊을 수 없는 연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또한 동양방송가요대상의 신인상, 공보부제정 제 1회 무궁화상 장려상의 가수상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하여 그녀는 성공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잘 모르겠심더'
톱가수가 된 문주란은 인터뷰 때마다 귀여운 사투리를 쓰며 팬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사랑노래를 잘 부르냐며 놀리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문주란은 사랑은 잘 모르지만 사랑의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녀의 취미는 성냥갑과 우표를 모으는 것이었다.
가수로 데뷔한 지 반년도 지나기 전에 가요계의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문주란은 계속해서 꾸준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정신없이 바쁜 스케줄에 매여있었지만 레코드가 나오자마자
작곡가인 백영호와 함께 들어보고 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공부를 계속하여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것이 문주란의 꿈이었다.
1969년 2월 15일 문주란은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매니저 역할을 하던 언니와 세탁물관계로 가볍게 다투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가족들은 문주란이 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족들은 서둘러서 그녀를 메디컬 센터에 입원시켰지만 상당기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음독직후에는 그녀의 호흡중추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얼마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먹은 것은 극약이 아니라 다량의 수면제와 중추신경안정제의 혼합물이어서 문주란이 의식을 회복한 후 별 후유증이 없었던 것이다.
'흠씬 젖은 머리칼이 밤에 익으면 고질적인 가슴의 병이 맴돌아 거침없는 울화는 거리를 간다'
문주란이 자던 방에 남겨져 있는 이 미묘한 내용의 쪽지를 보면 폐가 좋지않아 고민해왔던 점이 드러나고 있다.
1970년 문주란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로 한참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어린 여가수의 은퇴선언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문주란은 '나는 너무 지쳐있다. 너무 피곤해서 푹 쉬었으면 한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문주란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모든 살림과 짐들을 고향인 부산에 보내버렸다.
그녀는 여러 번의 스캔들과 음독소동 등에 의해 지쳐있었던 것이다.
인기에 오르내림에 민감한 가요계 현실에 환멸을 느꼈고
어른들의 세계를 알았을 때 오는 두려움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피곤함은 어쩌면 너무나 빨리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70년 4월 15일 TBC TV에서의 고별쇼만 끝나면 곧장 서울을 떠날려고 했던
문주란의 은퇴 선언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녀가 팬들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할 때 사회를 맡았던 곽규석과 구봉서가
문주란에게 은퇴를 취소시키기 위해서 그녀를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스크립트를 완전히 무시한 체 가수생활을 계속하라고 어린 후배인 문주란을 토닥여 주었다.
게다가 가요계의 대선배인 이미자도 가수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기 위한 운명이라면서 문주란에게 충고했다.
이런 선배들의 반대에 문주란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문주란이 은퇴를 결심한 것은 노래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물질 만능의 가요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1972년 12월 2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서울시민회관에서 촛불로 인한 화재가 일어났다.
문주란은 공연을 위해 준비하던 중 불길에 놀라서 2층 분장실에서 뛰어내렸다.
이때의 충격으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문주란은 사람의 명이란 순간적인 사고로도 없어질 수 있는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게 완쾌하면 즐거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화재사건 후 한달만에 문주란은 방송에 출연하면서 다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몸을 다치기 전부터 치던 볼링도 다시 시작했다.
문주란의 볼링솜씨는 거의 프로급으로 에버리지 240 정도인데 이러한 실력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1975년 문주란은 가수생활 13년 만에 첫 리사이틀 콘서트를 가졌다.
그녀의 리사이틀은 당시 극도록 침체된 극장쇼계의 상황으로 인해서
서울이 아닌 지방 10대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리사이틀이 시작하기 전 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수의 리사이틀에 대한 두려움을 얘기하는 문주란은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마산, 대전, 군산 광주, 우란, 포항, 안동전주 등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리사이틀을 위해서 하루에 10시간씩 연습을 강행하고 객석이 텅비어있거나 노래가 잘 안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원래 160센티미터의 키에 40kg이 채 되지 않는 갸냘픈 몸이었던 문주란은 이 리사이틀을 준비하면서 더 마르고 신경질 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동생 문준호의 데뷔 리사이틀을 겸한 이 리사이틀에 문주란은 가수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빈틈이 없도록 노력했다.
문주란은 70년대 후반부터 「공항의 이별」, 「공항에 부는 바람」등등 공항시리즈 대중가요로
다시 한번 가요계의 정상에 섰다.
그리고 1981년 문주란은 일본의 킹 레코드사와 2년 전속 계약을 맺고
「지로와나」, 「공항의 이별」, 「가슴아프게」, 「이슬비」 등의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가요가 담긴 앨범을 내었다.
처음 문주란은 단순히 초청되었다가 녹음에 들어가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매혹된 일본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전속계약을 맺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일본의 최고의 엔카가수 미조라 히바리와 맞먹는 대우로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되었다.
일본측에서는 문주란의 매혹적인 저음이 일본 정상급의 가수에 절대 뒤지지 않는 좋은 가창력을 가지고 있어 기대된다고 극찬했다.
'일본에 와서 한국에서 갖고 있던 명성도 지위도 다 버리고 신인가수로서 데뷔했다.'
라고 마음의 자세를 밝힌 문주란은 관습과 말, 음식등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일본에서 공연과 앨범, 양쪽에서 충실한 활동을 하여 한국인으로서 성공한 또 한명의 가수가 되었다.
80년대 중반 문주란은 「백치 아다다」란 노래로 팬들의 관심을 모으려던 즈음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쉽게 활동을 접게 되었다.
그러나 문주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업과 음악 양쪽에 정열을 쏟았다.
1993년에는 그녀는 외가쪽 친척인 임종성씨가 쓰레기처리용 기구를 개발하기까지
수십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것을 보고 주방쓰레기 재활용 처리용 '다써(DASO) 전문 생산업체 ㈜뉴대갑 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원래 환경문제와 쓰레기처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사업이 우리나라 사회발전에 조그만 밑거름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한편 그녀는 음반사 문기획의 대표이사이기도 했는데 문기획은 레코드기획과 제작을 겸할 수 있는 회사였다.
가수로서도 양인자 김희갑 부부가 각각 작사,작곡하여 그녀에게 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상당한 상당한 인기를 얻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멸의 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끊임없이 피어나는 대중의 연인이 되길 원하고 있다.
문주란이 출연한 영화 '애정이 꽃피는 계절'은 대영흥행이 1974년에 제작하여 1974년 9월 13일에 개봉된 영화이다.
박옥상 각본에 윤정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문주란 외에 역시 가수였던 남진이 함께 출연하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김사장의 집에서 식모생활을 하던 이쁜이와 영진의 일과 사랑의 성공을 그리고 있다. 이쁜이는 가난한 고향마을을 도와주기 위해 새벽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는 착한 소녀이다.
그녀의 남자친구 영진은 농과대학생으로 김사장집의 가정교사로 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농을 위해서 양송이 농장에서 일한다. 충분한 저축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이쁜이와 영진은 협동농장을 세우고 주위사람들의 축복속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파란 이별의 글씨 문주란
https://www.youtube.com/watch?v=3u8Hko7TekE
〈파란 이별의 글씨〉1968년 문주란이 부른 동명의 영화주제가로서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박춘석 작곡집, 꿀밤 삼백석 / 파란 이별의 글씨’ 앨범에 실려 있는 B면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박지연〈꿀밤 삼백석〉〈철쭉꽃 필때면〉〈상사디야〉이미자 선생님〈친정어머니〉〈대원군〉〈백년초〉Side B면. 문주란〈파란 이별의 글씨〉〈구슬공주〉〈종려〉남진〈만날때부터〉〈파랑새야 하늘로가라〉〈털장갑〉이 있습니다.
〈파란 이별의 글씨〉는 가수 문주란의 매혹적인 저음을 잘 느낄 수 있는 노래입니다.
영화는 정진우 감독, 배우 신성일, 문희, 윤정희, 태현실, 황정순, 안인숙, 양훈, 남미리, 한재경, 김소은 등이 출연 1968년 6월 27일 서울「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 5만 5천명 관객을 동원, 부산「문화극장」에서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타이틀 “사랑이 타다남은 절망의 터에.. 격정이 휩쓸고간 추억의 터에.. 미쳐 다 쓰지 못한「파란 이별의 글씨」!”
「연극 연출가 진우(신성일)는 소속 극단의 여배우(태현실)와 관계를 맺어 오다 딸들만 있는 단란한 부호의 집에 하숙생으로 들어가 스튜어디스인 그 집 둘째딸 수정(윤정희)를 만나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여배우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여배우는 진우에게 더욱 집착한다. 어느날 여배우의 출현으로 진우와 수정의 애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둘 사이는 멀어져만 간다. 그러나 진우는 끝내 수정을 잊지 못하지만 현실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여배우와 혼인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다. 비행기 안에서 스튜디어스로 근무하는 수정을 만나게 되자 그녀는 기내 안내방송을 통해 그들을 축하해 준다.」신성일과 윤정희의 풋풋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이 교차되고 주제가가 흘러나오면서 세 남녀의 삼각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 영화는 105분간의 막을 내립니다. 주제가〈파란 이별의 글씨〉는 두 연인이 사이가 좋았을 때와 나빠졌을 때, 연상하는 장면에서 실로폰 연주에 실려서 흘러나옵니다.
1960년대 ‘보석처럼 숨겨진 청춘영화’의 최고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영화 ‘파란 이별의 글씨’는 정진우 감독과 배우 윤정희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입니다. 완성도가 높았던 청춘영화로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영화입니다. 제주도의 모래바다 등 자연을 담은 화면과 조화를 이룬 신성일과 윤정희의 로맨스도 매우 달콤하게 느껴지는데, 빨간 양산 아래에서 벌이는 키스신이 영화의 명장면이었다고 합니다.
‘파란 이별의 글씨 ‘영화포스터(1968년 아카데미극장)
1968년 6월 29일 ‘경향신문’의 영화 평
「아름다운 색채와 화면 초연, 밀월, 초우 등 젊은이들의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를 만들어 온 정진우 감독의 애정물 시리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자칫 분별없는 한 때의 탈선 때문에 겹쳐오는 자신의 갈등을 억제할 길 없이 참된 사랑을 이별하고 애정없는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이의 회한을 그렸다. 환상적일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주는 정감독의 솜씨는 특출하다. 최호진(촬영), 고해진(조명)의 기술적인 뒷받침이 물론 크지만.., 고운 색채, 내용과 매치하는 배경을 위해 로케헌팅에 고심한 것도 알 수 있다. 다만 주인공의 성격이 후반에 가서 모호해 지는 이유가 불투명하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 것인지 결혼 상대에의 동정심 때문에 사랑을 버린 것인지의 설명 부족과 함께….., 모처럼 보는 애정물의 가작임엔 틀림없다. 아카데미극장」
이 영화는 1967년 문화공보부에서 레코드업계에 주던 ‘무궁화상’에서 작사가 전우가 ‘작사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수상 이미자 선생님, 남자가수상 최희준, 신인상 정훈희〈안개〉, 중창단상 봉봉사중창단, 작곡상 박춘석, 연주상 이봉조, 편곡상 최창권, 녹음상 최성악이 무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문주란의 노래가 히트를 하면서 영화가 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검은 눈동자에 맺히는 이슬처럼
이슬비 소리없이 내리던 밤길
서로 가슴깊이 상처난 아픔이길래
안녕도 못하고 깨물던 입술
아아 그러나 이슬비 다시오면
먼날 그리워지는 파란 이별의 글씨
서로 가슴깊이 상처난 아픔이길래
안녕도 못하고 깨물던 입술
아아 그러나 이슬비 다시오면
먼날 그리워지는 파란 이별의 글씨
.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OST 감독 : 한형모 출연 : 남정임, 트위스트김, 서영춘, 구봉서
남정임(노래 성태미) - 검은 이별의 글씨 (1966)
https://www.youtube.com/watch?v=_FCJy9OwegI&t=141s
https://www.youtube.com/watch?v=iUNx_KK2ZVU&t=135s
눈물이 날까 입술을 깨물면서
안녕이라고 마지막 잡은 손목
하고싶은 말 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다시는 못올 길을 당신이 간 뒤에
구겨진 종이 조각에서
흐느끼는 검은 이별의 글씨
눈물이 날까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이라고 조옹히 잡은 손목
처음부터 이런 날을 생각을 했지만
쓸쓸히 돌아서는 마음 괴로워서
찢어지는 종이조각에서
사무치는 검은 이별의 글씨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는 한형모 감독이 남정임, 서영춘, 트위스트김, 구봉서, 곽규석,
서영수 등과 가수들을 기용해 만든 코미디 뮤직영화로 1966년 12월10일 아세아 극장에서
개봉해 5만여 관객이 든 영화었다.
줄거리는 대훈(서영춘)은 한국전쟁 때 잃은 딸을 찾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기차에서 우연히
삼룡(트위스트김)이란 사람을 알게 된다. 서울이 초행길인 대훈은 삼룡에게 길안내를 부탁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딸 미라(남정임)를 찾아 다니는데, 우여곡절끝에 어느날 우연히 워커힐에
갔다가 그곳에서 인기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딸을 만나 감격의 해후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이미자,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유주용, 위키리, 정원, 김상국,
키보이스와 아리랑씨스터즈, 쟈니브라더스 등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한국 대중음악 자료의 보물창고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음악은 박춘석이 맡았다.
이 영화 자료는 국내에서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대만에 남아있던 필름과 국내의 필름을
조합해 디지털로 복구한 것이라고 하며 흑백필름은 대만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
Let's Meet at Walkerhill ( Wokeohileseo Mannapsida )(1966)
https://www.youtube.com/watch?v=SKt9OwUPqpk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포스터 - KMDB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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