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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갈라디아 선교 여행
사도행전 14:6~2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일차 선교 여행 중 중반부와 후반부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던 중에 성령의 지명하심과 파송하심을 받아서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서 구브로 섬과 튀르키예 중부의 비시디아 안디옥 성과 루가오니아 지역의 이고니온 성 곧 큰 지역으로는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물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도 사도 바울의 전도 설교에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사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역시 격렬하게 일어나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돌로 치려고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또 도망을 쳐서 다른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번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한 곳은 루스드라입니다. 이곳 역시 크게는 지역적으로 갈라디아 지방에 속합니다. 사도들이 로마 국도를 따라 이고니온에서부터 걸어와서 들어간 루스드라 성은 이고니온 성으로부터 약 35km 떨어진 성으로서 두 성 거리는 사람이 하루 종일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루스드라 성은 유대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 주민들의 원주민 언어는 루가오니아 방언이었지만 헬라어를 알고 사용할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헬라어로 설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7절에 보니, 사도들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모여든 회중인 그 루스드라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터인데,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곧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창조자시며 세상 만물의 운행자시며 만민의 심판장이심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인으로 전락하여 온갖 저주와 질병과 죽음과 죽은 뒤의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로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속하게 된다는 축복의 말씀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바로 이천년 전에 저 유대인의 땅 팔레스타인 땅에 육체로 오셨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거해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삼년 동안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시고자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으며 진리의 말씀을 증거해주셨으며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도들과 믿는 자들이 지금도 놀라운 이적도 행하신다는 말씀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중인데 그 설교 도중에 기이한 이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8절에 나온 바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을 듣는 회중 가운데 한 남자에게 시선이 쏠리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데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을 보니 그 사람 마음 속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사도의 눈을 열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사람이 곧장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인 자리에서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 것이며 얼마나 기뻐했을 것입니까? 그는 놀라고 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도 크게 놀라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 기적이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확증하기에 족하였기에 그 모인 사람들 중에 일부는 사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큰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적 직후에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너무나 놀란 그 모인 무리들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일어난 그 기적을 보고서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말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 중에서 최고의 신이요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로서 지혜와 장사의 신이요 해석의 신이요 말을 전해주는 전령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볼 때에 후덕한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훌륭한 인품을 풍기는 바나바는 제우스로 보이고, 설교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사도 바울은 제우스의 아들인 헤르메스 신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앉은뱅이를 한 순간에 고쳐버린 이적을 일으킨 사도들을 보니까 그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세상에 내려온 신들이라고 확신을 한 것입니다.
“야 저분이 제우스다. 저 분은 헤르메스다”
라고 하면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두 사도를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루아오니아 방언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사도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집회가 끝났는데 흥분한 사람들은 몰려가서 그 지역의 유명한 제우스 신당을 찾았습니다. 성 바깥에 있는 제우스 신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에게 몰려간 사람들은 그 제사장에게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이 우리 성에 방문했노라고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그 말에 놀란 제우스 신당지기 제사장도 서둘러 제물인 소 한 마리를 가지고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에게 바칠 화환을 준비하여 사람들과 함께 다시 바울과 바나바의 숙소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서둘러 제우스 제사장을 데리고 와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제사를 드리고 큰 환영식을 하려고 소동을 피운 데는 배경이 있다고 합니다. 얼마전 그 근처 브르기아 지방에 홍수 재앙이 내렸는데, 사람들이 믿기로는 그 지역에 찾아온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사람을 변장하여 찾아와서 천번씩이나 사람들에게 묵어갈 곳을 청하였으나 다 박대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가난한 부부가 그 두 사람을 초라한 집에 모셔들여서 없는 중에도 잘 대접하였으므로 돌아간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노하여 큰 홍수를 내려 부르기야 사람들을 쓸어버렸지만 자기를 대접한 그 가난한 노부부에게는 큰 상을 베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을 잘 아는 루스드라 성 사람들은 옆 동네 브르기야 사람들의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서둘러서 자기들을 찾아온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 바나바와 바울을 성대하게 대접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는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려고 제단을 차리고 소를 잡으려고 묶어놓고 화환을 전달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숙소에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바나바와 바울은 그제서야 사람들이 벌이는 일의 실체를 알고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무지함과 신화와 우상 숭배의 오랜 습관으로 인하여 자신들을 신으로 생각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 겉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을 뜯어 말렸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사도들은 자기들이 신이 아니라 그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도 베드로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을 고쳤을 때에 유대인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어 대단한 경외심으로 쳐다보았을 때에 사도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2)
고 말했던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들이 자기들을 신으로 생각할 만큼 대단히 여겼을 때에 즉각적으로 자기는 그들과 동일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증언함으로써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도록, 또 사역자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들을 본받아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큰 일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을 때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채거나 우리 자신이 으쓱거리는 교만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삼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모인 그 회중에게 사도 바울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화가 헛되다는 것과 진정한 신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 분이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알릴 기회를 다시 한번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15절 중반절부터 이렇게 큰 소리로 그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핵심적인 복음에 대하여 증거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인 사람들은 아직도 믿음이 없거나 오해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다시금 그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소개하고자 했을 때에 하나님을 창조주이시자 자연 만물 가운데 운행하시며 비와 곡식을 다스리시어 수확하게 하시고 음식을 먹고 하시고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 회당도 없어서 구약 성경을 접해본 적도 없는 자들인 완전한 이방인들인 것을 잘 알기에 사도는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그들의 일상 생활 곧 비와 곡식과 음식과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알아듣기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복음의 핵심은 마땅히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요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지만, 전도하는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접촉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지혜임을 사도의 설교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에 맞춰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경험으로 말하여 예수님의 대속의 진리를 전하고,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는 자에게는 성경을 가지고 전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자에게는 그가 가진 종교와 기독교의 복음을 비교하면서 복음의 탁월함을 힘있게 증거하는 방법들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전도할 때에 그 사람에게 복음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접촉점을 발견하여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서 그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전도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앉은뱅이가 낫는 큰 기적도 일어나고 제우스에게 드리는 제사 소동도 끝나서 이제는 루스드라에서 사도들의 전도 활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계기가 마련되었는가 싶었는데, 갑작스럽고 강력한 박해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이고니온까지 와서 유대인 회당에서 다시 유대인들을 만나 작당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이미 돌로 치려고 계획하고 달려들었으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웃 성인 루스드라로 도망쳐나왔는데, 어떻게 해서 사도들이 루스드라 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그들이 여기까지 와서 이고니온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큰 무리를 만들어서 사도 바울을 찾아 돌로 쳐서 완전히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자기들의 폭력 사태에 당국의 조사가 들어올까 봐 바울의 늘어진 몸을 질질 끌고 나가서 루스드라 성밖에 내던져버렸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몇몇이 곁에 있었겠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폭력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맹렬한 돌에 맞아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유대인들의 집요한 악함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기이한 것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며칠 전만 해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기적을 행하였을 때에 그들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기고 그들을 자기들에게 찾아온 강림한 신으로 여기고 떠받들어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유대인들의 악한 충동을 받자 유대인들과 함께 몰려와서 바울에게 돌을 들어 쳐서 죽이기까지 하는 돌변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변덕스러운 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과거 예수님 때에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올라올 때에 환호하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하면서 찬양하며 예수님을 맞이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죽어서 냄새나던 나사로를 살려낸 기적 소식을 듣고 그들이 흥분하여 그렇게 환호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혀 결박당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빌라도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자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돌변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혈기를 내면서 소리 소리 질러대었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한번은 신으로 여겨 제사하려고 몰려들더니 이제는 돌을 들고 죽이려고 몰려들어서 이렇게 사도 바울을 죽이고 질질 끌고 성밖으로 데리고 가서 내던져버리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사람들의 대적하고 조롱하는 것에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묵묵히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정으로 족하게 여기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주고서 사람 때문에 기뻐하다가 사람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오직 변함없으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20절에 보면 죽은 줄 알았던 사도 바울이 다시 살아나서 일어났을 때에 다시 그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서 형제들과 그 날 머물렀던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를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있는 그 성에 둘러싼 형제들과 더불어 다시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그 성을 떠났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였고 배신감을 깊이 느꼈다면 사도 바울은 그 성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깊은 실망감에 좌절하고 혐오감에 잡히지 않고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을 알기에 다시 그 성에 형제들과 함께 들어가서 믿음의 형제들을 격려하고 다음날 그 성에서 나와 이웃 성인 더베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하다가 사람에게 깊은 실망을 당하여 좌절하였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하여 인간을 혐오하고 미워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변치 않으시며 한없이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시며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님뿐임을 기억하고서, 사람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십시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하고 여전히 기도해주고 용서해주고 전도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모든 상처를 다 잊어버리고 내게 주어진 사명의 삶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돌 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후 이튿날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 성에서 떠나 이웃 성인 더베에 갔습니다. 더베 성은 루스드라에서 약 96km 떨어진 곳이니 두 사도는 삼일 길을 걸어가서 그 성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두어 달 사역을 한 두 사도는 이제 그 동안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세워진 곳을 다시 순차적으로 거꾸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돌아가면서 형제들과 만났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면서 했던 일은 몇 가지의 일입니다.
첫째로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라는 권면의 말씀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22절 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이 믿음’이란 사도들이 가르쳐주었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사도적 가르침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 중심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죄사함과 의로움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과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 보내주신 성령을 받는 은혜를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이 진리에 굳게 붙어 있으라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전해준 이 복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이 복음의 진리처럼 우리의 삶에 완전하고 영원한 힘과 소망을 주는 소식은 달리 없습니다. 훌륭한 철학도, 종교도, 탁월한 인간의 정치와 문화도 이 복음이 제시하고 확증한 진리와 약속보다 더 위대하고 행복한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들이 직접 듣고 보고 자기의 피로써 증거해준 이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굳게 붙들고 그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시다.
둘째로, 이 신앙의 길에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경고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자신이 몸소 이번 전도 여행 때에 온 몸으로 겪은 사실처럼 이 복음 진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대적을 당하곤 합니다. 심지어 루스드라에서 사도가 사람들로부터 돌을 맞아 죽게 되는 지경까지 갔던 것처럼, 우리 신자들도 신앙으로 인하여 미움과 비웃음과 폭력과 손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도는 확실히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 진리를 믿어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영육간의 축복을 얻게 되지만 그 만큼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미움을 받게 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으면 항상 복을 받고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만 받고 높아지는 일만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한 사도의 경고를 우리도 마음에 둡시다.
셋째로, 사도들은 그 갓 세워진 교회마다 지도자들을 세웠습니다.
23절에 보면, 사도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했습니다.
그 교회는 세워진 지 이개월 혹은 삼 개월 혹은 육개월씩 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어리디 어린 교회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오늘날 직분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렇게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교회를 지도할 지도자를 그렇게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룻밤을 밤새 산 위에서 기도하신 후에 다음 날 베드로와 요한 등 열두 사도를 세웠던 것처럼, 사도도 주님께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그 갓 생겨난 교회들마다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아마도 그 이방 교회들마다 적어도 한 두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익히 알고 있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확신이 있었던 거듭난 신자들이 있었기에 사도는 기도하는 중에 그들로 하여금 그 갓 시작된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장로님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체 곧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형제 자매가 교회 속에서 함께 교제하며 예배 드리는 것이 신앙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사도는 이렇게 교회 조직을 각 성마다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 없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신자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명심합시다. 누군가 말했듯이, 교회라는 어머니를 두지 않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 모실 수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교회일지라도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 신앙이 자라나고 성숙해지며 구원을 지켜갈 수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을 받은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과 감사함으로 함께 섬깁시다.
넷째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결국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장로들을 금식 기도하고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부름받은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들이요 그 동안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배우던 구약 성경도 전혀 모르던 자들이요 그들 위에 장로로 세워진 성도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개월 삼개월 육개월 정도 짧게 배운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두 사도는 그렇게 지역 교회 목회자로 장로를 각 교회마다 세우고 훌쩍 떠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같은 교회를 두고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그 두 사도는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결국 사도 두 사람의 수고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원주민 초신자들의 영성과 믿음에 달린 것도 아니요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부르시고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교회로 부르신 주님께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3절 후반부에 이르기를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고 한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사도는 그 장로들과 그 교회의 미래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께 위탁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그들의 신앙과 교회의 미래를 맡겨 드린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요 직분도 감당할 능력도 주실 것이요 친히 그 교회를 세워가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사도는 그 갓 세워진 교회를 주님께 맡기고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하여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우리 신앙의 여정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셨기에 지금까지 여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보존되어 왔음을 깨닫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끝내 길을 잃지 않고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와 교회의 미래를 신실하신 주님께 맡깁시다. 선하시고 능하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실진대 많은 시험과 도전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끝내 믿음을 지켜갈 것이요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서 주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다 마치고 처음 성령이 보내셨던 파송 교회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 귀환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사도들은 교회를 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 앞에서 그 동안의 일들을 보고하였습니다. 26절부터 28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두 사도는 그 선교 여행으로 인하여 거두게 된 선교의 놀라운 성과를 자기 공로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셨노라고 보고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하나님께 공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뒤에서 계속하여 기도로 후원해줌으로써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노라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그 전도여행의 성공의 공을 돌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하여 이년 남짓 기간 동안 행한 일차 선교 여행을 통하여 영적 어둠에 눌려 무지와 미신과 신화에 끌려다니며 멸망의 길로 내려가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열린 문으로 수많은 하나님의 작정된 영혼들이 들어왔고 세워진 그 연약한 교회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계속 일하심으로 이방인들이 계속하여 주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출발하여 행한 이 첫 번째 선교 여행은 온 세상 만민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 명령이 본격적으로 성령의 인도로 수행된 지극히 복된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지금까지 성령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파송하시어 땅끝까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 백성들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작정을 따라서 이 극동의 땅에 조선 말 무렵 선교사님들이 들어와서 전도함으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도 주의 백성들이 생겨나고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1997년 3월 첫째 주일에 천안 성정동에서 우리 함께가는교회를 세우심으로 처음 예배를 드리고 지금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까지 함께 해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를 불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렇게 세우시고 함께 한 형제 자매가 되어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세우신 직분을 따라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주님을 섬기며 서로를 믿음으로 섬기게 해주셨으니, 앞으로도 주님께서 그의 능하신 손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앞으로도 사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 전해준 바 사도적인 믿음의 도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를 우리도 굳건하게 붙들고 그 믿음에 머물러 있읍시다.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을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면서 신앙의 박해를 당할 때에 인내하며 핍박을 끝까지 잘 견뎌냅시다.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 때에 세상 사람들의 환호에 너무 좋아할 것 없고 그들의 미움에 너무 실망하지도 맙시다. 오직 주님의 인정과 칭찬만으로 만족하며 우리의 사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갑시다. 또한 사도 바울이 지극히 어린 교회지만 그 교회가 성도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함을 알고 곧장 세웠던 것처럼 우리도 부르심받은 우리 함께가는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여 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잘 세워갑시다. 또한 사도 바울이 돌 맞아 죽었다가 다시 그 성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전도하러 갔던 것처럼 우리도 어려움이나 결실 없음에 낙심하지 말고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계속하여 복음 전도를 계속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성령을 힘입어 잘 감당한 후에 거둔 열매를 인하여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공을 돌리고 또한 함께 한 형제들의 기도를 기억하며 공을 돌리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세월이 갈수록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여서 믿음을 잘 지키고 주신 사명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다가 우리 모두가 장차 주님 앞에서 귀한 칭찬과 영광스런 상을 다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