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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말씀 : 요19:25-27
제목 : 자녀들을 십자가 곁으로
지난주에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는 증거는 첫째,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 둘째, 십자가의 교리에 대한 사랑, 셋째,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거짓을 가르치는 것,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십자가의 원수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왕권과 인격과 복음에 대한 불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마음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의 인격과 통치와 진리에 대하여 충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멀어지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쫓아갔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심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과 멀어져서 그분과 원수 된 자들과 함께 자리잡고 앉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시들게 되면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들의 믿음도 나약해지고, 그분의 뜻을 향한 열정도 식어지며, 동심원들의 생명 구원을 위한 관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 절대 주권자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심도 쇠퇴하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분의 진리를 확신한다고 장담하며,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인정했을지라도 그분을 향한 사랑이 시들면 이 모든 것들은 금세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명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앞에서 그분을 향한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막12: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실하게 행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주께로 이끌며,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는 이웃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가까이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을 향한 충성을 방해하는 마귀는 반드시 물러갑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는 네 번째 증거는 건강한 영혼과 신앙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이 있다는 증거, 즉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그것은 우리와 십자가와의 거리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가 십자가에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에 따라 나약해지기도 하고, 활력이 넘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되고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다면 하나님을 아는 일과 천국을 준비하는 것을 갈망할 수밖에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 복종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 복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를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신자의 영혼은 물 댄 동산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참된 위로와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이 여인들은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을 영광의 자리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렵고, 참담하고, 공포스러운 낙심의 자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영광의 자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머니인 마리아와 예수님께 은혜를 받았던 여인들의 표정을 사람의 손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요? 세상의 어떤 작가와 화가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택하신 백성들을 통한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깊고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당사자가 아니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 설교를 위해 오늘 본문을 선택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믿고 십자가 아래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자세를 다섯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또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될 수 있으면 간섭하지 마십시오. 마리아는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소리치거나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내 아들을 왜 죽이냐'라고 통곡하면서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을 새기고 묵묵히 아들의 장엄한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며 기도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또래 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또래 관계가 잘 형성되어야 사회성이 뛰어난 아이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일에 간섭하는 것은 그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양육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부모가 항상 지켜보고 간섭하며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독립성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아들이 장성하면 군대에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몇몇 부모들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이런 행태가 나라와 자녀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집단 괴롬힘이나 구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부모가 문제를 제공한 것입니다. 부모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때로는 잘잘못을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은 부모의 몫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교육의 질은 부모의 인격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초등학교 성적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너무나 산만하며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미래가 걱정되는 아이이다.’ 아인슈타인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남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단다.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가끔씩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공상에 잠겨 있는 아인슈타인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려 섞인 말을 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는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언제나 사랑으로 그를 양육했습니다. 문제를 저질러도 학교에 따지거나 아이를 야단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기도하고 응원했습니다.
둘째, 자녀들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조급함이 아닌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힘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이 없는 부모는 내 아이의 말만 듣습니다. 내 아이는 정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렸을 때 내가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의 말만 듣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움, 그리고 다른 아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갖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면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게 맞을 수도, 누군가를 때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왕따 시킬 수도, 자신이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너그러움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품을 때 부모는 자신의 욕심과 생각을 버리고 아이들을 위한 올바른 교육과 훈계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마리아는 조금도 안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선입견을 갖지 마십시오. 부모가 선입견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선입견은 서로 다른 대상을 동일시하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예컨대 어떤 어머니가 첫째 아들을 아동학대 수준으로 때립니다. 이 분은 간호 장교이고, 남편도 공군 장교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때리지 않고 사랑으로 양육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이 잘못하면 남편이 잘못한 게 생각나서 남편에게 낼 화를 아들에게 쏟아붓는 것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내 아이도 공부를 못할 것이다. 부모 키가 작으면 아이 키도 작을 것이다. 남편 성격이 안 좋아서 아이들도 성격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면 절대로 올바르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입견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저 아이는 가난해서 버릇이 없을 것이다. 저 아이는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해서 공부를 못할 것이다. 부모가 서로 친한 저 아이들이 우리 애를 괴롭혔을 것이다'와 같은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면 말씀의 눈으로 분별력 있게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빌라도에게도, 잔혹한 로마 군병들에게도 선입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 자녀들은 세상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아이들이 참혹한 위기나 사건을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들어 누워 있는 침상 옆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보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녀를 바라보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동일한 아픔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분명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부모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게 하십시오. 넘어졌을 때 부모가 호들갑을 떨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복하면 그것이 곧 그 아이의 인격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당당하게 구는 이유는 연단과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녀들이 연단과 훈련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다섯째, 자녀를 십자가로 데리고 오십시오. 이것이 교육의 정답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요? 마리아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장엄한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부모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묵묵히 지켜보며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시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여자'를 '어머니'로 기록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헬라어로도 히브리어로도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말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기까지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권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제한을 두셨습니다. 즉 성경은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한 여인과 하나님 아들 메시아와의 관계라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소서 아들입니다."는 슬픔에 젖은 어머니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위로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이렇게 죽으러 온 사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죽음이 그분의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녀를 십자가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내게 맡기셨고, 이 아이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품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를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을 십자가 아래에 맡겨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십자가로 데리고 오는 것은 가족 구성원이 함께 와야 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도 됩니다. 자녀들을 십자가로 데리고 오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사랑이, 슬픔과 동정(同情)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 달리신 십자가 주위에 맏음으로 서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천지를 운행하시고 오늘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온 가족이 그분과의 만남을 누리는 기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짊어지셨기에 인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분은 유일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자녀의 고뇌와 아픔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직 자녀를 주님 곁으로 이끌 때 그것을 해결해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쓴 잔을 이미 맛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 좌절, 우울감 등으로 고통 당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잔을 들이키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보다 앞서 고난의 잔을 들이키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긍휼을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