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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에게 박정희는 아버지같은 존재…최남선의 <한국해양사>를 선물받아 '세계경영' 선봉장 김우중(上)-① 1979년 10월 27일 시곗바늘은 새벽 5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김우중은 대우자동차 인수 작업을 밤새 지휘하다가 부평공장 야전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서가 다급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본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김우중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시간이 멎어버린 듯했다. 청와대 빈소에 들어서자 영정사진이 그를 맞았다.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박정희 그 얼굴. 김우중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웅은 죽음을 직시한다. 단순한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죽음을 직시한다. 위기에 부딪혀 고귀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대에서 훌륭하게 영웅을 연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박정희는 김우중을 자식처럼 여겨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아련히 마음속에 떠올랐다. 1961년 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을 돌며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잡는 데 힘썼다. 제주도청을 방문하여 회의실에 들어서니 벽에 대구사범 은사 제4대 김용하 제주지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희는 크게 반가워하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김용하 선생의 가족을 찾아보도록 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박정희는 말했다. "그래,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세계를 돌며 무역업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 김우중의 당찬 말에 박정희는 활짝 웃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꼭 성공하리라 믿네 한국이 살길은 오직 수출뿐이야. 이제까지처럼 외국 물건을 들여와 팔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어. 그런데 기업인들 거의가 지레 겁을 먹고 이 좁은 땅 안에서만 움츠리고 있으니 걱정일세. 김우중 자네가 앞장서서 세계 수출에 힘써 보는 게 좋겠네.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쓴 '한국해양사'를 꼭 읽어보게나." 박정희는 책 한 권을 김우중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이제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고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국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가 민족 백년대계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바다를 안고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금후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일 것이다. … 이 정신을 고취하며 이 사업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며 또 영원성의 건국 과업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경제의 보고, 교통의 중심, 문화수입의 첩경, 물자교류의 대로(大路) 내지 국가발전의 원천, 국민훈련의 도장(道場)인 이 바다를 내어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다가 부칠 것이다. … 진실로 인도(引導)하기를 옳게 할 것 같으면 일찍 바다 위에서 유능유위(有能有爲)한 많은 증거를 보인 우리 국민은 금후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 장단에 크게 춤을 추어서 다함께 구국의 대원(大願)을 이룰 것이다.' - 최남선 '한국해양사' 머리글에서
1977년 4월 방위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우중(왼쪽서 두 번째).
머리글을 읽어보던 김우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이때 25세 젊디젊은 김우중 가슴속에 '세계경영' 대우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수출로써 나라를 일으키자는 박정희의 크고 깊은 뜻에 매우 공감했다. 박정희는 이 인연을 잊지 않고, 1974년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을 김우중이 불하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우중은 그 자리에 '대우센터'를 지어 그룹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 뒤로 대우는 박정희 뜻을 받들어 수출 선봉장 역할에 온 힘을 기울였고, 정부는 대우가 세계시장을 누비는 기업으로 나아가게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출이 곧 국력이라며 힘주어 말하던 박정희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로지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온몸을 바친 박정희,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그만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우중의 마음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 뒤 김우중은 박정희의 뜻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의 면담으로 추진된 한 해 100만대 생산 목표의 중앙아시아 자동차공장, 강경한 호메이니 정권의 각료가 직접 안내원으로 나서서 유치를 간절하게 바라던 이란의 도로.통신 관련 산업, 대우가 차관까지 주선해주며 수주했던 파키스탄 고속도로, 하노이 시장이 적극 요청하던 베트남 호텔 건립과 생산기지 유치, 군부 실세가 국가기간산업이나 되는 듯이 자랑 삼던 수단의 대우 타이어공장, 새벽 공항에 나와서 김우중을 기다리던 경제 각료들의 리무진 행렬, 국빈 대우 경호행렬, 세계 곳곳 수천 명 대우 가족들과 김우중과의 감동적인 만남들, 코리아는 몰라도 대우 로고가 그려진 작업복을 가장 멋진 나들이옷으로 자랑스럽게 걸치고 다닌 동구권 젊은이들. 이 밖에도 세계경영 김우중의 후광이듯 빛나는 기억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는 1896년 12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도쿄 법정대학 2년 수료 뒤 경성제대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 무렵에 학생 박정희를 가르치며 조선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전인항은 1902년 9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으며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이화여전 보육과 1기 졸업생이 되었다.
김우중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9년 4대 제주도지사로 일한 아버지 김용하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끌려가고 말았다. 5남매는 홀어머니 아래서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김우중은 피눈물 나는 고난의 그 시절을 오히려 자신의 일생 가운데 가장 값진 시간으로 간직한다.
그는 대구 방천시장에서 신문을 팔았다. 하루에 신문을 100부 넘게 사다가 팔았는데, 몽땅 팔리는 날은 돈을 조금 벌었지만 다 팔지 못하는 날은 그만큼 밑져야 했다. 그는 날마다 신문 100장을 사들자마자 방천시장으로 뛰었다. 남보다 빨리 가서 한 부라도 더 팔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 아무리 일찍 시장에 가서 이 집 저 집 신문을 넣어도, 이미 다른 녀석이 앞서서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어서는 신문을 넣고 갔다. 이때 무엇보다 거스름돈이 문제였다. 신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리 거스름돈을 세모꼴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를 어쩔까. 고민을 거듭하던 김우중 머리에 번쩍 기발한 생각이 스쳐갔다. 바로 신용거래 방식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무조건 뛰어가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먼저 돌리고 되돌아오면서 신문 값을 받았다. 그러자 어느새 방천시장이 몽땅 소년 김우중 것이 되었다. 어쩌다 돈을 떼어먹고 간 사람이 있더라도, 팔지 못해 남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작지만 남다른 생각! 이는 김우중 자신과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해내고, 뒷날 대우 32년 세계경영 성공신화의 밑거름이 된다. 김우중은 대학을 마치고 '한성실업'에 들어가 무역부 은행관계 업무를 맡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무역은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김우중의 선임자는 온종일 수시로 서류를 들고 황급히 은행에 뛰어다녔다. 그런데 김우중이 업무를 넘겨받고 보니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해서 능률이 오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은행결재시간이 오전 오후 한 번씩 있음을 알아낸 뒤 그에 맞춰 하루에 딱 두 번만 은행에 갔다. 결과는 허둥지둥 여러 번 뛰어다닐 때와 마찬가지였다. 또한 김우중은 은행에 갖고 다니는 서류를 하나의 서식으로 만들었다. 매번 수치나 내용이 바뀌는 칸들만 비워놓고 그 밖에 변동이 없는 부분은 미리 인쇄해 놓음으로써 서류 작성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런 만큼 여유가 생기고 능률도 올랐다. 은행에는 수많은 회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여직원들 도움에 따라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달라졌다. 김우중은 어떻게 하면 은행 직원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곰곰이 머리를 짜냈다. 마침 회사 창고에 수입은 해놓았으나 팔리지 않은 여성 양장 옷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옷감들을 풀어 은행 여직원들에게 싸게 팔자 그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좋고 회사서는 골치 아픈 재고품을 현금화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이렇게 김우중은 수출입 창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한성실업은 김우중 덕분에 은행 일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1963년 김우중은 동남아 중개무역 중심지 싱가포르에서 무려 37만달러어치 생산계약을 이루어낸다. 겨우 27세 젊은 나이로 이뤄낸 쾌거였다. 한성실업은 합성섬유를 써서 천을 생산했는데 그 무렵 합성섬유는 인도계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었다. 김우중은 천 조각 샘플을 들고 닥치는 대로 업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인도 상공회의소장 라자크가 경영하는 회사와 20만야드 생산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본 다른 상인들에게서도 앞다투어 주문이 쏟아졌다. 한성실업만으로는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분량이어서, 하청을 주고 기한 늘려가며 마침내 주문을 모두 소화했다. 생산된 천은 베트남·태국·필리핀 등 아시아 곳곳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국 최초 섬유제품 직수출이었다.
주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성실업의 사업은 크게 확장되었다. 김우중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통금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매우 많았다.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다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으며, 그즈음 전기가 없어 밤에는 촛불을 켜 놓고 일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한번 큰 성공을 거두고 나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정부에서는 수출만 하면 '시장 개척'이라 하여 3년여 동안 바터(barter·구상무역)권을 보장해 주었다. 수입할 물건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한성실업은 직접 물품을 수입하여 국내에 팔기도 하고, 그 권리를 프리미엄을 붙여 다른 회사에 팔기도 하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이 모두 김우중이 싱가포르에서 큰 계약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고민하는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만약 1%의 성공 확률이 있다면, 그 1%를 성공의 씨앗으로 삼는 자가 바로 진정한 비즈니스맨이다." 김우중이 남긴 명언이다. 성공 가능성 1%에 주목했던 저돌적 낙관론이 활발한 세계경영의 모토가 되었으리라. 김우중은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먼저 도전하는 '황무지 개척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박정희 경제개발연대 압축성장 시기에 꼭 필요한 이상적 기업인이었다.
그 시절은 유학만 갈 수 있으면 학비는 장학금을 받거나 현지에서 어떻게든 일하며 벌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일할 때 그의 큰형은 군인신분으로 유학을 갔고 둘째 형과 누이동생, 막내 남동생도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우중은 자신의 앞날을 거듭 고심했다. 이렇게 회사원으로서 삶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형제들처럼 유학을 떠날 것인가. 그의 결단은 직접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트리코트 원단 생산업체인 대도섬유 사장 도재환, 한성실업 영업부장 조동재, 경기고등학교 단짝 이우복 등과 힘을 모았다. 그러나 자금이 모자랐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거둔 실적만 듣고 은행이 큰돈을 빌려줄 리도 없었다. 은행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사정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자 김우중은 아예 새벽부터 은행 지점장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 지점장 차가 나오면 얼른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경비원들 손에 질질 끌려 나왔지만 사흘 때가 되자 마침내 지점장도 두 손 들고 말았다. "정말 독한 사람이군요. 그런 정신이면 꼭 성공하겠소이다. 좋소, 자금을 빌려드리리다."
마침내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다. 그때는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이 한창 재벌급 기업을 일궈나가고 있을 때였다. 탄탄한 기업들이 즐비한 적자생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대우'가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며, 창업자 김우중 자신 또한 몰랐으리라.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 규모의 수출 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킨다. '창조·도전·희생'의 대우정신은 박정희 불굴의 의지 '우리도 할 수 있다!'를 이어받은 1970~1980년대 한국 경제 시대 정신, 바로 그 자체였다. 아프리카·동남아의 밀림 오지, 불면의 열대야 속에서 독충들과 싸워야 했던 해외 15만명을 포함한 25만 대우인의 신념이었다.
1967년 31세 나이로 대우실업을 창업할 때부터 김우중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시장이었다. 그 무렵 국내 기업들은 수출하면 오히려 밑진다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김우중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기회였다. 국내시장은 한계가 있었지만 세계시장은 한없이 넓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우중에게는 국경이 없었다. 1984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주는, 기업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기업인상'을 받는다.
대우는 전략적으로 진출 지역을 정했다. 전략거점국가 육성 차원에서 온 세계를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세계화를 추진했다. 6개 권역 전략거점국가로는, 첫째 서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 둘째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체코, 셋째 독립국가연합(CIS)의 러시아·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 넷째 아시아의 중국·인도·베트남·미얀마·북한, 다섯째 아메리카의 미국·멕시코·페루·칠레·브라질, 여섯째 아프리카의 모로코·알제리·리비아·이집트·수단·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이들 6개 권역 국가들은 체제전환국 또는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고 인구가 많았으며 자원이 풍부했다. 서슬 퍼렇던 냉전시대였지만 김우중은 국내 기업들이 꺼리던 '철의 장막'을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의 이른바 '위험국가'들도 과감하게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고 외교관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이는 기업은 '애국'이며 기업이익보다 국가이익이 먼저라는 김우중의 신념과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우중은 자동차산업에 주력했다. 대우는 1979년 새한자동차를 인수했다. 국내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업체로 연간 16만대 생산에 머물러 있던 새한자동차는 대우가 인수한 지 6년 만에 200만대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적 규모의 자동차회사로 탈바꿈했다. 대우자동차는 '제미나'라는 구형 모델에서 자체 모델인 '맵시나'등을 생산하여 판매했다. 그리고 1992년에 이르러 GM과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경영혁신운동인 NAC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우자동차 경영 정상화에 몰두하던 김우중은 부평공장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지내면서 대우자동차 고유의 고효율 생산방식을 세워나가는 한편, 세계경영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매년 자체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차량을 출시하고, 세계 곳곳에서 200만대 규모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키울 계획을 세웠다. 그때 국내 자동차 총생산은 100만대에 지나지 않았고, 총 판매량도 20만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4~5년에 한 번도 힘든 신차 개발을 매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열악한 생산기술은 무시한 채 200만대가 무슨 말이냐며, 직원들은 김우중의 말을 새겨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6년뒤 부평공장은 복합생산체제를 이루어 '르망'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군산종합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며 '라노스·누비라·레간자'등과 대형 트럭이 쏟아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창원 공장에서는 경차 '티코'를 생산했고, 쌍용자동차까지 인수했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해외공장 인력 10만명 넘어 “5000년 역사에서 처음 있던 일” ‘세계경영’ 선봉장 김우중 (중)
▲ 서울역 앞 구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
대우자동차는 대우 세계경영의 선봉을 맡아 공장과 디자인연구소를 중심으로 폴란드·루마니아·인도·우즈베키스탄·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우크라이나·독일·영국 등 무려 10개국이 넘는 지역에서 동시다발 투자를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동유럽 자동차 생산기지를 싹쓸이하며 진군나팔을 불었다.
폴란드는 동구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인구가 4000만명으로 내수시장도 제법 큰 편이었다. 유럽 한가운데 위치한 폴란드는 머지않아 EU에 가입할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관세 부담 없이 서유럽에 자동차를 수출할 수 있게 된다. 김우중은 폴란드를 거점으로 유럽시장 전체를 공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우 FSO는 그런 전략에 근거해 전격적으로 인수가 추진되었다. 대우가 인수할 무렵 FSO는 폴란드 유일의 승용차 생산공장으로서 연산 30만대 규모의 생산라인과 모든 부품에 대한 일괄 공급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대우가 GM을 제치고 폴란드 자동차공장을 차지한 일은 온 세계 자동차회사들을 경악게 했다. GM은 수지를 맞추려고 기존 인력의 30%만 고용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와 달리 대우는 해고는 일절 없는 대신 오히려 생산을 늘려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김우중과 존 스미스 GM 회장은 2년 뒤 우크라이나 자동차회사 인수에서 다시 맞붙지만 김우중은 또 한 번 완승한다. 김우중은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강대국이 약소국 시장에서 이익만 챙겨 나오는 식민주의적 투자 유형이 바뀌어야 합니다. 현지에서 곧바로 자금을 조달하고 기술 개발을 추진하면서 기업의 현지화를 꾀해야 합니다. 돈벌이보다 기업 운영이 먼저라는 인식을 현지인들에게 심어주고 실질적으로도 그 나라 국민들에게 이득이 돼야 기업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지 정부로부터 전폭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까닭은 대우의 철저한 현지화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현지의 관습과 실정에 맞는 사업을 추진해 고용창출·수출증대·경영 노하우 및 기술이전 등 그들 나라의 경제에 철저히 기여하는 대우의 윈윈 전략은 이들 국가들이 대우를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그 무렵 극심한 무력화에 빠져 있던 미국 자동차업계는 약진을 거듭하는 대우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며, 이것이 뒷날 대우 몰락의 화근이 되지는 않았을까 한다. 1초 경영, 동유럽 정부지도자들과 담판 천부적인 금융전문가에다 뛰어난 국제 외판원이었던 김우중은 현지 정부지도자와 적극적인 협상으로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자신의 사업 계획과 국가원수의 요구사항을 멋지게 연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우는 해외사업에서 입찰로 프로젝트를 수주한 일이 없다. 대우의 해외사업 파트너는 각국 대통령과 수반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우는 그 나라의 경제개발계획을 세워주고 지원하는 형식으로 사업에 참여했다. 이런 방식의 해외사업은 김우중만이 해낼 수 있는 역량이었다. 현지 정부지도자와 직접 만나는 방식은 정보 축적이나 상대의 요구를 꿰뚫어보는 데 매우 쓸모가 있었다. 이 때문에 김우중은 대부분 해외시장에 진출할 때, 그 국가 지도자와의 담판으로 협상을 체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현장을 직접 지휘하는 김우중의 리더십은 그룹 총수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자동차공장을 인수할 때에도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김우중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GM 협상 대표는 디트로이트 본사에 대한 보고와 지침 하달 등 의사소통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이처럼 김우중이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1초 경영’이라 부르기도 했다. 협상 자리에는 으레 술이 준비되곤 했는데, 김우중은 협상 중에는 올바른 판단을 위해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미리 위스키 병에 보리차를 담아 갔다. 상대는 김우중이 마시는 것이 위스키가 아니라 보리차라는 사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 자동차공장 협상과정 때 김우중이 따낸 조건들을 살펴보면 ‘세계경영’ 정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기계장치·자동차 부품 무관세 통관, 법인세·소득세 면제, 공장용지 무료 제공, 경쟁차종 수입관세 대폭 상향 조정, 자금융통에 정부 지급보증, 기타 도로·통신 지원 등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들을 일일이 법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내각 강령’을 만들도록 했다. 이른바 ‘대우 특별법’이다. 대우가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문서에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카리모프의 특별서명이 붙어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대우의 프로젝트는 대통령 선거공약 사업이 되었고, 대우 광고에 카리모프 대통령이 무료로 출연했다. 대우인들은 자유로이 공항을 드나들었으며, 필요하면 어느 때고 정부 각료와 면담할 수 있었다. 대우가 진출한 나라들은 몇천, 몇만 명 고용을 약속하고 생산량 50%를 수출하여 외화를 가득 채워주겠다는 대우의 약속에 이런 특혜를 안겨주었다. 적어도 이들 국가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는 대우가 독보적이었다. 한국은 잘 모르지만 ‘대우 왕국’이라는 말은 심심찮게 돌았다. 협상을 마친 뒤에도 김우중은 각국 정상들과 무척 긴밀한 친분관계를 이어갔다. 대우가 발을 들인 나라의 지도자들은 김우중을 인간적으로 아주 높이 평가하며 측근처럼 믿었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 정상이 참석하는 만찬장에서 만델라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업인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김우중 회장님?” 만델라는 김우중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었다. 대통령과 정부요인 그리고 기업인들은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만델라는 한국 기업인들 가운데 남아공을 최초로 방문한 김우중과 대우를 특별히 기억했다. 세계경영과 한국의 미래
세계경영의 눈부신 성과는 김우중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세계경영의 결실인 해외 거점은 1993년 끝무렵 185곳에서 1998년 말 396곳의 현지법인을 포함해 모두 589곳으로 늘어났다. 해외 고용 인력도 2만2000명에서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특히 미국은 대우 성장의 밑거름이 된 중요한 시장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대우는 미국에서 현지법인 32개와 연구소 3곳을 운영했다. 대우 아메리카의 지휘 아래 무역지사 15개, 건설지사 4개, 전자·통신지사 6개, 중공업·증권지사 각각 2개가 있었다. 1993년 9월, 중소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때 김우중은 말했다. “독일의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36개 사단을 무찌른 맹장입니다. 힌덴부르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주저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힌덴부르크는 독일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어려워지는 기업환경과 기업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고조될 때마다 저는 힌덴부르크를 떠올리곤 합니다. 지금은 모든 기업인들이 힌덴부르크의 용기와 신념으로 자신을 무장해, 다시 한 번 국가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자세가 절실한 때입니다.” 그즈음 김우중이 구상한 세계경영 종착지는 ‘전 세계 20개 국가에 대우그룹을 줄줄이 세워 상호 네트워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우 위성그룹들을 지구상에 그물 펼치듯 갖추어 ‘글로벌 회사 네트워크의 시스템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공장 고용 인력이 국내 인력 10만명을 넘어서면서 대우와 김우중은 세계적인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김우중은 “5000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외국인 수만 명, 특히 백인들을 고용한 적이 있는가”라며 그 의미를 강조했다. 그 무렵 대우의 매출액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12%에 육박하는 56조원이었다. 대우는 1998년 말 국내 40개 계열사와 396개 해외 현지법인을 거느린, 그 무렵 개발도상국 다국적기업 가운데 해외자산이 가장 많은 회사였다. 18조3000억원의 자본총계와 83조8000억원의 자산, 62조8000억원의 국내 매출을 올린 굴지 대기업이었다. 나라를 위한 부실기업 회생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면서부터 대우는 부실기업으로 방치된 정부 투자기관을 떠맡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정부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김우중의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대우는 벽돌 한 장 쌓지 않고 기업을 일구었다’며 비난이 섞인 뼈 있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 기계공장으로 출발했던 국영기업 한국기계는 1968년 신진자동차가 인수했으나 다품종 소량 생산에 따른 원가부담 가중, 수주물량 부족, 디젤엔진 공장 건설에 따른 막대한 자금 부담으로 1975년에 이르러 산업은행 관리회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부는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한국기계를 다시 인수할 민간업체를 찾았고, 그 결과 김우중의 대우실업이 적격업체로 떠올랐다. 한편 중화학공업 본격 진출과 기계공업 개척이라는 과제에 골몰해 있던 김우중은 1976년 2월 한국기계를 인수해 대우중공업을 설립한다.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던 한국기계를 대우는 오직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꾸었다. 그 무렵 김우중은 이렇게 말했다. “흔히 기계공업이나 중화학공업은 우리나라 같은 개발도상국가의 기업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산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일찍이 독일이나 일본은 먼저 패배적이며 퇴영적인 사고와 자세를 극복하고 국가의 인력과 기술, 나아가 경제 여건에 맞는 중화학공업 개발전략을 마련해갔지요. 그 결과 오늘날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K200장갑차는 대우중공업이 만든 국내 최초의 보병장갑차이다. 1984년 최초로 개발돼 지금까지 2000대 넘게 제작되었으며, 1991년부터 말레이시아 수출이 추진되었다. 영국·터키 등 해외 경쟁기업의 방해도 집요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대우의 것이었다.
또한 김우중은 준공이 되지 않아 폐허더미로 변해가고 있는 국가 기간산업체 옥포조선소를 조선공사로부터 인수해 대우조선을 세웠다. 극심한 노사분규와 장기간의 조선업 불황 속에서 대우조선은 극한의 상황을 맞았다. 1989년 김우중 회장이 그룹 총수 자리를 잠시 내려놓고 옥포에 머물며 경영혁신에 나섰다. 그는 날마다 현장 구석구석을 자전거를 타고 순회했다. 모든 사원과 대화를 나누며 설득하고, 밤에는 사원 집과 기숙사를 찾아다니며 회사의 위기와 회생 방안을 일대일로 설명하는 초인적 노력을 이어나갔다. 마침내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서 회생의 꿈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옥포조선소는 아직 준공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우는 선박 수주에 나서, 가장 어렵다는 화학제품운반선 2척을 노르웨이 선사로부터 수주했다. 남들이 불가능을 말할 때 최고를 생각하는 발상, 이것이 바로 대우정신이었다. 이어서 김우중은 ‘희망 90S’라는 이름으로 대우조선의 개혁을 천명한다. 과감한 교육투자와 다양한 경영혁신 기법 보급, 현장중심 생산방법 도입과 제도개선 및 사무혁신을 통한 낭비요소 제거, 조직 간소화 등으로 실질적인 경영체계를 세워나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대우조선해양은 세계 최우수 조선기업으로 거듭 태어난다. 세계로 세계로 ‘킴기즈 칸’
1983년에는 대한전선 가전 부문을 인수하여 대우전자를 설립했다. 대우전자는 대우자동차와 함께 세계경영의 두 바퀴 가운데 하나였다. ‘신뢰받는 품질, 세계를 무대로’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적극적인 수출에 나선 대우전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인 생산 및 판매 현지화에 나섰다. 또한 고객지향·제품지향·문화지향 경영혁신운동이었던 ‘탱크주의’를 도입했다. 탱크주의는 대우전자 고유의 기업문화 혁신운동으로 자리 잡으며 일반인들에게 대우전자 하면 탱크주의를 떠올릴 정도로 뿌리를 내린다. 공기방울세탁기·임팩트TV·다이아몬드 헤드 VCR·입체냉장고 등 수많은 탱크주의 제품의 대성공으로 대우전자는 한국 시장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전자제품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1995년에는 22개 나라에서 33개 제품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전체 가전제품 수출의 38.8%가 대우 제품으로 글로벌 생산과 판매 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대우의 지속적인 급성장은 행운도 기적도 아니었다. 오직 김우중을 비롯한 대우인의 도전정신이 이끌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1980년대 들어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발 빠르게 홍콩을 경유한 중국과의 무역을 늘려가던 대우는 1987년 국내기업 중 최초로 중국 현지에 냉장고 합작회사를 설립해 중·소형 냉장고를 생산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심장부 베이징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더욱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에 나섰다. 국교수립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아무런 연고도 정보도 없이 과감한 진출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그들이 저마다 시장개방에 나서자 북한도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대우가 들어갔다. 대우는 평양에서 상품전시회를 열고 대표단은 김일성과 면담했다. 이어서 북한 핵심인사가 한국의 산업시설들을 견학하고 돌아간 뒤 대우는 마침내 북한에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최초 남북 합작사업을 시작했다.
대우는 리비아가 한국과 아직 정식 국교를 맺지 않았을 때부터 리비아에서 여러 대규모 공사들을 진행했다. 리비아 ‘부스타 비행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연이어 모랫바람이 밀려왔다. 모래알이 씹혀 밥을 먹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날씨는 날마다 5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의 연속, 그 속에서 그나마 서늘한 밤에 불을 밝혀 비행장을 지었다. 부스타 비행장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기간을 3개월이나 단축하며 완공되었다. 그때 현장을 찾은 카다피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렇게 정중히 부탁했다. “이와 똑같은 비행장을 하나 더 건설해 주시오!” 두 번째 비행장을 짓는 동안 카다피의 방문이 잦아졌다. 그는 현장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탁구를 치며 직접 사인한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리비아는 한국 정부와 정식 국교를 맺었다.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와 라호르를 잇는 고속도로는 거의 모든 구간이 험준했다. “과연 도로를 낼 수 있을까?” 처음 공사구간을 조사하러 온 실무자들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건설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계 건설 사상 최대 규모인 이 공사는 단일 도로 건설 규모에서도 최대였다. 파키스탄을 포함한 서남아시아 최초의 고속도로가 될 이 공사를 대우는 국내 최초로 턴키베이스로 수주했다. 공사 금액만 추가공사를 합쳐 무려 11억6000만달러, 우리 돈 1조3000억원이었다. 공사를 수주한 뒤에도 끈질긴 협상과 이해관계의 조정이 뒤따랐다. 밤낮을 잊은 공사 끝에 1997년 11월 마침내 357㎞에 이르는 파키스탄 모터웨이가 준공되었고, 샤리프 수상이 전 구간을 완주하는 준공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졌다. 1996년 7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 우즈베키스탄 공장 준공식 때,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김우중을 칭기즈 칸에 비유해 ‘킴기즈 칸’이라 불렀다. 통한의 IMF, 대우는 타살인가 자살인가 1997년 11월 국민들에게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IMF 외환 관리체제 도입은 기업과 경제활동에 대한 기존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국가신용등급은 갑자기 여섯 단계나 떨어지고, 온 세계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부채비율 200% 기준이 설정되면서 사실상 신규 차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에만 무려 8조5000억원 환차손을 입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대우에 대해 채권유예나 구제금융 지원은커녕 매몰차게 외면했다. 김우중은 처연할 정도로 고군분투했지만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채권 금융기관들이 부도처리 위협으로 압박하는 동안 밤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채권회수를 유예시키던 날들이 6개월 넘게 흐르고 난 뒤였다. 세계시장으로 승승장구 진군나팔을 불던 김우중의 세계경영 시계는 1999년 8월 26일 대우의 워크아웃 결정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멈춰 섰다.
금융감독원은 1999년 12월 9일 대우 특별감리반을 출범한 뒤 2000년 9월 15일 분식회계 등으로 대우 임직원 등 52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에 따라 대검 중수부가 대우 관계자들을 소환조사했으며, 2001년 2월 3일 대우 분식회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대우 관계자 등 34명을 기소하고 3월 6일 김우중 체포영장도 발부했다. 2001년 7월 2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대우 사태 관련 첫 공판에서 대우 관계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외화유출 등에 대해 23조원의 추징금도 별도로 선고받았다. 41조원의 분식회계와 10조원의 불법대출로 국민과 국가경제의 등골을 휘게 만든 장본인, 수많은 대우그룹 임직원의 밥줄을 끊은 무책임한 경영자, 24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거금을 해외로 빼돌려 법의 심판을 피해 호화로운 도피행각을 벌여온 파렴치범 등 김우중에 대한 여과되지도 않고 과장 증폭된,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비판 여론은 거세었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희생양이냐 부실경영이냐 ‘날개 꺾인 세계 경영’ 엇갈린 평가 ‘세계경영’ 선봉장 김우중 (하)
▲ 출장 중 기내에서의 김우중 회장.
미국의 경제잡지 ‘포춘’은 대우의 해체를 이렇게 보도했다. “대우의 해체는 단순히 김우중 회장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주식회사의 해체이며 또한 한국에서의 정치와 기업의 협력자 관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DJ와 김우중이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대 무렵이었다. 김우중이 DJ를 지원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김우중은 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경제 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을 찾는다는 말이 떠돌면서였다. 게다가 IMF 때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우중이 제기한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은 사면초가에 빠진 새내기 정권인 DJ 정부를 구해내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둘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DJ는 대통령 후보 때 IMF와 재협상 이야기를 꺼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경제관료들 이야기만 듣지 않고 전경련 회장 김우중 이야기를 함께 듣고 판단하려고 했다. ‘경제 대통령’을 하라고 말할 정도로 김우중의 견해에 큰 믿음을 보냈다. 전무후무한 IMF의 강경한 태도를 곧이곧대로 따르려 하지 않고, 전경련 회장 김우중을 국무회의에 참석토록 하여 토론도 하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악연이 되었다. 김우중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의견을 개진하면서 경제부 장관을 비롯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감독위원장 등 각료들을 탁상공론 운운하며 거칠게 책망했던 것이다. IMF에 대한 처방 등 정책 혼선으로 관료들은 당황했다. 김우중의 의견이 대통령을 통해서 관료들에게 간접 전달되기 때문에 곤혹을 치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원인이 김우중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김우중은 경제정책 당국자들의 공적(公敵)이 되었고 그들은 김우중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가졌다. 김우중이 경제 각료들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현실경제에 관한 한 자신에 찬 김우중 평소의 강경한 소신에 지나지 않았다. 대우그룹 해체의 주역들 대우그룹 해체에 관여했던 고위관료는 당시 강봉균 재정경제부장관, 이헌재 금감위원장,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채권단에서는 이근영 산업은행 총재이다.
대우 몰락 과정에서 생긴 악연 가운데 최고는 ‘김우중-이헌재’ 관계가 아닐 수 없다. 1982년 무렵 둘의 관계는 그룹 총수와 그를 보좌하는 비서실 상무였다. 게다가 김우중은 이헌재의 경기고 6년 선배였다. 한솥밥을 먹던 두 사람은 정확히 16년이 흐른 1998년 전경련 회장과 금융감독위원장으로 다시 만나, 이헌재는 옛 상관의 재산과 직함을 내놓게 하는 악역을 맡는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1998년부터 대우 측이 수차례 요청한 무역금융지원을 묵살해 수출을 주력으로 삼던 대우그룹 해체를 가속화했다. 이와 관련해 김우중은 회고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가 ‘수출지원금융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문을 열자 강봉균 수석이 ‘세상이 바뀌었는데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느냐’며 딴전을 피웠다. 그래서 나는 ‘강 수석, 당신 뭣하러 그 자리에 앉아 있나’며 호통을 쳤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12개 대우그룹 계열사로부터 워크아웃 신청서를 받아낸 주인공이었다. 이 수석은 ‘너희(대우그룹) 다 죽는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험한 꼴을 볼 것’이라 윽박지르며 워크아웃 신청서 제출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청서 한 통으로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30년’은 막을 내리고 만다. 이근영 당시 산업은행 총재는 대우그룹 해체를 주도한 채권단 대표였다. 게다가 한때는 ‘김우중의 출국을 권유한 장본인’이라는 의혹도 받았다. 김우중의 측근들은 대우그룹 해체가 진행되던 1999년 여름 동안 정부 고위관료와 채권단 관계자들로부터 여러 번 외유를 권유받았다고 밝혔다. 이근영은 이런 사실을 모두 부인한다. 김우중의 해외 망명생활
김우중은 1999년 10월 20일 중국을 방문하고 종적을 감춘 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는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일본으로 출국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그동안 해외에서의 김우중 거취 가운데 밝혀진 것은 다음과 같다. 김우중은 1999년 10월 21일 일본으로 출국하여 도피 아닌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4월부터 12월까지 7차례 홍콩을 방문했으며, 2000년 10월 프랑스 니스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월간중앙’ 취재로 확인되었다. 2002년 10월 독일에서 장협착증 수술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었고, 2002년 12월 ‘문화일보’ 주선으로 태국에서 도올 김용옥과 인터뷰했다. 2002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방콕으로 이동, 같은 해 12월 1일 로마로 출국했다. 2003년 여름 태국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과 만나 3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2003년 7월 베트남을 방문했고, 7월 15일 베트남 정부관계자를 만난 뒤 다음 날 독일로 출국했다. 2004년 2월 스페인 교포의 제보로 아내 정희자·아들 선용과 함께 독일 비스바덴에 거주하는 것이 확인됐다. 2004년 가을 베트남에서 고위관료들을 만나 베트남 하노이 신도시 건설공사와 관련된 협의를 한 것으로 김우중 측근이 확인했다. 2004년 11월 중국 베이징 캠핀스키호텔 16층 특별객실에 투숙하며 중국 고위관료들을 수시로 면담했다. 2004년 12월 25일부터 보름간 태국 방콕을 방문, 칸타나블 보난자 골프장에서 지인들과 골프를 친 것으로 SBS가 확인했다. 2005년 2월 초 태국 방콕에 머물고 있음을 ‘일요신문’이 확인했고, 2005년 4월 베트남 하노이 한 호텔에서 교민이 김우중을 목격했다. 2005년 6월 14일 새벽 베트남에서 귀국했다.
2002년부터는 베트남 정부의 경제고문을 맡았다.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는 신도시 조성 사업에 본격적으로 관여했고, 골프장과 호텔사업 등에도 깊숙이 개입해 자문을 해왔다는 게 정설이다. 김우중은 5년8개월 동안 프랑스, 베트남 말고도 독일, 수단 등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국빈 대우를 받았으며 특히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정부 고위인사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머물던 하노이의 호텔은 그를 위한 경호가 이루어졌고, 장기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그의 집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하노이 대우호텔 옆 용지에 추진 중인 65층 주상복합건물 건설과 관련해 김우중의 차남 선용, 측근 김주성 킴코 회장, 프랑스 로르그룹 등이 김우중의 못다 핀 꿈을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었다. 대우그룹이 ‘잘나가던’ 무렵 베트남 총괄 역을 맡았던 김주성 회장은 현지에서 컨설팅업체를 운영하며 김우중을 측면 지원해왔다는 것이다. 그의 대우정신과 우국충정 IMF 때 김대중 정부가 구조조정을 핑계로 외국에 자산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국부(國富)의 손실을 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업체는 물론이고 제일은행·한미은행·외환은행 등 금융기관들도 모조리 헐값에 팔아치웠다. 그때는 유야무야 넘어갔을지 모르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전문가들 대부분은 너무 서둘러 싸게 팔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국부 해외유출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이 기업체와 금융기관을 그렇게 싸게 판 것은 외국 기업과 기관들로서는 큰 이익이다. 그들은 그때 한국에 구조조정을 강요하여, 좋은 매물이 싸게 나오는 대로 재빨리 사들이면서 한국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이처럼 IMF 관리체제를 비판하고 선진국들의 의도를 의심해 온 김우중은 반미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이 대우그룹 해체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김우중은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강조한다. 대우는 본디 미국과 관계가 좋았으며, 미국 기업들과 합작 또한 국내 기업 가운데 대우가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미국 유수 대학을 지원하거나 대우 직원들을 연수보내기도 했다. 대우자동차가 GM과 합작을 오래하면서 서로 의견이 엇갈려 싸우기도 하고 갈라서기도 했지만, 그들은 절대 김우중을 반미주의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저 같은 장사꾼일 뿐이며, 자신들과 일어난 갈등은 서로 상업적 이익 추구에 따른 불가결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키신저나 헤이그 같은 쟁쟁한 사람들이 대우의 고문을 오래 맡아오기도 했다.
김우중은 미국을 비롯, 세계 곳곳에 두터운 인맥을 쌓아왔다. 그는 세계경제포럼, 시어스월드트레이드, 유나이티드 테크놀러지, 중국개발은행,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보스턴대학, 미시간대 등에서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또 국제경영리더협회 상하이지부장을 지냈고 우크라이나 외국자본협의회, 아시아태평양 리더십협회 회원 등을 역임했다. 그 무렵 세계경제포럼 자문위원 50명 가운데 김우중만이 아시아인이었다. 한편 김우중은 하버드 경영대 이사직도 지냈으며 하버드 특강도 했다. 지금껏 하버드에서 특강한 한국 인사들은 많지만, 대학 측이 한국 기업을 성공사례로 케이스 스터디를 한 것은 김우중의 이른바 ‘글로벌 경영’이 처음이다. 김우중이 정말 반미주의자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김우중은 미국과 관계를 잘 이어 나가야 한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아! 김우중의 세계경영
김우중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정부 측에서 자신을 체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고 말한다. 정부의 뜻에 따라 나갔는데 그런 일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도 아예 집을 구해 주소를 정해 놓고 살았다. 해외도피 기간 중에 김우중이 주로 머문 곳은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적극적인 외국자본 유치를 통한 수출 주도형 산업기반 구축과 국토개발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김우중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시아권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높은 연 7%대의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때문에 베트남 지도부의 김우중에 대한 대접은 각별하며, 특히 도이 무어이 전 당서기장, 보 반 끼엣 전 총리 등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계 원로들은 김우중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베트남 당서기가 한국 대사를 불러서 ‘우리는 베트남을 도와준 김우중 회장을 정말 은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신네 정부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우리는 안 듣는다. 우리가 김 회장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국에 보고하라’고 일축했다 한다.
해외 망명생활 동안 김우중은 몸보다도 마음이 무척 아팠다. 어처구니없이 모든 것을 잃고 말았으나 그래도 평생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 남자로 태어나서 여한이 없을 만큼 할 것 다 해봤기에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한 바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데 자신은 흔적이라도 남겼으니 말이다. 죽어라 돈만 벌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성공하고 그토록 사업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런 기회를 준 하늘과 박정희 대통령께 감사한다고 했다. 다만 김우중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대우 직원들의 가족이다. 직원들이야 김우중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아니까 이해할지 모르나, 그 가족들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우가 아닌 삼성이나 현대 같은 다른 회사에 들어갔으면 그렇게 비참하게 직장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으로 그는 몹시 괴롭다고 말했다. 그 밖에 대우 해체로 피해를 입은 국내외 거래처 사람들, 투자자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고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김우중은 시대를 함께한 젊은이들에게도 거듭 고개를 숙인다. 대우의 세계 도전이 불행하게도 한국 근대 기업사에 하나의 시행착오로 남아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 또한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김우중이 대우 가족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이런 진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소명처럼 추구했던 창조, 도전, 희생의 여정이 이 순간 못내 가슴에 맺혀 옵니다. 대우가 살아온 지난 세월에는 국가와 명예와 미래를 지향하는 꿈이 항상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웠던 여정은 오늘에 이르러 국가 경제의 숙제로 남게 되었으며 우리의 명예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했던 꿈과 이상 또한 이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되어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되었습니다. 구조조정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빚어진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초래된 경영상의 판단오류는 지금도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조차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우의 밝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나온 어두운 과거는 저 스스로 짊어질 생각입니다.… 새로 선임될 유능한 경영진들과 힘을 합쳐 대우를 희망 찬 회사로 재탄생시켜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대우와 모든 대우가족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대우의 미래를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10여년. 문제기업이라고 매도되었던 대우의 주요 계열사들은 오늘날 최우량기업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모기업인 대우인터내셔널은 2011년 포스코에 매각되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잠재력이 큰 우량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항공기·탱크·장갑차·전철·건설 중장비·발전설비 제조 등 방산·중공업 분야에서 우뚝 섰던 우량기업 대우중공업은 ‘두산인프라코어’란 이름으로 주력 기업이 되었고, 대우자동차는 GM의 효자기업이 되었으며 아예 GM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확고한 동남아 근거지를 마련했다. 김우중이 1990년 관리혁명을 선포하고 회생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대우조선해양은 비록 매각대상으로 오르내리긴 하지만 선박 수주물량이나 제조기술에서 이미 세계적 조선기업으로 성장해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우건설 또한 산업은행 관리 아래 있지만 최우량 건설사로서 초고층빌딩·교량·터널·플랜트·주택 등 각종 공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시공 능력이나 품질·해외플랜트사업 등 이제까지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1997년 김우중은 역동적인 리더십과 대우자동차의 중부유럽 투자로 중부유럽 오토모티브(CEAR) 경영인상을 수상했다. 그 수상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우중 회장의 지도 아래 진행된 과감한 중부유럽 자동차 투자는 경쟁자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만들 정도로 지역 시장에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그는 1997년 한 해 동안 233일을 해외에서 보냈는데, 23번의 비즈니스 여행에 42개국을 순방했다.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만 775시간이며, 무려 52만킬로미터를 옮겨 다녔다. 폴란드의 자동차 시장에서 대우는 동종 분야 경쟁업체인 피아트사와 경쟁하여 26%의 시장을 개척했다. 경쟁사인 피아트의 시장점유율은 35%였다. 1997년 한 해만 김우중은 동유럽(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체코·불가리아)을 18번 방문했고,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러시아·벨라루스)를 16번 방문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1998년 6월 10일 기사에서 김우중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지구촌을 뛰어다니는 대우그룹의 총수이자,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2005년 3월 7일자 기사에서, 김우중과 프랑스 정계와의 친분을 보도했다. 그 시작은 1985년 로랭 지역 의회 의장인 제라르 롱귀와 만나면서였다. 1986년 김우중은 서울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총리와 만나 곧 두터운 친분을 쌓았으며, 시라크가 아시아를 방문할 때나 김우중이 프랑스에 머물 때 계속해서 만났다. 1987년 4월 2일 김우중과 그의 아내와 두 자녀는 프랑스 귀화 인정서를 받았다. 이 인정서에는 사회부 장관 필리프 세귄이 직접 서명했다. 귀화 인정 명분은 프랑스에 대한 특별 공로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 공로가 뚜렷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1987년 대우가 전자오븐 공장을 프랑스에 세운 것이리라 짐작되고 있다. 1996년 5월 28일에는 알랭 쥐페 총리의 이름으로 명예 지역 지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는 김우중을 보호하고 예우했으며, 김우중에 대한 한국 정부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리베라시옹’은 또 프랑스 철도차량업체 ‘로르’의 회장 로베르 로르와 김우중의 관계를 확인했다. 해외 도피 중에도 김우중은 로르사가 한국에 지하철 차량을 판매할 수 있게끔 주선해주고 한국 회사와 최종조립 협력관계를 맺는 데 조언을 해주었다. 로르 회장은 김우중에 대해 ‘오랫동안 한국에서 훌륭한 기업가로 여겨졌던 그가 불합리하고 지나치게 매도당하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말했다고 한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오랜 도피생활 끝에 귀국한 김우중의 영욕에 찬 삶을 소개하는 기사를 경제 1개 면에 걸쳐 실었다. ‘그가 사업과정에서 정부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의 활동은 한국 경제발전과 궤를 같이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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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며 무리한 요구로 국제 투기꾼들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쓰고 국제적인 명성을 잃었다. 후에 세계 어느 국가들의 외환사태에서도 IMF의 말을 듣는 나라는 없다. 지금도.
한마디로 세계 금융시장의 자본이 한국을 날로 뜯어 먹은 것이고 그 앞잡이가 IMF다. 그리고 무식한 정치꾼들이 자기 명성만 앞세워 뭐든 다 들어줬다. 한국기업을 놓고 "골라 골라" 싸구려 덤핑을 친거나 마찬가지다. 수십 수백배의 이익을 챙겼고 지금도 한국의 상장 주식 보유가 30% 수준이다. IMF 이전에 10% 수준이 거저 들어 먹은 거다.
앞으로 아무리 국가가 경제 위기가 와도 재벌은 절대 안 망한다. 이미 당해봐서 안다. 국가의 부실기업은 절대 손 안댄다. 사내 유보금이 산더미 같아도 절대 돈 안 풀것이다.
현재 한국의 재벌기업이라 이름 붙은 회사들은 이미 은행권에서 좌지우지하는 입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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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