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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 지났습니다. 올해는 장마도 좀 이른 편 아닌가요? 특히 중부지방은 7월 초나 중순에 걸쳐 찾아왔는데 6월 하순에 시작되었습니다. 하기야 이왕지사 치를 것이면 빨리 지나가는 것이 낫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하잖아요. 근데 장마 지났다고 안심하면 큰일입니다. 그 뒤에도 얼마든지 폭우를 당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작년 수마를 경험한 주민들의 걱정이 다 해결된 것도 아닌데 다시 장마를 맞는다면 두려움까지 안아야 합니다. 큰 탈이 없기를 바라지만 알 수 없는 일,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이 여름 별 일 없이 지나가기를 빕니다.
정화수가 될 리는 없겠고 말이 좋아 ‘처리수’랍니다. 얼마나 처리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걱정뿐만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 많은 바닷물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합니다. ‘새 발의 피’ 정도이기를 비는 거죠. 우리 세대야 크게 걱정하겠습니까? 단지 우리 자손들이 어찌 되려나 그게 문제지요. 물론 우리들도 곱게 죽기를 바랍니다.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기이한 모습으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런 공포를 안고 있으면서도 원전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뭔 일인지. 앞뒤가 안 맞는 일이 한둘도 아니겠지만 정말 세상 요지경입니다. ‘요렇게 지랄스러운 경우’라는 뜻인가요? 거참!!
7월입니다. 옛날 생각하며 신나는 여름을 꿈꿉니다. 오염되기 전에 바닷물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합니다. ㅎㅎ 또 한달 건강하게 그리고 신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
2023년 7월 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행전 17 : 26 - 27)
<귀공자>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가? 사람의 도리로는 불가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불법이고 윤리 도덕적으로 비난받습니다. 그런 영화도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복제인간을 생산합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의 장기를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나입니다. 자신의 장기를 주고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두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제인간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생명의 가치를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복사해서 만든다는 자체가 불법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사람이 사람인 것은 육체만 가져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정신과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습니다. 복제인간이라면 이것까지 복제가 될까요?
‘마르코’라는 청년이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며 살고 있습니다. 막대한 수술비를 벌어야 하는데 가진 것은 몸뿐입니다. 그러니 싸움 실력을 쌓아 투전에 뛰어듭니다. 그래야 그나마 목돈을 빨리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자본도 기댈 곳도 없는 청년이 큰돈을 빠른 시간 내에 벌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습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투기해서 운이 맞는 일입니다. 실력이 있다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마저 그리 만족스런 결과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돈 가지고 이번에는 투전판에 겁니다. 모가 되든 도가 되든 한방에 끝내보자는 것이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마도 백전백패일 것입니다. 어렵게 번 것마저 날립니다.
그의 생활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습니다.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다니는 그럴싸한 장년의 남성입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나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갈 것이라 전합니다. 도대체 누구냐고 끈질기게 물어도 대답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친구’ 친구라니, 도무지 친구하고 싶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지요. 물론 친부를 찾으려 이런저런 방법으로 알아보고는 있습니다. 코피노로 차별받고 있는 마르코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나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다. 사랑으로 얻은 자식이었다면 혹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가 하룻밤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나타날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몇 신사들이 나타나서는 당장 짐 챙겨 떠나자고 찾아옵니다. 어머니의 간병인까지 대동하였으니 어머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부랴부랴 따라나섭니다. 그렇게 한국에 왔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아버지가 찾는다 하여 아버지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인적도 드문 숲길로 들어섭니다. 더구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영 달라집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싶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필리핀에서 친구라고 나타났던 신사가 쫓아옵니다. 갑자기 총질을 하더니 동승하고 있던 사람들을 살해합니다. 안 되겠다 싶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실력이 대단하지요. 기막히게 쫓아옵니다. 어디로 가든 나타납니다.
마르코를 쫓아다니는 무리가 셋으로 정리됩니다. 본래의 목적을 가진 큰 무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입니다. 마르코를 인도하려는 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마르코를 소개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브로커가 친구라는 자입니다. 사실 그 사이에서 중간 납치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라는 사람과 협업하는 듯하다 혼자 차지하려 합니다. 결과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아무튼 이 세 그룹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살인파티’를 합니다. 정작 마르코의 심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그의 큰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아비를 살려서 자기 의도대로 유언장을 만들 목적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입니다. 돈을 차지하려는 싸움입니다.
먼저 인도하는 팀이 박살납니다. 하기야 한국에 도착하고 나면 필요없는 자들입니다. 할 일 다한 것이고 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자 이제 의뢰인과 중개업자 사이에 거액이 어디로 가느냐 달려있습니다. 천만 달러, 환산만 하는데도 억 소리 나지요. 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마르코입니다. 마르코를 차지하는 자가 돈도 차지하게 됩니다. 죽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쪽은 그 생명을 차지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그 생명을 담보로 돈을 차지하려는 싸움입니다. 처절한 싸움이 깊은 산장에서 벌어집니다. 붉은 피로 낭자해집니다. 마르코는 중간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합니다. 주먹이 아무리 강해도 총 앞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고 나면 느낍니다. 기막힌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 하나 볼만한 이야기일 뿐 시원한 것도 없고 통쾌한 것도 없고 볼만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배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영화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다지 즐겁지 않은 피 튀기는 장면만 등장하고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에 감동이 오는 것도 아니고, 참 시간 낭비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지내고 나왔습니다. 하기야 그런 대로 좋아하는 관객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냥 개인의 생각이지요. 영화 ‘귀공자’(The Childe)를 보았습니다. 사실 그 날 선택할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ㅋㅋ
누가 심판을 받나요?
영화 속에서도 보았지만 군 생활 속에서는 일상화가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야간 보초를 나간다든지 내무반 안에서 불침번을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암호입니다. 이것은 우리 측 곧 아군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약속이고 비밀입니다. 이것을 적군이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어떤 곳을 들어갈 때나 어느 곳을 지나갈 때나 야간에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는 이 암호로 그 여부가 결정됩니다. 알면 통과할 것이요, 모르면 저지를 당하고 최전방이라면 총탄 세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측 암호를 모른다는 것은 적군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쪽에서 뭐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는 것은 수상한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쩌겠습니까? 저쪽에서 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쏴야지요.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뜸들일 시간이 없습니다. 암호를 알고 모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이 암호는 곧 비밀이고 알아야 할 사람이 있고 알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습니다. 아군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고 적군이라면 결코 알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보니까 역시 암호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밀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아서는 안 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잘 아는 대로 마 13장은 예수님이 특히 천국에 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밀이랍니다. 누구나 다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알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암호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첫째 누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는 것과 둘째 알아야 할 사람은 이 암호 같은 비유를 쉽게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도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36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제자들만의 능력으로는 비유를 풀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 백성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면서 경고를 하셨지요. 그것은 경고이면서 언약입니다. 지키면 복이고 영생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저주요 죽음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그 언약을 지키지 않는 것이 곧 죄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떠나셨는데 영생이 있을 수 없지요.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언약을 배반하면 하나님께로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세상에 다시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세상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맡아 다스리던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넘겨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구원하시려 계획하셨고 실제로 역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역사하심이 다시 마귀에게 노출이 된다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어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 48 : 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하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계획하시고 또한 이루십니다. 예언하시고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천국이 비유로 선포될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알아서는 안 되는 백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이 알까 걱정하셨습니다. 사 6 : 8 - 10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들은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야 합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 말씀은 암호 즉 비유로 선포됩니다. 이 예언은 누가 와서 이룹니까?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대로, 예언대로 성취하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하나님은 약 700년 후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마 13 : 14 - 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자들은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을 설교할 때 8절 하나에 집착하는 것을 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명 받는 자의 자세가 이보다 좋은 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감동적이고 도전적이지요. 그러나 그 사명이 무엇이고 실제로 누가 와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눈은 감겼고 귀는 막혔고 마음은 닫힌 셈이지요. 다시 말해서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모르도록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아는 부분만 가지고 자기 것을 만들어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까봐 우려했던 그들이 누구입니까? 15절에 보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눈과 귀, 마음이 닫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라는 백성이 하나님께 완악하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다른 말로 ‘목이 곧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질타하실 때 많이 사용하신 말씀이지요. 신 9 :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를 지나며 그 백성의 완악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누차 말씀하신 것이 바로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함께 광야를 지나온 모세도 그러한 백성을 걱정하였습니다. 신 31 : 27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였어도 그러한대 하물며 모세가 없을 때는 오죽하겠는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자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백성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어디서 활동합니까? 세상은 이미 자기 손에 있는데 세상에서 요란을 피울 리가 없습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려고 하니 바로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악을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어디입니까? 구약시대에는 성전이고 오늘날은 교회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성도들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경계하셨습니다.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지막 때에는 모두가 미혹된답니다. 계 18 :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만국이 미혹되었다 하니 예외가 있겠습니까? 모두 마귀의 미혹에 빠진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완악한 백성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백성을 이끌고 가야 할 지도자들 곧 목자들이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소경으로 만듭니다. 사 29 : 9 - 10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 곧 천국에 관한 말씀은 봉한 책과도 같습니다. 봐도 모릅니다. 읽어도 모르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 오셨지만 그들은 계속 대적하며 방해하였습니다. 백성이 예수님께 가려해도 방해합니다. 그래서 꾸짖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 처음 오셨을 때 그러하였는데 다시 오실 때는 어떠할까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걱정하십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 경성해야지요. 히 6 : 7 - 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같은 땅인 듯한데 나오는 것이 다릅니다. 채소를 내는 자가 있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4 가지 밭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마음 밭이지요. 열매를 맺는 밭은 하나입니다. 눅 8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우리 또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천국 창고에 들어갈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완악하고 목이 곧으면 그런 복과는 상관없는 자들이 되겠지요. 잠 28 : 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을 마음이 강팍하다고도 표현합니다.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의 비밀을 알아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허락된 사람이 있고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신자와 불신자로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영접하면 무조건 천국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지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백성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들의 마음 역시 완악하고 강팍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또한 이 천국은 비밀이 됩니다. 읽어도 모르고 봐도 모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외워도 모르고 쓴다 해도 모릅니다. 그러면 정말 눈이 멀고 귀가 막힌 것입니까? 그게 아니고 비유로 기록되어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막 4 : 11 - 12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다시 말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죄 사함이 없는데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므로 비유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됩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막연히 ‘예수 믿으면 천국’이라고만 믿고 살겠습니까? 정말 젖먹이 수준입니다. 그래서야 어찌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젖먹이를 신부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자라지 않으면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예수님 다녀 가신지가 무려 2천 년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 속 터지실 것입니다. 우리 자식이 나이 20살이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 젖을 찾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속이 안 터지겠습니까? 속된 말로 환장할 것입니다.
비유를 모르니 성경은 마치 봉한 책이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봉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열릴 때가 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유가 풀릴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유가 풀린 것을 알면 우리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거나 강팍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둔해져서 깨닫지 못합니다. 하늘의 것을 말한들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의 것을 땅의 것으로 알고 전합니다. 요 3 :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흔한 예를 듭니다. 마 24 :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이 뜻을 모르니 정말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진다고 설교합니다. 그래서야 지구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런 곳에 예수님은 뭐하려 오신답니까? 앞뒤가 맞지 않지요. 이것이 바로 하늘의 것을 땅의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에게는 봉해져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자기가 맞다고 우깁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해져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비유를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의 앞뒤도 가리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만들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앞의 이사야에 기록해주신 말씀도 그 예입니다. 사 6 :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잘 아는 대로 예언서입니다. 여기 ‘나’는 바로 후에 ‘예수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여 보내시고자 하는 곳,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신 백성입니다. 가서 뭘 전하라고요? 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너희가 들어도 보아도 모를 것이다, 경고해주라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너희가 마귀에게 미혹되어 완악하고 강팍해져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뒤에 또 말씀하십니다. 사 58 : 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하나님 백성에게 무엇을 말해주라 하십니까? 그들의 허물과 죄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겔 2 : 3 - 4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불러 지시하시는 것은 당신 백성에게 가서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구약시대 사건에 불과합니까? 오늘 하나님 백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 안 되는 옛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좋겠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마지막 때에 만국이 미혹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계 18 : 23) 에이, 그럴 리가요? 하나님이 거짓 예언을 하십니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하나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먹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영생이 보장됩니다. 천국이 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거짓을 전하는데 거기 앉아서 그 말을 먹으면 스스로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불신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벧전 4 :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심판이 신자 불신자를 나누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신자는 우리 이야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들이기에 제외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과 관계가 생깁니다. 잘 아는 성구가 있습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알고 신앙하기를 바랍니다. 심판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서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완악하고 강팍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마 19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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