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4일 수요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마태오 13,1-9);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birds came and ate it u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다가 광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단한 여정을 겪으면서 도리어 이집트를 그리워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위하여 메추라기 떼를 양식으로 내주신다(제1독서).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지만 모든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길에 떨어진 것, 돌밭에 떨어진 것,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사월쯤 보리와 밀을 추수한 다음 시월까지 밭을 묵혀 두기 때문에 밭에 가시덤불이 일어날 만큼 잡초가 무성하기도 하고, 길이 나거나 돌밭이 되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씨 뿌리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점뿌림입니다. 적당한 간격으로 씨를 한곳에 하나나 두세 개를 모아서 넣고 땅을 일일이 덮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줄뿌림으로, 밭에 가볍게 선을 그리고 나서 씨를 일직선으로 쭉 뿌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흩뿌림으로, 씨앗을 어느 정도 손에 쥐고 걸어가면서 밭 전체에 뿌리는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 뿌린 방식은 세 번째인 흩뿌림입니다. 사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흩뿌림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시기에 참으로 적합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길바닥 같은 사람에게도, 돌밭 같은 사람에게도, 가시덤불 속 같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이에게 늘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은 어떠합니까? 특정한 사람만 꼭 집어서 사랑을 전하는 점뿌림의 방식은 아닙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만 만나려고 하는 줄뿌림의 방식은 아닌지요?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때로는 배신당하고 모멸당하며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은 배 위에서 뭍에 있는 군중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과 가라지, 겨자씨와 누룩 등의 비유로 하늘나라를 풀어서 말씀하신다. 배는 물결에 따라 좌우로, 앞뒤로 움직인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조용히 앉아서 배가 많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를 조금씩 젓곤 한다. 그리고 가끔 군중을 보고 예수님을 올려다본다. 나도 베드로와 함께 배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흔들리는 배에 앉은 나는 엄마 등에 업힌 어린아이처럼 편안해진다.
한편 예수님이 농부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농부의 삶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유로 들려주시는 예수님은 친절하신 분임이 틀림없다. 아래를 향해서 위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친절한 예수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싶다. 배에 오르신 그분의 모습과 하늘나라를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써서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배려를 자주 떠올리고 싶다. 그리하여 큰 바위 얼굴이신 그분을 나날이 더 닮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복음 속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기보다 땅의 비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씨가 떨어진 땅에 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같은 씨가 어디에 떨어지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하느님의 은총이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열매는 같지 않다. 하느님의 은총이 올바로 작용하려면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권능이 완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위를 높이는 인간의 구원에 인간의 협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내 마음은 돌과 같이 딱딱한가, 아니면 부드러운 살과 같은 마음인가? 내 마음의 쓰레기와 돌멩이를 주워내고 흙덩어리를 부수어서 주님 말씀의 씨앗이 깊이 뿌리내리게 하자.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자.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갑곶순교성지에서 생활할 때가 종종 떠올려지곤 합니다. 어제도 저녁식사 후 주교관 앞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놀다가 예전에 성지에서 키웠던 강아지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였는데, 어느 날 반갑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깜짝 놀란 꼬마아이가 뒤로 넘어져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뒤 어쩔 수 없이 강아지를 우리에 가두어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우리에 가뒀는데 잠시 뒤에 보면 우리 밖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담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 같아 곧바로 우리의 담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여전히 밖으로 나와 저를 긴장하게 만들더군요.
고민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높은 우리를 어떻게 뛰어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가둔 뒤, 어떻게 이 우리의 담을 뛰어넘는지 몰래 지켜보았지요.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데, 언제 우리 밖으로 나왔는지 제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강아지들은 우리의 담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쪽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우리의 담만 높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10m 이상의 높이로 담을 높여도 뒷문이 닫혀 있지 않는 한 계속해서 우리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이때의 일이 생각나면서, 나의 생활 안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것만 먼저 해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해 봅니다. 본질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것을 행해도 문제는 풀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쉽고 편한 것만을 하려 합니다. 또한 내게 이득이 있다는 것만을 선호하면서 행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결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명한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을 행했을 때에만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씨가 어떤 땅에 떨어져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겠습니까?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씨를 지금 자신이 힘들다고 아무데나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씨를 뿌릴 수 있는 지혜로움이, 또한 내 자신이 좋은 씨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하는 열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지금 당장 이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신이 주는 축복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으면 축복을 저버리는 것과 같다(데이비드 팩커드).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양승국신부-
<마음의 밭갈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성공적인 농사를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할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날씨입니다. 비가 올 때 좀 와줘야 합니다. 햇볕이 필요할 때 해가 쨍쨍 떠줘야 합니다.
이번 봄 파종을 하고 나자마자 며칠 지나지 않아 봄비가 적당히 내려주었습니다.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봄비가 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우산도 쓰지 않고 다니십니다. 봄에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하지 않고 비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꾸준한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잠깐 신경 안 쓰면 밭은 온통 잡초가 점령합니다. 오늘도 밭에 난 잡초 키가 얼마나 크던지 예초기까지 동원해서 녀석들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또 한 가지, 바로 ‘좋은 토양’, ‘좋은 땅’입니다. 아무런 영양가 없는 황무지에, 또는 자갈밭에 씨를 뿌리면 몇 년을 기다려도 싹이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늦가을부터 넉넉히 다음 해 봄에 쓸 양질의 퇴비를 준비합니다. 이른 봄 그 퇴비를 밭 여기저기에 골고루 던지고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야 수확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싶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밭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인간적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균형 잡힌 신앙을 지니도록 할 것이며, 자신의 한계나 약점을 점진적으로 강점, 경쟁력으로 탈바꿈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성인들, 그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밭, 기름진 밭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황무지, 불모지, 모래사막 같은 땅의 소유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꾸준하고 점진적인 노력, 불굴의 노력 끝에 세상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탁월한 성품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온유와 애덕의 박사라고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 역시 자신의 신앙 여정 안에 엄청난 점진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제2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 불릴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 돈보스코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까도남’ 저리 가라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 맞서 싸워나갔습니다.
많은 결실을 바란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매일 마음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매일 솟아오르는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교만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멀리 내다 버려야 합니다. 완고함과 불신의 잡초는 모두 모아 불에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우리 각자에게는 양질의 밭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아주 좋은 밭의 소유자가 된 우리는 강한가 하면 부드럽고, 당당한가 하면 겸손하며,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최상의 토양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백배의 결실을 맺은 우리는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값진 선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농부의 마음
-이영춘 신부-
오늘 복음을 읽고 우리는 대번에 자책할 생각부터 합니다. “그래, 나는 길바닥과 같지.” “에구 돌밭 같은 내 신세여.” “내 마음은 완전 가시덤불이여.” 등등. 하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열매를 맺었다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면 잘 나는 것도 있고 썩어 없어져 버리는 것도 있고 자라다가 죽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농부는 없어지고 죽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싹을 잘 틔운 것에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수확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30배가 되었든, 60배, 100배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서 수확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 사실에 기뻐합니다. 다음 해에는 더 넓은 좋은 땅과 더 많은 좋은 열매를 수확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우리 마음 안에는 나쁜 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땅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은 우리 마음 안에 항상 동시에 존재합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 적다 하더라도 씨를 뿌리는 일이 중요하고, 하나만 싹을 틔웠다 하더라도 잘 키워서 수확을 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밭에 좋은 땅이 많이 늘어나게 되어 결국 옥토가 됩니다. 당연히 수확도 점점 많아지겠지요. 자, 하나라도 좋으니 어서 씨앗을 뿌립시다.
돌밭도 포기치 않으시고
-김찬선신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을 때 저는 보통 제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 생각하게 되지만 어떤 때는 씨 뿌리는 사람이 왜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 않고 돌밭이나 길바닥이나 가시덤불에 뿌리시나 하고 생각키도 합니다. 말하자면 씨 뿌리는 사람의 잘못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씨 뿌리는 사람이 주님이시고 씨가 말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돌밭에도 뿌리시는 것은 주님의 의도된 사랑의 실수임을 깨닫게 되어 크게 감동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제 마음 밭은 돌밭이라고 단정 짓고 아예 제 마음 밭에는 아무런 말씀의 씨앗도 아니 뿌리시면 저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아예 제켜놓은 사람이니 말입니다.
제가 양성을 담당할 때 똑 같이 얘기해도 다른 형제들은 잘 듣고 잘 알아듣는데, 어떤 형제는 듣지도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어떤 때는 그 형제를 특히 염두에 두고 말하였는데도 오히려 잘 하고 있는 형제들보다 더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살짝 화가 나며 “으이, 이런 인간 아주 제켜 놓을까”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다가도 “그러면 안 되지!”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릅니다. 아니 사랑을 추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니 오늘 이 비유 말씀에서 돌밭 같은 제 마음도 포기치 않고 말씀의 씨를 뿌려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좋은 땅이 되기를 희망하며 다짐합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 보니 원칙적으로는 복음관상보다는 묵상을 하는 것이 순리이겠습니다. 비유의 의미를 정확하고 깊게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복음관상을 해봤으면 합니다.
복음관상의 포인트는 교육 현장입니다. 예수님과 군중을 중심으로 가르침 내지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 현장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얻는 바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육이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을 봤으면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서 있다고 합니다. 호숫가를 보고, 모여드는 군중을 살피고, 배 위에 올라앉으신 예수님의 표정이나 몸짓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전반적인 교육 환경을 살펴봤으면 다음으로 교육 주체인 예수님과 군중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내용을 어떤 식으로 가르치시는지를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받아왔던 교육 내용과 방식에 비춰 살펴봅니다.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를 알아듣는 가운데 얻는 바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교육의 한 축인 군중을 봅니다. 그들은 어떤 눈망울과 자세로 어떻게 가르침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육의 두 주체가 움직이는 가운데 그 결과물로써 무슨 현상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교육 현장의 분위기나 열기가 변화되었습니까 ? 군중의 내적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 예수님께는 이 가르침 내지 교육 과정을 통해 무슨 위로를 받고 계십니까, 아니면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계십니까 ?
어제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BCK)에서 전국 성소국장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매 달 있는 성소후원회 월례미사가 있는 날이기도 했지요. 더군다나 제가 성소국장이 된 후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월례미사였기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면서 11시에 있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9시에 출발했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 때문에 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표를 스스로 생각했지요. 11시에 회의가 열리고, 12시쯤 회의가 끝나서 점심 식사를 한 뒤에 12시 30분쯤 출발하면 2시에 있을 성소후원회 월례미사에 별 무리 없이 참석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회의는 거의 1시까지 이어졌고, 저는 식사도 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도로 사정이 너무나 나쁜 것입니다. 도로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고, 차량 고장으로 인해 정체 구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저는 월례미사에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의 뜻대로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 세상은 흘러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느님 뜻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이 흘러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자기 뜻에만 맞게 살아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온전하게 당신의 품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즉,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좋은 밭에 떨어진 씨처럼, 좋은 주님 안에 떨어져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뜻만을 주장하고 내 뜻으로만 모든 것이 결정되길 바란다면, 바로 돌밭과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을 찾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몰아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돈 1억을 가진 사람과 아이 열 명을 가진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똑똑히 대답하는 것입니다.
“아이 열 명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그 이유를 묻자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1억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원하겠지만 아이 열 명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의 아이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학생은 아이 열 명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욕심과 이기심을 내 안에서 버릴 때,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으며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의 결실을 맺는 오늘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대 안의 작은 거장을 존중하라(랄프 왈도 에머슨).
마음에 품은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말씀을 삶으로 살아냅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마지막에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 라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스쳐지나간 모습과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그분이 마음에
품었던 말씀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시다시피,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인 톤즈에서 선교활동을 하셨습
니다. 남수단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 중에서도 더욱 가난한 나라라고 하는데,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그곳은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식량 부족으로 배고파하는 이
들이 먹을 것을 얻게 되었고,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
습니다. 또 아이들이 노래와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워 밴드부도 만들고 연주회도 하게 되었
고, 작은 치료를 받지 못해 죽거나 크게 불구가 되는 이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한 변
화를 만들어 낸 이태석 신부님이 평소에 마음에 품었던 말씀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
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합니다. 평소에 마음에 품었던 말씀이 삶
으로 열매를 맺은 것 같지요? 저는 묵상을 하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러면 다른 신부님들도 사제가 되면서 평생 마음에 간직할 성구를 정하
는데, 그 말씀이 열매를 맺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좀 해 보다가 떠오른 분
은 송봉모 신부님이었습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성구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의
친척들이 그를 붙잡으로 나갔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조금 특별한 말씀(?)을
선택하셨는데, 그 사연이 이렇습니다.
【신학생으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나는 수도회의 허락을 받아 불교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
었다. 수도회는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 불교 공부를 허락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 세계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특별히
선종의 하나인 조동종과 그 선사인 도원 스님의 사상에 심취되어 로마로 신학 공부를 하러
떠날 때에도 조동종과 도원 스님의 책만 10여 권을 가지고 갔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자주 영
적독서(?) 삼아 그 책들을 읽었다. 이렇게 불교 사상에 젖다 보니,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물건너간 셈이 되었고, 구도적 관심이나 열정을 성서와 성교회 전통에서가 아니라 불교 세계
에서 길어내게 되었다.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서도 성서나 성인들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불경이나 선사들의 말을 인용했다. 한번은 가르멜 수녀님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필자
를 아끼는 한 수녀님은 강의를 듣고 나서 이런 말로 질책을 하셨다. “수사님, 성교회 안에 그
렇게 성인들이 많은데 어떻게 불교 스님들 이야기만 하십니까? 그러려면 차라리 스님이 되
시지 그러세요.” 그러던 나에게 사제서품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난 자문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신부가 되고 나서도 지금 처럼 살 것인가? 신부로서 교우들에게 강론을 할 때에 지금
처럼 불교 얘기나 할 것인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제서품 기념 상본에
적어 넣을 성서 구절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친척들이 그를 붙잡으로 나갔
다.” 라는 말씀을 택했다. 나도 예수에게 미쳐보고 싶어서였다. ... 서품날 이후 나는 예수께
미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 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성서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된 것이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송봉모 신부님은 성서에 관련된 좋은 저술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냥 많이만 저술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신
부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신자 분들도 송 신부님의 글에 좋은 영
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송 신부님에게서도 마음속에 품었던 말씀이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 보이시지요?
오늘 하루, 마음에 품을 성경 구절을 고민해 보고 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열매를 맺
을 때까지,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4월 중순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묘목과 꽃씨들을 심을 시기였는데, 심을 자리마다 척박한 땅이라 여간 많은 돌들을 골라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돌이 많은 곳엔 흙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뿌리가 제대로 뻗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돌을 골라내야 하는 일은 전문 농부가 아니더라도 지극히 상식적인 준비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가장 알기 쉬운 자연의 법칙을 들어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비록 좋은 땅이라도, 그 땅의 질의 수준에 따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결과의 차이점도 말씀해 주십니다. “좋은 땅”은 양분이 많은 부드러운 흙처럼 잘 가꾸어진 우리의 마음 밭을 가리킵니다. 마음 밭을 좋은 땅으로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은 변화와 행실의 개선을 통하여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선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 하느님의 씨가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분이나 땅에 화초를 심거나 씨를 뿌려 보십시오. 흙이 좋을수록 생명들은 더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잘 맺습니다. 주님을 향한 내 마음 밭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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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하시는 하느님 사랑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각기 떨어져 열매 맺기도 하고 못 맺기도 한다는 비유입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훌륭한 농부가 아니시구나! 제대로 된 농부라면 씨를 아무 데나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씨를 왜 길바닥에 뿌립니까? 그 귀한 씨를 왜 낭비합니까? 농사를 짓자는 얘깁니까? 제 정신인 농부입니까?
지금까지는 토양의 좋고 나쁨의 관점에만 비유를 봤는데, 농부의 입장에서 이 비유를 보니 하느님은 정말 문제가 있는 농부십니다.
저는 저의 얘기가 씨도 안 먹힐 것 같으면 아예 말도 꺼내지 않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애씀이 허사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실상 내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몇 번을 끙끙거리다 겨우 한 번을 말하지요. 그리고 그런 말일수록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괴롭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기에 그만큼 얘기를 꺼내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자기가 강할수록 끙끙거립니다. 정말 상대를 사랑하고 자기가 없으면 그렇게 힘들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내가 상처받지 않고 그가 안타깝고 애처로울 뿐입니다. 나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한 말을 하기에 자유롭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의 사랑은 낭비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표현할 때 “Lavish"란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God lavishes His love on us"와 같은 말이지요. 넘치도록, 활수하게, 심지어 낭비하며 퍼부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사랑을 낭비하심은 그만큼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사람이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라야 흥청망청 쓸 수 있지요.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볼 때 낭비하십니다.
사랑을 아까워하지 않으시는 주님은 말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제 주변에 저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닮은 분들이지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저의 사랑은 알량하고 무엇보다 “자기”가 강해서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늘 아침, 반성합니다.
농부가 곡식을 귀하게 여기듯
-전삼용신부-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고 그래서 감사하게도 자연의 풍요로움 안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뒷짐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른들은 저를 ‘감독관’이라 불렀습니다. 당연히 거머리에 뜯기며 모내기를 하고, 개구리나 뱀을 잡아 닭의 모이로 주며, 풀을 뜯어 토끼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각 종류의 가축들이 좋아하는 먹이는 서로 다르고, 마찬가지로, 각 종류의 농작물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환경에서만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내기를 할 때는 물이 풍부해야합니다. 그러나 땅콩이나 고구마를 그런 곳에서 경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다 썩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캘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 땅이 마치 모래와 같이 부드러웠던 것 같고, 고구마는 조금 더 질긴 흙이었지만, 논과 같이 물이 흥건하지는 않았습니다.
토끼풀을 뜯을 때도 아무 풀이나 마구 뜯어서 갖다 주면 안 됩니다. 그들이 먹는 풀이 따로 있습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토끼에게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토끼에게 물을 주면 토끼는 얼마 안 가서 죽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토끼는 풀에서 수분을 섭취하는 동물이라 물을 마시면 수분과다로 병이 들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이렇게 씨를 뿌릴 준비를 하기 시작할 때부터 수확하여 저장할 때까지 한 순간도 정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잠깐 방심하면 일 년의 농사를 망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깐의 방심이 자식만큼 소중한 가축을 병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요즘과 같은 장마로 둑이 넘쳐 농사를 망쳐버렸을 때 농부가 느끼는 심정은 가히 자식을 잃은 것과 버금갈 정도일 것입니다. 농부가 끊임없이 농사일에 신경을 쓰는 모습에서 우리는 땅에서 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그분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끔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이해가 안 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집니다. 물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길에 떨어지면 새들이 주워 먹고, 돌밭에 떨어지면 수분부족으로 말라 죽게 되고, 가시밭에 떨어지면 영양부족과 일조량부족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물론 그 때는 이렇게 흩뿌리는 모종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길에도 뿌려지고 돌밭 위에도, 또 가시밭에도 떨어질 수 있었겠지만, 진정한 농부라면 그 씨앗을 뿌리기 전에 돌을 솎아내고 가시나 잡풀을 걷어내는 일은 필수적으로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한 모종씨앗이 낭비되는 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을 일구지 않거나 안 좋은 땅에 씨앗을 낭비하는 것은, 어쩌면 몰라서라기보다는 씨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즉 농부의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내기 이전에 하는 것이 모종심기입니다. 작은 모판에 모종 씨를 뿌리는데 그 씨는 전년도에 거둔 곡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만 선별해서 간직해 둔 것입니다. 아무리 모아놓은 곡식이 없어 가족이 굶어야 할 때더라도 다음 해에 뿌릴 씨앗까지 먹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모종씨앗은 또 한 해를 날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밥풀 하나라도 남기면 혼이 나곤 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노력을 거쳐서 밥상에 올라온 것인지 부모님들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 비유말씀대로 우리 마음에 떨어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가 듣는 그분의 복음을, 농부가 농사짓는 곡식과 가축들에게 갖는 애정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농부의 성실함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물론 농부의 땀방울 없이 새로운 소출이 없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말씀의 열매는 우리 안에 맺혀질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귀한 말씀의 씨를 우리 마음에 계속 뿌리고 계십니다. 그 귀한 말씀의 씨앗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그것을 잘 키워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 농부의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한 늙은 인디언이 소유하고 있던 척박한 땅에서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인디언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으나 유전이 발견되면서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부자가 된 뒤 그는 가장 먼저 대형 승용차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스페어타이어를 달 수 있는 자동차에 네 개의 스페어타이어를 달았습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 달리는 자동차를 갖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늙은 인디언은 머리를 땋아 내린 채 비싼 실크 모자를 쓰고 나비넥타이를 맸으며 커다란 시가를 물고 다녔어요. 그리고 날마다 일과처럼 무덥고 지저분하고 조그만 근처 마을로 자신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성공한 자기를 봐 주기를 바랐거든요. 그래서 마을로 드라이브를 나갈 때마다 이야기 나눌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자동차 사고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그 크고 아름다운 자동차 앞에는 두 마리 말이 매어져 있어서 그 말들이 자동차를 끌고 다니기 때문이지요.
늙은 인디언은 자동차 키를 어떻게 끼우며, 시동은 어떻게 거는지, 운전은 어떻게 하는지를 결코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차가 100마력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2마력의 성능을 가진 두 마리의 말에만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셨지만, 스스로의 능력을 깎아내려서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모두 똑같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씨가 뿌려졌음을 말씀하시지요. 당연히 좋은 씨가 뿌려졌으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지요. 바로 어떤 곳에 그 씨가 뿌려졌냐는 것입니다.
길 위,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상징되는 곳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의 씨가 어떤 마음에 떨어졌을 때 가장 좋은 열매를 맺겠냐는 것이지요. 당연히 하느님 은총의 씨를 마음에 받아, 물을 주고 거름도 주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이 세상에서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64년 미국 유나이트드 아티스트사가 “The Best Man”이란 영화를 만들 때 대통령 역을 할 배우를 찾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영화배우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거론되었다고 해요. 그러나 곧 감독과 운영진에 의해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얼굴이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널드 레이건이 실제의 대통령이 되었고, 감독과 운영진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렇게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포기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맺어야 할 열매임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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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는 사람들
-허영업 신부-
신학교에서 성경의 이 대목을 처음 배울 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왜 씨앗을 돌밭에, 길바닥에, 가시덤불 속에도 뿌리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활하신 팔레스티나는 우리나라의 농사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팔레스티나의 땅은 대체적으로 바위가 많고 더운 여름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농부들은 메마르고 굳은 들판에 먼저 씨앗을 뿌린 다음에 비가 오면 쟁기질을 해서 땅을 갈아엎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동시에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은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고 거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씨앗을 보존하고 잘 가꾸는 사람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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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자라는 밭
-여상훈-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늘 읽고 들어서 입에 붙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고, 비옥한 땅에 계절은 뚜렷해서 천하에 이처럼 작물이 풍요로운 곳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유럽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흰 눈 속에서도 풀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천길 암벽에서 옥빛 호수로 이어지는 유장한 기슭은 아름다운 거목들의 바다였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강산의 깊이와 다감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유럽에 처음 내렸을 때 어쩔 수 없던 그 배신감은 아직도 기억에서 생생합니다. 그 배신감이 야속한 마음이 들 정도로 커진 것은 그네들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서였습니다. 저희 성씨 집성촌이 있는 상주에서 한 뼘 밭을 일구려고 온 가족이 허리가 빠지게 돌을 골라내고 다듬으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아 온 제게, 봄밀을 파종해 놓고는 잡풀 한 번 뽑지 않고 추수하는 농사는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민들레 언덕에는 지난 철에 거둔 유채에서 씨가 날아와 지천으로 자랍니다. 가을에는 억수로 자란 풀을 퇴비와 사료용으로 쓱 걷어내고, 그 자리에 가을밀이나 보리를 뿌립니다. 저녁 산책 때 우유를 사러 농가에 갔다가 왜 그렇게 모든 게 잘 자라는지 물었더니 중북부 유럽의 검은 땅이 워낙 비옥하고, 비가 연중 골고루 내려서 그렇다는군요.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재작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가까운 사람이 마흔이 다 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이 무척 고된데도 열심히 예비자 교리를 다닌 이 애송이 신자는 세례를 받자마자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요일별로 성경 공부, 기도회, 성체조배를 하는 대단한 열성을 보이더니 이제는 기도와 행동으로 제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그 사람이 바로 말씀을 받아들여 백 배로 키우는 상토(上土)였던 것이지요. 그를 통해 다시 깨달았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논리가 아니라 의지가 바로 말씀이 자라는 밭이라는 것을.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면서 돌이켜 보니 저 같은 고집불통에게 주어진 말씀은 말하자면 제 고향 상주의 계단밭에 떨어진 씨앗이겠군요. 꼭 가슴에 새겨 들여다보고 반성하겠습니다. 밭이 나쁘면 씨가 고생한다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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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양승국신부-
<Love tank>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정서적, 심리적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탁월한 처방을 내놓기로 유명한 의사인 로스 캠벨(Rosss Campbell)의 말씀입니다.
“모든 아이들의 내면에는 사랑으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감정의 그릇’(emotional tank)이 있다. 아이가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아이는 정상적으로 발육하지만, 그 사랑의 그릇이 비었을 때 그 아이는 그릇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수많은 아이들의 탈선은 빈 ‘사랑의 그릇’(love tank)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데서 비롯된다.”
백퍼센트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갈망합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사자’도 모를 것 같은 사람도, 중환자실에 누워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에 대한 갈망은 똑같습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지속적인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균형잡히고 건강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그 사랑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좋은 땅, 기름진 토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올 초부터 저희 형제들과 심혈을 기울여 가꾼 몇 가지 작물들이 넉넉한 밑거름과 충분한 강우량으로 인해 ‘대박’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고추밭에는 고추들이 주렁주렁 보기만 해도 탐스럽습니다. 오이와 토마토도 실컷 따먹고 있습니다. 호박 넝쿨들은 온 둔덕을 점령하면서 은밀한 곳에 커다란 호박덩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른 봄부터 형제들이 흘린 땀방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이 중요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무성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밭을 가리는 바람에 일조량이 부족했습니다. 나무에게는 미안했지만 과감하게 전지작업을 해줬습니다. 1차 비료, 추가 비료, 진딧물 잡기, 잎마름병 퇴치...
이런 오랜 노력의 결실이 좋은 땅이요, 수백 배, 수천 배의 결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좋은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자동차가 쾌적하게 운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타이어, 브레이크, 라이닝, 팬벨트...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엔진 오일입니다. 엔진오일을 적당한 레벨로 유지시켜주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해 중요한 노력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탱크(love tank)에도 충분한 사랑을 채워 ‘사랑의 레벨’을 적정히 유지시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 ‘좋은 땅’이란 사랑하는 삶이 아닐까요? 사랑을 주는 삶, 사랑을 받는 삶, 그 사랑으로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그런 삶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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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 만들기 -오상선신부-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농사짓는 방법을 예의주시하시면서 씨가 뿌려지기는 하는데 가시덤불에도 떨어지고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제대로 된 밭에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리라.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씨를 흩뿌리지 않고 심는 방식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좋은 땅에 씨가 뿌려져야 삼십배, 육십배, 백배, 아니 천배, 만배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밭, 영혼의 밭에 말씀의 씨를 아무리 뿌려도 좋은 결실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 우리 마음밭의 토양의 질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매일 미사하고, 기도하고, 말씀묵상하고, 성경쓰기하고, 여러가지 교육이나 피정에 참석하고, 애덕 실천활동에도 참여하지만 내 영혼이 영으로 충만해지지 않고 있다면 내 마음밭의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 필요가 있다.
내 마음밭은 어떤 수준일까? 어떤 씨가 들어와도 잘 자랄수 있는 수용성을 지니고 있고, 어떤 병이 들어와도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있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맺지 못하는 그런 땅이 아니라 여러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어 균형잡힌 열매를 풍성하게 맺도록 하는 그런 힘좋은 땅인가?
이런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타고난 좋은 땅은 별로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가꾸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결코 좋은 땅이 되지 못한다. 내 마음 밭은 최고의 토양으로 가꾸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퇴비'이다. 내가 썩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나를 비워야 한다. 별것아닌 잡초든 무엇이든 받아들여 함께 썩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좋은 토양이 된다. 그래야만 생각지도 못하는 엄청난 열매를 맺게 된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하지만, 먼저 땅이 썩어서 그 밀알을 함께 썩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요, 곧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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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열매란? -김찬선신부-
씨가 열매 맺듯이 말씀이 열매를 맺는다 함은 어떤 뜻인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맺는다 함은 양적인 것을 뜻하는가?
열매란 씨앗, 즉 시작과 근원에 대한 결과, 결실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씨앗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제일 중요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열매 무성해도 변변한 열매가 없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우리의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쳐주셨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파리 무성해도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르치는데도 깨우침이 다릅니다. 제가 양성소에 있을 때 똑같이 가르쳐주었는데도 어떤 형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형제는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이고 어떤 형제는 창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어떤 마음 밭이냐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시고, 그러나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하라 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그 명령이 싫습니다. 권고나 부탁을 한다면 혹 선심을 써서 해 줄 수 있지만 명령은 생래적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하느님의 계명은 말부터가 입에 달다고 하였는데 이런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라는 말이 쓴 마음 밭에서는 합격의 기쁨과 영광이 없듯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억지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의 언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랑의 언표이시고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마련하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인데 많은 경우 우리는 불감증 환자입니다. 한 번도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구나 하고 느낀 적이 없거나 느껴도 지나간 뒤에 사랑이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감사와 사랑의 응답이 없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 풍성히 열매 맺지 못합니다.
어제는 우리 한우리 회원들과 함께 탈북자들의 얘기를 다루는 크로싱(Crossing)이라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였습니다. 저는 시사회 때 보았기 때문에 두 번째 보는 것이었는데도 또 눈물을 많이 흘렸고 끝나고 인사를 드리니 남녀 불문하고 모든 회원들 눈이 발갰습니다. 그중에서 가슴에 남는 것 하나는 남쪽으로 내려온 주인공이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장이며 아마 교회의 장로인 듯이 보이는 분에게 절규하던 말입니다. 하느님은 남쪽에만 오시고 북쪽에는 오지 않으시느냐고, 지금 자기의 아내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쪽에서는 공짜로 주는 그 결핵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외치던 말이었지요.
지금은 경제가 어려워 우리도 살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북쪽에 비하면 모든 것이 과분하지요. 過分,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대로 풀이하면 넘치게 나누어졌다는 뜻이지요. 나에게 나누어진 몫이 지나치게 많다는 뜻이지요. 지나치게 나누어진 나의 몫을 북쪽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도 과분하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하느님과 북쪽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아주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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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양승국신부-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
며칠간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들을 위해 보다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겠는가?’하는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를 위해 훌륭한 강사께서 물 건너 오셨습니다.
제대로 된 형제적 봉사를 위해 리더십, 조직력, 친화력, 참신한 아이디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등등 여러 덕목들이 요구되지만, 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는 삶’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 원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복잡한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심산유곡에 위치한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하루 온종일 기도 속에 보내는 사람일까요? 하루 10시간 이상 감실 앞에 앉아 성체조배에 전념하는 사람일까요?
그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무얼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운동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 미사, 영적 독서, 피정뿐만 아니라 공부 휴식, 운동, 취미활동, 잠을 잘 때에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영적인 사람이며 제대로 된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보다는 성령의 활동에 많은 부분을 내어맡기는 사람, 밤이슬 내리듯, 미풍이 불어오듯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야말로 보다 효과적인 형제적 봉사를 위해 적합한 사람입니다.
좋은 말씀들을, 핵심을 찌르는 말씀들에 다들 많이 반성을 했고,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에 새로운 전망을 지니게 되어 다들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뜻밖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들은 그 말씀들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일입니다. 피부로 와 닿는 만만치 않는 현실 앞에서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론과는 너무나 다르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인내심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다가온 잡다한 걱정거리들로 인해 숨이 막힙니다. 밀린 숙제들이 압박합니다.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이 바람에 흩어지지 말고 제 마음의 밭 안에 뿌리내려지길 기대합니다. 지속적인 자기 비움과 낮춤으로 말씀의 씨앗들이 숨 막히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작고 초라하나마 싹을 틔우고, 작은 열매나마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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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비유
-조욱현 신부-
예수님은 오늘의 복음부터 1주일간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밀밭의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 밭에 묻혀있는 보화, 장사꾼이 찾은 진주, 어부의 그물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오늘 처음으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사정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것이다. 어떻게 농부가 돌밭에, 길바닥에,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겠는가? 당시의 팔레스티나는 대체적으로 바위투성이의 땅이었고 가장 더운 여름 5개월은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농부들은 메마르고 굳은 들판에 먼저 씨를 뿌린 다음 비가 와서 땅이 물러지면 쟁기질을 해서 흙을 갈아엎는 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따라서 복음 말씀대로 농부는 돌밭에, 길바닥에, 가시덤불 속에도 씨를 뿌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얼마 되지 않는 수확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사회의 세속적인 면에서 볼 때에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 헛수고하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성당에 많은 시간과 돈과 정성을 바치는 멍청이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결국에는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쪼아 먹히기도 하고 말라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수개월 내지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또 이 씨앗은 농부의 보살핌 없이는 벌레에 먹히고 태양에 말라죽고 시들어 열매 맺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은혜와 도움을 주님께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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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열매
-구경국 신부-
가끔 신자들에게 전달할 사항을 반·구역 봉사자 월례회를 통해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공동체 모임 때에 전달된 내용을 다른 경로를 통하여 다시 듣게 되면 가끔 당황할 때가 생깁니다. 제가 말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같은 말을,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장소에서 들었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내용은 천차만별입니다. 모든 가치의 인식은 편견을 포함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성이나 스스로의 경험에 의거하여 자신에게 유익하게 보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씀을 같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느냐, 나의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하려 하느냐, 혹은 희생, 봉사하는 마음자세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관심사에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큰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듯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특히 나보다 못한 이웃을 연민의 정으로써 배려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어떤 자세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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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조 신부-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씨앗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에 이르는 진리를 일깨워 주시려고 합니다. 씨앗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영적인 가르침을 일러서 “씨앗의 영성” 이라고 불러 볼까 합니다.
씨앗의 영성, 그 첫 번 째는 “씨앗은 미래의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까만 점 같이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씨앗은 지금 “아름드리 큰 나무”를 꿈꾸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지만 씨앗이 꿈꾸고 있는 미래는 너무나 크고 당당합니다. 씨앗은 너무나 볼품 없이 못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빛깔 곱고 향기로운 꽃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못생긴 씨앗은 지금 “빛깔 곱고 향기로운 꽃”을 꿈꾸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는 너무나 볼품 없이 못생겼지만 씨앗이 꿈꾸고 있는 미래는 너무나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씨앗들은 미래의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어하고, 꽃이 되고 싶어합니다. 씨앗은 자기 안에 나무가 될 능력이, 꽃이 될 능력이 숨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입니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만이 감추어진 미래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금 당장 작고 초라하다고, 지금 당장 볼품 없이 못생겼다고 씨앗을 내던져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작은 씨앗 안에 감추어진 미래의 아름드리 나무를, 미래의 향기로운 꽃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씨앗을 소중하게 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금 당장 자기의 현실이 작고 초라하다고 현실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작고 초라한 현실 속에 감추어진 미래의 행복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현실을 소중히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 살면서도, 갈대처럼 수시로 흔들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도, 저 미래의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앙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천국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씨앗의 영성, 그 두 번째는 “씨앗의 정직함”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오늘 새삼스럽게 되새기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정직하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콩을 심어 놓고 팥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농부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미움이라는 씨앗을 심어놓고,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합니다. 하느님의 마음 밭에 기도의 씨앗을 조금도 뿌린 적이 없으면서, 내 마음 밭에서 은총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정직하게 살아갑시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뿌리지 않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뿌린 만큼만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설령 뿌린 것이 열매 맺지 못할지라도 씨앗을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씨앗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그 씨앗을 품지 못한 우리 마음 밭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뿌린 만큼 거두고, 정성을 다해 품은 만큼 거둘 것입니다.
씨앗의 영성, 그 세 번째는 “우리는 모두 주님의 씨앗” 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심었습니다. 처음 심어 진 곳은 지상이지만 열매 맺는 곳은 천국입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을 꿈꿀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천국의 나무, 천국의 꽃이 될 능력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지만 장차 완성될 미래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천국의 씨앗들이기 때문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 언젠가 우리는 천국의 나무가 되고, 천국의 꽃이 될 것입니다. 뿌린 만큼 거두고, 정성을 다해 품은 만큼 거둘 것입니다. 주님께서 뿌려 놓으셨으니 정성을 다해 우리 자신을 품고 가꾸어 나갑시다. 그 언젠가 천국에서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날 그 날을 꿈꾸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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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에 보면 인기를 끌어 모으는 친구들이 꼭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춰서 오락시간에 무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친구, 싸움을 잘해서 약자의 편에 서던 멋진 친구, 운동을 잘하는 친구, 말 잘하는 친구, 글을 잘 쓰는 친구…….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는?’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기가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춤과 노래로 오락시간을 휘어잡지도, 싸움을 잘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말을 잘하는 것도, 또 글을 잘 쓰지도 못했습니다. 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없었던 저의 모습이었지요. 그래서 인기를 누리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었고,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는 저의 모습에 스스로 한탄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기(저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창시절 때보다는 분명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를 나름대로 느끼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저의 능력이 갑자기 생긴 것일까요? 신부가 된 뒤, 하느님께서 “너 그동안 재주 하나 없이 사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능력을 주마.” 하면서 저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즉, 저의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가 ‘신부’이기 때문에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저의 부족한 능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치 제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질 때도 종종 있지 않았나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차별 없이 하느님 사랑의 씨앗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들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지요. 즉,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소출을 낼 수도 있고, 반대로 싹도 트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 하느님 사랑의 씨앗은 우리들의 작은 능력도 크게 만드는 아주 신기한 효과를 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시기심과 욕심,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한 밭은 나의 능력을 조그맣게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 나의 마음 밭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 모두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전에, 주님께 감사합시다.
빠다킹신부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정원순 신부-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어머니한테서였다. 어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으셨다. 대신 새벽 4시나 4시 반쯤에 일어나셔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셨다. 특히 묵주기도를 하실 때 나는 어머니의 성모송에 잠을 깨곤 했다. 그래서 아침을 먹으면서 어머니 기도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든가 기도를 함께하는 것이 어떠냐고 반문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성당에 다녀오시면 성당에서 일어난 일이라든가, 신부님과 수녀님들에 관한 동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식사시간에 재미있게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권유로 아무런 저항도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 없이 성당에 나가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 오늘 복음에서 씨는 말씀이고, 씨가 떨어진 곳은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이며,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말씀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인격에 달려 있다. 말씀에 인격이 더해져야 한다. 이것은 믿음을 낳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인격 안에 내재된 불가사의한 힘을 통하여 말씀을 믿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어머니의 태도에 나는 성당에 나가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는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신뢰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련의 한 가운데서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며 희망을 잃지 않은 때가 옥토였습니다. -홍성만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배 위에 올라앉으시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 해가 솟아오르자 타 버리고 맙니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외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이렇게 끝내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옥토를 만드는 것은 너의 몫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데 혹시 내 마음이 길바닥과 같이 딱딱해서 말씀이 그냥 튕겨 나가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이 돌밭과 같아서 주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뿌리는 내렸지만 걱정과 근심으로 매몰되어 숨도 쉬지 못한 채 질식되어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 마음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로 승화된 옥토와 같아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
아렇게 나 자신의 마음 상태를 뒤돌아보니, 나의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길로, 어떤 때는 돌밭으로, 어떤 때는 가시덤불로, 어떤 때는 옥토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열매를 맺었던 옥토와 같은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던 때였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주님의 용서와 자비에 끝까지 의지하며 희망을 잃지 않던 때, 그때 내 마음이 옥토였습니다.
이시기에는 힘겨워하면서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목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각인되며, 주님의 말씀이 더 깊이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항상 내 가슴 밑에서 울려오곤 했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가 고통과 시련 속에서 더 깊이 각인되며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내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이 있다면, 이를 통해 더 좋은 마음의 토양을 일구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이영탁신부-
오늘은 바보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날 바보가 별을 세고 있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이백다섯개, 이백여섯개,..아~ 열받어. 드럽게 많네” 그래도 별이 몇 개인지 알고 싶은 바보는 천문학자한테 가서 별이 몇 개냐고 지겹도록 물어봤습니다. 몇 번이나 알 수 없다고 대답하던 박사도 계속되는 바보의 질문에 짜증이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만두게... 젊은이 " 그러자 갑자기 바보가 좋아하면서 뛰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별은 구만두개였어“
바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제 어린 시절 어린이 미사 시간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씨 뿌리는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씨를 뿌릴 거라면 좋은 땅에 계획성 있게 뿌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아무 땅에 아무렇게나 뿌리는 걸 보면 ‘씨 뿌리는 사람’은 분명 게으르거나 바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신부님은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이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하느님이라니... 그렇다면 하느님이 바보란 말인가?
여러분! 하느님은 바보이실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 마다 그분을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기도합니다. 전지전능 하신 그분이 바보이실 리 없습니다.
사실은 제가 바보였던 겁니다. 어린시절의 철없음이었다고는 하나 비유를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가 바로 바보였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를 당신의 말씀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시려고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다고 오늘 복음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돌밭이어도 당신은 비유로 당신 말씀의 씨앗을 우리에게 뿌리십니다. 우리가 가시덤불이도 당신은 우리가 좋은 땅이 되도록 희망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하게 알아듣는 땅이어도 그분은 우리가 서른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땅이라 부르십니다. 그분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믿음 그대로 우리는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씨앗이 이미 우리에게 뿌려진 이상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그 분이 바보처럼 우리에게 그냥 씨를 뿌리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엉뚱하지만 하늘의 별이 모두 구만두개임을 알게 된 한 바보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얻었고 기뻐했습니다. 엉뚱하게 하느님이 바보라고 생각했던 한 바보는 그분이 바보가 아니라 우리를 믿어주시는 우리의 희망임을 알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영창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햇볕에 말라죽었고,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져 열매를 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많은 수확을 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농부는 참 이상한 농부다’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농부가 자신의 소중한 씨앗을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던지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농사법과 이스라엘의 농사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건기와 우기가 우리나라하고 반대인데 건기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많은 나무와 풀이 말라죽습니다. 그들의 밭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의 비옥한 땅이 아니라 그야말로 척박한 밭이고 흙이라는 것도 우리의 찰흙이 아니라 돌이 깨져 생긴 부스러기들로 비가 오지 않으면 먼지만 휘날리는 그러한 흙입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에 있는 농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암석 위에 흙이 얇게 덮힌 돌밭과 자갈이 섞인 자갈밭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농한기에는 그 밭에 가시덤불이나 엉겅퀴 같은 잡초가 자라기도 했고,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녀 밭 가운데 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 우리나라로 치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우기가 시작되고 비가 와서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때 내리는 비의 양이 워낙 엄청나서 어제 사막이었던 곳에 갑자기 강물이 흐를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부는 좋은 땅, 나쁜 땅 가려내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여기저기 씨를 뿌려보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농부들은 우리처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덮는 방식이 아니라, 우선 씨를 뿌립니다. 넓은 평지에 일일이 손으로 정성스레 뿌리는 것이 아니라 나귀에다 씨앗주머니를 싣고 그 주머니에 구멍을 내서 나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뚫어진 구멍으로 씨앗이 다 떨어지고 나면 괭이로 조금씩 흙을 덮습니다.
이런 식으로 씨앗을 심기에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들이 날아 와서 집어삼킵니다. 또 어떤 씨는 돌들이 많은 틈에 떨어져 습기가 있는 동안은 싹이 나지만 해가 쨍쨍 내리쬐면 돌 틈에서 수분을 얻을 수 없어 뿌리가 내리지 못하고 즉시 말라 버립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집니다. 그 씨는 싹이 나기는 하지만 가시덤불에 가려 잘 자라지 못하고 싹은 기운 없이 비틀거리다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보드라운 흙에 떨어져 흙을 갈아 덮으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말라죽거나 해서 잃어버린 씨앗쯤은 전혀 대수로울 게 못됩니다. 씨앗 한 톨에서 여러 줄기가 돋아난다는 것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풍성한 수확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 차서 씨를 뿌립니다. 씨앗 한 알이 백 배, 예순 배, 삼십 배 소출을 낸다는 것도 과장이 아니고 자연스런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처럼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농부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할 비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들으면서 시장사목의 어려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매일 매일 시장을 찾아다니며 신자, 냉담자, 비신자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이는 본체만체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는 뒤에서 욕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하기도 전에 얼굴을 돌리는 이들도 있고요. 그들을 만날 때면 너무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요. 마치 오늘 복음의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 같이 소용없게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정답게 정겹게 맞이하는 이들이 있기에, 어려움속에서도 희망의 말씀에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갈라진 손으로 제 손을 잡고 주름 깊은 얼굴로 웃어주시는 할머니들이 있기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봅니다. 또 다시 보드라운 흙에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수확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가지며 오늘도 시장을 돌며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아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강영구신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그대에게
당신의 가슴은 밭입니다. 콩을 심을 수도 있고, 벼를 심을 수도 있고, 감자나 고구마를 심을 수도 있고, 상추나 배추 혹은 무 따위 채소도 심을 수 있습니다. 잔디를 심고 정원수와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꿀 수도 있겠군요. 무엇을 심던 밭은 가꾸어야 합니다. 쟁기질을 하지 않아서 길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밭, 자갈과 돌멩이로 가득 찬 밭, 잡초 무성하고 가시나무까지 자라고 있는 밭에서 어떤 소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수고로움 없이 밭을 가꿀 수 없습니다. 쟁기질을 하면 파이고 뒤집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돌멩이들을 집어내고 잡초를 뽑으려면 땀 흘리는 노고와 끊어질듯 아픈 허리통증도 참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 가꾸어진 당신 가슴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싶어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리4,12). 그러나 무관심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밭, 미움과 증오, 원한과 원망, 시기질투의 돌멩이 가득한 밭, 돈과 재물에 대한 탐욕(貪慾)과 권력과 향락을 탐닉(耽溺)하는 욕망의 가시덤불 가득한 밭에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별수 없이 시들어버립니다.
한 여름 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논밭을 가꾸는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얻습니다. 당신의 오늘도 부지런히 마음 밭 가꾸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척 더운 날씨입니다. 건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一明)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남을우-
예수님의 말씀 중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는 항상 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내 믿음의 씨는 어디에 뿌려졌을까? 길바닥일까, 돌밭일까, 가시덤불 속일까, 아니면 좋은 땅일까? 세례를 받은 후 나는 어느 모임에 가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축하를 하는데 한 회원이 “냉담이나 하지 마세요”라고 탁 내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상했고, 왜 저 친구는 자기도 하느님 자녀이면서 왜 저런 말을 하나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 말이 옳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버리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내 힘으로 해결한다는 마음이지 주님께 나의 모두를 봉헌하려고 하였던가요? 말로는 하지요. 하느님께 나의 모두를 봉헌한다고.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뿐이지 주님께 엎드려 간구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주님은 ‘나를 버리셨나 보다’라고 투덜거리고, 잘 되면 ‘역시 주님은 존재하셔’라는 말로 자신이 하느님 자녀임을 표명하지요. 이처럼 변덕스러운 믿음을 가졌으니 주님께 부끄럽기만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주님을 잉태하게 되심을 알렸을 때 성모님께서 불안도 걱정도 없이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신 것과 같은 믿음을 저도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땅에 심어진 씨앗이 되어 하느님을 모르는 많은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알리고 싶습니다
좋은 땅? -이인옥-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어느 날, 이 비유에서 그동안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바로 "백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구절이다.
마르꼬 복음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올라가고
루가 복음서는 "백배"라고 하는데 비해
마태오 복음에서는 유독 좋은 밭에 떨어진 결실이 내리막길로 표현되어 있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결실을
좋은 땅에서 거둘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비유의 주제이다.
그렇다면 마르꼬 복음에서처럼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단계로 올라가던가
아니면 루가복음처럼 "백배나"하며 강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일 것이다.
더구나 마태오복음은 마르꼬복음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터에,
그 순서를 바꿀만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복음사가의 의도는 그분을 만나봐야 확인이 되겠지만, ^^*
추측해보면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같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엔 놀라운 가르침과 행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들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 둘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마침내 그분의 선교는 실패로 보이기 시작했고 도처에 적대자들까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농부는 얼마되지는 않지만, 좋은 밭에 희망을 걸고 씨앗을 뿌리지 않는가.
팔레스타인에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을 문제삼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애초에 농사는 지을 수 없을테니까.
즉 당신의 복음선포가 겉으로 보기엔 대실패인 상황같지만
애초부터 소수의 사람들에게 떨어진 복음의 결실에 희망을 두고 씨를 뿌리신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다.
가시덤불, 돌밭, 길바닥으로 영영 고정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돌밭과 가시덤불, 길바닥과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좋은 땅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남아있다.
그 가능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복음선포야말로 그분의 경작법, 즉 김매기와 풀뽑기와 흙고르기 작업이다.
그러기에 지금 당장 당신을 배척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길바닥이라고, 돌밭이라고, 가시덤불이라고 규정하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늘 독서에서 출애굽의 놀라운 은총, 자유와 해방을 주신 그 감격의 순간을 벌써 잊어버리고
한없이 투덜대고 원망을 퍼붓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본다.
애초에 은혜를 모르는 길바닥과 같은 마음이다.
금방 감격하다가 금방 시들해지는 돌밭같은 마음이다.
지긋이 뿌리를 내리는 듯 싶더니 어려움만 생기면 흔들리는 가시덤불같은 마음이다.
마태오복음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좋은 밭의 상태도 믿을만 하지 않다.
끝까지 좋은 밭으로 남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가장 좋은 땅이라고 여긴 제자들까지 십자가 죽음 앞에는 제대로 남아나지 못했다.
우리라고 별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 대부분은 일생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복음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교회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너무 깊숙히 터전을 잡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에 맞는 복음의 실천도 행하고 있는가?
그 인품도 그 위치에 걸맞게 성숙되어 있는가?
마태오복음에서 말하는 좋은 땅의 결실의 지표는. 교회 안에 있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내가 너희의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 주어라.”
양은 냄비처럼 쉽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보시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시고 끝까지 보호해주시는 주님을 독서에서 만난다.
우리도 그들처럼 쉽게 잊어버리고 쉽게 변심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는 주님.
세례 초기의 열성, 은총 체험의 감격들이 아득하고 시들해졌다면
하강곡선으로 떨어진 우리 마음을 회심시켜 상승 곡선으로 끌어올려보자.
쟁기와 호미를 들고 마음의 밭을 보슬보슬한 흙으로 변화시키자.
풀을 뽑고 돌과 가시덤불을 치우자. 물을 주고 거름울 주자.
주님, 우리의 이 결심을 뿌리내리게 해주시어 그 결실을 나날이 倍加하여 주십시오.
"삼십배, 육십배, 백배"가 될 때까지.
†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신부 -
만약 우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약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생애를 놓고 각각 한 권의 책을 집필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명이 각각 책을 썼다고 해서 그 10권의 책이 결코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료들을 모아야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이 되겠고, 그 밖에도 사도행전이나 서간들, 필요하다면 구약성서와 위경들을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아들인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저자가 10명이라면 10명이 쓴 10권의 책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저자마다 자료들을 분석, 종합, 해석, 편집하는 방법이 다르고, 사용하는 문체나 문장의 표현과 유형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에 대하여 기록한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가 4개인 이유는 4명의 저자가 서로 다르게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4개의 복음서에 붙여진 각각의 이름들이 그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한 저자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복음서들이 적어도 예수님의 직제자인 마태오와 요한, 그리고 직제자의 제자인 마르코와 루가라는 사람의 사도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통상 마르코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기원후 50년경에 수집된 예수어록집을 근거로 기원후 70년경에 집필되었고, 그 다음에 예수어록집과 마르코복음을 토대로 빨라도 80년 이후에 마태오복음서와 루가복음서가 기록 되었으며, 90년 이후에서 100년 사이에 비교적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요한복음서가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서는 그 분량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상 비교적 대동소이한 양상을 띠고 있으면서, 전체적 사건 자체와 저자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한층 가미되어 돋보이는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각의 복음서를 대할 때, 이런 관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줄곧 마태오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들어왔으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참고로 연중 제1주간부터 제9주간까지는 마르코복음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상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② 10장에는 파견설교를, ③ 13장에는 비유설교를, ④ 18장에는 공동체설교를, ⑤ 24-25장에는 종말심판설교를 모아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 ⑥ 진주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설교의 부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나라의 지상 선포자(宣布者)요 구현자(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나라의 신비(神秘)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신비(神秘, mysterium)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理論)과 인식(認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그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즉, ‘길바닥 -> 새의 밥, 돌밭 -> 말라죽음, 가시덤불 -> 숨 막혀 죽음, 좋은 땅 ->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위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