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준 말
손택수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힌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는 뭔가 거짓만 같은데
그럴 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게 구박만 받던 관용구는 늙은 아비처럼 나를 안아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어둠 속 벽을 떠듬거리듯 나는 말의
스위치를 더듬는다
그럴 때 만난 눈빛들은 잘 잊히질 않는다
그 눈빛들이 나의 말이다
----애지, 2022년 겨울호에서
탄생은 죽음의 첫걸음이고,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죽음만큼 낯설고 두려운 것은 없다. 이 죽음 앞에서는 하루를 살다 가거나 천년을 살다 가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고, 제아무리 죽음이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날이면 날마다 자살자의 숫자와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보도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대형병원과 요양병원에서 하루하루 연명치료를 하며 식물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의 증상과 그 질병이 있다. 첫 번째는 가난과도 같은 삶의 고통이고, 두 번째는 건강을 상실하고 병든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탄생은 죽음의 첫걸음이 아니라 삶의 첫걸음이고,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상승곡선을 그릴 때에는 그 어떠한 고통도 생각하지 않지만, 언제, 어느 때나 건강한 몸으로 연애와 축구와 등산을 즐길 때에도 죽음의 그림자조차도 생각하지 않으며, 마치 하늘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영원불멸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산다.
하지만, 그러나, 이 삶의 의지, 이 영원불멸의 삶에 반하여, 삶이 고통스럽거나 중병을 앓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벌벌벌, 떨게 된다. 타인들의 가난이나 비참한 삶의 풍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건강을 상실한 사람들과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의 모습도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이다. 요컨대 죽음의 그림자와 죽음의 풍경은 그 어떤 영웅호걸이나 천하장사조차도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고 싶은 살풍경일 뿐인 것이다. 호랑이와 마주 친 늑대처럼, 또는 고양이에게 잡힌 들쥐처럼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히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 입이 떨어지질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가 있는데도, 두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저승사자 앞에서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죽음 앞에서는 신참배우이며, 저승사자의 먹이와도 같은 수많은 병자와 망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이가 떨리고 살이 떨려서 도망칠 궁리만을 하게 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라고 수없이 되풀이 반복하여 외웠던 그 대사들조차도 까먹고, 그 ‘말없음’의 차갑고 싸늘한 “눈빛들”만을 만난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죽음 앞에서는 영원한 왕초보이고 겁쟁이이며, 언제, 어느 때나 그 대사를 까먹는 백치들에 지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빚을 지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빚을 갚는 것이다. 노자는 어느날 물소를 타고 떠나갔고, 엠페도클레스는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졌다. 중세의 어느 영웅은 ‘자, 우리 멋지게 죽는거요“라고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었고, 아이아스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살 수는 없다고 자살을 했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자살을 했고, 부처는 스스로 죽어감으로써 입신의 경지에 올라섰다. 인도의 과부 분사焚死와 한국의 수많은 열녀들과, 모든 순교자와 고행자와, 그리고 고귀하고 위대한 문화적 영웅들의 삶과 그 신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저승사자와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 과장, 허풍, 너무나도 허황되고 공허한 가공의 드라마가 모든 영웅들의 나약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삶을 미화하고 성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죽음이 준 말]은 입속말이고, 말이 되지 못한 혼잣말이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영원히 대사를 까먹은 신참배우의 잃어버린 말이다. 만년 전이나 천년 전, 또는 10년 전이나 인공지능 AI가 활보하고 있는 오늘날이나 수많은 위장과 내장이 필요없는 로봇 인간이 이 세상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주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무대가 다르고 삶의 환경이 변하더라도 죽음은 영원히 두렵고 무섭다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악마, 저승사자, 무섭고 두려운 괴물----. 천하장사 헤라클레스도, 삼손도, 부처도, 예수도 피하지 못한----.
탄생은 축복이고, 죽음은 저주와도 같다.
삶의 의지는 거짓에의 의지이고, 거짓에의 의지는 악마의 의지와도 같다. 왜냐하면 돈을 빌릴 때는 공짜와도 같고, 돈을 갚을 때는 생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