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베이비부머 세대는
일제 강점기를 비롯하여 광복과 6.25 사변은 겪지 않았지만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았으며 산업의 역꾼이요, 민주화의 주역입니다.
국민교육헌장의 비전을 이루어
오늘의 번영과 발전과 부강을 이룩한 세대입니다.
수 많은 자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가장 많은 연령대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6.25 참변 이후......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최고의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물지게로 물을 져다 정지의 물두멍에 물을 깃는 것은
시골에서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의 동심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어린 시절은
누구나 도리께로 타작을 하고 등불 아래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설날은
추억의 동심으로 가득한 전통적인 명절의 서정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때때옷 입고 부모님께 세배하고
새신 신고 친지들과 마을의 어르신들을 찾아 다니며 세배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설날의 놀이는
연날리기를 비롯하여 윷 놀이와 재기차기, 그리고 자치기를 하였습니다.
우리 동네 설날 자치기는 도시로 갔던 젊은이들이 돌아와
윗동네와 아랫 동네로 편을 나누어 해마다 큰 판을 벌이는 연례행사였습니다.
오늘날 설날의 자치기 전통 놀이가 사라진 것은
산업화의 영향으로 전통의 문화와 그 가치를 잃어버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치기 놀이를 실제 경험으로 기억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잃어버린 전통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기억하는 전통 놀이는
그 외에 팽이치기와 구슬치기, 딱지치기, 못치기를 비롯하여
오징어 놀이, 이병 놀이, 땅따먹기 놀이 등 다양합니다.
어린 시절의 풍성한 놀이 문화는 일제 강점기와 6.25 사변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부머 세대의 전통을 잇는 놀이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는 초가 지붕을 걷어내고 돌담을 무너뜨리고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전통의 문화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우리 동네 어린 시절 할아버지들은
거의 대부분 도포 입고 갓쓰고 다녔습니다.
아버지 세대는 짚신을 신었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의 어린 시절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당시 흰고무신을 신고 다닌 사람은
상당히 세련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동료 가운데는 신학을 졸업할 때까지
흰고무신을 신고 다닌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등불 아래서 맞은 설날의 풍광이
설날의 전통 문화가 살아있었던 그 때 그 시절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설날 아침은 이른 새벽부터
집안의 며느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처하는 사랑채를 향하여
마당에서 세배를 하고 떡국을 올렸습니다.
사극을 많이 봤어도 이런 모습은 거의 보지 못하였는데
설날 새벽이면 집안의 며느리들이 한복 곱게 차려입고 예를 올렸습니다.
할아버지 4형제와 아버지 3형제가 살았던 고향 마을은
옛 고을의 전통이 살아있는 8남매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할아버지 4형제의 후손이 고스란히 우리 동네 친인척을 이루고 있어
우리 마을의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설날 아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세배를 드렸고
그 덕담으로 어린 시절은 참으로 많이 행복하였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심으로 말미암아
큰 집에서부터 차례(次例)대로 지냈던 차례(茶禮)를 드리는데 동참하지 않고
차례지내는 집을 피해 도망다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설날이면 더욱 가족과 친척으로 넘쳤던 고향집은
감나무 가지에 둥지를 튼 까치의 울음소리가 한없이 정겹기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아 계실때 설날은
당일 오후부터 그 다음 날까지 마을 사람을 비롯해서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세배로 찾아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 때마다 오는 손님들에게 음식 가득한 상으로 대접하였습니다.
당시 냉장고도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설 날의 음식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이 준비하였습니다.
비교적 입주 머슴을 들일 정도로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베이비붐어 세대이지만 보리고개를 알지 못하였고
설날이면 돼지를 잡아 친척과 나누었고 마당은 토종닭의 놀이터였습니다.
큰 집 할아버지는 한문의 조예가 깊었는데
할아버지의 사랑채는 한문으로 된 책으로 가득하였으며
1890년대에 태어나 96세를 향유하였습니다.
올 해도 설날을 맞아 고향에 가지 못하는 마음을 담아
베이비부머 세대의 설날을 아련히 추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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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 보면
설날의 차례는 제사지내는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 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깊은 갈등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명절의 차례를 비롯하여 제사지내는 풍습은
기독교 신앙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전통이 강하면 고난과 핍박의 흔적이 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강하면 전통을 폐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전통과 신앙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명절의 차례와 제사를 대신하여 추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추도 예배는 성경의 기원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대신 조상으로 환치된 무속신앙입니다.
제사를 대신하는 추도 예배마저 거부하는 신앙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주기철 목사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묘지를 참배하는 성묘 신앙은
구약시대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던 산당신앙과 유사합니다.
기독교 인본주의 신앙은 추도 예배를 용인하지만
기독교 신본주의 신앙은 추도 예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인본주의 신앙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의 전형적인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앙입니다.
추도 예배를 드리고 가정이 화목하다면
그 화목의 끝은 종말론적인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을 대신하여 세속과 화평을 이룬다면
심판받은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세속화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