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들음의 감사, 믿음의 감사, 축복의 감사
로마서 10:16-21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후 곡물을 추수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랜 세월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정착하여 첫 소산물을 거둔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감격과 기쁨을 갖고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의 제사를 드렸던 절기가 바로 맥추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당시 신앙의 선배들처럼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올 한해 지나온 삶을 생각해 보면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 상반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참사인 세월호 참사입니다.
사고가 일어난 지난 4월 16일, 선내에서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는 방송만이 되풀이됐고 결국 수많은 학생이 세월호와 함께 바닷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사건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 발생지인 진도에 내려와 ‘아이들을 꼭 구하겠다.’고 단언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한 약속이 돼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잘못된 여러 관행들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으며 지금 검찰은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자인 ‘유벙언’ 전 세모그룹회장을 쫓고 있지만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외에도 전방 gop 근무자의 총기 난사 사건, 이건희 회장의 중병설 등을 비롯한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며 나아가는 날이 바로 오늘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말을 타고 숲 속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몇 십 마일을 간 다음에 드디어 부자는 반갑게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부둥켜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때 아들이 아버지께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참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요."
이 말에 아버지는 궁금해서 까닭을 물었습니다.
아들이 하는 말이 "제가 지금 아버지를 찾으러 오는 도중에 나무뿌리에 걸려 말이 세 번이나 쓰러졌어요.
그런데 저는 한군데도 다친 데가 없어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지 몰라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도 "그래, 참 감사할 일이구나. 그런데 나도 하나 감사하자구나.
내가 너를 찾아오는 도중에 내 말은 한 번도 나무뿌리에 걸려서 쓰러진 적이 없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참 우리 하나님 감사하구나."
오늘 이 시대를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에 비해 풍성한 것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며 말이 넘어졌으나 다치지 않은 사람은 그 돌보시는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아무런 일이 없이 무사히 상반기를 잘 지나오신 분들은 말이 넘어지지 않았음을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그럼에도’의 신앙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삶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그러나 막상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주셨을 때는 그를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사건인지 모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이스라엘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하실 일들을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생명의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내치지 않고 그들이 돌아오도록 종일 손을 벌리고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같은 동족의 입장에서 정말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고 사모하던 메시야를 같은 동족의 일원으로 보내주셨고 같은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영광된 일이고 축복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들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감사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감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말을 타고 가다가 세 번이나 넘어졌어도 감사해야 하고 무화과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없어도 감사해야 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기다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 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겠습니까?
이 구원의 축복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듣고 사느냐는 한 사람의 가치와 판단에 영향을 많이 줍니다.
어떤 것을 중요하게 듣고 살아가느냐는 한 사람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회사들은 광고비를 많이 투입하여 소비자들에게 상품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를 들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하면 우리나라 상위그룹의 중산층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위치한 한 학교에서 이런 문제가 시험에 출제되었습니다.
다음에서 가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하면서 1번에 침대가 있었고 4번에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80%의 학생들이 4번의 예문에 전화가 엄연히 있었는데도 1번 침대에 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고 선전한 한 침대회사의 마켓팅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람 앞의 등잔처럼 꺼져가는 이 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문화 유교문화권에서 수 천 년 동안 살아왔던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슬람 문화가 들어오기 전에 복음이 들어왔고, 공산주의 철학이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까?
당시 조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들을 수 있는 은혜, 들음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말씀, 우리 인생을 지도하고 교훈하며 이끌어주는 진리의 말씀을 많이 들으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삶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 올바른 믿음으로 인생을 이끌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들음의 은혜보다 더 감사한 것은 믿음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들음의 은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온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지만 믿지 아니하였다고 지적합니다.
믿음은 분명 들음에서 나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믿지 않았고 우리보다 1세기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던 일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상황이 그리 녹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500년 동안 유교문화가 이 땅을 지배하였고 그 이전부터 내려온 천년의 불교문화가 있었고 샤머니즘은 수천 년 동안 이 민족의 마음 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 밭에 복음이 떨어졌을 때 새들이 그 씨를 먹지 않았고, 돌 짝 밭과 가시밭길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중간에 시들지 않았고,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은 이 땅을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우리나라가 받았고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 믿습니다.
이 복음의 은혜는 이후 모든 분야에서 복음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였고 더욱 확대되었으며 더욱 큰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게 하였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며 독립운동을 하게 하였고 불의와 싸우는 용기를 갖게 하였습니다.
이 복음의 은혜는 교육에 눈을 뜨게 하였고 교육이 확대되면서 경제가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혜택은 이 땅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감사하고 그럼에도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면서 세월호 사건은 이 땅에 깊숙이 박혀있는 많은 부조리와 부정과 부패를 보게 했습니다.
후배 현직관료와 선배 퇴직관료 사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은밀한 커넥션을 말하는 이른바 관피아란 신조어는 수없이 많은 유사어귀를 양산해내었습니다.
세피아 법피아 해피아 교피아 감피아 법피아 등 수많은 신조어는 모든 분야에서 지금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통하여 잘 살게 되고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나라가 부강해진 이 땅을 무너트리는 여우는 다름 아닌 복음의 상실입니다.
복음의 뿌리가 시들어갈수록 잡초는 더욱 많아지고 이 땅은 점차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총리지명과 장관들 청문회를 통하여 우리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이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였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지성소를 떠나 성전 문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성전 문지방에 있던 영광은 다시 그곳을 떠나 성전 동문에 머물고 그 후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이스라엘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의 범죄는 여호와의 영광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이 땅에 머무르시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 여호와의 은총이 이 땅을 지켜주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으면 이 땅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축복을 계속 받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고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손을 벌리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종일 손을 벌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여러분들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아버지의 빨간 옷은 사랑과 열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으며, 머리는 빠져 있고, 오른쪽 신발은 다 떨어지고 헐어 밑창이 뜯어졌고, 왼쪽 신발은 벗겨져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을 감싸 안고 쓰다듬는 오른손은 어머니 손과 같이 작고 부드러우며, 왼손은 아버지의 손과 같이 크고 힘 있어 보입니다.
이는 부모의 손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의 모습에는 용서를 구하는 애절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뒤쪽에는 하인이 가락지와 신발과 송아지를 끌고 오는 모습도 보이고 그리고 왼쪽에 좋은 옷을 입고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이 있는데, 몹시 못마땅한 모습을 하고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돌아온 아들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누가복음 15장의 예수님의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기다리고 용서하는 마음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으로 돌아가고 믿음으로 돌아가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땅을 축복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잘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신앙으로 응답하면서 맥추감사절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며 실천해 나가야 할 줄 압니다.
이미 받은 선행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응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감사로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독일의 정치인 가운데 ‘마키 바덴’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적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면서 자신처럼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친구 하나가 헌 신발을 빌려주며 주일이니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마키는 마지못해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젊은 정치가 마키 바덴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구나.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데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그 불구자의 감화가 마키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항상 감사할 조건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를 위해 크게 일하는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지 않고 그럼에도 감사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시고 더욱 귀한 주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감사를 넘치게 하는 성도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심을 믿고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을 믿고 감사신앙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