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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수당전쟁 1편
수나라 백만 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https://www.youtube.com/watch?v=zq_ulX5Gn0g
4차례의 고구려 원정!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 동원!! 수나라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고구려원정을 감행했는가? 수양제는 고구려 출정을 위해 5년간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군수품을 운송하기 위해 양자강과 북경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확장공사를 마무리하고 612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여기에 보급부대가 200만 명, 군량 실은 배만 천 여리에 달했다고 하니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그들이 고구려에 패배하고 돌아간다. 불가사의한 고구려의 승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수나라는 이렇듯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 고구려를 수차례나 제압하려 했던 것일까? - 고구려 승리의 전략! 수나라 양곡수송로를 차단하라! 고구려는 어떻게 100만 대군 수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수나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북경지역인 탁군에서 요동벌판까지 무려 2,000리에 이르는 군량미 수송이었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에는 고구려군대가 북경의 북쪽, 거란지역인 내몽고 자치주 적봉지역에 주둔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적봉지역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북경을 향해 내려와 양곡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요동평야에 있던 수나라대군의 아사는 불을 보듯 뻔한일! 불가사의한 고구려 승리의 비책은 바로 거란과의 연합작전에 의한 수나라 양곡수송로차단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어떻게 수천 리를 돌아 수나라의 양곡수송로를 공격했던 것일까??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수당전쟁 2편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 꿇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ugjH4kOGs&t=441s
전쟁영웅 당태종이 후회한 단 하나의 전투, 고구려전! 수나라 패전의 쓰라림을 알고 있던 당태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행한 고구려원정! 강제징집된 군사가 아닌 자발적 전쟁참가로 구성한 사기충전한 군대! 대전략가 이정의 전술 지휘! 당차, 포석차등의 파괴적인 무기 동원! 과연 당태종은 고구려를 멸망시킬것인가? 그러나 이번에도 고구려원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또한 단순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 도하장비도 이미 불 태워버린 상태에서 굳이 늪지대인 요택을 건너 회군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젖어서 죽게 된다. 당태종은 “위징(직언과 극간을 서슴지 않았던 시중)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그가 군을 돌려 유성에 도착해서 전사자의 해골을 모아 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데 태종이 가슴 아프게 울자 병사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 주필산전투의 미스터리, 고구려는 참패했나? 당태종의 원정군은 건안성,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등을 연이어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압박해온다. 이제 안시성이 함락되면 당군은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할 상황! 안시성을 지키기 위한 고구려의 운명을 건 전투가 주필산 앞에서 벌어지는데... 중국사서는 이 주필산전투에서 안시성을 구하러 온 고구려 구원군 15만 명이 당나라군에 참패를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의 유속의 [수당가화]라는 글에는 다른 정황이 기록돼있다. “주필산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방 10리에 뻗쳐 있었다.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주필산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당의 6군에게 거의 승리를 거두려하자 태종이 이세적의 깃발, 흑기를 살펴보라고 명했다. 척후가 고하기를 흑기가 포위되었다고 하니 당태종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 당태종의 패배를 감추려는 역사조작의 가능성은 없는가? [자치통감]은 당태종의 고구려원정으로 ‘군마는 열에 일곱, 여덟이 죽고 원정군은 병사는 2,000명이 죽었다’다고 기록하고 있다. 4만의 고구려인이 목숨을 잃고 당나라군의 군마가 열에 일곱, 여덟이 죽었다면 엄청난 유혈접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나라 군사가 겨우 2,000명만 죽었을 수가 있을까? 오류가 없기로 소문난 ‘자치통감’조차 당의 참패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 평양성 함락의 위급상황! 연개소문은 중국본토에서 무엇을 했을까? 안시성 앞에 당나라 대군이 모여들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온 고구려 구원군 15만 명은 주필산전투에서 대패했다. 이제 안시성이 함락되면 당나라는 건안성을 치고 일시에 평양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연개소문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신당서]에는 당시 연개소문이 심양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음을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멀리 고비사막에 사신을 보내어 이 전쟁을 국제전으로 확대시키는데...
KBS 역사스페셜 –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https://www.youtube.com/watch?v=C0bexfXajkc
수나라, 동아시아 사상 최대의 전쟁을 일으키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300년 만에 통일한 수나라. 거란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당시 아시아 최대의 강대국으로 위용을 떨친다. 하지만 고구려는 대담하게도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거부한다. 이에 수나라는 612년, 철저한 준비를 통해 11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향해 진격한다.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 규모는 고작해서 5만~10만 명이었다. 100만의 수나라의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 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사동원이었다 - 살수대첩, 전쟁의 운명을 가르다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해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던 수나라. 하지만 요동성, 평양성, 살수에서 패하며 100만 대군은 치욕적으로 철수하고 만다. 특히, 30만 별동대까지 투입하여 전투를 벌였던 살수에서는 살아남은 수군의 수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가 바로 삼국사기에서 최고의 일이라고 격찬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은 청천강에 둑을 쌓은 다음, 수군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뜨려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이 전술은 실제로 가능했을까? - 고구려 승리의 전략1 - 청야입보 중국의 강력한 군대와 대항하며 성장해온 고구려는 그들만의 독특한 전략을 만들어낸다. 바로 청야입보전술이다. ‘청야’는 ‘들을 비우다’, ‘입보’는 ‘성을 굳게 지키며 저항한다’는 의미로 적이 공격해 왔을 때 쌀 한톨 남김없이 생활터전을 불태우고 성으로 들어가서 적의 현지조달을 막는 방어전술이다. 서양의 사례로 본다면 러시아군이 원정을 온 나폴레옹군을 상대했던 전략과 유사하다. 러시아군은 나폴레옹군을 러시아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후, 보급선을 끊어 철군하는 나폴레옹군의 후미를 쳐 큰 피해를 주었다. 을지문덕 또한 수나라군을 고구려땅 깊숙이 유인해 보급로를 차단하고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해 수나라군을 물리쳤다. - 고구려 승리의 전략2 - 최강 중장기병과 활 고대 세계 최강의 수나라군을 완파한 고구려군, 그들은 어떠한 무기로 싸웠던 것일까?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군 무사와 말이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최근 경주의 쪽샘지구에서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무사와 말의 갑옷이 한세트로 발굴되었다. 동아시아에 있어 완전한 형태의 철갑옷 발굴은 최초이다. 쪽샘지구의 철갑옷 발견으로 고구려 철갑옷의 존재를 확인한 제작진은 고구려의 철갑옷과 활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그 위력을 실험해보았다. 고구려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도 발견된다. 이 화살촉들은 오늘날의 특수강과 맞먹는 강도를 갖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무기들은 고구려의 뛰어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구려vs수나라, 제2차 고수전쟁 (feat. 살수대첩)
https://www.youtube.com/watch?v=H_qjqy0iIbc
隋(수)나라
610년. 수나라의 판도
정치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
황제 581년 ~ 604년 604년 ~ 618년 617년 ~ 618년 618년 ~ 619년 | 고조 문황제 세조 양황제 공황제 공황제 |
역사 | |
•성립 • 대륙 재통일 • 고수전쟁 • 멸망 | 581년 3월 4일 589년 2월 10일 598년 ~ 614년 619년 5월 23일 |
인문 | |
공용어 | 중국어 |
지배층 | 선비족 |
피지배층 | 한족 |
기타 |
자금성, 경산공원에서 바라본 자금성 전체 모습
선사시대[보이기]
신대[보이기] 삼황오제(기원전 4000년? ~ 기원전 2070년?) |
고대[보이기] 상고시대 하(기원전 2070년? ~ 기원전 1600년?) 상(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046년?) 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221년) 춘추 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453년) 전국 시대(기원전 453년 ~ 기원전 221년) 진(기원전 9세기 ~ 기원전 206년) 한(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 전한(기원전 202년 ~ 서기 8년) 후한(25년 ~ 220년) 신(8년 ~ 23년) 삼국 시대(220년 ~ 280년) 위(220년 ~ 265년) 촉(221년 ~ 263년) 오(229년 ~ 280년) 진(265년 ~ 420년) 서진(265년 ~ 316년) 동진(317년 ~ 420년) |
고전후시대[보이기] 5호 16국 시대(304년 ~ 439년) 남북조 시대(386년 ~ 589년) 수(581년 ~ 619년) 당(618년 ~ 907년) 오대십국시대(907년 ~ 979년) 송(960년 ~ 1279년) 북송(960년 ~ 1127년) 남송(1127년 ~ 1279년) 대요(916년 ~ 1125년) 서하(1038년 ~ 1227년) 대금(1115년 ~ 1234년) |
근세[보이기] 대원(1271년 ~ 1368년) 대명(1368년 ~ 1644년) |
근현대[보이기] 대청(1616년 ~ 1912년) 중화민국(1912년 ~ 현재) 중화제국(1915년 ~ 1916년) 중화인민공화국(1948년 ~ 현재) |
수(隋, 581년 3월 4일 ~ 619년 5월 23일)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서진이 멸망한 후 분열했던 중국을 약 300년 만에 재통일한 국가다.
그러나 제2대 황제인 양제 때 폭정으로 말미암아 약간의 혼란기를 거치고서 멸망하였고, 그 후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목차
역사~수나라 건국
양견 아버지인 양충은 북위가 서위, 동위로 분열될 때 우문태를 따라 서위를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북주가 건국된 뒤 수국공(随国公)의 작위를 받았다. 568년에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과 수국공을 물려받게 되었다. 무제는 숙적인 북제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남쪽의 진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북쪽의 돌궐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576년에 병사했다.
무제의 뒤를 계승한 선제는 기괴한 인물로 5명의 황후를 가졌다. 그중 한명이 양견의 장녀였던 천원대황후 양씨 여화(麗華)였고, 선제의 또 다른 황후인 천대황후 주씨가 우문천을 낳았다. 이 우문천이 바로 뒤의 정제였다.
선제의 기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며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하며 정무를 내팽개쳤기에 정제의 뒤를 보살피던 양견에 대한 성망(聲望)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580년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섭정으로써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무천진 군벌 내 실력자들은 양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 울지형(尉遲迥)에 의한 것으로 한때 양견이 장악한 관중지역 이외 모든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양견은 교묘하게 이것을 각개격파하여 북주내에서 패권을 확고히 다졌다.
그 해 말에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은 사후 문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국 통일
이미 북주 무제가 중국 통일을 진행했었으나, 신중한 문제 양견은 세밀하게 준비했고, 장성 복구하여 북쪽 돌궐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고, 한구(邗溝) 개착(開鑿)으로 회수와 장강 연결해서 보급로를 확보한다. 뒤이어, 곧 북조 괴뢰정권인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고. 588년 문제는 기어코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이었고, 과장이지만 51만 8천이라는 대군으로 다음해(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우물에 숨지만 잡혔다. 진나라 멸망 이후(184년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약 405년) 기나긴 분열 시대가 종결되었고, 사회가 안정되자 인구는 2천600여만명(멸망 무렵)에 이르도록 증가했다.
개황의 치(開皇之治)
610년의 수나라-개황의 치 사이에 행정구역이 재편되었다.
문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다음과 같이 내정 개혁을 진행했다.
《주례》와 북주의 정책 진행을 중지했고,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개혁을 진행했다. 581년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였는데, 이 율령은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간소화해서 알기 쉽게 고친 것이다. 이후 이 개황율령을 당나라 율령에서도 답습했다.
대대적으로 관리제도를 개혁했는데, 최고기관으로써 상서성(尚書省), 문하성(門下省), 내사성(内史省)의 3성을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 문서행정기관인 6부(六部) 말하자면 인사담당인 이부(吏部), 재정담당인 도지부(度支部), 의례(儀禮)담당인 예부(禮部), 군사담당인 병부(兵部), 법무담당인 도관부(都官部), 토목담당인 공부(工部)를 두었다. 그 아래 실무기관인 9시(寺), 게다가 이를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대(御史台)를 설치했다. 이때까지 지방에서 사용하던 주(州), 군(郡), 현(縣)이란 3단계 구분을 없애고, 주와 현의 2단계 구분으로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문제 치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치적인 과거(科挙), 더 정확하게는 공거(貢挙)를 실행했다. 남북조 시대 때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따라 관리 임명권이 귀족 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한다는 매우 개방적인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관리 임명권을 황제의 손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이점도 노렸다.
이렇게 문제에 의해 정비된 여러 제도는 거의 대부분이 후에 당나라가 물려받아, 당나라 300년의 역사를 지탱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당시 연호에 의거해 개황의 치 라고 불렀다.
양제의 치세
문제 황후였던 독고황후는 매우 강한 성격의 여성인데, 문제에게 "자신 이외 여성에게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는 서약을 맺게 하였다. 이게 당시 황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독고황후는 문제 주위를 엄격하게 감시하며, 문제가 가까이한 여성을 경계하였다.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 태어난 맏아들 양용이 황태자가 되었지만, 양용은 놀이와 여색을 즐긴 탓에 검소한 문제와 정조를 중시한 황후 모두에게 미움을 사 폐위당했다. 그 대신 부모 비위를 맞춘 차남 진왕 양광이 황태자에 올랐다.
604년 문제가 병으로 사망하고서 뒤이어 황제에 오른 차남 양광이 바로 양제다. 양제는 즉위 후 즉시 동생들을 계략으로 살해하여 라이벌을 제거했다. 이때문에 문제의 죽음에 대해서도 양제의 모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생겨났다.
양제는 검소함을 즐기던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사치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기피하던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진행하여 완성시켰다. 주요한 것으로는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를 대폭으로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에까지 서로 연결하게 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중단한 고구려 원정을 3번에 걸쳐 실시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여러차례 진행된 대규모 토목과 군사행동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일어난 양현감의 반란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확대되었다. 양제 자신은 순행 도중에 강도(江都)에 머물면서 반란진압 지휘를 맡았으나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었다.
滅亡(멸망)
수나라 말기 군웅 할거
반란이 확대되면서 패권을 잡으려는 군웅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현감의 참모를 맡았던 이밀은 북주의 8주국(八柱國) 이필(李弼)의 손자로써 관롱귀족집단중에서도 상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전사후 낙구창(洛口倉)이란 수나라의 거대 식량저장기지를 손안에 넣는 데 성공하여 대규모의 백성을 모았다.
이밀과 격렬하게 항쟁한 사람은 서역 출신으로 수나라 장군을 지냈던 왕세충이었다. 고구려 원정군에서 탈주하여 같은 탈주병들을 모아서 하북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은 두건덕이 있다. 그리고 수나라의 태원태수로 있던 당국공 이연은 대흥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양유를 옹립했다.
잇단 보고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술에 취해 듣지 않다가 618년에 불만을 품은 근위군들에게 살해당했다. 근위군들은 우문화급의 주도하에 진왕 양호를 옹립하고 북쪽으로 귀환하는것을 희망했으나 도중에 두건덕의 군에게 하여 패망당했다.
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한다. 같은 시기 양제의 죽음을 알게되어 618년 낙양에 있던 월왕 양동은 왕세충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되어 이로써 수나라는 3대 39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양제의 시호인 양(煬)은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수나라 멸망 연도에 대해서
이 기사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 연도는 619년이라 할 수 있으나 문헌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은 618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수나라 멸망 시점을 어느 시기로 보는냐에 따라 다르다.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인 《수서》 등에서는 당나라가 수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시점인 2번째 설을 취했으나 여기서는 3번째 설을 취했다.
文化(문화)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왕조였으며, 남쪽의 한족계 왕조와 북쪽의 북방민족계 왕조들의 문화가 서로 합쳐졌다. 그리고 수의 문화는 당나라 때에도 계승된다.
歷代 皇帝(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 - | 강왕 (康王) (수 문제 추숭) | 양렬(楊烈) | - | - | - |
- | - | 헌왕 (獻王) (수 문제 추숭) | 양정(楊禎) | - | - | - |
- | 수 태조 (隋太祖) (수 문제 추숭) | 무원황제 (武元皇帝) | 양충(楊忠) | - | - | - |
제1대 | 수 고조 (隋高祖) | 문황제 (文皇帝) | 양견(楊堅) | 개황(開皇) 581년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 581년 ~ 604년 | 태릉(太陵) |
제2대 | 수 세조 (隋世祖) (황태주 추숭) | 양황제 (煬皇帝) (공제 추숭) (민황제(閔皇帝)) (두건덕 추숭) (명황제(明皇帝)) (황태주 추숭) | 양광(楊廣) | 대업(大業) 605년 ~ 618년 | 604년 ~ 618년 | 양제묘(煬帝墓) |
- | 수 세종 (隋世宗) (황태주 추숭) | 효성황제 (孝成皇帝) | 양소(楊昭) | - | - | - |
제3대 | - | 공황제 (恭皇帝) | 양유(楊侑) | 의녕(義寧) 617년 ~ 618년 | 617년 ~ 618년 | 장릉(莊陵) |
비정통 | - | 상황제 (殤皇帝) (진왕(秦王)) | 양호(楊浩) | - | 618년 | - |
제4대 (비정통) | - | 공황제 (恭皇帝) (애황제(哀皇帝)) (황태주(皇泰主)) | 양동(楊侗) | 황태(皇泰) 618년 ~ 619년 | 618년 ~ 619년 | - |
610년의 수나라-개황의 치 사이에 행정구역이 재편되었다.
Sui Dynasty 589~609 CE.png
외부 링크
수나라 황제와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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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토 2020-10-31 오후 5:33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