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2월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난 선생은 집안은 어려웠으나 머리가 영민하여 동네에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이 상실되어 가던 상황을 목격하고, 을미의병에 참여한 부친과 뒤에 헤이그특사였던 이준 열사의 가르침을 받아 민족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1903년 보국안민·광제창생을 내세우는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하고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자 문창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친일 주구 노릇을 하던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처단을 시도했다. 1910년대 천도교의 종합강습소 강사, 대구 대교구장, 중앙총부 서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직전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교정과 인쇄 작업을 도왔다. 3·1운동 직후에는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국내외의 임시정부 수립활동에 관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920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의 천도교인들을 결속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천도교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안창호를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운동 노선에 반대하여 북경으로 이동한 뒤에는 1921년 4월 박용만 등과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하였다. 여기서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 독립운동 노선의 관철을 힘써 주창했다.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창조파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노령에 임시정부를 새롭게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1925년 흑룡강성 길림으로 이주한 뒤 신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28년에는 신민부에 참여하고 민정위원이 되어 3부 통합운동을 앞장서 벌여 나갔다. 신민부는 용인출신 김혁선생이 중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1930년 이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9·18 만주사변 후에는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통일국가 수립에 헌신하였고, 천도교와 민주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병으로 쓰러져 1967년 11월 22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첫댓글 천도교나 대종교 등 민족의 얼에 바탕을 둔 종교에 훌륭한 인물들이 유입되지 못하여 답보 상태에 지리멸렬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애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