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의 꽃이 이렇게 화려할 수 있다는 것, 이팝나무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세상으로 눈으로 뒤덮인 흰색의 아름다음 보다 초록을 바탕으로 한 5월에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나는 무궁화도 좋지만 우리나라 국화로 이팝나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팝나무가 원래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자생하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에서 열리는 하얀 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자기 향상"입니다.
그러니 이팝나무 꽃 사진을 연인에게 보내는 것은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계절의 여왕인 이 시기에 이 꽃을 보면서 자기 계발에 노력한다면 분명히 자기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팝나무의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쌀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먹을 것 걱정 안하고 세계 20위 이내의 선진국 수준에 이른 것은
불과 일이십년 밖에는 안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시대에 대부분 사람들은 먹는 것 자체를 힘겨워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봄부터 다음 수확 때까지 먹을 것이 없는 힘겨운 시기인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까지 먹어야하는 시기, 그때가 바로 이 꽃이 피는 시기입니다.
이때에 쌀밥을 먹으려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녹봉을 받아야 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쌀밥을 왕인 이씨가 주는 밥이라하여 이밥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이팝으로 발음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유래는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 절기에 꽃을 피는 나무라하여 "입하나무"라 하였고 이것이 "이팝나무"로 발음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팝나무와 관련하여 보릿고개와 관련한 슬픈 전설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명문가에 며느리로 들어간 한 여인이 있었는데 시어머니의 구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살만한 형편인 데도 보릿고개에는 먹을 것조차 제대로 주지않았습니다.
이런 일에 남편마저 무관심하여 며느리는 의지할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사가 다가왔고 며느리는 제사에 쓸 쌀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밥이 익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밥풀 몇개를 입에 넣었는데
그 장면을 시어머니가 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밉다밉다하니 이제는 젯밥에도 손을 대느냐?"며 막말에 폭언을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너무 서글퍼 뒷산에 올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다음해 그곳에는 나무가 한그루 자라났는데 입하일 즈음에 쌀밥과 같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났습니다.
그 꽃을 사람들은 이팝나무라고 부르고 며느리의 한많은 삶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또다른 전설도 있습니다.
이것도 보릿고개가 원인이었는데 효심 깊은 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시 시대적 배경은 조선 중기로 전란으로 보릿고개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어느 시골마을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딸이 있었는데 밥을 지으려고 하니 쌀이 바닥이었습니다.
딸은 밥을 지어 아버지 밥상에 드리고 본인은 이팝나무 꽃으로 가득담아 아버지가 같이 밥을 먹고있다는
생각을 들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듬해 병이 나았지만 잘 먹지못하던 딸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딸 묘지에서 이팝나무가 자라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가 화려하게 피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설도 있는데 이번에는 효심 깊은 아들과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위의 효녀딸 이야기와 유사한데 효자가 병든 어머니에게 쌀밥을 해드리고
본인은 이팝나무꽃으로 공기밥을 가득 채웠습니다.
아들과 노모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마침 그곳을 지나던 변복한 임금님이 보고,
자초지정을 알아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된 임금님이 많은 쌀을 하사하고 그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합니다.
즉 이씨 성을 가진 왕으로부터 이밥을 받을 수 있게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팝나무는 멋진 꽃과 같이 아름다운 꽃말과 이름의 유래, 그리고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꽃이 쌀밥으로 보였을까요?
우리역사상 최고로 부유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꽃의 꽃말처럼 영원한 사랑과
자기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할 때입니다.
이팝나무를 보고 오히려 풍요로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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