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가 ‘최고 존엄’ 숭배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1회>
◇ 20세기 공산주의는 선의로 포장한 파멸의 길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정의를 부르짖는 권력자가 불의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금욕이 파산을 부르기도 한다. 탐욕이 빈민을 구제하기도 한다. 이타심이 빈곤의 악순환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기심이 번영과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파시즘을 낳고, 권위주의가 민주화의 초석을 놓기도 한다. 인간의 현실은 복잡하고, 역사의 궤적은 난해하다. 단순한 일반화는 어리석다. 섣부른 예측은 위태롭다.
시경(詩經)에 적혀 있듯 지혜로운 사람은 “살얼음 위에 올라선 듯(如履薄氷)깊은 물 앞에 선 듯(如臨深淵)” 조심조심 돌다리를 두드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격정이 실패를 부르고 모험이 파멸을 초래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럽의 속담대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과연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은 선의로 포장된 파멸의 길이었다.
20세기 동구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드라마틱하게 실패했다. 공산주의 명령경제는 미증유의 권력 집중과 비효율적 자원 배분을 초래했다. 사적 소유권을 박탈당한 개개인은 국가의 농노로 전락했다. 그들은 경제활동의 자유를 빼앗겼다. 수천 년간 개개인은 머리를 써서 유용한 상품을 만들어내고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 그들은 코뮌의 우리에 갇힌 가축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경제활동의 지혜와 진취적 개척의 정신은 파괴됐다.
<1991년 11월 13일 구동독 지역 베를린의 레닌광장에서 해체되는 레닌의 석상. 129조각으로 쪼개진 이 석상은 모래둔덕에 매장됐다. http://germanhistorydocs.ghi-dc.org
◇ “인민은 당의 명령에 복종하라” 공산주의 정권의 인격 숭배 강요
공산혁명으로 중국 전 국토의 모든 재산이 중앙정부에 귀속됐다. 중앙정부의 모든 권력은 고작 3백~4백 명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에 집중됐다. 중공중앙은 다시금 정치국 상무위원 7~9명에 종속됐다. 정치국은 최종적으로 최고영도자의 지휘 아래 놓였다. 만민평등과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권인데, 일인지배의 극적인 불평등이 나타났다. 이율배반의 모순상황을 봉합하기 위해 20세기 공산정권들은 예외 없이 ‘인격숭배’를 추진했다.
공산정권의 인격숭배가 어떻게 가능할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을 역사적 합법칙성을 발견하고 공산혁명의 전략을 제시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라 칭송한다. 과학기술의 복잡한 원리를 몰라도 인민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몰라도 인민은 인간해방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 혜택의 최대화를 위해 인민은 무조건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무조건적 복종이 바로 혁명적 자기헌신으로 미화된다. 인민 개개인은 “나쁜 머리”를 써서 자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묘하고도 천재적인” 혁명적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가축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라는 주장이다. 결국 인격숭배는 노예의 도덕이다. 플라톤 철인통치 모델의 조악한 복사판이다. 전체주의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백전백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만세!”
◇ 인격신이 된 마오쩌둥…세뇌 당한 추종자들 “마오는 태양!”
마오쩌둥 인격숭배는 문화혁명의 이념적 기둥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 중공정부는 지속적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하고 선전했다. 1951년부터 1977년에 걸쳐 ‘마오쩌둥 선집’은 다섯 권의 정본으로 출판됐다. 이 선집은 1925년 이래 마오쩌둥이 남긴 소논문, 팜플릿, 연설문 등 모든 저작의 집대성이다.
1964년 1월 5일 국방장관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의 정신무장을 위해 '마오쩌둥 어록'을 출판한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홍보서(紅寶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팜사이즈(palm-size) 작은 책자라서 서구에서는 "작은 붉은 책(A Little Red Book)"이라 불렸다.
최초에는 23개 주제 아래 200개 어록을 채록한 이 책자는 곧 25개 주제 267개 어록으로, 이후 33개 주제의 427개 어록으로 증보됐다. 공산당, 계급투쟁, 대중노선 등 공산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청년, 여성, 문화예술, 학습 방법 등 사회발전과 자기향상의 교안까지 담긴 마오쩌둥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편찬자 린뱌오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수많은 대중이 이해하는 순간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고 무한한 권력의 정신적 핵폭탄이 된다!” 과연 홍보서는 문화혁명의 바이블이 되었다.
<1967년 경 단체로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있는 홍위병의 모습
1950년대까지 공산권에선 1937년 편찬된 스탈린의 “소련공산당사: 속성코스”가 가장 널리 보급된 관제 베스트셀러였다. “마오쩌둥 어록”은 그보다 수백 배를 웃도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1967년 5월경이면 “마오쩌둥 어록”은 공산권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후 이 책자는 전 세계적으로 65억 부 정도가 유포됐다. 성경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소홍서”의 편찬과 출판을 관장한 린뱌오는 군에서부터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개시했다. 머잖아 마오는 살아 숨 쉬는 불멸의 인격신이 된다. 1964년 이후 그는 중국 전역의 방방곡곡에 “태양”으로 강림했다. 당·군·민 모두 날마다 마오의 어록을 읊조렸다. 마오는 혁명의 지도자를 넘어 인생의 스승이 되었다.
밤낮으로 “마오쩌둥 주석 만세!”를 외쳐대는 수억의 인민대중이 없이 문화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중공정부의 선전 전략에 의해 날마다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조정되고 세뇌당한 마오쩌둥의 추종자들이었다. 요컨대 문화혁명은 인격숭배의 결과다. 인격숭배가 낳은 관제의 대중운동이다.
◇ 마오의 '건망증' 지적한 언론인 덩퉈, 결국 스스로 목숨 끊어 1962년 비판적 언론인 덩퉈(鄧拓, 1911-1966)는 "건망증 전문치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건망증을 보이는 사람은 늘 식언을 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그 사람이 일부러 미친 척하고 바보 시늉을 하지 않나 의심케 한다. 절대로 신임할 수 없다! 극심한 증상이라도 드러나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선 아니 된다. 억지로 말을 하고 일을 하면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라면 이 글이 마오쩌둥 비판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마오쩌둥 1957년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하며 지식계의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한 후, 곧바로 “반우파운동(1957-1959)”을 일으켜 50여만의 지식인들을 솎아내 숙청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무서운 “건망증”이 아닐 수 없었다.
1965년 11월 30일 문혁의 뇌관이 된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평”이 ‘인민일보’에 게재된다. 그 문제의 글을 게재하면서 ‘인민일보’의 편집자는 마오쩌둥의 1957년 3월 12일 연설문을 길게 인용한다. “마오 동지가 말씀하셨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과학, 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보증이 된다. 만약 옳게 쓴 글이라면, 그 어떤 비평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당시 인민일보의 편집권은 베이징 시장 펑전이 쥐고 있었다. 결국 펑전이 마오쩌둥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춰내 마오쩌둥의 모순을 지적하는 소극적 저항이다.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 제 5면.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 바로 위에는 1957년 모택동의 연설문을 인용하여 “학술연구”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편집인의 견해가 실려 있다.> 
언론인의 저항은 그러나 문혁의 쓰나미 앞에선 작은 집채도 못되었다. 반 년 동안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역사학자 우한을 변호했던 덩퉈는 결국 인격살해의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1966년 5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펑전은 곧 홍위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오쩌둥 치하 중공정부는 중앙권력의 권력집중을 지속하기 위해 인격숭배를 강요했다. 만민평등의 사회주의 이념이 어떻게 인격숭배와 공존할 수 있나?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의 정신적 타락이며 이념적 파산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평등을 내건 사회주의 정권이 "최고 존엄" 운운할 순 없다. "최고 존엄"이란 전체주의 전제정의 독재 유지 수단일 뿐이다. 마오이즘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