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16/한글날]염수분사구간鹽水噴射區間?
오늘이 한글날인 줄도 몰랐다. 누구라도 그러기 쉽지만, 세종대왕의 애민愛民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한글날만큼은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어 반성했다.
대체휴일을 낀 연휴, 처가 식구들과 양양에서 2박을 하고 귀경하는 중, 고속도로 곳곳에 서있는 도로표지판 중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 <염수분사구간>이 그것이다. 한자어漢字語투성이, 한 자 한 자 쓰라면 쓸 수는 없지만, 읽을 수는 있겠기에 무슨 뜻인지 짐작은 할 수 있다. 겨울철 눈이 쌓여 길이 미끄러울 때 염화칼슘 녹인 물을 뿌리는 구간이라는 것일 게다. 하지만 꼭 그렇게 써야 하는 것일까. 염수鹽水는 소금물, 분사噴射는 뿌리다, 구간區間는 곳이나 지역일 터. ‘소금 염’‘뿌릴 분’‘쏠 사’자를 제대로 쓰거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한자말로 쓰는가. 언중言衆의 이해가 쉽지 않은 한자어로 쓰면 유식하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말글 ‘소금물 뿌리는 곳이나 구간’이라고 쓰면 어디 덧나는 것일까. 염수는 소금물을 일컫지만 정확히는 염화칼슘을 녹인 물이다. 대국어사전에도 그렇게 올라 있으니 그냥 써도 무방하리라. 한국도로공사에서 했을 터이니, 정말 이것 하나라도 시급히 고치면 좋겠다. 박수 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한글날이라고 새삼 한글사랑 운운하며 티를 낼 생각은 전혀 없지만, 또 하나 꼴불견 안내판이 떠올랐다. 일반국도 17번 임실에서 오수 가는 길, 우회전을 하면 1km쯤에 내 고향마을이 있다. 하필이면 우회전 하는 사거리 언저리에 <펫추모공원 4km>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을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영어 펫pet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꼭 그렇게 써야 하는 것일까. 애완동물愛玩動物이라고 쓰면 안되는 것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애견愛犬이라 했는데, 언제인지 고양이까지 통칭하여 반려동물伴侶動物이라 하더니, 이제 숫제 영어로 펫이라 한다. ‘사람 인人’변이 들어가는 반려라는 글자를 동물에 붙인 것도 기분이 나쁜 판인데(왜냐하면 반려동물이란 말은 사람끼리의 평생 짝꿍을 뜻하는 반려자伴侶者를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만간 펫호텔을 지을 계획이란다. 애묘愛猫(애완고양이)에 이어 애완돼지(愛猪)까지 집안에서 버젓이 활개를 치는 집이 많다하니, 아아- 이 참담한 노릇을 어이할 것인가. 제 부모 수발은커녕 반려동물에 들어가는 비용은 물쓰듯 아까워하지 않는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인저!
나는 한글전용주의자도 아니고 어쩌면 한자를 더 사랑하는 지도 모르지만, 쓰기커녕 잘 알거나 읽지도 못할 한자어와 영어를 비롯한 세계 각나라의 언어(외래어가 아닌 외국어)가 미친 듯 춤을 추는 ‘외국어 홍수洪水’의 나라에는 살고 싶지 않다.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先進國’의 나라, GNP 3만달러가 넘는 나라다운 나라, 우리 고유의 문화文化가 살아 숨쉬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게 나만의 욕심일까. 방탄소년단이 지구촌에 우리말과 글을 전파하는 전도사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 한심하고 또 한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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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졸문을 읽은 지인들이 '백퍼 공감'한다며 댓글을 몇 개 보내왔다. 그중에 어느 사무실 유리창에 붙여놓은 안내쪽지를 사진으로 보내왔다.
<용무 계신 분>의 '계신'은 맞는 것일까? 그냥 '있는'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칭어미를 마구마구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병원, 관공서, 식당 등에서 우리가 흔히 듣는 정체불명의 화법을 보자.
'주사 놓으시게요' '이쪽으로 오실 게요' '신청서 쓰실 게요' '가만히 쉬실 게요' '아픈 부위를 주무르시게요' 등의 '-ㄹ게요'식 표현이 그것인데,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고 이것은 아니다싶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작(생각, 연구 등)하도록 하겠습니다'도 췌언贅言이다. '시작(생각, 연구 등)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말조차 절약되고 뜻이 명약하지 않은가. 이것도 일본말의 잔재이거나 영어 번역투 문장에서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꼴불견임에 틀림없는 것같다. 한 후배는 이제껏 반려동물을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동물'인 줄로 알았다고 하여 쓴웃음을 짓게 했다. 또 한 친구는 한자로 된 표지판들을 보면서 같은 생각이라며 글자수를 줄이려하는 것도 있겠지만 한글의 맛을 모르는 꽉 막힌 공무원들이 너무 많은 것같다고도 했다. 일단, 염수분사구간이라도 고친다면 졸문을 쓰는 보람이 있지 않을까.
첫댓글 세종대왕님이 흑흑하신다. 염수분사구간이라니, 소금뿌리는 구간이 듣기 헐 낫다.
그렇다고, 너무 소금 뿌리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