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 종교는 개신교. 아호는 산남(山南). 본관은 풍천(豊川).2. 생애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 및 형제들과 함께 맹산을 떠나 평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한동안 어머니 혼자서 김동길 자신을 포함한 4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장성한 후에도 아버지를 미워하며
끝내 김동길 그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교원 자격시험에 통과해서 평안남도 평원군의 괴산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46년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와 함께 야음을 틈타 월남했다.
이렇게 서울에 도착한 김동길은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다니던 중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과 함석헌 등을 좇아
역사학과로 전과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미국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라는 백낙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후에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랄한 사회풍자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유신 이후에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같이 체포되어 구속된 사람 중에 하나가 당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였던 김찬국 전 상지대학교 총장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해직되었고,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또다시 해직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수필이나 신문칼럼만 간간히 쓰면서 칩거하였다.
1984년 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손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년 4월, 난데없이 삼김씨는 정치관두고 고향가서 낚시나 하라.
이제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노릇을 해야 한다는
신문칼럼(일명 낚시론 및 40대 기수론)을 발표하였다(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양김씨와 민주화세력이 관제야당을 제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사정권이 아니라
야당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은 재야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았다.
1991년 4월 강의 도중에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후 삼김정치 청산과 새정치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한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최고위원직을 보장받고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면서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통일국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속 국회의원이 절반 이상이 탈당하는 등 당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1994년 5월 박찬종이 이끌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권을 놓고 김동길과 박찬종 양쪽 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전당대회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였다. 박찬종계가 다시 이탈하고 김동길은 신민당을 장악했으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신민당을 이끌고 1995년 1월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였으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공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반공, 반북 성향의 인사가 되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주최하는 집회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우익 언론과 각종 인터넷매체에 수시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살펴보면 대략 20년 주기로 정치적 스탠스가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권위주의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민주화운동가 및 지식인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로는 권위주의 정권과 집권여당 뿐 아니라, 민주화를 주장하는 야당과 (진보적)재야까지 구태정치라면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현실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제3세력을 자처하는 재벌회장(정주영), 기성정치인(박찬종)과 함께 정치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반공, 반북을 외치는 인사가 되었다.
특히 노무현이 대통령 퇴임 후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조사가 시작되자
라며 자살을 종용하는듯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논란을 빚었으며, 나중에 정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 국민장 이후엔
라고 올렸다. 다만, 19대 대선 직후 친구인 문재인이 당선되자, 눈치가 보였는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공격했어도, 노무현은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저 정신 나간 늙은이가 미쳤나" 같은 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참 미안하다고... 하지만, 기사에서도 보이듯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후 자살하지 말라고 해 또 비난받았다. 출처
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정호용 전 국방장관, 박재완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국회의원, 심대평 전 충남지사, 윤상현 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소설가 이문열, 강창희 전 국회의장,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가수 이미자 등이다.
2012년 11월에는 사퇴한 안철수 후보를 가리켜서 “만에 하나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임기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아니면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2014년 설립된 우파 성향 정치 원로들이 모인 한민족명예원로회의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현재는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종합편성채널의 패널로도 종종 나오고 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 22일까지 조선일보에서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를 연재하였다.
김활란과 이광수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어낸 적이 있다.
또한 최남선 편에서는
라는 글을 올렸다. 기타 인물에 대한 에세이
전두환 편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징역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라고 적었다. 그의 과거 행적과 비교하면 180도 매우 다른 행보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세계를 강타한 2021년 2월 12일에는 9년전 암살 당했을 거라고
폄하했던 안철수와 함께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여기서 안철수는 현재의 거리두기가 아무 효용이 없다며 과학적 기준을 세우면
자영업자들의 영업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아예 안철수 지지를 선언하며 선거대책위원회 후원회장에 영입되었다.
2022년 10월 4일 항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