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두 안으로 물이 스며들었는지 발이 축축해지며 미끈거렸다.
35년 전, 젊은 패기로 직장 선배와 친구들과 함께 여의도에 사무실을 열고 1년쯤 지난 어느 겨울날, 그날따라 눈이 많이 내렸다.
신월동 집으로 가려면 영등포로 버스를 타고 나와 다시 신월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영등포 역 앞에서 내려 영등포 시장 쪽으로 걸어오는 도중에 낡은 구두는 그 잠시를 못 참고 바깥의 물기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집에서 나의 퇴근만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리니 마음이 바빠졌다.
갑자기 많이 내린 눈이라 군데군데 교통이 두절되었는지 버스는 쉬 오지 않았고, 다른 방향의 버스도 마찬가지였던지 버스 정류장은 도로로 나가선 사람들까지 더해져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했었다.
드문드문 버스가 나타나면 서로 앞줄에 서보겠다고 버스를 향해 우르르 달려가고, 애써 앞줄에 서보았자 이내 몰려든 사람들 틈에 이리저리 밀려, 버스를 올라타기라도 하면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택시들은 모처럼의 호황에 합승 손님들을 태우느라 바빴지만, 사업이랍시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한 푼의 돈도 아쉽던 시절이라 그 마저도 선뜻 "신월7동~~" 목청 높여 부르지도 못하고, 버스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머리에 눈은 쌓이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습기와 한기에 몸은 자꾸 움츠려드는데, 발은 왜 그리 시리던지...
한 삼십 분쯤 기다렸을까?
학수고대하던 버스가 왔지만, 거쳐온 정류장에서도 사정이 비슷했을 테니 차 안에는 더 이상 밀고 들어갈 여지도 보이질 않고, 그래도 악다구니를 쓰며 버스를 타보려고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우물쭈물 밀려나, 다음 버스는 괜찮을까... 기다리던 날,
나는 내 차가 있었으면 싶었다.
그날의 소망은 다시 일 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이루지 못하고 잊혀지고 있었는데, 그다음 해 2월에 기다리던 내 아이가 태어났다.
동네 산부인과라 분만 오분 전까지 아내와 함께 호흡하고 아내와 함께 힘을 주다가, 아내가 분만실로 들어간 잠시 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연속극에 나오는 것처럼 힘찬 울음소리가 아니라... 간신히 내는 듯한 소리, 두려움에 떠는 듯한 소리, 추워서 움츠린 듯한 소리. 갑자기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온몸을 소름 돋게 하는 전율이 지나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인연의 고리가 엮어지는 듯한 지릿지릿한 느낌과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다양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사랑, 죄책감, 책임감, 용기, 자존심, 미래, 불안, 고통, 다짐... 짧은 순간 순서 없이 정말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오갔다.
그때 정신을 집중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싹~!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아기의 미약한 울음소리가 잦아들라치면 어김없이 그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분만실 안으로 달려들어가 그 의사를 마구 패버리고 싶었다.
호흡을 위해서 그런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갓 태어나 불안하고 외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울 그 아이를 거꾸로 들고 한 대도 두 대도 아니고... 그렇게 여러 번을 때리다니 울분에 치를 떨면서 나의 초보 아빠 첫날이 시작되었다.
산고에 지친 아내 옆에 누워 더 작을 수 없는 코로 색색 숨을 쉬고, 더 작을 수 없는 입으로 오물오물 보리차를 받아먹고... 첫 똥을 누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그 검은빛의 아이 똥이 하나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던 그 특별했던 날, 아내 옆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고 자꾸 가슴만 떨렸었다.
아... 드디어 내가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구나...
퇴원하던 날, 딸아이를 강보에 꼭꼭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2월 초였으니 매서운 겨울의 끝바람이 옷 속을 헤집으며 파고들던 날, 빈 택시는 잘 보이질 않았고, 모처럼 빈 택시가 보이면 강보에 싼 아이와 그 아이를 위한 많은 짐 보따리들을 보고는 그냥 휙 지나쳐 가곤 했다.
더 감쌀 수도 없는 강보를 자꾸만 여미면서 아이가 추울까 걱정을 하고, 혹 산후에 아내가 한기를 먹으면 어쩌나 걱정도 하며 종종 발돋움질로 택시를 기다렸던 날...
나는 간절히 내 차가 있었으면 싶었다.
그해 시월 소망하던 차를 산 날, 작은 소형차였지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참 기뻤었다.
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일지라도 오버랩이 되네요
생명의 신비는 어떤것 하고도 비교하지 못한다는것
그리고
산고의 시간을 겪고 탄생한 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어떤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한테 과거의 시간이라는 것은
지금을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듯 합니다
소망하던것을 쟁취한 순간의 기쁨이 눈에 그려지네요
행복하고 고맙습니다
지나온 발자취마다 그때를 기억하게 만드는 상징들이 남아있었더라고요. ㅎ
첫차... 소유했던 물건들 중 가질 때 가장 기뻤던 소유물이었어요.
그렇다면 34년 전에 차를 샀다는 거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우하하하하하
나는 30년 전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그것두 운전 학원을 다니고 필기 한번 코스 한번 떨어지고나서야 땄습니다
그리고는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서 남보다 늦게 28 년 전에야 차를 장만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차 운전이 적성에 안맞고 술도 자주 하는지라 운전을 몇번 하다가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내가 번돈으로 그때부터 열심히 차를 타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전철 매니아 이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없다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지도 않읍디다
나도 마음자리 님처럼 미국에서 생활 했으면 거기는 차가 없으면 안되니까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전철만 타고 다녀도 여전히 행복합니당
그러면 된거이지용? 우하하하하하
열심히 안전 운전 하시기 바랍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한국에서 했던 일이 출장이 잦은 일이라 차가 없으면 안 되긴 했었지만, 보통의 경우엔 차보다 지하철을 더 많이 이용했지요.
한국의 전철과 버스의 연계 서비스는 분명 세계 제일의 서민 교통시스템일 겁니다. 가장 깨끗하고요.
미국은 성인 식구 수대로 차가 있어야지, 없으면 노숙자가 되거나 굶어죽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ㅎㅎ
내(동연1)가
자네(태평성대) 도로 운전- 안전 운전 - 방어 운전에 관한
무료 강습을 해 주겠네~~
제1종 보통
제2종 소형(바이크)
지금, 바로 신청서를 제출하시게나~~~~
<운전면허 - 강습교관 -자격증>
@동연1 해상 모타보트(25 t)와
수상 제트스키도 가능함
그런 간절함 끝에 차를 샀으니 얼마나 기쁘셨을지
상상이 됩니다.
뭔가를 소유할 때, 그 소유의 기쁨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간절함임을 그때 배웠습니다. ㅎㅎ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한 소회이네요.
추위 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보호해야 하는 가장의 마음이
구구절절한데,
차를 가지게 되는 마음을 재촉 했는가
싶네요.
그 시절의 사회상도 그러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되는 일이
남자라는 이유와 보람의 나날이
선물되어 돌아 왔을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해 봅니다.
출산의 순간에 태어나는 아기 곁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경험이 모든 아빠들에게 주어진다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나 여러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곤 합니다.
내 집을 떠나와서
일주일 만에,,상경하는
용산행 케이티엑스 17호차 12C
열차에서,글을 읽습니디.
95세 어머니 뵙고
순천만 국가 정원 개막식에
사람도 꽃속에,피었고
꽃들이 사람을 불러 모아서
순천 시내가 화려한 봄잔치를 치르고
저도,그 안에서 즐겨보는 날을
보냈습니다.
신월 본동 신탁은행 뒤편
65평 첫번째 우리의 집을 마련했던
1979년 겨울,부동산에서,우리 부부
계약서 작성하며 떨리던 순간을
떠올려 보네요.
첫아이의 탄생도
첫번째 집을 사던 그날도
설레고 감격스런 날이었어요.
그날의 기분 오늘,내일 삶에
윤활유 되었으면 합니다.
순천만이 국가 정원이 되었군요.
오래전에 가보았던 순천만 풍경이 어른거립니다.
조윤정님이 사셨던 신월동에 짧았지만 저도 같이 살았다는 한 동네분 같은 느낌이 들어 신월동 이야기를 쓸 때면 늘 조윤정님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일주일동안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셔서 돌아오시는 발걸음이 경쾌하실 것 같습니다.
내 차가 있었으면 하는 날
아이의 탄생과 연결되니 더
필요성이 느껴지고 실감이 납니다.
저는 얼떨결에 당시 마음님 처럼 절실한
필요성도 없었는데 중고차를 장만
어쩌다 주말에만 필요한 쓸모없는 차 이어서
조금 몰다가 팔아 치웠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그 무렵엔 차 하나 장만하는 일도 집안의 큰 대사였지요.
소형차였지만 큰 거사를 치룬 듯 주문을 하고 참 뿌듯했었습니다.
당시의 기분,
너무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 지나간 한국생활 한달동안
BMW로 바삐 다니면서
언제 이렇게 걸어 다녔던가 싶을 정도로
많은 걸음으로 다녔습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길을 알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지만,
환승하기 위해 지하철역 오르락 내리락
내가 타야할 버스가 어디에 서는지 모를
수많은 종류의 버스로
기나긴 버스 정류장을 왔다 갔다 헤메다
보니, 약속시간에 조급하고..
한곳으로 이동하기에 버스와 전철을
몇번씩이나 갈아 타면서, 최소 1시간씩 걸리고..
결국 지난 주에 렌트를 했습니다.
술 약속이 없는 날은
운전하고 다니니 마음 편하기만 하더군요..
저도 떠나온지 15년, 오랜만에 고국 방문하면 대중교통 이용해서 길 찾아 다니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국생활 한달동안 참 행복하셨겠지요?
지극히 가정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고계신 초보 가장으로써 가족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가 선하게
느껴져서요.
그러게요 정말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신났을 것같아요.
처음 차를 사면 괜히 어디라도 다니고 싶잖아요.
가족들하고 여행도 많이 다니셨죠.
저는 너무 좋아 온데 다 다니고 싶어했는데 아내와 딸의 멀미가 심해 먼곳으로는 많이 다니진 못했습니다. ㅎ
다행히 제 일이 출장이 잦은 일이라 열심히 첫차, 그 애마를 몰고 다녔지요.
수동 기어에 클러치가 너무 빡빡해서 육개월 후 결국 제 허리가 고장나서 ㅎㅎ 열심히 치료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자리님은
가족애가 넘치는 참 자상하시고
따뜻한 지킴이 가장이시군요
문득
제가 우리 큰 아이 낳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분만실에서 아가를 낳은후
아가를 어찌하는지를
누운채로 고개까지 돌려서 멀리서 자세히 봤어요
의사선생님이 아가의 발목을 잡더니
거꾸로 들고서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번 때리니
아가의 입에서 뭔가 이물질 같은게 툭! 튀어 나오더니
그때서야 아가가
아앙~
큰소리로 울었어요
저는
울음소리 들었으니
그담
선생님
아가 손목에 얼른 제 이름 적힌 팔찌 묶어주세요
아가 안 바뀌게 얼른요
했더니
의사,간호사 모두 웃더군요
참 오랜전 기억이 마침 꼭 엊그제 일처럼 환하게 생각나네요
마음자리님 덕으로 ㅎ
제 아내는 손가락 발가락 갯수가 맞는지 확인해보더군요. ㅎㅎ
그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10개라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합승이 택시기사의 권리가 되고 승객들이 당연히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연두색 포니가 많던 그 시절, 첫차가 참 귀하기도 했을 겁니다.
의사가 미웠나니요
그건 따끔하게 세상을 일러주는 제의였는데요.ㅎ
나쁜것도 그렇지만 때론 좋은것도 충격으로 다가오지요.
첫아이를 생각하던게 차라니
저보다는 많이 개화했었네요.
첫아이 출산때의 그 다급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심경을 절묘한 필치로 기막히게
묘사하셨네요^
거기다 내 차를 가져봤으면~ 하는 절박하고
서럽기까지 한 경험은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킬듯
합니다.
1980년대 들어와서야 그나마 일반 서민들이 작은 차라도
꿈꾸어 볼수 있던 시기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