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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한국 고고학 강의』에서 친것입니다.
4억 5000만 년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에서 실루리아기로 넘어가던 시기 바다에서 번성한 무척추동물의 대부분이 멸종, 지구 전체 생명체의 약 60% 사라짐. 원인은 대규모 빙하기.
약 3억 5000만 년전 고생대 데본이 바다에서 많은 종류의 생물이 사라졌고 막 번성하기 시작한 양서류가 대량멸종. 특히 육지에 살던 동물의 80%가 사라짐. 원인:연쇄적으로 일어난 운석의 충돌.
약 2억 5000만 년전: 고생대 페름기 지구 생명체의 약 99%가 멸종. 지구를 덮고 있던 양치식물이 대부분 사라짐. 4억년 동안이나 종족을 유지한 삼엽충마저 멸종함. 이 사건으로 고생대가 막을 내리고 중생대가 시작함. 원인: 대규모 지각 변동과 그에 따른 화산분출
약 2억년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페름기대 멸종 사건을 견디고 살아남은 진화를 거듭한 몇 안되는 파충류등이 상상수 사라짐 원인: 캐나나 퀘벡주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거대한 운석 충돌
약 6500만년전 중생대 백악기말
대체로 700~450만 년 전 마이오세 후기의 고인류로 알려져 있다.이후 플라이오세에 들어서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했으며, 250만 년 전 무렵부터 호모 속의 고인류가 출연한다.
원래 구석기시대란 도구로서 타제석기(뗀석기)를 만들던 때를 뜻하였으며, 20세기 초까지 빙하시대와 동일한 시기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신생대 제4기에 대한 연구가 넓어지고 각지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구석기시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타제석기(뗀석기)의 출현은 호모의 등장과 함께...이때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다고도 할수 있다. 호모 속은 180만 년 전 무렵 시작된 플라이소토세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진화했고 아프리카를 벗어나 아시아의 유럽 각지로 진출하였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호모 사피엔스 (계통적임..즉 호모 사피엔스는...멀리...하이델베르겐시스와 연관된다는...)
약 20~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는..6만 년전 무렵에는 오세아니아에 도착하게 된다.(현생 인류가 아프리카 기원설이 맞다면~~)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거의 대부분 약 13~1만 년 전의 플라이스토세 후기 동안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플라이스토세 후기는 간빙기로 시작했지만, 8~7만 년 전부터는 대체로 흑심한 빙하기 환경조건이 계속 되었다. 특히 2만 여 년전에 빙하는 가장 크게 발달해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135m 가량 낮았다. 이때를 최후빙하극성기(Last Glacial Maximum, 약칭 LGM)라 부르는데, 한반도 및 그 주변지역도 흑심한 기후조건 아래 높여 있었다. LGM을 비롯한 빙하기 동안 황해는 거대한 분지로 노출되어 있었으며, 동해는 내륙호가 되기도 하였다.
신생대 제4기 말..(흔히 빙하시대라고 하는)...
올도완(2백만 년전) 아슐리안(80만 년전) 무스테리안(20만년전 나타남)
남전(藍田) , 소장량(小長梁) , 동곡타(東谷坨) :중국의 고고학인데..인터넷에서 검색해보시면..정보를 알수 있을 것임.
한반도에는 현재까지 1000개 정도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되며, 임진-한탄강 유역에서는 50여 개 유적이 밀집분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플라이스토세 전기(약 170~83만 년 전)로 소급되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플라이스토세 중기(약 73~13만 년 전)의 유적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
임진-한탄강하류의 파주 장산리 유적인 용암대지 형성 이전으로 추정되며 20만 년전 내외의 연대값이 얻어졌는데, 임진강 유역에서는 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 발견이 기대된다.
지금은 멸종된 동굴하이에나는 대현동(11.3%) , 평양 근처의 만달리 하층(59.6%) , 만달리 중층(15.1%) 등에서 발견되었다.
역시 지금은 멸종된 쌍코뿔이는(금굴 하층, 구석기 중기 전반)
이른 시기의 화석은 평양 대현동 동굴의 역포인과 승리산 동굴의 덕천인이다. 플라이스토세 후기의 호모 사피엔스이다.
평양 입산에서 분출해 내린 용암으로 임진-한탄강 하계망에 퇴적분지가 형성됨으로써 구석기시대 수렵채집민들에게 양호한 생활환경이 만들어졌으며, 이후 하천의 하방침식으로 단구지형이 형성되어 유물 퇴적층이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유물군
주먹도끼는 동아시아권에서도 주먹도끼가 만들어졌음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동아시아는 찍개문화권이라는 소위 ‘모비우스 가설’을 반박하는 자료이다.
찍개나 다면석기는 대형 석기 규암과 함께 맥성영 자갈이나 덩어리로 만들어진것이 많다. 이런 암석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날카롭고 견고한 날을 만들 수 있다.
긁개, 톱니날석기, 흠날석기 같은 중소형 석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정질의 석영함에서 떼어낸 작은 격지를 잔손질한 석기가 많아지는데, 특히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유백색의 석영함으로 밀개나 새기개, 돌날 등을 제작한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
석영 종류는 내부에 포함된 불순물과 절리면 때문에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정교한 석기는 반암과 규질혈암....
규질현암이나 흑요석은 세석기(잔석기) 제작에 널리 이용되었다.
전세계적으로 빙하는 13000년 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물러나 결국 현재와 같은 간빙기 환경이 도래하였다. 온난화는 약 10500년 전부터 급격히 진행되어 플라이스토세가 막을 내리고,...
중서부 이남의 빗살무늬토기는 뾰족한 바닥....
기원전 4천년기가 되면 중서부지역을 시작으로 조를 경작한 초기농경이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3500년 무렵 남부지역까지 확산되었다고 보인다. 주요 재배 곡물은 조와 기장으로서, 농경 관련 도구의 기종과 형태와 더불어 초기 농경은 한반도 북부의 요녕과 그 이동지역에서 보이는 양상과 유사하다.
움집(수혈식 주거지) 빗살무늬토기 단계 전국적으로 확산됨.
기원전 2000년기에 접어들며, 유적의 수와 규모는 급감한다.
개시기를 제외한 이른 단계의 신석기시대는 납작바닥(평저) 토기로서 동북아시아 공통의 전통을 보여준다.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일반적으로 친선문토기가 유행한 시기를 기준으로 그 앞뒤의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데, 한국 신석기시대에서도 그러한 경향성이 보인다.
중서부지역에서는 전기 후반에 첨저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한다.
중기에는 침선계 빗살무늬토기가 확산되었다. 동북과 서북지역에서는 평저토기가 계속되지만, 영동지역을 포함한 중서부 이남지역에서는 첨저의 포탄형토기가 유행하였다.
후기에는 무늬없는 토기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동북과 서북지역에서는 뇌문, 중서부지역에서는 동일계 침선문...
금강식 토기로 불리던 능격문토기는 신석기시대 중기 후반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남부내륙을 중심으로 유행한 형식임이 밝혀졌다.
본격적인 수혈주거는 신석기 중기 이후 나타나며 방형 또는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변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대동강 유역이나 남부내륙에서는 중기 단계에 장방형 주거지가 등장하지만, 출입구가 달린 대형 장방형 주거지는 대동강 유역과 충청 내륙에서 후기 단계에 나타나며 서해안에서는 후기 단계에서도 방형계 주거지가 대세를 이룬다. 취락은 신석기시대 중기보다 후기에 더 작아지고 입지도 강변 충적지에서 구릉으로 바뀐다.
중기에 식물자원 이용의 강화와 곡물재배라는 큰 변화와 더불어 정주취락이 발생하지만, 신석기시대 후기에 들어서며 취락 규모가 축소해 만기에는 남부지역과 중서부지역 모두에서 정주취락이 해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신석기시대 중기에 빗살무늬토기는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동북아시아 전체에 걸친 모종의 큰 문화적 변동과도 관련 될 수 있다.아직 일치된 견해는 없다. 확산의 배경으로 초기 농경 도입으로 인한 인구 증가 때문이라는 추정이 제시되었다. 가설적 제안
그리 많지 않은 주거지는 전기 이전에는 앝은 수혈을 가진 원형 주거지가 일반적이다.
중기 이후가 되면 주거 유적의 수도 증가하며 수혈의 깊이가 깊어지고 원형, 방(네모)형, 장방형으로 다양화된다.
패총은 남해안에서 융기문토기 단계에 처음 나타난다.
서해안 대규모로서 신석기시대 전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된 양상이다.
수렵도구로는 석촉은 이른 시기에는 주로 타제(뗀)이며, 동북지역에서는 늦게까지 흑요석제 타제석촉이 나타난다. 서부지역과 중서부지역은 마제석촉이 주류를 이룬다.
신석기시대 전기 후반에 식물자원 채집이나 농경구로 사용되었을 도구의 대표 격인 보습 혹은 따비는 중서부지역에서 등장해 중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가공도구로서 전기에는 한 손으로 회전하여 사용하는 구형 갈돌과 괴사의 갈판이 주류이지만, 중기 이후 말안장형 갈판과 두 손으로 왕복운동을 하여 사용하는 봉상 갈돌이 정착된다. 봉상 갈돌은 점차 갈판과의 접촉면이 넓어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인 농경사회의 시작, 무문토기의 등장, 마제석기의 본격적 사용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 후반부에야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15세기 전형적인 전기 청동기시대 문화보다 이를 거스로 생각되는 각몰돌대문토기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 등장하는 시점을 초기철시대의 시작으로 본다면,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하한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남한의 청동기시대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는 토기는 각목돌대문토기와 절상돌대문토기인데, 하남 미사리, 등지에서 방(네모)형의 평면형태의 주거지에서 발견되고 있어 미사리 유형이라 지칭한다.
신석기 말기의 이중구연토기와의 관계도 논의되고 있다.
(세) 장방(네모)형 주거지는 노지의 형태에 따라 위석식 노지는 금강 중상류에 집중되어 분포하며 주로 가락동식 토기가 발견된다. 이 외에는 모두 무시설식 노지주거지
가락동식 토기는 청천-압록강 유역(아무튼 서북지역) 주민의 남하로 발생 -김장석(2001)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송국리 유형의 최초 발생지로는 충청남 서해안-금강 중하류가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
전기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주거지와 송국리문화의 원형주거지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는 이른바 휴암리식 주거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송국리 유형의 문화는 발생 이후, 점차 삼남지역의 전기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대체해 나간다. 반면 송국리문화의 파급이 불분명한 경기, 강원지역 및 영남 동부지역에서는 기존의 양상이 지속되거나 약간의 변형만을 거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석묘가 전기 청동기시대의 주 묘제인 것은 확실하며, 일부 지역에서 석관묘가 지석묘와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송국리 유형의 등장을 즈음하여, 묘제는 다양해진다.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옹광묘, 토광묘 등의 묘제가 새로이 등장한다.
지석묘(고인들)는 처음에는 지하였으나 뒤에 지상 으로 변화한다.
대체로 충청 서해안 및 금강 유역은 송국리문화의 확산에 따라 지석묘가 감소 또는 소멸하는 것으로 보이며,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에서는 초기 철기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호남과 호서의 경우, 송국리 유형의 형성 이후 석관묘가 급증한다.
송국리 유형의 등장 이후, 이중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묘제가 등장하여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지석묘와 공종하거나 대체 또는 변형시킨다.
유병식 석검의 경우, 전기 청동기시대에는 이단병식이 제작되다가, 송국리 유형의 등장 이후 남한지역에서는 일단병식으로 변화한다. 유경식은 장경식에서 단경식으로 점차 변화한다.
현재까지의 남한의 발굴 결과를 보면, 단면이 편평한 삼각만입촉과 이단경촉은 주로 전기 청동기시대에 국한되며, 일단경촉은 전기 청동기시대에 등장하여 송국리 유형 등장 이후 가장 많이 사용된다. 또한 장릉형 또는 일체형 석촉이라 불리는 석촉은 송국리 유형 형성 이후 등장한다.
삼각형 석도가 시기적으로 가장 늦어 송국리단계에 들어서 등장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자루 장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편인 석부인 유단석부와 유구석부는 시간적으로 다른 형식에 비해 늦게 등장하는데, 유단 석부는 대동강 유역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등장하고 있으며, 유구석부는 송국리 유형의 등장 이후 남한지역에 등장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이용된다.
기원전 10세기 이전 청천강 이남지역의 전기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청동기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현재까지의 편년으로 보아 송국리문화 등장 이후부터는 청천강 이남지역에서도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은 기원전 12~10세기경에 출현하여 기원전 5세기까지 지속된다. 이 지역의 비파형동검은 크게 세 형식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형식은 길이가 30cm 미만이며 봉부가 짧은 것으로, 쌍방 석관묘, 이도하자 석관묘 등 석관묘에서만 발견된다. 두 번째 양식은 길이 30~35cm 정도이며, 봉부가 첫 번째 형식에 비해 긴 것들인데, 강상 무덤, 십이대영자, 남산근 101호동 등에서 출토되엇다. 세 번째 형식은 다른 형식에 비해 세장하며 봉부가 길고 돌기가 현저하지 않은 것들인데, 정가와자 6512호 토광묘, 누상 무덤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각 형식은 시기차를 반영하는데, 첫 번째 형식에서 두 번째 형식을 거쳐 세 번째 형식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령지역 , 청천강 이북지역은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동검이 공반되지만 청천강 이남은 미송리형 토기 없이 비파형동검 및 동기만 출토된다. 청천강 이남지역의 비파형 동검은 석관묘와 지석묘에서만 출토되나, 동모, 동촉, 동부는 주거지에서 출토되기도 하낟.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비파형동검은 중국 동북지역과는달리 검병의 장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자루부분에 흠이 파여진 형태를 가진 것들(유구경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 농경사회인 야요이(도래인)시대 성립 과정에 한반도 남부의 송국리 유형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큐슈지방에서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자료(지석묘, 송국리식 주거지, 무문토기 등)가 다수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판단되는 일본의 초기 철기가 야요이시대 초기인 기원전 4~3세기경의 연대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쳐 크게 네 가지 문화유형이 제시될 수 있다. 이들은 청천강 이북의 중국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유행한 세죽리-연화보 유형
초기 철기시대 유형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수법으로 모래가 섞인 점토를 손으로 빚어 야외가마에 산화염소성으로 구운 무문토기가 주요한 특징.같은 시대에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고운 점토를 태토로 하여 회전판에 돌려 성형을 하며, 폐쇄된 실요에서 환원염으로 구워 만든 회색도기가 보급되나, 이는 중원 계통....무문토기의 외반구연호는 가운데위가 가장 넓고 짧은 목, 고배형 토기는 높은 굽이 달린 접시모양으로
점토대토기는 흑도장경호와 함께 이미 청동기시대 말기에 유행한 것으로 요하유역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지역에 널리 퍼지는데, 세형동검 등의 청동기문화와 함께 공반한다. 요하 동쪽의 심양 정가와자에서 후기 비파형 동검, 요양 이도하자의 무덤 유적에서 초기 세형동검과 함께 발견된 예가 잇다. 한반도에서는 이른 단계의 것이 양주 수석리와 아산 교성리, 안성 반제리 등 중부지역의 집자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장경호(흑색마연토기)
외반구연 항아리 토기는 꼭지 손잡이 토기와 함께 초기철기시대에 요동과 서북한지역은 물론 연해주-두만강 지역에 널리 유행된다. 요동의 윤가촌과 연화보, 청천강 이북의 연변 세죽리에서 출토하여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토기를 대표한다. 송화강 이동 수분하 유역에 위치한 흑룡강성 동녕현 단결 유적, 연해주의 크로노프카 유적, 두만강 유역의 회령 오동 유적 등으로 대표되는 단결-크로노프카 유형의 여러 유적에서도 기원후 2~3세기까지 이러한 토기가 출토한다. 남한지역에서 기원후의 강릉 안인리 등의 동해안지역과 춘천 중도 등의 한강 유역에 널리 보급된 중고식 토기라고 하는 외반구연항아리토기의 원형이 이 토기로서, 요동-서북한 혹은 두만강-연해주지역이 기원지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요양 이도하자 등의 요동지역을 비롯하여 남성리-초포리 유형은 물론 단결-크로노프카 유형 등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전역에 널리 분포한다. 시기가 내려오면서 남한에서는 고배형 토기의 원통형 내각이 유난히 높아지지만, 두만강-연해주지역에서는 오히려 낮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삼족기 요하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요서 지역의 하가점 상층문화의 영향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삼곡지는 송화강 유역에서 서단산자 유형의 문화에 이어 기원전 4~3세기에 보급되는 대해맹 유형 단계에 이르기까지 출현한다. 그러나 그 이후 같은 지역에 등장하는 한의 영향을 받은 (송화강 유역의) 포자연 유형에서는 이 형식의 토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집터는 청동기시대와 같이 반움집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집끼리의 비율의 평면형태는 청동기시대에 유행하였던 장폭비 3 대 1 이상의 세장방형이 아니라 1.5 대 1 미만의 방형(네모)이 대부분이다.
청동기시대와 달리 청천강 이북의 서북한과 중국 동북지역가 연해주, 두만강지역의 집자리에서는 종전의 화덕 대신에 난방과 조리 기능을 보다 강화 발전시킨 부뚜막과 구들 시설이 유행한다.
연(燕), 기원전 3세기에는 한반도 북부에 철기가 들어왔으나, 충돌의 전연에서 벗어난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충돌의 파급이 미쳐 철기가 상류계급에 나마 보급되는 것은 이로부터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기원전 1세기) 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묘제는 목관묘이다. 이것은 토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할 때 그 주위 공간이나 윗부분에 끼워 넢거나 쌓은 돌이 남아 있어서 위석묘로 불리기도 한다.
적석목관묘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원삼국시대(AD 2세기 아니면 3세기)까지 만들어졌다.
금강 유역에 구리광산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영산강 하구의 영암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이 일괄로 나와 이곳에 대규모 공방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기원전 5세기 전후 한반도에서는 겁이나 창이 무덤에서 1,2 점씩 발견되는 정도로서, 아직 청동기의 전 기종이 제대로 제작 보급되지 않았다.
기원전 4~3세기에는 요동지역을 벗어나 송화강 유역과 연해주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무기, 공구와 거울 등의 청동기가 제작보급되었다. 특히 정가와자에서 보이는 이형(귀모양) 동기가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등지의 무덤 유적에서 발견되어 아산만과 금강 유역이 새로이 청동기문화의 중심지로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2세기에는 보다 발전된 주조기술로 만든 꺽창, 세문경, 청동방울 등이 보급된다. 청동기는 중국 동부지역에서 쇠퇴하지만 대동강 유역 이남의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에까지 널리 보급된다.
기원전 1세기 이후로서,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가 앞서 서남한에서 영남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전반 : 기원전 5세기 전후에 요하 중류 유역에 있었던 심양 정가와자 유형의 청동기 문화가 청천강 이남으로 확산되었음이 평양 신송리 무덤 유적에 부장된 청동기와 토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송화강 유역의 대해맹-포자연 유형, 두만강-연해주지역의 단결-코로노프카 유형은 한군현이 설치되기 이전의 일부의 철기만 선택적으로 반견된다. 명도전도 요동과 청천강 이북의 서북한지역에 대량 보급되었을 뿐 그 동쪽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토기에서도 전단계의 무문토기가 지속되고 연,한나라의 회색타날무늬토기는 거의 보급되지 않은 듯 하다.
연의 철기문화가 보급될 무렵 중국 동북지방가 연해주에서는 연전히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뭊덤이 만들어졌다.
청동기 부장 묘가 위치한 지역 , 서남해안의 당진만, 삽교천, 금강과 만경강 연변의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대전, 부여
심양 정가자와와 동일한 양식의 청동기와 토기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 신송리에서 확인된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전단계(연나라가 망했어도)의 청동기 문화가 더욱 발전하여 세형동과, 세문경등의 청동기가 제작되었음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거푸집과 청동 유물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수노하심 구조는 토광목곽묘가 중심인데, 목관 흔적이 확인되거나 부곽이 설치된 것도 있다.
유수노하심 유적보다 이른 시기의 분묘 유적으로는 63기의 토광묘가 확인된 서차구 유적을 들 수 있다.
읍루의 대표적 유적이 흑룡강성과 송화강이 합류하는지점의 남쪽으로 넓게 형성된 삼강평원일대 곤도령(滾兎嶺)이다. 봉림성지(鳳林城址)도 있다.
목관에서 목곽 으로 바뀌게 된다.
단장목곽묘에는 (한나라)식의 거마구를 비롯해 세형동검등 한국식 청동기
부부합장 관념이 고분축조에 반영된 이혈(2기, 같이 안많듬, 안팠음) 합장목곽묘가 중심묘제이다.
기원전 1세기 주엽~말엽의 연대 동혈합장묘 3기, 한나라식의 청동 거마구가 소멸하는 단계
5기는 대형 목곽묘가 여전히 상위계층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대형 목곽묘가 여전히 상위계층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전실묘가 기원후 1세기 말에 초현하여 석개천정 전실묘가 기원후 2세기 중반에 등장
화분형통기(정, 화분)와 이질계 단경호가 가장 빨리 나타나며, 기원후 1세기에 석영혼입계의 저장옹과 호형토기 등이 추가된다. 화분형토기는 구연단이 각지고 평저인 것이 전형인데, 이후 구연단이 휘며 외반하고 저부에 굽이 달리는 것으로 바뀐다. 기원후 2세기에는 부뚜막형(이질계의) 토기를 비롯하여 각종 명기가 추가된다.
전국시대의 반와당은 진한 교체기를 거치며 점차 원와당으로 변한다. 낙랑에서는 원와당만이 출토되었다.
경지무문토기 다음에는 타날문토기가 나타난다.
서남부지역 삼각형점토대토기 (전반기)
서해안 각지와 남해안에서....조개더미 유적은 원삼국시대에 폭발적으로 증가
충청 내륙지역에 분포하나 경기 남부지역에서도 발견 얕은 구릉의 경사면에 입지 토광묘 눈썹 모양의 도랑을 두른...심발형 토기가 부장된다.(나중에 도랑이 사라짐)
서해안과 충청이남 지역에...네 면을 도랑으로 두른.... 서해안 일부 지역과 영산강 유역에서 고총 분구묘로 발전하여 5~6세기까지 지속된다.
임진강 및 한강 중상류 유역에 북한강과 남한강에 합류하는 양평, 북한강 상류인 춘천 과 남한강 상류의 정선, 영월, 제천 지역에 국한되어 분포한다. 자연 사구의 상면부를 삭평한 다음 강돌에 얇게 쌓은 적석층을 만드는데, 매장주체부인 중심부는 7~8겹 가량 두껍게 돌을 쌓고 주변부에는 1~2겹 가량만 돌을 쌓은 형태이다.=>적석분구묘
전남 연해지역의 삼각형점토대토기를 이른 단계의 원삼국 토기로 파악
타날문토기는 철기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하는 토기로...
중부지역에서는 기원 전후 무렵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영산강 유역에서는 1세기 중반 또는 2세기 전반대에 연질계 타날문토기가 등장하였다고 본다. 심발형토기
기원전 2세기의 금강 유역은 전국계 철기문화의 선진 지역이었지만,....
와질토기(동남지역) 널부덤(전기)->넛널무덤(후기)
널무덤과 전기와질토기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 초엽에 해당되고, 후기 와질토기와 덧널무덤의 시작은 2세기 중·말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밖에도 토기를 통해 일본 키타큐슈 지역과의 관계를 사린 연구도 있다.
와질토기는 기와과 같이 회색이면서 질이 무른 토기를 말한다.
도질토기는 3세기 말엽에 출현하여
적석분구묘는 중부지역 특성
전실묘 성행시기 궁륭식 천정을 가지는 무덤이 축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