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첫 토요일 성모 신심) 십자가의 길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하느님이 예수님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셨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셔서라기보다는 불의한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셔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가장 가까운 분으로 부르실 수 있었다. 국가 대항 운동경기를 응원할 때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하나가 된다. 우리나라 선수가 이기면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도 얼싸안고 기뻐한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한마음 한뜻이 될 때 우리는 친밀감을 느낀다.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가 됨은 그분과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마태 12,49). 그들을 기꺼이 당신 형제자매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그들은 참으로 고단한 전도 여행의 동반자요 선교사업의 협조자였다. 하지만 형제를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투덜거리고 서로 다투고 서열을 따지고 스승님이 성공하셨을 때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건지 생각했다. 그걸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의 지향은 순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이 수난하고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는 걸 보고 스승을 모른다며 달아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그럴 거라고 이미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데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 전까지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지만, 죄인을 구하기 위해 수난하고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는 하느님을 따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라서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죽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 길이다. 고통스러운 길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은 그분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짊어지게 할 거라는 뜻이다. 죄로 기울이지는 본성적인 죄스러움을 거스르는 것도 그렇지만, 소외된 이웃의 편에 서는 것도 또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권력자와 부자들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그분은 잃은 것을 찾으러 오셨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다니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게 그분의 지상 사명이고 아버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받고 기뻐하지만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하라고 하면 당황해서 주저하거나 거부감마저 생긴다. 당연하다. 제자들도 그랬고 예수님도 우리가 그런 줄 아신다. 보람을 주는 좋은 일은 예수님을 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따라가는 건 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고 다른 길은 없다.
‘계약의 궤’는 성모님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다. 그것은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 내용이 적혀 있는 그 돌판을 담아 둔 상자다. 성모님 바로 그 궤다. 성모님 안에 예수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 보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도덕 선생님이 아니라 죄인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다. 세속적인 땅에 속한 죄인이 어떻게 신성한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겠는가. 누가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나서겠는가. 혼자서는 못하지만, 함께 하면 할만하고 누군가 힘 있는 분이 넘어져도 위로하고 격려하면 따라갈 수 있다. 백 번 실패해도 백 번 똑같이 그렇게 해주면 못 할 게 아니다. 성모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그분을 부르면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그분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하신 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주님은 제가 짊어질 수 없는 걸 지라고 하지 않으시는 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 십자가고, 제 맞춤 멍에고, 주님이 주시는 짐은 가볍습니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주님이 도와주시니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끝까지 죽은 다음에도 불쌍한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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