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펠리오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년 5월 28일 ~ 1945년 10월 26일)는 프랑스인 중국학자로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수많은 유적들을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처음에는 외국인 사절단으로 들어가, 중국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실바인 레비(Sylvain Lévi)와 에드아르 샤바네(Édouard Chavannes)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였다. 펠리오는 단 한번 중앙 아시아를 탐사했지만, 수많은 유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펠리오는 하노이에 있는 프랑스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에서 일을 했으며, 거기서 학회의 도서 수집을 위해 1900년 베이징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일을 하는 동안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여, 외국인 대사관에 포위 당하여 구금되었다. 그는 포위를 당한 동안 두번을 탈출하게 되는데, 한번은 적군을 사로잡아 의복을 빼앗고, 또 한번은 과일을 얻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그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그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22세의 나이에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 학회의 중국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프랑스 대학의 교수로 역임하였다.
폴 펠리오의 탐험단은 1906년 6월 17일 파리를 떠났다. 그의 팀원은 루이 바일라(Louis Vaillant) 박사와 의료 장교와 사진사인 샤를 노우에떼(Charles Nouette)였다. 이 3인은 중국의 투르케스탄을 모스크바와 타슈켄트를 경유하여 철도로 이동하였고, 카슈가르에 1906년 8월 말경에 도착하여 러시아 총독과 함께 머물렀다.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 솜씨를 뽐내 현지의 중국인 관료를 놀라게 했고, 그의 노력은 곧 결실을 보았다. 중요한 소스를 얻은 것이다.
카슈가르를 떠나 처음으로 정박한 곳은 툼추크였는데, 그곳에서 쿠차로 향했다. 그리고 쿠차에서 소실된 쿠차 언어로된 많은 문서를 획득했다. 이 문서들은 나중에 스승인 실바인 레비에 의해 번역되었다. 쿠차를 떠나 펠리오는 우루무치를 갔는데, 그곳에서 형제가 의화단의 수괴인 란 공작을 만나게 된다. 란 공작은 종신 유배 상태로 있었다. 펠리오 탐험대가 마지막으로 발길을 멈춘 곳은 그의 명성을 쌓게 한 둔황으로 1908년 2월 12일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둔황에서 펠리오는 왕원록의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접근할 수 있었다. 방대한 분량의 고서적과 판본, 예술 작품들이 이미 오렐 스타인에 의해 유출된 후였다. 카슈가르에서처럼 펠리오의 중국어 실력이 또 한번 빛을 발휘했다. 3주간 판본과 고서적 등을 씨름하며 분석한 후에 왕원록에게 일부를 팔도록 설득했다. 왕원록 또한 사원의 보전에 예산이 필요했으므로, 90 파운드를 받고 막대한 분량을 팔게 되었다.
펠리오는 1909년 10월 24일 파리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에게 동료이자 스승인 에도아르 샤바네(Édouard Chavannes)의 추악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폴 펠리오는 공금횡령과 문서 위조로 기소되었다. 결국 1912년 오렐 스타인이 쓴 저서로 인해 무죄가 인정되었다.
그후 1차 대전 때는 프랑스군 대사로 베이징에서 복역을 하였으며, 1945년 암으로 죽게 된다. 그는 중국학의 위대한 학자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소장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파리동양박물관(Musée Guimet)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있다.
오렐 스타인 경(Marc Aurel Stein, 1862년 11월 26일 ~ 1943년 10월 26일)은 헝가리 출신으로 중국의 깐수성 둔황의 막고굴 제17굴(장경동)의 유물을 유럽에 소개함으로써 "둔황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세번이나 탐사를 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으며, 특히 돈황의 유적지를 연구한 사람으로 돈황 막고굴의 존재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敦煌學)'을 탄생시켰다.
스타인에게 돈을 받고 유물을 유출한 둔황석굴 관리인 왕원록
http://cafe.daum.net/tourebiz/MFIn/832?docid=nJJd|MFIn|832|20051022110022&q=%BF%C0%B7%BC%20%BD%BA%C5%B8%C0%CE&srchid=CCBnJJd|MFIn|832|20051022110022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년 ~ 1948년)는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했던 혈기넘치는 젊은 인텔리로 일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젊은 주지승이자 학승이었고, 27세가 되던 젊은 나이에 1차원정(1902년 ~ 1904년)을 가서 1914년까지 총 3차까지 원정을 떠난다.
둔황과 쿠차 등지의 예술품들을 구입하거나 약탈해와 소장을 하고 있었는데,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파산으로 일부를 당시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16년 구하라의 고향친구였던 데라우치 총독이 있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어 해방 후 국고에 귀속되었다. 물론 구하라가 그냥 선물로 준 것은 아니고, 조선광산채굴권에 대한 뇌물로 준 것이다.
오타니의 전체 소장품은 무려 5,000점이나 되었는데, 그 중 1/3은 일본에, 나머지 1/3은 한국에 나머지는 중국 뤼순에 분산되었다.
승려였던 오타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가 당나라 승려가 아니라 신라의 학승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1900년대 초반 실크로드에 대한 세계 열방의 문화탐험이 고조되었을 당시 중국 둔황석굴(막고굴)에
엄청난 불교유적과 당나라 시대까지의 유물을 유출해간 유명한 3명입니다..
사실 이들의 평가는 극과극이죠...찬란한 동양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연구한 위대한 탐험가이자 동양학자이면서도
남의 나라 유적을 자기나라로 반출한 희대의 문화도둑놈이기도 하죠...
잘 아시다시피 세계 4대 여행기이자 가장 오래되었고 초국보급으로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펠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가 현재는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타니는 혜초가 당나라가 아닌 신라의 승려라고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오타니가 가져온 유물중 3분의 1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스타인은 당나라계 고구려 명장인 "고선지"의 업적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들에게 돈을 받고 유물을 넘긴 "왕원록"이란 사람도 그당시 둔황석굴에 대한 어떠한 인력과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스타인이게 재정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받은뒤 유물발굴을 허락한 사람입니다..
중국 정부에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원록을 북경으로 압송하여 사형에 처하였다고 하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것도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매수하여
대신 처형당하게 하고 죽음에서 피해갔다는 말도 전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초반의 둔황석굴의 모습
첫댓글 저도 그냥 도둑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타국 문화재를 저렇게 다 가져가 놓고 찬란한 동양문화 전파라니..
문익점 나올줄 알았네요.
저기 돈황석굴 갔다 왔는데..정말 대단하더군요....크기부터 세밀함까지...중국에서 세계에 자랑할만한 유적입니다.... 근데 과연 도둑놈인지 잘 모르겠네요....중국에서 목숨 걸고 저 보물들 지키려고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죠...주식시장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주식을 저가에 마구잡이 매수했는데..1년뒤 가격이 3배로 뛰어올랐다면 그 투자자는 도둑인가요? 그건 아니죠...자신의 문화재를 못알아본..중국의 잘못이죠...역시 아는것이 힘~!
이건 좀 아니죠. 주식은 애초부터 경쟁해서 사느냐 마느냐 파느냐 마느냐를 하는 게임인데 애초부터 중국에 있는거고 중국거인데 그걸 왜 와서 가져가 놓고 돌려주지도 않느냐 그 문제죠. 예를 들자면 제가 님이 안쓰는 지갑을 훔쳐와서 보니 엄청난 보물이다. 그럼 이 보물은 제소유인가요? 비유가 잘못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