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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23편 1절-3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기도: 추운 이 한 밤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셔서 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고 저희들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것과 같지 않은 것을 낱낱이 고쳐주시고 고침을 받고 돌아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맞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 자기 목자가 맞느냐?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마귀를 자기의 목자로 삼는 기독교인은 없다.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부족한 게 많다. 왜 부족한 게 많으냐? 부족한 게 많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아니라는 말밖에 더 되느냐? 하나님은 인간 자기의 목자가 되어주려고 하시는데 인간 자기가 하나님을 내버린 건지,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보고 못 생겼다고 내버린 건지?
본문이 다윗의 시인데,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 것이 다윗이 어느 면에 부족이 없다는 말인가? 육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영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가? 진리성도 다윗이 어느 면을 채우기 위해서 어느 면에 자기의 만족도를 두고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았을까? 다윗이 어느 면에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은 것일까?
다윗이 다른 사람들처럼 인간 자기의 육신의 만족, 즉 세상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만족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다윗의 신앙이 육신적으로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는 건지, 아니면 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는 건지? 어느 마음이냐? 영이냐, 육이냐? 영이다.
그러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 것이 하나님을 자기의 영적인 만족도로 삼으면 육적인 면에서도 부족이 없다는 말이냐? 육적인 면을 만족을 시켜주던 아니던 그것은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영적인 만족도로만 나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거짓된 교회는 육신의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 믿는 쪽으로 자꾸 몰고 간다.
그러면 세상으로 속화된 채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게 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육신의 만족도를 찾아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자기 육신의 만족도를 찾는다면 누가 더 저질적인 사람이 되는 거냐? 반대로 누가 더 솔직한 사람이냐? 육신의 만족도를 목적으로 하고 예수를 믿을 바에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자기 노력 것 해서 육신의 만족도를 채우려는 하니 이것이 더 솔직하고 깨끗하다.
이걸 또 다른 면으로 돌려서 말을 하면 두 종류의 사람 중에 게으름뱅이가 누구냐? 안 믿는 사람은 자기 노력 것 해서 세상을 가지려고 하고, 세상 속화된 교인은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으로 세상 것을 갖다달라는 것이니 누구의 마음이 더 시커먼 거냐? 믿는 사람이다. 이건 신앙양심이 틀려먹은 거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라’ 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치를 어기고 믿으니까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영적인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을 영적인 면에 만족함과 같이 육적인 면도 똑같이 만족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으로 살면 육적으로도 부자가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육신적으로 살면 영적인 면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적으로도 부자가 된다’ 하는 이 둘 중에 어느 게 맞느냐?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도 부자가 된다’ 하는 이게 믿음으로 들리느냐, ‘육신 만족도로 살면 영적인 만족도도 이뤄진다’ 하는 이게 믿음으로 들리느냐? 앞의 것은 육 주격이고, 뒤에 말한 거는 영 주격이냐?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 살면 육적인 만족도도 100% 이뤄진다’ 하는 것이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육신적으로 살면 영적인 면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적으로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육적인 만족도는 하나님이 알아서 덤으로 주시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게 맞느냐? 맨 나중의 말이 맞는다.
육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영적인 만족도에는 완전히 망한 거다. 한 마디로 말을 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육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사는데, 그런다고 해서 영적인 면에서 채워지느냐? 전혀 없는 거다. 그리고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육적인 면에 만족도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건데, 안 왔다고 해서 이 사람이 영적인 만족도가 불편스러우냐? 아니다. 정말 옳은 진리신앙의 노선에서 예수님을 바로 믿어나간다면 이 사람은 은혜를 받는 대로 세상의 근심 걱정은 다 물러가고 영적인 만족도로만 자꾸 채워진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거다.
이런 신앙은 점차적으로 희망이 있다. 이런 사람은 믿어갈수록 알고 깨닫는 면에서도 그 만족도가 자꾸 커진다. 그런데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사람인지라 세상염려 걱정 근심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그것도 잠깐이지 늘 그렇게 있으면 영적 만족도에 문제가 있는 거다. 이걸 스스로 진단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의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잘 먹어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마음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병이 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육적인 모든 것도 시루에 구멍이 난 것처럼 대 새버린다. 설령 몸에 병이 안 들었다고 할지라도 육적인 만족도의 갈급증을 자꾸 취하려고 하게 되니 그 마음속에는 이미 병이 커지고 있는 거다. 첫째는 정신적 병이 자꾸 커지고 있는 거고, 두 번째는 육신적인 병도 자꾸 물고 들어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으냐?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스스로 병을 만들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가 자기 운명을 끝내는 거다. 세상 모든 인간이 그렇다. 그러니 남 탓할 게 없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사람이 짐승들보다도 더 미련하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면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육적인 면을 방편으로 쓰고 있다. 예수 믿는 자기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려고 육신의 모든 보이는 것을 잡고 쓰고 계신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자기 몸 안팎으로 날마다 분초찰나마다 교체시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육 주격으로 살면, 육의 만족도를 위해서 살면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저질이 돼버리기 때문에 왜 사건 환경을 교체시키는지를 못 깨닫는다.
사람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루 온 종일 테레비만 보고 있으면 볼 때는 깔깔거리며 재미가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그 머리는 점점 저질이 돼버린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성경을 보는 성도라면 그 머리는 자꾸 회전이 되어서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테레비만 보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고상해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신앙하는 사고방식이 육이 잘 되는 목적이라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거다. 그리고 자기의 육이 잘 되니까 ‘내가 믿음이 좋아서 육적으로 축복을 받는구나’ 이렇게 되어있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육이 잘 된 것이 곧 영이 잘 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거다. 큰 잘못이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으로 부자인데 주님이 오셔서 성령의 일곱 눈을 가지고 볼 때는 헐벗고 눈이 멀었다고 했듯이 영적인 면에서 그런 상태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세상에서 부귀영광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세상 속화된 정신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은 성령의 일곱 눈을 가지고 볼 때 영적인 면에서 꽤꽤 마른 거다. 이런 사람은 첫째는 성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게 영적인 면에서 마른 증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이 영특하고 지혜롭고 총명해져야 하는데 이게 안 된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초장이 뭐냐? 풀이 자라는 넓은 들판이다. 정말 보기가 좋다. 양떼들이 푸른 초장을 만나면 원대로 만족하게 실컷 먹을 수 있다. 없어서 모자라서 못 먹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양떼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참 목자는 푸른 초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 목자는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를 한다. 이게 참 목자다. 푸른 초장은 모자람이 없고 다함이 없는 곳이니 배가 큰 자나 작은 자나 자기 원대로 먹고 자기 배의 크기대로 먹을 수 있다. ‘왜 너만 많이 먹느냐?’ 하는 게 없다. 누가 말리지도 않고 누가 빼앗지도 않는다.
푸른 초장이란 진리와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참 인도자는 성도들의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고, 깨달음이 진리이치 쪽으로 깨닫게 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만족이다.
사람은 한 이치라도 깨닫는다면 그 마음에 기쁨이 있는 거다. ‘아,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로구나’ 하고 기쁨이 충만한 거다. 그런데 ‘예수 믿어 부자된다’ 라고 설교를 한다면 이미 부자가 된 사람은 그 말을 먹을 필요가 없다. 가난한 사람만 먹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먹으면 영혼이 만족인가? 아니다. 세상욕심만 자꾸 커진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부흥강사가 설교를 하면서 어느 분이 장사를 하는데 처음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했는데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잘 내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그래서 감사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십의 2조를 내니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용달차를 사게 해 주셨고, 여기에서 또 십의 3조를 내니까 더 복을 많이 주셔서 큰 트럭을 한 대 샀고, 계속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십의 9조까지 냈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간증설교가 어디에 목적을 놓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냐? 간단히 말해서 그런 간증설교를 하는 것은 육에 속한 말이냐, 영에 속한 말이냐? 육에 속한 말이다. 그런데 영에 속한 말인지, 육에 속한 말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이 듣기 좋다고 그저 ‘아멘’ 하고 있다. 이건 영인성장이 되는 면을 다 죽이는 거다. 거짓 목자는 양떼들을 어디로 인도를 하느냐? 우리가 참 목자만 알면 거짓 목자가 교인들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빤히 알 수 있다.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잔뜩 먹여놓고 물가로 인도한다고 한다. 생명의 말씀, 살아있는 신실한 푸른 꼴을 먹고 나서 그 다음에 진리의 생수를 먹으니 갈증이 해소가 된다. 영혼의 배부름이 되었다면 ‘좀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양떼들에게는 어디까지나 푸른 초장이다. 그런데 아무리 푸른 초장이라고 해도, 아무리 물이 맑은 시냇가라고 해도 그것을 안 먹겠다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양이 있다면 그걸 못 먹는 거다. 성도가 애굽 건설, 세상 건설, 바벨론 건설, 종교적 건설이 목적이 돼버리면 굶어죽고 말라죽는 거다. 참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을 만나게 해주고, 쉴 수 있는 물가으로 인도해 준다.
이방세상과 종교적인 세상은 영혼의 안식처가 없다. 종교적인 세상, 종교적 사업을 크게 이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나가면 영혼의 안식이 없다. 마음의 평안이 없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권 아래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의 안식처가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성경에 주님 앞으로 오는 자는 짐이 풀려지고 가벼워진다고 했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이게 틀림이 없다. 짐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게 뭐냐? 간단히 말해서 세상 것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것인데, 세상 것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것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거냐?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왜 세상에 속한 것을 짐처럼 둘러메고서 그것을 벗을 줄을 모를까? 뭐가 없어서 그럴까?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느냐? 첫째는 그 소원 목적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물질이요, 그 이치가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이라는 짐이 올라가서는 안 되는 거다. 세상물질은 자기 발밑에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발등상이다.’ 세상물질은 자기의 발밑에 있어야 사람이 뛰기도 하고 마음대로 활동을 하는 거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으면 뭘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짐을 내려놓는 거다. 이러면 가벼운 거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지혜지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영특해서 세상을 다스려 나가게 된다. 환경을 다스려 나가고 세상을 다스려 나간다. 이러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이게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지혜가 없으면 짐을 지고서 무겁다고 하며 원망불평을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짐을 지고 있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도 세상목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기 머리에 세상이라는 짐이 있다 이건 참으로 고달픈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걸 내려놓아야 한다. 이 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못 먹고 사는 거냐? 아니다. 세상이라는 짐을 내려놓게 되면 사람이 더 활발하고 더 지혜롭고 바로 살아갈 수 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첫째는 기본은혜, 기본구원 면에서의 소생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대형과 대행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살렸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 결합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중보의 역사라야 만이 영혼을 소생시키는 거다. 영혼을 소생을 시킨 이것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속의 영혼을 우리 주님이 일차적으로 살린 거다. 다른 방법은 없다. 이렇게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은 인간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언제 살리던 살리는 거다.
그런데 구원파 사람들은 구원 얻은 날짜를 자꾸 말하는데 이건 이치적으로도 잘못된 거다. 세례요한이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 그 어머니가 예수님 집에 심방을 가니까 태속에 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뛰놀았는데 이 때 세례요한이 중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태어난 후에 그 누군가가 막 태어난 세례요한에게 ‘네가 몇 년 몇 월 몇 시에 태어났느냐?’ 하고 묻는다면 어린 세례요한이 말을 해 주겠느냐?
우리의 중생도 마치 어린아이가 막 태어난 것과 같은 건데, 이제 막 중생한 사람에게 ‘네가 언제 중생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답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구원파 사람들은 이치도 안 맞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믿음의 길로 못 나가게 만든다.
‘네가 언제 구원 받았느냐?’ 하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누가 그 사람을 구원을 시키겠다고 하느냐? 구원파 자기들이 구원을 시키겠다는 거다.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서 구원에 대한 감사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 그 때가 구원을 얻은 때라고 한다. 이렇게 돌아가면 이단이 되는 거다. 우리 주님이 하실 일을 인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말이 되느냐?
선악과 따먹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 인간의 영은 우리 주님만이 살리신다. 인간은 못 살린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더라도 어린 아이가 막 태어난 것과 같은 상태라서 그 당장은 자기의 영이 살아난 것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얼마정도 자라서 ‘네 생일은 언제다’ 하고 가르쳐 주면 알게 되듯이 중생을 한 후에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되면 자기가 구원 얻은 사실을 알게 되는 거다.
영혼을 소생시킨 기본구원 기본은혜는 누가 하신 거냐? 누가 살린 거냐? 주님이 살렸다. 이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독권으로 역사한 거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면 그 다음에는 육신도 건강하게 자라고 아는 것도 자라듯이 영이 살아났으면 이제는 신앙 성장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이 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즉 이룰구원 면에서의 소생이 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이란 누구의 이름이냐? 주님이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성도를 어느 길로 인도하느냐? 의의 길, 옳은 길로 인도를 한다. 옳은 교훈을 줘서 옳게 자라게 한다는 거다. 왜냐?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고 예수님이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성도라도 의의 길로 가는 성도가 진짜 교회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진짜 주님의 교훈이고, 이렇게 나가는 것이 성령님이 역사를 하는 교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는 주님이 얼굴이 있는 거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거다. 교회 인도자는 이걸 알아야 한다. 교인들을 잘못 가르쳐 놓으면 주님의 얼굴이 어떻게 되겠느냐? 마귀의 놀림감이 되는 거다. 그래서 교인들을 인본주의 세상주의로는 못 가르치는 거다.
한 생명이 귀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가 붙어있다. 이 말이 그냥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온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지옥에 가면 한 생명만 있느냐? 많은 영혼들이 있다. 그러나 이건 귀하지 않다. 아합 왕 때 3년 6개월 동안 흉년이 와서 그 때 남자들이 많이 죽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눈도 깜짝 안 하신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아오는 이방군대들을 하나님께서 물속에 쳐박아서 고기밥을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그런 자들은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거다. ‘너희들이 짐승으로 살고자 하니 내가 너희들을 짐승취급을 해 주겠다’ 해서 무더기로 죽여 버리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거, 몇 백 명 몇 천 명이 죽어나가는 거 눈도 깜짝 안 하신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까? 의인이 죽는 것, 하나님 앞에 옳게 바르게 사는 성도가 죽는 것을 하나님은 신경을 쓰고 그를 보호하고 인도를 하고 감찰을 하신다. ‘누가 그를 건드리나?’ 하고 천군천사들에게 비상을 걸어서 보호를 하신다.
자기가 아무렇게나 살고 싶으냐? 계:에 2억의 군대가 나오는데, 이 2억의 군대가 왜 있는 거냐? 이걸 시대적으로 푸는 사람은 군대들이 중국 쪽에서 유브라데강을 넘어서 쳐들어 올 것을 말하는 거라고 정치적인 논리로 말을 하겠지만 이걸 우리가 보도록 기록을 해 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도망가는 너 하나 때려잡으려고 2억의 군대를 동원시키는 거다. 이걸 알아야 한다. 바로 믿고 나가는 자에게는 온 만물이 자기의 충복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옆으로 나가는 자에게는 온 만물이 그에게 재앙으로 몰고 온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당신의 이름을 걸어놓고 진리성도를 인도하신다는 거다. 참 목자의 인도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나가게 되면 영혼의 소생이 되고, 이는 곧 성도의 생활에 신앙심으로 반영이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꼴로 잘 인도가 되면 그 성도는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성장이 돼나가는 거다. 깨달음도 솟아나고, 영적인 감각 면도 민감해지고, 도덕성도 고상해지고, 성격 성질도 고쳐지고, 가치판단 평가성이 신령계에 내려지게 된다.
믿기 전에는 자기의 모든 가치판단 평가성이 이 세상에 내려졌지만 진리말씀을 바로 깨닫고 나면 죽음의 선 이후의 결과성에 자기의 계산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거다. 이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펀하겠느냐?
그러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해서 못 사는 거냐? 아니다. 세상욕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신경질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신경질이 있는 사람치고 위장병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아, 이 사람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장차 어떤 것이 자꾸 물고 들어오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다.
진리와 성령의 감화성으로 사는 상태는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즉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나그네 인생살이의 모든 것이 이룰구원으로 되어있으니 매사가 긍정적이고 헛된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이게 하나님 앞에 바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성경으로 볼 때 우리 주님이 이렇게 걸어가셨고, 사도바울의 걸음걸이도 이렇게 걸어갔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에, 다시 말하면 죽음의 언덕에 서서 뒤를 쳐다보면서, 세상을 쳐다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노라. 나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 놨다’ 라고 한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죽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과거적 자기를 쳐다봐라. 그리고 미래적으로도 쳐다봐라. 그래서 잘못된 것은 돌아보고 고치고, 고친 후에 또 뛰어가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거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으로 닮지도 못하고 날마다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