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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 300년 동안 유럽이 본 한국 』를 보고 친것입니다.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독자적 입지를 확보한 해인 1637년에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는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다시 히라도 섬의 무역 관장이었던 쿠커바커N. Couckebacker가 네덜란드 본부에 전달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왕국의 금과 은의 산출량은 부진한 편이며.....조선 왕국은 지극히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라여서 외국인을 강력히 배척하고....일본인들은 조선에서 7년 동안이나 끔찍한 살육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55년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새 중국 전도>>에는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중국과는 다르게 자유롭게 외출을 하며 집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중국이들은 이것을 매우 비도덕적이라고 본다.....또한 결혼 상대자를 찾는 것도 매우 자유로워 부모나 가족의 간섭이나 감시 없이 자신의 배우자를 찾는다...인삼이 매우 많이 재배되며 금과 은이 풍부하게 매장된 산들이 많다”고 적고 있다. 또 죽은 자를 3년간 집 근처에 안치해두었다가 3년 후에 매장을 한다는 기이하고 야만적인 장례문화, 여자들이 자유롭게 외출을 하고 가족의 간섭 없이 외간 남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배우자를 구한다는 개방적이면서 윤리적 구속에서 벗어난 다소 방종한 느낌을 주는 표현, 한국에는 유럽인들이 꿈에서도 그리워한 금이 많으며 사람들은 진주를 바닷가에서 줍는다는 등의 ‘보물섬’에 관한 표현 등이 그것이다. 또한 왕의 최측근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언급하면서 문명의 상징인 기독교 선교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이 기원전 1120년에 중국의 황제가 자신의 자손인 기자에게 하사한 은대지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방견문록>>에서는 한국이 ‘카울리’라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으로 딱 한번 언급된다.
17세기 중반 아담 샬이 글 쓸 당시에는 서술자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이 통례였다.
하멜의 보고서는 1668년에 출판되었다. 이중 세 번째인 사흐만G. J. Saagmann판은,1669년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는 원본에 없는 식인 악어와 코끼리 그림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하멜 보고서가 폭넓게 주목을 받은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유럽은 팽창 정책과 함께 식민지 확보와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중국과 일본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은 이때까지 유럽인들에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고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나라, 베일에 싸인 나라였다. 한국에 관해서는 고작해야 한국이 반도인가 아니면 섬나라인가 등 이런저런 풍문만이 떠돌앗다. 이러한 상황에서 13년 동안이나 ‘야만인’들에게 억류되어 있다가 자유를 향해 탈출한 유럽인들이 직접 체험한 내용을 다은 한국에 관한 책은 유럽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마르티니나 아담 tif의 책이 이미 그전에 발간되었지만 이들의 책은 교회나 지식인들은 위한 학술적 성격을 지닌 두꺼운 책이고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하멜 표류기 만큼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널리 읽히지는 못했다.
하멜은 한국인과의 첫 만남을 “그들의 복장은 중국식 차림이었으나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어 그들이 분명 해적단이거나 추방된 중국인 불한당(범법자 집안)일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우리는 모두 잔뜩 겁이 나서 가슴을 졸였음”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하멜 표류기>>가 출판된 지 4년이 지난 1672년에 독일인 아르놀트Christoph Arnold에 의해 독일어판 <<하멜 표류기>>가 출간된다. 여기서 편집자는 서문에 ‘13년 동안 야만인들 아래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하멜의 책이라고 소개하면서 표류기를 읽는 독자에게 문명과 야만, 노예와 자유인으로 구분되는 독서의 지평을 전제한다.
“이교도들과 우리 기독교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정도로 선한 일을 했다..[제주도에서 서울로 온 후] 왕을 알현한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정했다. 왕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은 내보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관습읻“라고 말했다. 왕이 우리에게 춤추고 노래하고 뚜어보라고 하면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즐긴 다음에야 약간의 선물을 주고 우리를 거처로 돌려보냈다....한국에서는 뇌물로 관원을 매수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동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남편을 살해한 여자는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가에 머리만 내놓은 채로 땅에 묻힘. 그 옆에는 나무 톱이 놓여 있어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양반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그녀의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머리에 대고 톱질을 한 번씩 하고 가야만 함....남을 구타하여 죽인 자는 다음과 같이 처벌됨. 식초와 냄새나는 구정물로 죽은 자의 온몸을 싯어내고, 그 오수를 범인의 배가 부풀어 오를 때까지 깔때기를 통해 목구멍 안으로 들이부음. 그런 다음 다시 배가 터질 때까지 막대기로 배를 때림. 혼인한 여자와 정을 통했거나 기혼녀를 납치한 자들의 경우도 쌍방이 다 조롱을 면치 못하게 되는데, 발가벗고기도 하고 아니면 얇은 속옷만 걸치도록 하여, 얼굴은 석회로 회장을 시키고, 두 사람의 귀를 뚫어 화살로 연결하고 그들 등에는 작은 북을 매달아 형리가 그것을 내리치면서 이 남녀는 간통한 자들입닏!’라고 외치면서 온 마을을 다닌 후에 각각 엉덩이 50~60대를 내리침.”
“양반들이 유홍삼아 창녀(기생)들과 다른 권속들을 거느리고 종종 절을 찾곤 하는데, 그것은 절이 산 속에 그리고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분위기가 그만이기 때문임. 또 항간에는 절을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이라 일컫지만, 실제로는 신당(神堂)이라기보다는 매춘굴이나 주막집이라해도 과언이 아님. 재삼 강조하건대 소위 사원들이란 게 일반적으로 다 이런 식이며, 중들 역시 액류液類(주색)라면 무엇이든 사족을 못 쓰는 판국이기 때문임.”
유럽에 널리 퍼진 ‘쾌락을 추구하는 동양’이라는 이미지와 선입견에 부응하고 이를 확대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상중에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 되며, 설령 그 기간 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은 사생아로 취급됨.”
“[한국인들의] 신임과 불신, 아울러 관용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습성이 지극히 농후함. 따라서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아니 됨.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는 그게 마치 무슨 자랑인 양 우쭐대며, 그런 정도는 그들 간에는 아예 수치로 여겨지지도 않는 형편임...그들은 마음씨 좋고 남의 말을 아주 쉽게 곧이듣는 경향이 있어, 우리는 원하는 대로 뭐든지 그들을 속여먹을 수 있었음. 또 외국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따르며 특히 중들이 그러함. 믿을 만한 자들이 수십 년전 일본인들이 그들의 왕을 살해하고 도듭과 마을에 불을 질러 파괴한 등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연약한 여자들처럼 보였음. 홀란드인 안스(박연) 우리에게 들려준 바에 의하면, 달단인[청나라]들이 빙판을 건너와 그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에게 붙들려 죽임을 당한 자들보다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은 자들이 숲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들은 그와 같은 자결 행위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역성을 들고 동정을 표했다 함..그들은 피 보는 것을 금기로 알고 있음. 누가 땅에 쓰러지면 다들 거들떠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침”
<조선 왕국기>에 묘사된 부분을 보면 “그들이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나라나 왕국은 12개를 넘지 않으며, 그들 말에 따르면 중국이 유일한 황제국이고, 나머지 나라들은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고 함.....그들의 옛 문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세계에는 8400여 개국이나 있다고들 하나 그건 허무맹랑한 공상엡 불과 하다며 일소에 부치면서, 태양이 하루 동안에 그 많은 나라를 다 비칠 수 없으니 이는 필경 섬, 절벽, 바위 등을 다 포함한 숫자라고 덧붙였음. 우리가 그들에게 몇몇 나라 이름을 대주면 그건 어떤 도시나 마을 이름이 아니냐고 반격하면서 도리어 우리를 골려대곤 했는데, 그것은 그들 지도에 시암Siam[태국] 이상의 지역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임.”
하멜은 한국의 민속 신앙이 모두 악귀에게 조언을 구하는 미신일 뿐이라는 데 미친다.
“이 나라는 백성들이 필요한 식량 및 필수품을 자급자족할 만한 능력이 있음....백성들은 의원 대신 장인과 점쟁이들에게 찾아가며, 그들이 귀띔해준 그대로 실행함. 그것이 산 위든, 강가든, 절벽이든, 바위든 또는 신당 안이든, 어디든지 간에 시키는 곳에 공양물을 싸들고 가서 악귀에게 조언을 구함.”
“제주도 졸장부들이 우리가 사람보다는 괴물에 더 가깝다는 둥 뭘 마실 때는 코를 귀 뒤로 휙 제쳐 둔다는 둥, 머리칼이 노래서 사람이 아니라 바다 귀신 같다는 둥,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숱한 헛소문을 퍼뜨린 탓이었음. (장안에 나도는) 그런 황당무계한 말에 많은 고관들이 놀라우을 표하면서 (그들이 무척 부러워하는 힌 피부 색깔 때문에) 우리네 외모가 오히려 자기 나라 사람들보다 더 수려하다고 찬탄을 보내기도 했음.”
한국은 ‘상상의 인간이 산다는 소문이 무성한 나라’라는 느낌을 준다.
사흐만 판에는 “남자들은 매우 호색적이고 시기심이 많아서 가장 친한 벗에게라도 자기의 아내와 딸을 잘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유부남이 타인의 처를 간음하면 그는 사형에 처해지는 데, 더욱 상류인, 즉 양반들 사이에서 그러하며, 범인의 아비가 있을 때에는 그 아비가,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사형 집행인이 된다.”라는 내용이 추가 되어 있다. 또 식인 악어들이 우글거린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실려 있는 그림을 보면 세 마리의 악어가 보이고 육지에는 두 마리의 불을 먹고 사는 새, 즉 화식조(火食鳥)가 보인다.
1666년에 발행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절단>>에서 노이호프Johan Neuhof는 중국에 서식하는 동물과 파충류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엔 중국에 서식하는 “악어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그 속에 세 명의 어린아이들의 사체가 들어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노이호프는 마르티니의 글을 인용하였으며, <독자를 위한 서언>에서 “유럽의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 ‘짙은 어둠에 싸인 세계’(한국)를 알고 싶어한다.”라고 기술했다.
노이호프의 글은 한국을 풍요롭고 값비싼 광물들이 넘쳐나는 곳, 즉 보물섬과 같은 곳으로 인식하게 한다.
악어는 ‘악어의 눈물’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위선을 나타내는 상징적 동물이다. 또 이런 인간을 잡아먹는 악어는 ‘식인주의’ 담론이다.
식인 악어에 대한 상상과 그 실재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며 한국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 였다.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였던 뒤 알드Jean Baptiste Du Halde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여러 나라에서 보내오는 각종 문서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중국 통사The general history of China>>라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는데(1735), 이 책은 19세기 말까지 중국에 관한 책으로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지침서였다.
마르티니의 <<새 중국 전도>>가 발표된지 약 80년 후에 출간된 뒤 알드의 저서에는 마르티니가 주장한 요소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이 충분하게 매장되어 있을 분만 아니라 금으로 옷장을 장식하고 많은 귀중한 보물들을 부장품으로 매장한다고 확대되어 재생산 되는 것이다 또한 이국적 담론을 구성하는 요소인 진기한 동물로는 식인 악어외에 꼬리가 3피트가 넘는 닭 등의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한다.(뒤 알드가 주장하는 ‘꼬리가 3피트나 되는 닭’에 대한 기록의 유래로는, 진나라의 학자 진수가 편찬한 <<삼구지>> <위서> ‘동이전’에 한국에는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존재한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뒤 알드의 주장은 아마도 중국에서 전해지는 이런 기록이나 구전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2006년 9월 15일 농업진흥청 축산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그동안 한반도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긴꼬리닭이 발굴되었다고 한다(2006년 9월 16일 YTN보도). 이외에도 당시의 유럽인들이 소장하고 싶어 했던 도자기가 언급되고 있다.
1747년에 출간된 슈바베Schwabe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여행의 일반 역사>>에는 “[한국에는] 도둑이 없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간통은 거의 없다....한국인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로고 도둑질을 잘한다. 그리고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한국인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다. 일본의 황제가 한국의 왕을 참살하거나 몽골족(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적군에게 죽은 사람보다 도망가다 밝혀 죽은 자가 더 많다고 신뢰할 수 있는 전하고 있다. ..집은 낮고 지저분하다...한국의 남자들은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릴 수 있으며, 4촌까지 결혼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세계가 중국에 종속된 12개의 나라로만 되어 있다고 믿을 정도로 그들의 세계관은 제한적이고 좁다...한국인들은 종교가 없으며 미신을 믿는다...”
슈바베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중죄인은 섬으로 유배 보내지만 부모에게 불손한 자식은 참수형에 처하는 도대체 비이성적이기 이를 데 없는 형벌 체계를 갖추고 있다.
1761년 출판된 <<세계 창조의 전체 면적에 대한 일반백과사전>>중 가테러Gatterer가 기록한 부분에는 “남자를 살해한 여자는 길가에 목이 나올 정도로 묻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여자가 죽을 때까지 도끼로 내리친다....” 내용이 있다.
예컨대 <<하멜 표류기>>에서의 ‘나무 톱’이 여기에서는 ‘도끼’ 바뀌었다. ‘속옷만 입은 채 끌려 다니던 간통범’은 여기에선 ‘속옷마저 벗긴 채’ 곤장을 맞는다.
1669년에 그리멜스하우젠이 발표한 소설 <<모험적인 짐플리치시무스>>를 보면 “이들[떠돌아다니는 타타르인]과 니우치 타타르인[여진족]들은 나와 몇가지 중국 상품을 교환했다. 니우치 타타르인들은 나를 이제 막 휴전을 맺은 한국의 왕에게 특별한 선물로 바쳤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 소설에는 한국에 관한 부분은 몇줄 안되지만..그 내용은 호의적인 편이다. 아마도 그리멜스하우젠은 1665년에 출가된 아담 tif의 회고록을 읽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18세기의 독일 작가 빌란트Wieland는 장편 서사시 <<새로운 아마디스>>에서 ‘제3의 노래’에서 “부왕은 질문을 받은 드루이덴들이 써준 답변 쪽지를 찢어버리자마자 즉시 두 살도 안 된 어린 아마디스Amadis를 야스피스의 탑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시험 삼아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2천년이나 3천년 후에 부하라(우즈베키스탄)이나 한국에서 이 시를 접하게 될)미래의 주석자들에게 이 시의 연대기적 매듭을 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라고 언급딘 ‘드루이덴’에 각주를 붙이고 있다.
볼테르는 한국을 언급할 때는 ‘멀고도 깊은 나라’의 이미지를 늘 사용했다고 한다. 위대한 만담가였던 볼테르른 뭔가 멀고 어두운 것에 관해 얘기하게 될 때마다 한국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서양인이 본 한국인 800년>>
괴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헤르더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들>>라는 에세이 에서 “한국은 문화, 종교, 학문에 있어서도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부와 몇 개의 수공업 공장들도 중국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라고 라고 서술하고 있다.
장 파울 은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한 에세이 <<레바나 또는 교육론>>의 ‘영주英主의 교육’에서 영주를 어떻게 교육시키야 할 것인가에 대해 쓰고 있다. 여기에서 영주가 될 사람은 자기 나라의 하층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왕과 신하 그리고 왕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가 권위적이고 상호 차단된 예로서 한국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 왕이 행차할 때 국민들이 문과 창문을 닫아야 한다면 국민들이 올 때도 왕은 문과 창문을 닫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벽이 생길 것이디.”라는 내용이다.
생 소베의 <미지의 한국인> 그림을 보면 한국인을 인디언이나 인디오를 연상시키는...
독일인 의사 지볼트의 <<일본: 일본과 그 주변국 및 보호국에 대한 서술을 위한 문서고>> 전체 20권 중 제2권 7장이 한국에 관한 내용이며, 분량은 총 163쪽에 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한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다”라는 내용등이 있지만 한국이 개항을 요구하는 유럽인의 고압적인자세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을 펴는 것은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며 비교적 객관적 시각을 견지한다.
“정신의 교육과 관습과 풍속의 세련됨에 있어서는 일본인에게 뒤진다.....”
신체적인 면에서 취약한 일본인이 정신과 교육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우월하다고 평가한다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의 국력을 과시하고 식민지 정책을 홍보하면서 동시에 자국민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식민지 박람회를 개최했다. 이런 식민지 박람회에는 으레 인종 전시관도 함께 설치되는데,이때의 인종 전시관은 말 그대로 다른 인종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고 전시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유럽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아시아인들이 기형아, 거인, 소인, 샴쌍둥이 등과 함께 유럽인들 앞에 ‘살아서 움직이는 동물’로 전시되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끌려온 ‘제3세계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먹고 배설하면서 그들의 생활 하나 하나가 적나라한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오늘날의 동물원과 식물원의 구조와 분류 체계도 이때부터 점진적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한글에 대해서 “이 문자는 374년 신라의 어느 임금이 발명한 것으로 언문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붓을 사용하여 이 문자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쓴다. 이 문자는 자음모음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잘못된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지볼트는 독일어 문법 체계를 빌려와 그에 따라 한글의 문법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독일어의 문법 형태(6시제, 능동태와 수동태, 명령형 등)에 따라 독일어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의 뜻에 상응하는 우리말 문장을 만들어 독일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는 독일어 구조로 한국어를 분석하였다.
독일의 중국 전문가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은 1869년에 중국과 하국의 국경지대를 방문했다. 하한국과 중국의 국경에 세워진 장벽을 가리켜 “만리장성보다 더 튼튼하고, 지구상에는 중국과 한국의 국경보다 더 삼엄한 곳은 없다”라고 적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 남자보다 더 크고 멋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이처러 코가 납작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들 중에는 하층민들은 (계급 문제) 넓적코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갖고 있다.”
1873년에 발표된 글은 한국을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답지로 표현하며 아직 “국가의 화석”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반들의 무덤’이란 설명이 붙은 그름과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설명이 붙은 그림에서 독일인들이 상상한 한국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두 그림은 실제의 한국과는 다르며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것은 사흐만 판 <<하멜 표류기>에 실린 목판화를 연상시킨다.
1880년 오레르트Oppert는 “백성들의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반(半) 야만적인 통치 때문에 우리는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문 앞에 서서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한국은 “출입 금지라고 적어놓고 문명화된 세계를 조소하고 있다”
“한국은 국명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 온화한 기후, 의심할 바 없을 정도로 풍부한 광물 자원, 생산 능려을 보유하고 있다. 문호를 개방한다면 한국의 풍부한 새 자원들기 개발되는 것은 물론 과학 세계에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분야에서 풍부한 수확을 제공할 것이다”고 기술한다.
마르티니에서부터 언급하기 시작한 ‘죽은 자는 3년이 지나야 매장을 한다’는 한국의 장례 문화에 대한 묘사는 230년이 지난 후에 쓰인 오페르트의 글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새로 덧붙여진 이야기는 주로 “한국인들은 매장을 하고나면 죽은 자들이 사용했던 마차, 말고 함께 생전에 아끼던 물건들을 무덤 옆에 진열한다. 이 물건들은 장례를 함께 치른 사람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준다”와 같은 내용들이다.
오페르트는 1866년 6월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상륙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절되자 서해안을 거쳐 강화도에 잠시 상륙했다. 그는 이때 자신이 ‘발견’한 강화도 주변의 섬들을 독일어로 명명했다. 그는 강화도의 교동도를 ‘베이컨 힐 섬Beacon-Hill-Insel’으로, 교동도 서쪽에 위치한 무인도 남도(일명 딴납섬)을 ‘올가 섬Olga-Insel’으로 명명했다. 또, 그는 한국이 개항할 경우 한국 정부에 제안하여 체결할 조약문의 초안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오페르트는 <<금단의 나라: 한국으로의 여행>>(1880)에서 “지정학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한반도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소규모의 군대와 몇 척의 전함일 뿐이다. 만약 러시아가 원한다면 러시아는 언제든지 동해까지 진출하여 아시아 동부 해안 전체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얼마후에 발간된 한 독일 잡지는 “최근의 주장처럼 독일이 식민지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면 적도 근처에서 식민지를 찾기보다는 한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식민주의적 지배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매우 고집스럽고 문제가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873년, 복음 선교 )
당시의 선교사들은 고집불통인 한국인을 기독교화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내부에서 협조자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믿은 협력자는 한국의 여인들이었다.
오페르트의 책은 하멜과 지볼트 이후의 유럽인이 쓴 한국에 관한 가장 방대하고 포괄적인 책이다.
“나는 아시아 대륙의 어느 나라도 광물의 풍부함에 있어 한국만큼 많은 나라는 없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정부가 이를 개발하기는 커녕 엄격하게 규제하고 방치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오페르트는 적고 있다.
“만일 그들이(조선인들) 유럽식 복장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을 유럽인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그리고 어린이들 중에서 잘생기고 준수한 용모와 장밋빛 피부 그리고 금발의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많은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으며 이들을 유럽의 어린이들과 거의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선의 내륙으로 점점 깊이 진입하면서 이를 매우 빈번하고 거의 일상적으로 발견한 후에야 한국 사람들이 유럽 인종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17,18세기 유럽의 다른 지역 우월감 중국에 대한 자신감이 형성되었을때 아직 증명 확인 되지 않았다. 아니 나중에라도 중국 등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일너 대단한 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를것이다.
1873년 발표된 글에는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일본에는 매년 30명분의 인피(人皮)를 바쳤으나 나중에는 금, 쌀, 인삼 등으로 대체했다.”라는 것도 있다.
“그들은 그것이 머리에 뿔 하나가 달린 말과 수사슴이 혼합된 모습의 동물로 잘 놀라고 생포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다고 한다.” (오페르트)
유니콘은 남성적인 용맹성을 지닌 동시에 동정녀를 보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유순해지는 특성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한국인들의 풍습에 대하여 기술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쓰는 글은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첫째 한국인 스스로는 자신의 나라와 그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둘째 한국인들은 다른 아시아인들처럼 유럽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배경으로 쓰러지기 적전으로보이는 토담집 초가지붕은 이엉으로 얼기설기 얽혀 있고 지붕에는 박들이 열려 있다. 그리고 이 그림 아래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며, 이집보다 더 열악한 집들이 많다”는 설명이 있다.(크라우스Fr. Kraus 1889)
한국의 다양한 생활 용품을 소개하는 그림에서 젓가락과 작은 칼을 그려놓고 ‘식사용 수저’라고 설명을 붙였으며, 또 다른 그림에서는 숫대야와 요강 등 놋으로 만든 다양한 용기를 정렬해놓고는 ‘식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1895년에 쓰인 한 문서는 “한국인들은 마음이 온화하고 개방적이고 정직하고-심지어 도둑질은 사형에 처한다-충실하며 예의바르다. 그러나 문화적 수준이 저급한 모든 민족이 그렇듯이 그들의 소원과 사물을 보는 관점은 유치하고 호기심이 많다”라고 적고 있다.(1895. 8. 9)
게으름과 무기력의 원인을 사회제도에 의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인종학적 게으름이 없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하나의 원인이 더 ‘발견’ 되었고 분석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문제는 제도의 개혁이며, 나아가 누가 이 제도를 개혁하여 야만과 자연상태의 한국인에게 문명의 혜택을 줄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그 주체는 유럽인으로 귀결된다.
하멜은 ‘한국에서 구걸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가난을 극복하려 하기는 커녕 대책 없이 무기력하게 그것을 견디기만 하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한복을 입은 사진이 ...인 이유는??
‘가난하고 게으른 한국 남자’와 ‘부지런하지만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한국 여인’ 이 대비된다.
현재의 외모지상주의 험상궂게 생긴 사람은 아무래도..스스로 화를 내는 등 신체를 더욱 파괴시키고 외모에 의한 투시를 통해 왜곡 돼어 보고
혼자 있어도 원래 전라로 있지 않고 혹 옷을 벗고 섹시, 속옷 드을정액을 방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유럽 회사인 독일의 ‘새한양행’의 대표였던 볼터Wolter 조차도 1901년 기행문에서 “한국에는 많은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지만 제대로 채굴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금ㅇ을채굴하고 나면 가난해진다는 미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말 발간된 백과사전에는 “한국에는 원숭이가 서식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항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의 욕망에 찬 시선과 정형화된 한국 여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젖가슴을 드러낸 한국의 여인’이다 이 시기에 발표된 신문 기사와 논문 등 거의 모든 자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소재다. 그 종류가 기행문이든 논문이든 상관없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두 여인 모두 젖가슴을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치마를 접어 아래로 내리거나 저고를 위로 올린듯 하다.
밀었다는 것은 가렸다는 것이다.
음모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안에 있다. 그런데 이 음모를 정리하고 위에 옷을 입으면서 이 음모가 조금이라도 보일까봐 조심한다. ->그럼 왜 음모가 보일수도 있는 옷을 입는가?
선택적 노출, 음모는 감추고..다른 부분은
어차피 성기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확인받을수 없음에도 이들은 민다.
비키니등을 입은 여자들 대부분밀었다. 음모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음모를 민 여자는 문명적, 인위적, 가장 한것이다.
유럽인들은 운송 수단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사용한 한국 남성의 이미지는 바로 ‘지게 진 남자’이며, 이는 가장 원시적이며 아프리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한국인드른 열정적이지만 사랑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정을 마음이나 사랑보다는 육체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이 열정은 동물의 수컷이 처음 만나는 암컷에게 달려들어 본능적 욕구를 해결하는 열정에 비교될 수 있다...한국 사람의 반은 자신의 진짜 부모를 알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토담집 같은 거실에서 함께 잠자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하나뿐인 이불 속에서 서로 끌어안고 자기 때문이다....혼자서 길을 가는 여자는 그 여자를 먼저 발견하는 남자의 먹이가 되나. 한국에서는 10살이 넘을 때까지 남녀 아이들이 거의 발가벗은 채 다닌다.
모든 남자들은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많은 첩을 둘 수 있다....매춘은 도처에서 성행하며 대낮의 길이나 성문 근처에서 행해질 정도로 만연해 있다....도덕 교육은 없으며 아이들이 잘못하면 훈육을 하기보다는 국민적 속성이 일찍부터 나타난다고 오히려 좋아하다...한국 사람들은 소비적이다. 돈이 생기면 탕진하고 그래서 가난해지고, 가난 속에서 다음 행운이 올 때 까지 기다린다....한국인들은 어리석게도 많이 마시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한국인들은 식성이 까다롭지 않다. 날고기, 날생선 및 날곱창도 즐겨 먹는다. ....지방에 따라 한국인들의 특징이 다르다. 평안도 사람은 강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늘 감시를 하고....황해도 사람은 우매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서울 사람은 경솔하고 오락에 빠져 있다...(Arnous, 1895)
이 글의 저자 아르노스는 구한말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로프의 요청으로 1883년에 한국에 와서 1889년부터 부산 세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1893년부터 다양한 주제-한국의 동화, 한국의 왕과 왕실, 한국 여인들의 삶, 한국의 놀이와 축제, 도량형, 한국인의 특성과 윤리 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에서 수년의 시간을 보낸 만큼 한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흥부전> , <춘향전>등 여섯 편의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다.
한국의 경상도 근처에는 병과 노화를 치료하는 온천이 있다...한국의 남쪽과 북쪽 끝에는 두 개의 샘이 있는데 한 샘이 마르면 다른 샘이 가득 차고 또 그 샘이 마르면 다른 샘이 가득 찬다. 한 쪽은 물맛이 쓰고 다른 쪽은 달다. 한국에는 찬바람이 부는 동굴이 이쓴데 힘센 남자도 이 바람을 견디지 못한다. 한국에는 벌채가 불가능한 불사조 같은 가문비 숲이 있다. 뿌리를 뽑아도 다시 나무들이 자란다. 한국의 궁전에는 거석이 있는데(....양쪽에서 끈의)끝을 잡고 돌밑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1886)
종로를 벗어나면서 도처에 산재한 더러움과 지저분함에 구토가 날 정도이며 몹시 불편했다. 서울을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말해도 그것은 비방이 아닐 것이다.(1887, 선교)
1884년 서울의 지저분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사람들은 모든 쓰레기를 길거리에 쏘당 부었다. 많은 경우 집의 화장실이 길거리를 향해 나 있다. 그러나 서울의 위생 상태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것은 소나기가 오물들을 씻어내기 때문이다. (C. Wolter)
“한국에서 시술되는 기이한 치료법이 보고되었다...작게 썬 이(머리카락에 사는)가 궤양이나 머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좋으며 달팽이는 마비 증세나 경련 또는 갈증을 해소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이것은 술 취한 사람을 깨게한다. 빈대는 흥분과 급한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좋으며 모기는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1904)
“선교사들이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는 경솔한 민중들의 믿음을 이용하여 먹고사는 점쟁이, 점성술사, 사기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기록했다. (K. Steiner, 1895)
"..나는 서울에서 아주 진기한 세계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지도는 한국 사람들이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지리학 교육을위한 기본적인 지도로 사용된다고 한다...이 오래된 세계 지도의 중앙에는 중국과 한국이 있다. 일본은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다. 실제의 국명을 가진 나라는 중국, 일본, 만주, 한국 네 나라 밖에 없으며 다른 나라들은 그 나라의 특징에 따라 명명되었다. 영국이 있는 곳에는 ‘황소의 주둥이’ ,‘흰’ ,‘일에 바쁜’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일에 바쁜 황소 주둥이의 흰색 인간들’이다. 영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의견에 대하여 감사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인 독일에 관해 설명을 요청했다. 그곳에는 ‘허리가 없음’, ‘완벽한 여자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독일 남자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그러나 평소에는 여성을 경멸하는 한국인들이 우리의 여성들에게 보이는 경의를 찬사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허리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묻자 이곳[독일]의 여자들은 상체와 하체가 두 개의 부분으로 보일 정도로 허리를 단단히 묶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알기로는 독일 여자가 한국에 체류한 적은 업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이런 복식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까?... 이 지도에 그려진 삼각형 또는 사각형에는 진기하기 그지없는 나라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날아다니는 국민’ ,‘팔이 하나밖에 없는 종족’ , ‘다리가 하나뿐인 종족’ ,‘머리가 세 개인 종족’ ,‘두 명의 바보’ ,‘내장이 없는 종족’ ,‘소란스러운 종족’ ,‘여자 궁수’ ,‘경멸스러운 종족’ ,‘떠돌아다니는 마귀’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지도는 종족학적인 지도다. 이 지도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살았던 한국인의 지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도다...."(바르테크Wartegg, 1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