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가 저희까페에 올리려고 정리한 내용들인데 밑에 토론내용상 이어지는 부분이라 올립니다 .....
도대체 강화가 뭔데... 일단 한번 들어가면 잡으러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 갯벌에 푹푹 빠지고, 조수 간만 차가 크고 수상전에 약한 몽고군이라서 그랬다는데... 많이 잡아 1,2년이면 모를까... 39년이나 그렇게 농성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 적어도 1,2년이면... 점령한 대륙에서 특히 송이나 기타 나라에서 수상전에 능한 병사들과 전투선을 소집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원은 독안에 가둬둔 생쥐 마냥 강화에 가둬 놓고... 항복할 때까지 마냥 기다렸는가요... 혹시나 쳐들어가면 왕족이 모두 자결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인가요..? 아니면 최대한 예의를 갖췄던 것인가요... ?
불과 몇천도 안되는 몽고군이 어떻게 한반도를 쓸었다는 말인가요? 몽고군은 기마병입니다 기마병이 최대치의 군사력을 발휘할려면 그건 산지가 70%인 한반도안에서는 불가능하죠 그건 평야지대 즉 개활지에서이죠 대륙동부에 있던 고려여야만이 말이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강화도 가보셨나요? 그건 제주도와 같은 원양에 있는 섬이 아니라 겨우 근해에서 몇킬로떨어진 섬입니다 분명 말씀드렸듯이 39년동안 버틸만큼 그렇게 자연적인 방비나 요소가 없는곳입니다 다른 근거에서 찾아볼수있듯이 이유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ㅡㅡ;;
단지 섬이라서 그만큼 버텼다는 그말한마디로 모든것을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것같습니다 오히려 수만의 고려군이 한반도에서 수천기의 몽고군을 상대로 산성을 위시해서싸웠는데도 그렇게 밀렸다는 것이 더 이상한데요 몽골군이 공성을 잘했다지만 수성은 고구려때부터 내려온 우리군의 전매특허아니던가요... 대륙에 있던 고려가 밀리고 숲이울창한 대륙남부로 숨었을 가능성도있습니다 원사에는 한반도까지 몽고군이 왔다는 기록또한없는것으로 아는데요
첫째 강화도 논쟁이확산된 핵심은 일단 고문서나 사서에서 고려의 임금이 피난을 갔으나 대몽항쟁으로 강화 천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있다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한반도 중서부 강화도(현재 지명)라는에서 섬에는 당시 5000결을 수확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 주변에 하음 진강 해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지명이 존재하지않습니다 존재했었다는 기록또한 없으며 있었다가 바뀌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넷째 고려가 송악에서 발원했다고 하여 동경으로 부르고 서경은 평양이라고 하였다는 점 , 위로는 거란과 남으로는 일본이 위치한다는데 세나라가 같은 땅에서 방향을 설명하듯이 했다는 점..(일본이 현재의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바다 건너"라는 표현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움) 고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하였다고 하면서 장안으로 불렀다고 하는 점.남으로는 패수가 있고, 북으로는 국내성, 한성이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 점. 등으로 인하여 강화도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된것입니다
다섯째 현재 한반도의 강화도에 절터이라도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강화도로 추정한 호북성, 그리고 중원 대륙의 팔공산에도 불교 사원과 절터가 다수 존재합니다
부인사(符仁寺)는 예부터 신라 절터였고, 그곳에 사당인 선덕묘(善德廟)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데, 선덕 여왕의 무덤이 실제 있는 곳은 바로 호북성이었는데, 그곳도 역시 강화도로 추정된 곳입니다
역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양자강 유역 부근이며, 그 곳에 사로 신라의 주 강역지이라는 점을 보아,
고려는 사로 신라를 취득하였다는 기록을 생각해보면, 호북성이 '강화도'이라는 가능성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것입니다
여섯째 강화도의 면적과 거기서 나는 나무 종류를 생각해보면, 적지 않는 모순이 드러나더군요
'팔만대장경' - 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모두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강화도는 기후가 온화하여 남서부에 동백나무·초피나무·비목나무(보얀목)·탕나무 등의 난대림(상록활엽수대(常綠闊葉樹帶))이 자생합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의 재료는 기구재료로 쓰였던 돌배나무와 같이 낙엽활엽수이며, 낙엽활엽수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원대륙에도 나는 식물입니다
고려 왕계 무덤이 여럿이 세워진 곳은 강화도에 있다고 하였는데, 한반도의 강화도 면적이 비좁은데다, 고려와 연관되는 무덤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복원된 조선식 건물만 덩그라니 있을 뿐입니다
강화의 공공 전답에서 쌀 2000섬, 조 3000섬을 수확했다
또 똑같이 [우이]최의의 가정에서 수확했다
하음, 진강, 해령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후]왕, 재상인 추밀원 그리고 그 이하[사람]에게 차별 있게 나눠줬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우이[又以]라는 글자가 뜻하는 것입니다
우(又)자와 어조사 이(以)자, 그러니까 "또 똑같이란 뜻"을 의미하고, 공공 전답에서 5000섬, 또 똑같이 최의 가정에서 5000섬 합계 1만섬을 수확했다는 말인데, 1만섬을 수확하려면 농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해 보십시오
1섬은 20마지기, 1마지기는 200평이므로, 1만섬×20마지기×200평은=4000만평의 농토가 있어야만 1만섬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의 평야 면적이 1500만평이 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시대적으로 간척사업을 한것을 제외 한다면 아마도 1000만평 이라도 될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과연 한반도의 강화도에 4000만평의 농토가 있는지 반문합니다
강화(江華) - 국고에 2천결, 최의 가문에 3천결을 두었고, 또 똑같이 하음(河陰)ㆍ진강(鎭江)ㆍ해령(海寧)의 토지를 다른 귀족에게 차등있게 두었다는데, 즉 5천결을 두었고 "또 똑같이(又以)"라고 하였으므로 5천결을 더하여 1만결으로 부과됩니다 고려 시대 당시의 토지 제도는 전시과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볼수 있는데, 전시과에는 여러 가지 토지 지목이 있습니다 고려 전기 전시과체제에서의 결부법은 전지의 질에 따른 등급에 관계없이 그 결·부의 면적이 동일하였습니다 즉, 전품의 등급은 상경전(常耕田)을 상등 ; 간년휴경(間年休耕)의 것을 중등 ; 간이년휴경(間二年休耕)의 것을 하등으로 구분하였고, 수전(水田)·한전(旱田) 모두 상·중·하 등의 전품에 따라 수조율(收租率)을 차등 있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결·부의 면적을 동일하게 책정해둔 채 전품의 등급에 따라 수조율을 달리하는 이러한 제도를 ‘동적이세제(同積異稅制)’라고 합니다 고려 전기 1결의 면적을 지금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1천 2백 평 정도이며,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결당 생산량은 최고 18석에서 10석 정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척관법(尺貫法)으로 환산해 7,260평설(坪說), 6,806평설, 그리고 4,184평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시과체제가 무너져가는 고려 후기에 와서 결·부의 법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휴한농법 위주의 전통적인 농경 방식이 상경전으로 점차 바뀜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고려 말기에 제정된 과전법은 그러한 변화된 결부법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의 1결 실제 면적을 척관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상등전 1결이 1,846평 ; 중등전 1결이 2,897평 ; 하등전 1결은 4,184평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고려 고종 시기는 고려 후기이므로 척관법으로 적용하고, 부과 대상 여부와 상관없이 1결을 최소한 1천8백4십6평으로 정하여 계산해 보자면.. 그렇다면 1만결을 1천8백4십6평으로 곱하여 계산해보면, 18,460,000평으로 나오며, 즉 1천8백4십6만 평입니다 그러나 과전법은 공양왕 시기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고려 고종 당시 부과법은 전시과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시과에 따라 척관법 기준으로 정하여 1결을 최소한 4,184평으로 하여 계산해보면, 1만결을 곱하여 4천1백8십4만 평이 됩니다 지금 한반도의 강화도에 고려 당시 부과할 때 최소한의 면적인 4천1백8십4만 평이 있을 수 있는지요?
섬 (석, 石) : 신라 때부터 사용된 '섬'은 새끼로 날줄을 삼고 짚으로 엮어 곡식을 담는데 쓰는 물건입니다 여기에 채워진 양곡의 양이 한 섬입니다 원래는 15말이 한 섬이었지만 후대로 가면서 10말들이의 한 '석(石)'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말하는 섬 또는 석은 실제로 미터법 체계의 '무게'단위입니다 도정(搗精)한 쌀 144kg이 한 섬이고, 보리의 경우는 138kg이 한 섬입니다 그럼 고려때는 이 한섬의 기준은 15~17말이 되었을 겁니다. 과거에 이루어졌던 단위로 생산량을 계산함은 당연한 것이고, 한마지기당 생산량도 오늘날과 동일시한 생산량은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만약 동일 하다면 과거의 농업기술이 오늘날과 대등하여야 할 겁니다. 일정시절에 농업생산성을 보면; "1918-1920년에 논 1단보(300평)의 연평균 수확량은 0.93섬(167리터)이었다. 이 시기의 토지생산성은, 조선시대의 1말을 5.976리터로 잡고 계산하였을 때, 15세기중엽 4등전의 두 배 정도가 된다. 일제시대에 논 1단보의 연평균 수확고는 1섬 정도까지 증가하였으며, 1960년대이래 토지생산성이 급증하여 오늘날에는 3섬을 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에도 토지생산성은 계속 상승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일제시대의 상황을 보면 한마지기 좀 넘는 300평의 규모에서 약 한섬이 덜되는 생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비록 4등전의 토지를 근거로 평균치를 내었지만 그 4등전의 2배를 일정시절에 생산한 규모 랍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한마지기(300평)당 반섬꼴이 되겠군요! 물론 4등전 기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화도의 농지 전체가 4등전 혹은 1~2등전이라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결국 조선시대의 농업생산성은 상상 이하라는 결론이 도출 될수도 있다 봅니다. 강화도의 토지는 전부다 농지가 아닐겁니다. 강화도의 땅면적에서 평지가 차지하는 지중은 그리 많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평지에 농사만 짓는게 아닐것이고,사람의 집도 있을 것이고,관공서도 있을 것이고, 상가,주점등도 있을 것입니다. 강화도의 산악지형과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곳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평지의 농지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무조건 산술적인 접근이 능사가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1결당 평수는 천차만별 이랍니다. "1등급 1결은 2,986.6평이었고, 6등급은 그보다 면적이 4배가 넓어 11,946,4평이었다." 그러면 강화도의 농지는 전부다가 1등전 이었을까요? 이러한 사실들과 일제시대의 농업생산성과 강화도 평지,평야의 토지용도 상의 시대적인 관점에서 생산량을 말한다면 이해할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벼등이 과거 전통의 토종벼를 재배하는 농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거의 다가 추정미(일명 아끼바리)를 재배하더군요! 과거의 토종보다 생산량이 많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강화도 면적은 과거의 강화도의 면적과 그 크기가 다를 겁니다. 간척을 활발히 하여 그 면적이 늘어난 사실을 역사적으로 합치해서의 해석은 무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단순히 면적 만으로 농업 생산량을 논한다면 그럼 강화도의 산악과 길가,그외 모든 땅이란 곳은 모두다가 농지란 말입니까? 제가 알기론 간척한 지역 포함해서 순수한 평야의 면적이 1500~2000만평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평야 지역이야 말로 농지의 적합한 대상지가 아닐까요?
일곱번째 고려 태조,세조의 능을 강화에 이장했다는 고려사절요 기록--고종 30년 8월 기록
-원문-팔월이장세조태조우강화개골동[八月移葬世祖太祖宇江華蓋骨洞]
21대 희종의 능을 모신 기록 고려사절요 고종 24년 8월 기록
원문-추팔월무자[일]전왕훙우법천정사다빈우낙진궁
[秋八月戊子(日) 前王薨于法天精舍多殯于樂眞宮]
동십월정유[일]장석릉시왈성효묘호정종후개희종 축강화외성
[冬十月丁酉(日)葬碩陵諡曰 誠孝廟號貞宗後改熙宗 築江華外城]
--가을 8월 무자일에 전왕 훙[죽다]하여 법천정사에 빈소 마련하고, 겨울 10월에 낙진궁에서 장사지내고 석릉이라, 시호는 성효, 묘호는 정종, 후에 이름고쳐 희종이라하고, 능을 강화 외성에 쌓다
위의 기록은 세조, 태조의 능을 강화 개골동으로 이장하고, 21대 정종[후에 개칭, 희종]의
묘는 강화 외성에 쌓았다는 기록.
우리는 강화도에 가서 왕릉이나 왕릉의 흔적을 본 일이 있고 날조인 강화 천도에 따른 궁성이, 또는 궁궐 터라도 있는가요?
일본은 그래도 사실을 말만 바꾼거죠..ㅡㅡ 박아람님은 사실여부 자체가 불투명하지 않습니까;;
변태인가... 욕을 얻어먹을수록 쾌감이 솟구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