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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사사됐죠. 사약 먹고 죽었죠. 제3의 여인이 들어와서 왕후가 되죠. 인원왕후예요. 후사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분 성격도 좋았어요. 각 파에서 그냥 무난하게 본 거예요. 그래서 이분은 합장한 무덤에 사람이 쳐다봤을 때 왼손 편 살짝 뒤에 단독으로 묻었어요. 그렇게 세 분이 다 묻혀요.
왜 이런 거 있죠? 엘로드 (수맥봉)이란 게 있죠? 이게 얼마나 웃기는 건 줄 아세요? 이거 잘한다고 심지어 도사 자격증까지 준 적이 있어요. 이게 맞아요. 안 맞지는 않아요. 반응해요. 근데 왜 엉터리냐? 이게 지하 5m에서 오는 반응인지, 지하 2m에서 오는 반응인지, 지하 1m에서 오는 반응인지 이 표피에서 어떻게 알아요?
표면과 함께 깊이도 고려했던 풍수
실제로 같은 엘로드를 들고 2층에 가서 했더니 막 반응을 하는 거예요. 4층에 갔더니 꼼짝 안 해요. 그러니까 이게 높이도 있다는 거거든요. 땅을 보는데 표피만 갖고 볼 수 있고 그러다가 그게 반응을 하니, “수맥이 있군요!” 했단 말이죠. 수맥이 어디 있는데요? 느낄 만큼 있다고 한다면 말은 될 수 있는데, 이 근원이 지하 10미터인지 지하 5미터인지, 심지어 윗집인 윗집이 수도인지 윗집 보일러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간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풍수라는 것도 현지에 오면 깊이라는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풍수가 없어요. 있는 지표, 울퉁불퉁한 지표, 울퉁불퉁해도 지표는 지표잖아요. 그걸 읽는 거죠.
그건 풍수가 아닌 거예요. 옛날의 풍수는 지표뿐만 아니라 깊이를 읽어요. 그래서 그것이 효율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별개로 따지는 겁니다. 당시의 습관, 당시 집단 지성의 관점에서만 보자는 거죠. 유용하냐 아니냐의 얘기를 제가 드리는 건 전혀 아니에요. 저는 현대사회에 와서는 그다지 유용하다고 생각 안 해요.
어쨌든 서오릉을 가면 아주 재미있어요. 산이라는 게 흐름이 있잖아요.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흐름이 있잖아요. 그것이 때로는 굴곡질 수도 있고, 어떤 데는 다르게 흐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흐름이라는 게 있잖아요. 뭔가 곡선 직선으로 흘러가는 흐름에 사람 하나 들어갈 깊이만 들어가게 묻었구나 싶은 게 네 번째 왕후인 인원왕후의 무덤입니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거예요.
그 당시에 장희빈이 먼저 죽었잖아요. 장희빈 무덤은 산의 흐름이 있으면 그 흐름보다 더 판 느낌이 와요. 내려 앉힌 느낌이 와요. 사람 키 하나 내지 둘 정도로, 정확하게는 하나라고 봐야 돼요. 당시에 사람 키라고 하면 22cm가 한 척이니까 22 곱하기 6 하면 132인가요? 132가 표준이에요. 이 132보다는 좀 더 더 깊이 판 듯한 그런 느낌이에요.
반대로 숙종의 무덤을 보면 그만큼 높인 느낌이에요. 산이 흐르면서 돋우었어요. 밑에는 당연히 산 흐름을 따르다 보면 밑에는 당연히 돋아야 되는데, 전체적으로 무덤이 있는 데를 중심으로 선을 그려 보면 높여 놨어요.
이건 뭐냐? 노론들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해석을 한 거예요. 높이면 장자가 발복을 받는다고 그래요. 꺼뜨려서 낮추면 그 다음 다음이나 또는 장자가 아닌 서자가 이렇게 발복을 받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장희빈의 경우에는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고 경종이 숙종의 장자잖아요. 장자가 발복을 못 받도록 하는 거죠. 경종은 그냥 왕이 되든 말든 간에 빨리 그냥 사라져라 이거죠. 실제로 왕을 2년밖에 못 하잖아요. 해코지를 했다는 설도 있고요.
그 다음에 무수리 최숙빈이 낳은 아들이 영조잖아요. 영조를 키우기 위해서 반대로 봉분을 높여요. 저는 서오릉에 산보를 간 건데요.
사람들의 걷는 모습
공기가 너무 안 좋은데 좀 걷고는 싶고 그래서 숲이 있는 데를 걸어야겠다 해서 갔죠. 어제 공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지켜봤어요. 어떻게 걷는가? 요즘 무료 개방 주일이 있어서 사람이 꽤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한 200명 정도 걸음걸이를 지켜본 것 같아요. 제대로 걷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다 특징 있게 걸었어요. 그러니까 개성이 있다는 얘기예요.
표준에 얼마만큼 가까우냐의 문제이지 표준인 건 없는 거죠. 우리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려고 애를 쓰고 있고, 애쓰는 선에서 가격이 반영되는 순간, 수요와 공급이 일제히 움직이죠. 또 가격 따라가죠. 또 움직이죠. 그것처럼 근접하려고 하는 성격이 있는 거지 일치는 불가능하죠.
옛날에 그랬어요. 의리를 지켜라! 의리를 지켜라! 의리는 지킬 수 없어요. 의리에 근접하려고 하는 거죠. 의리 자체는 지킬 수가 없어요. 움직이니까! 옛날 사람들은 “그의 의(義)에 근접한다” 이렇게 표현하지, ‘의를 지킨다’ 하는 것은 속류학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벌써 사람이 다 다르니까 음식을 해도 그 사람하고 대화를 해서 그 사람에 맞는 음식을 하는 게 맞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러기가 어렵죠. 표준으로 살아야 되죠.
집단지성의 개별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교육이라는 게 집단 지성을 개인화시켜주는 과정인 거죠. 집단 지성을 개인화시켜주면 아이들이 커가지고 또 다른 집단 지성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발전된 집단 지성을 또 주입이든 훈련이든 내재화시켜줘야죠. 그러니까 집단지성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이미 흘러간 집단, 너무 오래전에 흘러간 집단 지성을 교육하거나 하면 이건 교육이 아닌 거죠.
그건 학습인 거죠. 살아 있는 교육이라고 보기 어렵죠. 아무튼 교육이라는 건 본질 자체가 집단 지성을 개별화시켜주는 과정이죠. 그런 게 안 이루어지니까 그냥 나와버리는 선생님들이 계시는 거죠.
아무튼 그런 것도 개별 개별이 다 달라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별이 동일한 표준을 적용하려고 한다면 자기는 다치는 거죠. 어떤 분들은 차 마실 때 강중수(江中水)가 제일 좋다고 그래요.
(주- 차를 우릴 때 쓰는 물을 산상수(山上水), 강중수(江中水), 정하수(井下水) 등으로 구분. 산물과 강물과 지하수 등으로 구분하는데, 이 가운데 江中水는 오염이 덜 된 강 상류의 물을 말함)
또 (주- 당나라 육우가 구분한) 천하10대명천(天下10大名泉) 중에 제이천(第二泉)으로 알려진 (강소성 무석시에 소재한) 혜산석천(惠山石泉)이란 게 있잖아요. 혜산석천에 우리 옹달샘 생각 왔다가 보면 더러운 물이에요. 상당히 넓고 더러운 물이에요.
실제 바로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급할 때 먹는 물, 이게 안전하다는 개념에서 즉 병균이나 이런 데서 안전하다는 개념에서 먹을 수 있는 긴급수(緊急水)이지, 평상시에는 그런 물 안 먹어요.
왜냐하면 아직 그 물은 태양을 충분히 받거나, 바깥바람을 충분히 쐬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아직 나와 만날, 내 몸과 만날 준비가 덜 된 거예요. 내 몸과 만날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안 다쳐요. 내 살이 안 다치고, 내 신경이 안 다치고내 에너지가 손상이 안 돼요. 그런데 막 나온 샘물이 좋으면 잘 정제해서 먹어야죠.
과정을 거치고 거쳐 돌려서 먹는 이유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 아래에 차력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도 어깨 너머로 조금씩 배웠죠.
그분들은 돌을 살짝 들고 때리는 게 아니에요. 진짜 놓고 때려 깨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딘가에 힘이 엄청 들어가야 돼요. 역도 선수들은 역기를 들 때 허리띠 하는 경우 있죠. 그것처럼 허리 복막의 힘이 엄청 강해야 돼요. 그 힘이 부족하면 탈장이 일어나요. 그래서 복막의 힘이 그냥 근육처럼 딴딴해지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구리 가루를 먹어요. 구리를 볶고 물에 녹이고 풍화시켜가지고 먹을 수 있는 구리 가루예요. 옛날 차력사들은 구리 가루를 다 먹었어요.
이렇게 구리가루라고 그러면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닌 게, 우리가 먹고 있는 게 다 그것들을 정제한 거잖아요. 그렇게 정제한 건데 왜 정제하느냐? 내 몸에 가깝게 만드는 거예요. 내 몸에서 멀면 내 몸이 그만큼 삭(삯)고 다쳐요.
만일 구리 가루를 이렇게 정제를 하지 않고 그냥 먹었다! 그때 제가 철명계라는 닭 이야기를 얘기했잖아요. 개구리한테 주고, 그 개구리를 뱀 주고, 그 뱀을 쪼개서 닭을 주고, 사람은 그 닭을 먹는다고 그랬잖아요.
닭도 겨우 견딜 정도로 털이 벗겨지고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소리가 이상해지는데 그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에요. 그 소리들을 듣고 나면 정내미 다 떨어져요. 어떤 느낌이냐면, 칠판을 손으로 긁는 소리를 최대화시켜 놓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러니까 찍 하는 소리가 살짝 들리는 게 아니고 천 명 정도가 들을 수 있는 정도로 나는 그런 느낌의 소리를 내요.
그렇게 돌려서 먹는 것, 이게 뭐죠? 나한테 가까이 끌고 오는 거잖아요. 나한테 가까이 있지 않는 것을 끌고 오는 것. 이것이 집단 지성으로서 인간이 찾아낸 자기에게 근접하는 것을 먹는 방법이에요.
그것 때문에 인간은 다양하게 먹어요. 그게 없었으면 인간도 다른 동물들처럼 그냥 그렇게 먹었을 거예요. 그러면 수명도 16년이나 20년 정도 이렇게 사는 게 최대 수명이었을 거예요.
요즘 개들 오래 산다고 그러잖아요. 걔들 원래 평균 수명이 12살이나 13살이죠. 요즘 16세에서 17세 살죠. 먹는 게 개들에게 좀 더 근접한 음식이 제공되고 있는 거예요. 개들이 그것 때문에 덜 다치고 덜 삭아서 버티는 거죠. 인간이 아닌 들개들이 수명 짧은 거는 환경도 열악하지만 먹는 것도 자기한테 가까운 것을 먹을 수가 없죠.
지난번에 곶감 얘기했죠. 그렇게 당겨서 먹는 거죠. 안 당겨서 먹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죠. 이렇게 당겨 먹으면서 가는 것을 제가 선근후원(先近後遠)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가까운 것을 먼저 먼 것을 나중에!’ 내 몸에 가까운 것을 먼저 받아들인다는 거죠. 이게 몸의 움직임인데요.
선근후원(先近後遠), 가까운 것을 먼저 먼 것을 나중에!
가까이 있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선근(先近)을 시키는 것,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오는 행위, 그걸 ‘법’이라고 그래요.
춘추전국시대라는 나라 아시죠? 주나라도 아시잖아요. 원래 주나라는 통일의 시대고 춘추 전국 시대는 분열의 시대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착각에 빠지느냐? 주나라라는 큰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쪼개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그렇지 않아요. 주나라는 원래 조그마한 나라예요. 그 주변에 위성 국가들이 생기게 되죠. 그 위성국가들이 힘을 갖추죠. 그게 분열이에요.
그러니까 주나라에서 춘추 전국 시대로 넘어가는 분열은 사실상 중국이라고 불리던 영토의 확장이에요. 같은 영토가 분열된 게 아니고 그 주나라는 그대로 유지돼요. 주나라 이외에 독립해 있던 나라들이 진짜 독립해 가지고 쪼개져 있는 게 이 춘추시대이거든요.
이 춘추시대에 오면, 모든 것을 국가 위주, 즉 조직 경영 위주로 언어들이 재해석될 수밖에 없어요. 재해석이 안 됐을 때 ‘법’이라는 건 뭐냐? 먼 것을 가까이 가져오는 방법인 거예요. 방법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써요. 그런데 춘추 시대가 되면 표준이라는 면으로 ‘법’을 써요. 지금 법이라고 하면 두 가지 뜻이 같이 있죠. 방법이라는 의미로 법이 쓰이기도 하,고 법률이라고 그럴 때 표준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죠.
두 가지가 지금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주로 남아 있는 이미지는 법률로서의 이미지죠. 방법이라는 의미로서는 쓰긴 쓰면서도 그게 법이라는 생각은 안 하죠. 원래 법이라는 것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내게 먼 것을 내게 가까이 갖고 오게 하는 방법 또는 그렇게 만들고, 실행을 해야죠. 그렇게 실행하는 것을 법제(法制)라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내게 가까이 있는 것이 내 먹을거리잖아요.
요리와 약이라는 것
그리고 요리를 하잖아요. ‘요리’라고 하는 것은 언제 만들어진 말이냐면, 당나라 때 만들어진 말이에요. 그 이전까지는 요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약선(藥膳)이라고 불렀어요.
(주-약(藥)과 음식(膳)을 합친 말로 약이 되는 음식이란 뜻. 선(膳)은 채소(菜蔬), 두부(豆腐), 쇠고기 따위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만든 음식(飮食)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요리가 요리하지 않고 그냥 대충 구워서 먹고 대충 삶아서 먹는 그냥 음식이에요. 그런데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고 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 약으로 인지된 거예요. 오늘날 생각하는 약이 아닌 거죠.
약(藥)의 원래 의미는 메디슨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다 놓은 결과물인 거죠. 가까이 끌어오는 방법, 그 방법에 따라서 만드는 법제, 법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약이었어요.
근데 어느 시기에 오면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물건에서 뭔가를 고치는 것으로 인지가 되죠. 그래서 지금은 약이라 그러면 일상적으로 먹는 것은 아닌 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서 바나나를 갖다가 상온에 둬서 이렇게 거무틱틱하게 먹는다면 이게 약이에요. 약 만드는 거죠. 가장 간단하게 법제한 거예요. 노란 바나나를 사다가 자기가 까무티티하게 만들어야죠.
그게 제일 좋아요. 두 가지 면에서 그래요. 첫째 그렇게 해야 자기가 사는 공간과 대화가 이루어진 거예요. 자기와도 대화가 될 준비가 됐지만 동시에 자기 공간과 대화가 이루어진 결과물이에요. 그게 첫 번째 요인이고, 두 번째는 그래야 믿을 수 있어요.
요즘 사회에서는 누가 그냥 대충 건조실에 넣어 가지고 꺼무티티하게 해 갖고 팔면, 진짜 법제를 한 것인지 모양만 낸 것인지 알 수가 없죠. (저기 기성세대이신 동갑내기 네 분은 못 믿으실 거예요. -*웃음)
식문화
이런 것이 식문화예요. 그러니까 식 생활이 아니고 식사 양식이 아니고 식사 문화예요. 그러니까 스타일이 아니고 컬처(culture)예요. 식문화라는 것! 내게 먼 것을 가까이 가져올 수 있는 능력치, 인간이 개발한 영역, 그걸 개발한 방법과 표준 등을 총괄해서 식사 문화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우리는 현재 식사 문화에서 내 살에 살을 재공급하고 있느냐? 바나나를 두면 바나나는 처음엔 바나나였죠. 자기들끼리 땡땡 뭉쳐 있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분해되기 시작하죠. 완전 분해되면 내 것이 아니죠. 이미 지났죠.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것은 변질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동시에 에너지원으로서 분해됐다는 것입니다. 그건 들어와 봐야 질료만 들어온 것이고 어떤 형상만 들어온 것이지 어떤 질료로서 기능을 못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3년 전 쌀을 갖고 밥을 지으면, 비슷한 쌀인데 들어가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서는 이미 에너지가 분해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그런 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기 시작하는 흐름을 탔을 때, 그 때 노인이면 조금은 더 분해된 것을, 젊으면 조금 덜 분해된 것을, 심지어 분해 안 된 것도 젊은 분들은 먹죠. 젊은 분들은 뭐 쇠도 소화한다고 그러잖아요.
실제로 인간이 법제화할 때 얼마나 무서운 줄 압니까? 우리가 쇠를 갖고 사람 몸에 찌르면 어떻게 하죠? 잘못하면 파상풍이 나죠. 그래서 파상풍 약 치료받으러 병원 얼른 가거나 약국 가죠. 쇠가 무서운 거죠. 쇠독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쇠를 갖고 침을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래야 사람한테 놓잖아요. 쇠 갖고 침 넣으면 어떻게 돼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짓 하는지 압니까?
법제의 사례 - 구리침
소의 위가 몇 개 있죠? 4개라고 하는데 사실상 ‘강약중약’이니까, 2개라고 볼 수도 있고 4개나 볼 수도 있죠. 그 소의 위에 따라 가지고 안에 있는 어떤 건 천엽이고 어떤 건 양이죠. 그러니까 위의 위치와 위의 순번에 따라서 안에서 정제하는 것이 무언가 다르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 소한테 무쇠를 먹여요. 무쇠를 먹이면 평생 그 소에게 그 무쇠는 무거우니까 안 내려가요. 그렇다고 소가 갑자기 서가지고 사람처럼 뛸 수도 없잖아요. 소가 두 발로 서서 걷는 거 못 봤잖아요. 그러니까 소한테 쇠를 주면 그냥 배 불룩하게 그 무쇠 덩어리를 담고 20년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무쇠가 파상풍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제거되는 거예요. 법제가 되고 있는 거죠.
그 소가 죽잖아요. 그러면 그 소의 배를 갈라 그 쇠를 꺼내서 그걸로 침을 만들어요. 그래서 그 침은 무쇠로 만든 침이지만 찔러도 독이 없어요. 요즘은 그렇게 못 만드니까 어떻게 하죠? 아예 독이 없는 녹이 없는 재료로 만들죠. 아예 쇠로 만들기도 하지만 요즘 특수 스텐레스(stainless)도 많아요.
엄밀하게는 스텐레스가 아니죠. 스테인이죠. 왜 녹이 안 쓸죠? 녹으로 만들었으니까 녹이 안 쓰는 거죠. 녹이 안 쓴다고 녹으로 만들었다면 뭐죠? 이게 잘 안 휜다는 얘기죠. 스텐 그릇을 던져도 휘지 않고 플라스틱처럼 틱틱 튀잖아요. 유연성이 떨어져서 그렇죠.
요즘은 기술이 좋아가지고 유연한 스텐레스도 만들더라고요. 요즘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그럴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 합금술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구리를 정제해서 구리침을 쓰거나 했죠. 안 그러면 구리도 역시 구리 독이 있죠.
구리독이 생기잖아요. 구리독이 생기면 판다처럼 돼요. 똥독 걸린 사람처럼 발등이 퍼렇게 부풀어 올라요. 그렇지 않으려면 구리도 정제해야 되는데 쇠독만큼 위험하지는 않죠. 철명계를 안 만들어도 구리는 그렇게 했어요. 구리는 어디다 넣어가지고 했을까요? 구리도 남의 배에 넣어 했어요.
아니면 땅에 묻어가 하기도 했어요. 어디 어떤 흙에 묻느냐면, ‘쪼다’에 묻어요. 지난번에 쪼다라고 말씀드렸죠. 찰흙에 구리를 넣어요. 구리를 넣는데 까만 찰흙이 있고 하얀 찰흙이 있어요. 하얀 찰흙을 밑에 두고 거기에 구리를 넣고, 여기에 까만 찰흙을 덮어 마치 태극 모양처럼 이 두 겹 사이에 두어 주물러서 만들어요. 그렇게 오래 둬서 찰흙이 마르면 다시 물을 주고, 다시 찰흙이 마를 때쯤 되면 또 물 주고 하면서 오래 두어요. 그걸 3개월쯤을 하면 구리 독이 빠져요.
별 희한한 옛날 얘기를 들으시죠. 이런 옛날 얘기는 지금 여기 19세기 분이 안 계시기 때문에 제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어요. 저는 19세기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튼 법제를 하는 데 원칙은 선근후원이에요. 그리고 이게 법(法)이에요.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도 우리가 사는 데서 먼 걸 먼저 먹으면 안 돼요. 먼저 먹으면 안 되는데 먼 걸 먼저 먹으려고 하는 욕구가 존재해요.
아낌없이 주는 건 없다
어떻게 하면 존재하느냐? 여러분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 같은 것이나 프로그램 같은 것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게 책인지 뭔지 전 모릅니다. 책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죠? 그때 제가 그 책을 보고 제목을 바꿔서 책을 하나 쓰고 싶었어요.
물론 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 순간 몇 초 동안만 제목을 이렇게 바꿨어요. ‘망설임 없이 괴롭히는 너!’
어제 서오릉에 갔을 때도, 굵기는 사람 팔뚝 굵기밖에 안 되는 나무를 붙잡고 거기서 뭘 얻겠다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뭘 얻겠다는 건 나무가 뭘 준다는 거잖아요. 그 나무는 줄 생각이 없는데 달라고 그러면, 그건 뺏는 거잖아요.
망설임 없이 나무를 붙잡고 그래요. 미안함도 없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것은 뺏는 사람의 자기 정당화예요. TV 프로그램 보면 ‘자연인’이라고 나오는데, 자연 훼손인들이에요. 자연에 뭐 해주고 있는 건 없어요. 자연 수탈이죠.
가서 자연에 있는 것, 여기 가서 여기 맛있어 보이니 빼먹고, 저기 가서 나무 껍질이 좋아 보이면 그걸 해먹고 그러죠. 전부 자연 수탈을 하지 자연한테 뭐 주는 자연인은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걸 자연인이라고 부른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정당화될 수 있겠는데, 그래도 나무가 언제 아낌없이 준다고 그랬어요? 자기가 망설임 없이 수탈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런 풍경이 공원마다 있어요. 하지 마세요. 나무 붙잡고 막 치고 흔들고 그러는 거 있잖아요. 하지 마세요. 그건 망설임 없이 빼앗는 행위이어요. 그 빼앗는 것만큼은 그 나무를 괴롭히는 것이고, 나무로부터 허락받지 못한 에너지를 받을 때는 나무로부터 해로움도 받아요.
영화 중에 어느 날 나무가 화가 나서 나무가 막 사람 죽이는 영화 있었죠. 그런 일 벌어질 정도로 나무도 에너지 작용을 해요. 허락받지 않고 쓰다듬어주고, 그 나무와 같이 즐기다가 가야 되어요. 그 나무한테 “내가 요즘 힘든데 좀 기대도 되겠니?” 마음으로라도 하고 하면 나무는 알아들어요.
나무의 방식으로 알아들어요. 우리가 이성적 지성적 방식으로 알아듣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존재는 자기가 갖고 있는 본래의 본능으로 알아들어요.
그렇게 나누는 거죠. 내가 나눠줄 테니까 너도 좀 나눠주고 그래! 나한테 조금 남는 잉여를 그에게 주고, 그의 잉여를 취하는 걸로 하는 거죠. 어떤 나무를 보니까 막 단풍이 들고 떨어지고 있어요. 그런 나무 붙잡고 막 등을 부대끼며 치고 있는데요. 그렇게 해서 나무늘보로 개종을 하시나 했어요.
이런 경우 많아요. 혹시 여러분 중에도 켕기는 분 있을 수 있어요? 켕겨도 오늘부터 안 챙기면 돼요. 모르고 하셨잖아요. 아낌없이 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거래하는 거죠. 왜 나무만이 아낌없이 줘야 되나요? 그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수탈의 정당화예요.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는 거예요. “얼굴도 모르고, 뭐 사람 식으로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사람식으로 한다면 통성명도 없이, 나 한 번 그냥 쓰다듬어 주지도 않더니 갑자기 와가지고 나를 끌어안고 좋은 기운 달라고 막 하는데…” 그러면 자기는 안 다치겠냐고요.
자기도 다쳐요. 그 친구도 나한테 줄 준비가 안 됐어요. 그 친구도 생명이니까 나한테 줄 만큼 자기가 스스로 준비를 해 주는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응해서 법제가 돼 주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안 됐을 때는 취하지 말라는 거예요. 취하면 얻음도 있지만 잃음이 더 클 수 있다는 거예요.
흙을 밟는 것이 아니라 디디는 것
어떤 때 흙도 막 밟고 다니시는데 예전에 한 마을에 살 때 흙을 밟고 다니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이렇게 걷는 걸 봐요. 아프니까 그러셨겠죠. 땅을 걷는데 땅과 대화를 하시는 게 아니라, 땅에 권위를 세우시는 자세로 걸어요. 걷는데 “땅아, 나야!”라는 자세로 걸어요.
땅이 어머니 품이잖아요. 중력이 작용되고 있다는 건 과학의 설명이고 인문의 설명은 어머니 대지가 우리를 끌어당겨 안아주는 힘이잖아요. 중력의 인문적 표현은 지모신인 어머니가 되고 실제 생명이에요. 무슨 외계인하고 소통을 하신다고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는데, 살아있는 어머니하고 대화를 해여죠.
우리는 환경이라고 부르지만 환경이 아니에요. 환경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회충들이 우리를 환경이라고 여기겠죠. 어머니 대지는 생명인데 인간들이 마치 회충들이 우리를 환경이라고 부르듯이 어머니를 환경이라고 부르는 거죠.
‘대생명부’라고 해야지, 혹은 ‘대생명연대부’ 정도라고 해야지, 환경부가 뭐예요? 집에서 어머니가 환경이에요? 똑같죠. 아무튼 땅을 환경으로 여기고 내 아래에 있으니까 아래로 생각하고 걸으시는 거예요.
그 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한 말씀을 드리고 싶기는 하더라고요. 안 했죠. 드린다고 들을 분이 아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시대적인 한계가 그분 속에도 있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런 분을 저는 영향가(影向家)라고 불러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영향가이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영향가! 우리 사회에 영향가가 많고 그런 사람들을 좋은 말로 오피니언 리더라고 그러죠.
오피니언 리더라는 말을 한자어로 번역하면 영향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영향가의 다른 특징을 보면 장님이 밤에 등불을 들고 가는 거죠. 필요해요.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필요해요.
심지어 어떤 분은 같은 흙이라고, 외국 나가서 순례길을 천천히 걷는다면서 맨발로 걷는 분도 있어요. 그건 독이에요. 내가 평생 걸어보지 못한, 아직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곳을 그렇게 걷고 오신 분들은 하나같이 병이 나서 오시죠. 심지어 큰 병 나가지고 그 길로 돌아가시는 분도 제가 몇 번 봤어요.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만나기 위해서 다가와 있다는 거예요. 다가오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와서 만나는 건 다 강제라는 강(强)자가 붙어요. 애인하고 남녀가 같이 하는 것은 강자를 안 붙여요. 강자가 붙는다는 건 내 옆에 아직 없는 자예요. 없는 자를 억지로 끌고 오는 모든 행위에는 强(강) 자가 붙는 거예요.
선근후원과 선신후구(先新後舊)
내 몸에 대해서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서 그게 안 되려면 그 친구를 법에 따라서 법제를 해야 되죠. 다가오게 해야죠. 그 다음에 만나야죠. 그래서 순서를 지키는데 그게 선근후원이에요. 그런데 선신후구(先新後舊)와 선근후원(先近後遠)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선근후원으로 몸이 이루어지면 삶의 방식은 저절로 선신후구가 돼요. 선신후구는 먹는 것과는 별개예요. 선근후원으로 내가 나를 불리면, 그렇게 살을 붙이면 살이 어떻게 되죠? 그러면 그 다음에 죽은 살이 빠지죠. “살이 제법 붙었구나!” 그러면 “제법 성장했구나!” 이런 의미죠.
“살이 쪘구나!” 그러면 뭐죠? 우리는 동일한 사실과 사건을 놓고 다른 각도에서 봐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에 청계천 삼일고가를 해체하고 복개된 부분을 드러내고 내부를 정비했죠. 그 복개된 강 주변도 자기 시대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정비를 했어요. 이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한번 볼래요. 원래 미군들은 삼일고가를 안 다닌다고 그랬을 정도였어요. 너무 젊어서 삼일고가 모르는 분도 있죠(-*). 삼일고가 생긴 이후에 태어나신 거죠? 옛날 70년대 사진 보면 그게 가장 멋진 부분으로 이렇게 돼 있어요. 서울을 소개하는 3.1 빌딩과 함께 시작던 곳이죠.
그런데 서울 시민들은 그것을 드러냈으면 했던 거예요. 그게 좀 정리됐으면! 그게 정리가 안 되니까 강북이 서울의 중심이 안 됐어요. 서울 강북이 중심이 되려면 3.1고가를 정리하고 청계천도 복원해야 했죠. 세운상가로부터 저기 진양상가와 풍전 상가로 이어지는 걸 정리해야 재개발이 돼요.
아무튼 간에 관점을 위주로 보겠습니다. 3.1고가 철거하고 청계천 주변을 정리한 것을, 어떤 사람은 서울시민의 숙원을 풀어줬구나! 어떤 사람은 토목사업을 했구나! 어떤 사람은 수리 사업을 했구나! 이렇게 서로 다른 포인트를 어디에 주느냐에 따라서 다음에 그가 할 계획이 달라지겠죠.
이명박 대통령은 그 가운데 두 가지로 본 것 같아요. 토목과 수리 사업으로! 그래서 대통령이 되자마자 ‘아 내가 토목과 수리 사업을 해서 성공한 시장이 됐구나!’ 그것으로 대통령이 됐구나! 그걸 성공이라고 여기는 분이니까 그렇죠. 대통령이 되자마자 4대강을 꺼냈죠. 치수 사업을 토목 사업과 연결해서 청계천을 전국화하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서울시민의 숙원을 풀어줬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봤어요. 그럼 4대강이 대한민국 국민의 숙원을 들어준 거냐? 전혀 포인트가 안 맞죠.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각과 못해본 일을 꺼낸 거예요.
어느 것이 맞았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썩 성공하지 못하고 초기에 4대강 때문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동일한 사건도 다르게 보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많은 게 그래요.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도 포인트가 다르면 달라지는데 몸을 키우는 데 ‘찐다’라는 게 있잖아요. ‘찐다’는 건 뭐죠? 일단 살만 볼까요. 어제 49kg였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51kg이여서 밥을 많이 먹었나 해서 그 다음 날 다시 뱄는데 50kg가 됐어요. 일주일을 보니까 밥 먹었을 때 53킬로, 밥 안 먹었을 때 52킬로가 됐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보니까 70kg가 돼 버렸네! 그래서 저는 실제로 그렇게 54kg 된 분을 알고 있어요.
살이 붙은 것과 비슷해 보일 수 있어요. 달라요. ‘찌다’라는 말의 뜻은 가두어 둔다는 거예요. 살이 붙은 것과 찐 것은 달라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그러면, “저 살 찐 거 아니고 살 붙은 거예요” 라고 하면 돼요. 뜻이 달라요.
찌다라는 것은 가두어 놓다라는 뜻이에요. 새 살이라는 게 결국 세포가 분열한거죠. 그러니까 뭔 가가 붙었기 때문에 분열이 되는 거죠. 분열이라는 방식으로 살이 붙는 거죠. 우리는 세포 자체의 활동만 되면 세포가 분열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괜히 분열되나요? 뭔가 살에 해당되는 요소가 들어가고, 그 에너지로 말미암아서 양의 한도에 오니까 자기가 쪼개기를 한 거죠.
몸에 무언가 들어와서 분열이 되어서 붙는데, 이렇게 되면 죽은 세포는 나가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안 나가고 머무는 거예요. 그게 찌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51kg밖에 안 되는데 찐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80kg인데 붙은 사람이 있어요. 전혀 다른 개념이에요. 죽어가는 세포가 못 나가고 있는 거예요. 가둬져 있는 거예요.
우리 날씨가 푹푹 찐다고 그러죠. 얼핏 생각하면 매우 덥다! 내가 만두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만두가 뜨거워진다는 현상도 아까 청계천 고가처럼 하면요. “물을 어딘 가에 넣어 담아 놨다. 그리고 그 위에 무언가 만두를 넣어 놨다. 그리고 뚜껑을 덮었고 열을 가했더니 그것이 익었다.” 이것은 전체가 사실이잖아요. 그 중에서 우리가 먹는 것에 꽂히면 찐다는 것은 만두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죠. 어떤 사람은 에너지 작용을 보면서 불을 떼는 것을 찌는 것으로 할 수 있죠.
중요한 것은 수증기가 거기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찌다’의 어원이에요. 날씨도 뜨거운 공기가 갇혀 있다는 거죠. 몸속에 갇혀 있으면 어떻게 되죠? 얘들은 에너지를 잃어가죠. 거의 잃었죠. 안 나갔다는 것은 에너지가 조금 남았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세포로서 활동성도 많이 죽었죠. 근데 전혀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은 거라는 얘기죠.
힘이 약해지고 활동성이 약해진 존재들의 특징이 뭘까요? 단결이에요. 약해진 세포들아, 단결하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단결이 살 길이거든요. 정상적인 세포들은 왕성하게 자기 나름의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범위 안에 있는 거지 단결하지 않아요. 죽어가는 세포만이 단결해요. 그렇게 단결된 세포는 결국은 덩어리가 되죠. 암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예요.
순환이 안 되는 상황에서 가둬져 있으면 결국은 덩어리를 짓는 거죠. 그렇게 죽어가는 세포들이 생기는 거죠. 좀비 세포 같은 게 생기는 거죠. 그게 없어야 되는 거죠. 원활하게 나가야 되죠. 이게 없어지려면 선근후원을 지켜야 돼요.
선근후원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단결한 좀비 세포들이 몸 안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단결해요. 건강한 세포들은 자기들끼리 단결하지 않아요. 자기들의 역할을 맡아서 할 뿐이에요. 2개가 되면 힘을 모으고 4개가 되면 힘을 나누어서 역할을 나누고 그래요. 예를 들어서 8개가 되면 그 역할을 더 다양화시키고 그렇게 할 뿐이고, 그 안을 무대로 삼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덩어리 지으며 단결하지 않아요. 단결하는 순간 전체 몸의 조화는 깨지고 자기들끼리 사느라고 바빠요.
정치도 마찬가지죠. 똘똘 뭉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러한 정치 시스템이 망하고 있다는 뜻이죠. 어디는 어디끼리 그냥 내 편이면 그냥 똘똘 뭉쳐요. 오늘도 여기에 오다가 똘똘 뭉친 집회를 2개나 보고 왔는데요. 아무튼 그런 ‘찜’이 없어지려면 철저하게 지킬 걸 키는 게 좋아요.
낯선 것이 들어오면 결국은 가두어 놓는 상황이 발생해요. 힘이 붙을 요소는 들어왔는데 그것을 붙이는 데 힘이 더 들어요. 그러니까 세포가 분열하는데 힘이 안 든 것이 들어와야 이것을 에너지로 삼아서 분열이 이루어지는데, 힘이 든 게 들어오면 이 세포가 이것을 처리하기 더 바빠요. 그러다가 좀비세포가 돼 버리는 거예요. 좀비 세포를 막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발과 선신후구(先新後舊) 이야기
여러분! 제가 신발 만든다는 건 아시죠? 광고예요(_*). 신발을 신어 보시면 절반은 첫날 황당하실 거고 3일이 지나면 감동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 한 두 달 정도 지나면 감수성이 예민한 최수종 씨 같은 분은 눈물 흘릴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아세요? 눈물 흘리는 것은 그걸 생활로서 한번 적용해 본 사람만 가능해요.
우리가 이렇게 팔자걸음으로 걸어요. 걷는 순간 자연은 나한테 멀리 가 있어요. 나한테서 멀리 있어요. 그런데 그 신발을 신고 걷는 순간 가까이 있는 사물과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요. 느껴져요. 느껴지면서 나무들이 대화를 해오는 것 같은 느낌이 와요. 실제로 한 두 달 정도 신으면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이 없어져요.
이게 신발 때문인가 싶어 신발을 갈아 신고 나왔어요. 다음 날 전혀 안 느껴져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한번 신어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 신발 언제 나와요?” 십이월에 나와요. 다음 주 초에 샘플 신어 보러 가요. 아니 위에 가피 부분 라스트 신어 보러 가요. 물론 라스트를 제 발에 맞춘 게 아니기 때문에 저는 못 신어 보는데, 그 부분은 이쁘고 그러면 돼요.
그렇게 옆에 있는 소나무와 대화가 되는 그런 신발이어도 안 이쁘면 끝이에요. 그렇죠? 안 예쁘면 끝이에요. 그렇잖아요. 남자들은 친구가 가방 좋은 것 들고 나오면 뭐라고 그러죠? “야! 멋지다!” 그러죠. 멋져야 돼요. 여자들이 좋은 가방 예쁜 것 들으면 뭐라고 그러죠? “와! 이쁘다!” 그러잖아요. 이뻐야 돼요. 멋지고 예뻐야 돼요. 우리 신발은 남녀 공용이기 때문에 두 개 다 있어야 돼요.
선신후구(先新後舊)
이제 선신후구(先新後舊)로 넘어가려고 그러는데요. 사람이 순서대로 가까운 것을 받아들이면, 저절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먼저 인지하고 자기 삶의 영역으로 삼게 돼요. 낡은 먼 것을 쓰는 데 그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어요.
멀리 있는 나와 만날 준비가 안 된 것을 내 속에 집어넣는 순간, 나는 내 앞에 다가온 새로운 것을 내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힘이 없게 되어요. 가까이에 온 사람이라면, 옛날 사람이 좋은 거예요. 왜? 새 사람 사귀기에 힘이 없어요?
내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을 중심으로 내 몸과 내 살을 형성하지 않으면, 그리고 내 사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안 받아들이고 굳어져 가요. 노인들이 굳는 이유는 그래서 그래요. 노인들이 단순히 늙어서 에너지가 약하다! 그럴 수는 있죠. 그런데 에너지가 약한 것은 오래 시간을 점유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점유하는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될 수 있는 에너지를 소화 못하는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삭아가는 것이 포함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시간을 늘려가는 거예요. 시간을 늘려간다는 것은 새것을 계속 쌓아가는 거예요. 새것을 쌓을 힘이 없으면 옛날 지나간 것에 대한 타령을 계속해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도 옛날 지나간 것이 재미가 없거든요. 재미가 없을 때 남에게 그걸 재미있게 들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해야죠.
한 번 해갖고는 바나나가 까매졌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시간을 점유할 뿐인 거죠. 삭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점점 점점 새것을 축적시키지 않고 시간만 끌고 가고 있는 것은 멈춘 거예요.
사실상 낡은 것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거죠. 과거로 하여금 나를 지배하게 하고 있는 거죠. 미래로 하여금 나를 지배하는 것이 청년들의 어떤 과감함 또는 조금의 부족함이라면, 나이 든 사람들은 과거의 지배를 받죠. 현재를 못 살아요. 새것을 맞이하지를 못해요. 새 사람이 누가 오면 불편해해요. 성격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건 이해가 돼요. 그건 별개의 문제예요.
그래서 새 거를 못 받아들이다 보면, 점점 못 받아들이다 보면, 한국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한국의 특히 기성세대 되는 분들 보면 옷을 입고 다니는데요, 양복을 입었든 뭘 입었든 간에 자기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입었던 옷에 그냥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것은 거의 용납이 잘 안 돼요. 그래서 보면 늘 같은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냅둬! 이렇게 살다 죽게!” 그렇게 살라고 그래야죠. 그렇게 과거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나 소위 귀신이 있다면 빙의된 사람이나 뭐가 달라요? 과거에 끌려간다는 본질에서는 동일하잖아요.
나날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스스로 의지에 의해서 나날이 새로워질 수는 없어요. 그건 거짓이에요. 작심 3일도 아니고요. 여러분! 제가 11자로 엄지 엄지 걸으라고 그러잖아요. 그 걸음 거리 2분 이상 지속되지 않고 금방 풀어져요. 옆에서 또 “11! 엄지!” 이래야 또 정신 차리고 걸어요. 그러다가 3분 이내에 또 풀어져요.
그 신발 신으면 계속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아무튼 작심 3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지 하지만 받아들여지는 게 안 돼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내 자신이 변해 있어야 돼요. 내재된 힘이 없이 자신의 이성적 의지만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일신(日日新)하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하라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만들라는 거죠. 그렇게 살려고 애쓰라는 의미에 그치는 교훈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내 자신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켜서 그 삶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라!
그렇게 살게 하라는 거지, 그렇게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나마도 아예 그런 생각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요.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이 교훈으로 작용했다면 객관적으로 그렇게 되는 조건을 만들어 가야 되죠.
그게 우리가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이에요. 오늘이 없이 어제가 계속 늘려온 거예요. 마치 어떤 느낌이냐면, 운남 여강에 골프를 치러 가신 분들이 있어요. 뭐 골프 프로도 아닌데 자기 손에 맞는다고 꼭 골프채를 비행기에 무겁게 다 들고 가요. 가서 빌려 쓰면 되는데요.
그리고 심지어 여강 같은 곳이 해발 3천m 가까이 된다고 그러니까 한 클럽은 더 나가네. 근데 고산병에 걸려가지고 한 클럽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 클럽 밖에 안 나가요. 아무튼 거기서 일주일 동안 골프를 쳤대요. 일주일 내내 친 건 아니고 4일을 쳤대요. 그런데 옥룡설산은 한 번도 못 본 거예요. 고개만 들어도 보이는데요. 골프라는 것 자체를 제가 뭐라 그러는 것 아니에요. 저는 골프 구경하는 거 좋아해요. 전쟁적인 운동이 아니어서, 전 골프를 좋아하고, 배드민턴이나 테니스나 이런 거 좋아해요. 근데 하나에 굳어버리면 바로 앞에 있는 새것이 아예 안 들어와요.
새것이 들어오는 사람이 안 되어 있으면 의지를 가졌더라도 안 보일 수 있어요. 이번에는 옥룡설산도 보고 골프도 치고 와야지 했는데, 골프 치다가 옥룡설산 생각 깨져버린 그게 우리가 의식으로 가지는 ‘매일매일 새로워져야지!’ 하는 거예요. 일신(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하려고 하지 말고,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되게 하라! 그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생각하는 방식의 표준이에요.
그렇게 일일신 우일신 되게 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음식이나 이런 걸 접할 때는 선근후원하게 하는, 먼저 가까운 데 있는 것을 취하라는 거죠. 오지 않는 것을 취하면 나는 낡은 사람이 돼버려요. 너무 충격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 외로 꼰대예요. 맨날 새로운 것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꼰대예요. 얘기 조금만 나눠보면 여러분이 알아요. 정말로 그 평범하게 살고 지나가는데 그렇게 색을 받아들여요.
지금 내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새 사람이잖아요. 인사를 했든 못했든 그 사람이 인지가 돼요.
걸어가면서 내 앞에 예를 들어 이 선생님 나타나고 저 선생님 나타나고 막 이렇게 나타나요. 그러면 이 사람이 새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걸으면서 앞에 나타나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요. 내 안에 과거에 만났던 기억들을 헤매면서 걸어요.
사람이 의무적으로 걷잖아요. 의무적으로 걷는 모습은 뛸 때에만 존재해요. 뛸 때 어떤 생각을 하고 뛰면 어떻게 되죠? 넘어지죠. 뛸 때는 집중해서 해야죠. 그런 집중력은 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죠. 집중하려고 책상에 앉아도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랬으면 전부 다 하버드 대학 갔겠죠. 하버드가 좋다는 전제 하에서요. 그런데 왜 미국 하버드 대학을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볼 때는 자기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이 제일 좋은 대학인데요.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걸 가르쳐주는 데가 제일 좋은 대학인데요. 아무튼 옆에 오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그 사람들이 인식되고 지나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원숭이가 흙을 이렇게 어정어정 보면서도 저 위 어디에 도토리가 있더라?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는 원숭이도 잡생각 안 해요.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질적 운동성에 해당되는 표준 운동을 하고 있을 때는 잡생각을 못해요. 인간이 어정거릴 때는 온갖 생각을 다 해요.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싶을 때는 쉬어야 돼요. 그걸 쉰다고 하는 거예요. 집중하기 때문에 쉬는 거예요. 잠시 멈춰주는 거예요. 집중하지 않는데 쉬는 거는 그냥 노닥거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100m를 뛰는데 100m 사이에 딴 생각 조금만 해 봐요. 옆으로 나가요.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건드려요. 엎어지기도 해요. 심지어 10미터 허들을 띠는데 바로 걸려 넘어져요. 그러니까 그렇게 집중했을 때는 땅도 느껴지고, 저 거리도 가깝게 느껴지고, 옆에 사람들 허덕거리는 소리까지 느껴져요.
나는 집중했는데 왜 현재 있는 게 더 잘 느껴질까? 조용히 앉아가지고 이것저것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이상하게 더 안 느껴져요. 집중해서 딴 짓을 안 하고 있을 때 옆에 살아 있는 새것이 더 잘 느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새롭고 싶으면 집중해야 돼요. 집중이 힘들면 멈춰야 돼요. 그게 쉬는 거죠. 그렇지 않고 쉬는 건 쉬는 게 아니라 그냥 힘들어서 허덕거리는 거거나, 아니면 이유 없이 노닥거리면서 딴 생각을 이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집중하는 것 이상으로, 또는 일일신 우일신 하는 몸으로 바꿔주는 것 이상으로 카르페디엠(Carpe diem –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라틴어)은 불가능한 거예요. 오늘을 즐겨라! 오늘을 즐기는 것은 그렇게 새것을 느끼는 것만이 즐기는 방식이에요.
새것의 문을 닫잖아요. 즐길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즐기다가 두 달만 있다가 나오면 땅이 흔들거려요. 땅이 막 일어나서 나한테 다가와요. 징역에 살면 징역 살아도 운동해요. 운동하는데도 징역을 좀 살고 나오잖아요. 땅이 막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와요. 땅이 벌떡벌떡 일어나요. 왜냐하면 못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 안에 갇혀서 과거에 주어진 정신도 찜으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가둠으로 정신도 찌면 낡은 생각이 안 빠져나가죠. 그것도 먹는 거거든요. 생각도 먹는 거고 생각하는 것도 법제의 기능 중에 하나이죠. 생각도 법제에 맞게 해야 되고 그러면 빠져나가요. 법제에 맞지 않는 생각에 집중하면 생각이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맴돌아요.
그러면 어떻게 일일신 우일신의 존재로서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게 늙음과 삭음 사이에 있는 중요한 함수 관계이에요. 그 함수 관계 얘기를 하다가 지금 중단한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요. 이렇게 조금 노닥거리고 하는 게 나중에 편하게 남아요. 제가 옛날 욕 먹은 게 책 쓰면 어떻게 책 안에 필요 없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냐는 것이었어요.
그런 욕을 많이 먹었는데 제가 반성 많이 했어요. 어떤 무식한 남자들이 이런 얘기를 해요. 남자들은 필요한 몇 마디만 하는데 여자들은 필요 없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아니 아니어요. 남자들은 필요 없는 말 몇 마디를 했을 뿐이에요. 먹고 살기 위해서 했겠지만 여자들은 정말 필요한 말을 수없이 많이 하는 거예요.
그 증거가 있잖아요. 남자들이 그렇게 딱딱 필요한 말만 한다고 하잖아요. 그 일에서 은퇴하거나 그 영역에서 물러나잖아요.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필요한 말을 하나도 안 했기 때문이에요. 값이 얼마이고, 길이가 얼마이고, 납기일은 언제이고 그리고 우리는 뭐 해야 되고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등등의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그걸 할 때만 친구처럼 보여요. 그런 남자들이 여자들을 보고 친구 몇 명도 없으면서 나는 지금 아는 친구가 이렇게 많다고 전화번호를 보여주기도 하죠. 그런데 그 일이 아니니까 앞에 있는 전화번호 나중에 삭제를 해보니까 한 개도 없어요.
여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기도 한데 맨날 떠들고, 심지어 30분을 떠들고 할 얘기는 1시간까지 얘기하고 나서, “야! 우리 못 다 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고 그러는데요. 필요한 얘기예요. 필요하다는 게 논리적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진짜 새것을 받아들이는 두드리기예요. 그렇게 안 받아들이면 새 존재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이 든 남자들은 새로운 사람이 멤버로 등장하잖아요. 엄청 힘들어해요. 여자들은 그렇게 재잘거리던 여자들은 마치 새로운 벗인데 한 10년 전 온 친구처럼 막 놀아요. 5분도 안 지나 그래요. 그게 진짜 대화이죠.
“내가 새것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표준을 맞추고 보면 유의미하다고 했던 것이 정말 헛된 것이고,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알찼다는 것도 가끔은 반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반전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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