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고등학교 초대이사장 임병학
드넓은 대지 위에 우거진 나무와 넓은 잔디밭으로 장식한 3층 건물과 확 트인 운동장은 잘 꾸며진 정원을 연상케 하고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500여명의 학생은 [갈무리된 시간은 향기가 영원하다]는 설립자 고 임병학 이사장의 말씀을 지성으로 실천하는 성취인의 후예들이다. 이는 50년을 하루같이 학교에 세우고 말겠다고 노력했던 한 인간의 꿈이 만들어낸 노력의 결실이기에 더욱 소중한 일이었다.
서당에 몇 달 한문을 배우러 다닌 일 외에는 정식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육영사업가 임병학 옹의 본업은 정미소의 주인이자 잡역부에 과수원의 주인이자 일꾼이다. 열일곱 살에 양친 부모를 여읜 임병학 옹, 내가 공부를 못한 것처럼 후손들과 고향의 후세들마저 그 슬픔을, 그 과거를 경험하게 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던 소년 임병학, 그는 5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뼈를 깎는 각고 끝에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날, 그 첫 입학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입학식을 갖는 그의 마음속엔 오직 한 길, 그 길을 위해 살아온 지난 50년의 갖가지 일들이 벅찬 감격과 함께 되살아났을 것이다.
임병학 옹은 1906년 4월 8일,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건지화리, 버스조차 볼 수 없는 산골 마을, 빈농의 가정에서 8남매라는 많은 형제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양친을 모두 잃었을 때 임옹이 물려받은 유산이란 논 서너 마지기에 일곱 동생과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얻어먹은 수십 가마의 장리쌀 갚을 길만이 막연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임병학 옹의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부르터 터진 손에 아물 새도 없이 일을 해야 했고 배고파 우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시련의 나날이 계속됐다.
“앞이 캄캄하고 어떡해야 이 동생들을 구제해서 살리나, 돌아가신 부모의 입장과 제 입장으로 거지가 되면, 저게 아무개 아들딸 거지다. 이 소리는 안 듣겠다고 밤으로 낮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빚을 갚고 동생들을 잘 기를 수 있는 길이라면 그는 힘이 들고 쉬운 일을 가릴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웃에서 같이 자랐다는 삽교경로회장 유세진 옹은
“나는 이사장 임병학 씨와 이웃동네에 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8남매의 맨 맏이, 큰 아들로서 조실부모하고 오두막집에서 아우들을 키워가며 교육시키고 생활을 하다 보니 나무를 해서 장사를 해도 생활비가 부족 돼서 할 수 없이 남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든가 부자가 되겠다든가 하는 꿈보다 더 큰 야망이 그에게는 있었다. 열일곱의 임병학 소년은 자기 일생의 목표를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 가기로 방향을 분명히 세워 놓았었다.
“부모를 막상 이별하고 그때서부터 일생을 나도 인간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서 나도 삼 천석 이 천석 지주 소리를 듣고 그 때서 인간 사업을 하고 그 다음에 자선사업하고 말년에 가서 어느 지방에 가서 살든지 학교나 하나 세워 내가 못한 공부의 한을 푸는 것은 국민 자제들을 훌륭한 우리나라 일꾼, 인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열 살부터 생각했고 열일곱 살에 아주 못을 박아서 69세까지 노력해서 오늘날 삽교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그의 이러한 결심은 대단하기보다는 차라리 무서운 편이었다. 품삯으로 받은 돈을 삼베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다시 세고 또 세었다. 이것을 몇 개 보태야 천석지기 지주가 되고 남에게 고용되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고용해 쓰는 입장이 되고 나아가 자기처럼 공부 못하는 애들에게 공부를 시킬 수 있는 학교를 세울 수 있을까하는 계산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피곤함보다는 오히려 빨리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만이 늘 가득 차 있었다.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돈을 모았고 남들이 쉬고 화투나 치며 노는 겨울철에 그는 내년 농사 준비로 하루도 쉬어본 일이 없었고 남들이 무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서 장기판을 벌일 때,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그는 몇 번이고 논밭을 매어 풀 하나 없는 논밭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자손들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자신이 못한 공부가 한이 돼 남보다 더 잘해주고 싶었고 더 높은 학교까지 교육을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큰 아들 임동규 씨
“궂은일 다하시고 악식을 잡수시면서도 입으실 것을 못 입으시고 잡수실 것 못 잡수시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해서 저희 자손 6남매를 키우시고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저희는 감사의 마음 뼈저리게 느끼는 바입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남에게 신용을 얻고 살아온 임병학 씨는 자신의 체험에서 얻은 진리를 자손들에게도 늘 가르쳤다.
“저희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신세진 사람에게 은혜의 보답을 꼭 해라. 예를 들어서 아쉬울 적에 빚을 가져다 쓰면 이자는 물론이고 상환할 때도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을 하고, 이자 본전 다 갚는 것이다. 또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시기가 있는 것이다. 젊어서 공부하고 또 일할 때도 시기가 있는 것이고 배우는 데도 시기가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치지 말고 항시 노력해라. 이 두 가지를 늘 말씀하셨습니다.”
자손들 교육시키랴 동생들 키워 살림 차려주랴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인다고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20년 후인 37세 때에는 500석을 헤아리는 농토를 가진 대지주가 되었고 예산 지방 곳곳에 전답을 가진 군내에서 알아주는 지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장만한 토지도 해방과 함께 토지 분배에 들어가 얼마 남지 않게 되자 다시 이번에는 자손들 교육도 시킬 수 있고 돈벌이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서울로 옮겨 여관업을 시작했다.
“시골사람이라 경험도 없고 서울 올라와서 밥장사를 하겠다. 밥 한 그릇을 해주고 밥값을 받는 것은 촌사람도 할 수 있어서 종로 3가에다 충림여관 간판을 붙이고 일년을 했습니다. 하다가 보니 그것 가지고 애들 뒷받침 생활도 안 되고 또 따라서 목표를 크게 세웠기 떄문에 관철동 동아여관을 7년을 하다가 6.25를 당했습니다. 그 순간 앞이 캄캄하고 애들을 가르칠 수가 없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단칸방 하나 얻어놓고 애들을 가르쳤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재기의 터전이 이번에는 난리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늘을 원망도 해왔고 저주도 해왔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 이루어질만할 때마다 무참히 깨져버리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17살부터 25년간 모은 모든 재산을 난리통에 날려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또 예전 같은 일들을 차근차근 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다시 농토를 샀고 정미소도 샀고 통운지점도 운영했다. 이렇게 노력하기 25년, 다시 수억대의 재산이 모여졌고 학교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준비가 마련된 것이다. 실로 52년 만에 이룬 꿈이었다.
충남 예산군 두리 532번지에 부동산을 처분한 돈으로 대지 2만평을 구입하고 현대식 3층 철근 콘크리트 교실과 보일러 장치가 되어있는 기숙사와 샤워장 그리고 5천여 평이 넘는 운동장과 3천여 평의 정원을 가진 웅장하고 아름다운 삽교고등학교가 드디어 1975년 3월 8일 개교식을 갖고 첫 입학생을 맞이한 것이다.
임병학 이사장은 자신이 어렵게 자라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실력은 있으나 공부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장학제도 확충에 가장 큰 목표를 두고 학교를 운영했다.
어느 육영사업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교육에 대한 정열과 의지를 불태우던 고 임병학 이사장은 자신의 꿈이 서린 이 학교가 발전하고 학생들이 더 나은 시설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경영하는 정미소에서 점퍼 차림으로 인부들과 같이 방아를 찧는데 잡다한 일들을 손수 맡아하기도 했다.
이사장의 거룩한 정신을 가르치기에 지성으로 하며, 배우기에 지성으로 하고 경영하기에 지성으로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교훈이 [지성(至誠)]임은 너무 당연하다.
초대 이사장이 되신 이후로 열정적인 삶을 아쉬워하듯 그 무덥던 여름, 1994년 7월 8일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학교를 경영하심에 교정의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이사장님의 손길이 닿지 않으신 바가 없었으나 오히려 겸손하시어 독선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포용력과 헌신하는 마음으로 참된 교육을 뒤에서 살펴 주셨습니다.
오직 [갈무리된 시간은 향기가 영원하다]는 말씀을 돌에 새겨 후학을 지도하신 임병학 이사장님의 교육적 덕망을 아는 사람들이 있어 몇 개 표창을 주시니, 1979년 5월 18일 충청남도 교육회장상을 수상하시고, 1979년 11월 21일에는 한국교육연합회장상을, 1980년 11월 26일에는 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셨다.
교정 곳곳에 그 정성과 사랑으로 자라난 나무는 여전히 그 푸르름을 지녀 곧게 자라고 학생과 교직원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영재를 교육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세워 고인의 유지(遺旨)를 받들고 있다.
※ 이 글은 <삽교읍지>에 실린 “제2장 후대인물,
제1절 삽교고등학교와 임병학” 원문을 발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