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남북한 해군함정, 서해상에서 교전
15일 남북 해군 함정간 교전이 발생, 연
평도 인근 서해상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합참은15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영
해를 침범하는 북한 경비정 을 우리 고속
정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즉각 응사, 북어뢰정1척이 치명타를 입고 한계선 북측으로 퇴각 했다고 발표했
다.
합참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25분께 북
경비정 2척이 한계선을 넘어 영해를 침
범,해군 고속정이 출동해 충돌 공격으로
남하를 저지하자 갑 자기 어뢰정 3척이 나타나 수류탄 공격을 감행해왔다.
해군은 40㎜ 함포 등으로 즉각 응사하면
서 양측은 10분간 교전을 벌 였으며 북한
어뢰정1척에 우리함정에서 발사한 포탄이 명중,침몰직전 까지 갔으나 나머지 어뢰정 2척이 이를 예인해 북측으로 도주했다.
교전 과정에서 우리 고속정 한척도 북한 어뢰정이 발사한 27㎜ 함포 에 선체를 맞
아 일부 파손됐으며 고속정 정장과 대원
등 2명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5년유엔(UN) 본부 공연 갖는 평균 65세 아마추어 ‘청춘합창단’
➡️2015년‘라스베이거스 대통령’ 커크 커코리언 별세
➡️2015년병무청 첫 여성 국장 탄생
👉🏿 병무청 창설 이후 첫 여성 국장이 탄생했다. 병무청은 6월 15일 홍승미(49·행시 41회·사진) 부이사관을 국장(이사관)으로 승진시켜 부산지방병무청장에 임명했다.
충남 부여 출신인 홍 청장은 병무청 선병자원과장, 병역자원과장, 대변인, 산업지원과장, 운영지원과장을 거쳤다. 그는 “지금까지의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 중심, 국민 중심, 소통 중심의 병무 행정을 수행해가겠다”고 말했다.
병무청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정부의 인사 혁신 방향에 따라 연공서열을 과감히 타파하고 새로운 비전과 철학, 도전적 혁신 의지,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예멘서 납치된 봉사활동 엄영선씨 피살
➡️2004년남북, 군사분계선(DMZ) 지역의 모든 선전 도구 철거
👉🏿 15일 0시를 기해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 모든 상호 비방과 선전·선동 활동이 전면 중단되며, 확성기·대형입간판 등 모든 선전수단이 8월 15일까지 서해안 섬과 한강 하구, 서부전선 지역부터 3단계로 나뉘어 제거된다.
남북은 지난 10~12일 개성시 자남산 여관에서 장성급 군사회담 실무대표회담을 열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13일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측은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선전물도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며 “북측의 이행 여부를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 양측은 비무장지대 일대에 설치된 선전 수단의 제거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데는 종교 시설물을 제외하곤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라!
북으로’ ‘반미구국’ 등 상대방을 향한 자기측 체제 선전이나 상대방이 비방·선동으로 인식하는 모든 확성기, 돌글씨, 입간판, 전광판, 전단, 선전그림, 선전구호 등을 없애기로 쉽게 합의됐다는 것.
주목할 만한 것은 김일성 국가주석 및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련된 선전물도 제거해야 한다는 우리측 요구를 북측이 수용한 것. ‘21세기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주체조선 우리 장군 제일. 백두광명성’ ‘무적장군’ ‘천출명장’ 등 대형 입간판이나 돌에 새겨진 선전물도 없어지게 됐다.
군사분계선 남측 지역에 건립돼 있는 점등탑(크리스마스 트리), 불상, 석탑 등 종교 시설물은 양측이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가림막 설치 등의 방법으로 상대측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애기봉 점등탑(높이 30m) 등은 가림막을 설치하기엔 너무 커서 아예 제3의 장소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필요할 경우 3~5명의 검증단도 구성해 운영키로 했다.
➡️1999년남북한 해군함정, 서해상에서 교전
👉🏿 1999년 6월 15일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으로 양측 해군함정간 교전이 발생했다. 15일 오전 7시55분, 420t 규모의 대청급 북 경비정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 영해로 넘어왔다.
우리 해군이 고속정 10척과 1200t급 초계함 2척, 구조함 1척 등이 긴급 출동, 대치에 들어갔으나 북 경비정에 있던 북한군 10여명이 갑판위에 올라와 소총사격으로 우리 해군에게 선제공격을 시작하며 25mm 기관포를 고속정에 발사했다.
그러나 우리 초계함에서 발사한 76mm 함포 포탄 한 발이 북 어뢰정에 명중하여 40t규모의 신흥급 북 어뢰정 1척이 불기둥에 휩싸이면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완전히 침몰했고 나머지 북 경비정과 어뢰정도 우리 해군이 발사한 40mm 기관포에 의해 선체가 크게 파손됐으며 북한군 다수가 사망 또는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측도 장병 7명이 경상을 입었고, 해군 고속정 기관실과 초계함 기관실 등이 일부 파손되거나 그로 인해 침수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북한이 전에 없이 북방한계선 무력화 기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당장은 영토 분쟁을 통해 남북 공동 어로작업 등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현행 정전체제의 문제점을 부각시켜 미국측과 평화협상을 체결하려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속셈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996년버스카드제 실시
➡️1984년한국-포르투갈 정상회담
➡️1983년한국형다목적 경비함진수
➡️1983년국립중앙박물관이전 개축공사. 구 중앙청서 기공
➡️1977년주한미군 이네스트존 미사일 대대 해체
➡️1962년한국-파라과이, 국교수립
➡️1960년허정 제6대 국무총리 취임
➡️1960년제3차 개헌(내각책임제) 통과, 제2공화국 출범
👉🏿 1960년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제3차 개헌안이 출석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국회에서 통과, 같은 날 공포됐다. 우리나라 최초 의원내각제의 화려하고도 힘겨운 시작이었다.
같은 해 3월 15일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연일 계속된 시위가가 4·19혁명으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 제1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제3차 개헌안에는 헌법상의 명목적인 양원제를 실질적으로 채택하는 내용과 국민의 기본권 강화,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출, 경찰의 중립,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명실상부한 민주헌법이자 자유헌법이었다.
국회는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윤보선을 선출하고, 장면 국무총리를 인준했다. 제5대 국회는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 등을 가결시켜 과거 부정척결의 노력을 보였으나, 여당인 민주당의 신·구파간 집권 분규와 대립, 원내교섭단체의 별도구성, 분당, 각종 데모의 속출로 정국 불안이 계속되다 이듬해 5월 16일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해산됐다.
➡️1960년일본 전학련 국회 난입
➡️1959년미국 정찰기 동해서 소련기에 피격
➡️1954년제네바회담에서 한국참전 16국 공동성명
➡️1954년아시아 민족반공연맹 창설
➡️1952년시아누크공, 캄보디아 정권 장악
➡️1950년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 주한 미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을 유혹, 결혼해 살면서 고급정보를 빼내 자신의 애인인 남파 공산당 거물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 검거된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이 1950년 6월 14일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6월 15일 사형언도를 받고 곧 처형됐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11살 때 시집갔다가 2년이 못되어 서울로 도망쳤다. 김수임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대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의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사교계로 진출한 후 경성제대 법과와 베를린대학 유학생 출신인 남로당원 이강국과 깊이 사랑하게 됐다.
이어 주한미군 수사기관의 고위직 고문과 결혼,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미군에 관한 1급정보를 빼내 이강국에게 계속 제공하다가 국내 수사기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1949년군인용담배 `화랑`제조
➡️1948년중국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 창간
➡️1942년아바나 승전연합대회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1942년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 출판
➡️1940년탤런트 최불암(본명 최영한) 출생
➡️1939년경부선 대전-서울간 복선화
➡️1934년히틀러-무솔리니 첫 회담, 오스트리아 처리 논의
➡️1922년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사망
➡️1920년제네바서 제2회 국제노동회의
➡️1919년영국 존 알코크와 아더 브라운, 최초의 대서양무착륙비행성공
➡️1917년미국 방첩법 제정
➡️1914년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출생
➡️1911년성균관 폐지하고 경학원 설치
➡️1911년IBM의 전신 CTR사 설립
➡️1909년부통감 화이황조 통감에 임명
➡️1907년제2회 만국평화회의 헤이그에서 개막(~10.18)
➡️1902년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출생
➡️ 1861년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순직
👉🏿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1821∼1861) 신부가 경상도 지역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1861년 6월 15일 과로로 문경에서 순직했다. 시신은 제천의 배론성지에 묻혔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카오와 몽골에서 신학을 공부한 최양업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1849년. 함께 떠났던 김대건보다 4년 뒤였다. 그러나 김대건(1821∼1846)이 짧고 치열하게 활동한 후 순교했기 때문에 최양업은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양업은 전국 5개도에 흩어져 있던 127여개의 교우촌(공소)을 순회하며 12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전교활동을 폈다. 극심한 핍박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던 최 신부는 결국 이날 식중독과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에 걸려 순직했다.
가톨릭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증거자’로 칭하는 대신, 쉼없는 전교활동을 편 최 신부를 ‘땀의 증거자’로 부른다.
그는 또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19통의 라틴어편지를 비롯해 순교자에 관한 자료수집, 성교요리문답 및 기도서 번역간행, 천주가사 저술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https://youtu.be/EPMT4Ya5c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