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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禪社 4세 眞明國師 混元의 家系와 왕사 책봉
박 윤 진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연구교수
목 차
1. 머리말
2. 혼원의 가계
3. 혼원의 사승 관계와 관련 사원
4. 혼원의 왕사 책봉과 불교계의 변화
5. 맺음말
국문요약
수선사 4세 사주인 眞明國師 混元의 부계는 태조대의 개국공신으로 시작해서 현종대에 재상을 배출했으며 과거합격자도 다수 있었다. 그 후손들도 封君되는 등 고위 관료로 활약하였다. 한편 혼원의 외할아버지인 金閱甫는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당시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또한 혼원의 외증조부인 金端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한 계기로 가문을 성장시키고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定安任氏ㆍ坡平尹氏 등과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있다. 이상을 통해 보면 혼원의 가문은 문벌귀족에 상당할 정도였다. 수선사나 백련사의 초기 주도층이 향리나 하급관리의 자제들이었다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는 수선사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문벌가문에서도 출가하게 되면서 나타난 양상으로 이해된다.
혼원은 자신의 외삼촌이자 사굴산문 소속인 宗軒에게 출가하였으며 이후 雙峯寺의 辯靑牛와 惠諶ㆍ夢如를 스승으로 섬겼다. 수선사ㆍ선원사 뿐만 아니라 수선사의 주요 사원인 雙峯寺, 定慧社 등에 주석하였으며 왕사로 책봉받으면서 慈雲寺를 본사, 臥龍寺를 하산소로 지정받았다. 혼원의 제자들은 ‘慈雲宗派’라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던 듯한데, 구체적으로는 수선사의 사주가 되는 天英ㆍ冲止와 왕자 승려인 鏡智 등이 제자였다. 혼원의 사승 관계에서도 수선사의 중요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였음이 확인된다.
한편 혼원은 고종 46년에 왕사로 책봉되는데, 고종이 왕사 임명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원종으로부터 재책봉된 후 하산하였다. 그런데 혼원이 최씨정권과 고종 말년에 승려로서 최고의 僧階와 다수의 僧職, 나아가 왕사로 임명된 것에 비해 하산 이후는 중앙 정계와 별다른 관련없이 지냈다. 그 이유는 원종 초년의 정치적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최씨정권기에는 대몽항쟁의 구심점으로 혼원과 수선사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면,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고종이 사망하게 되면서 혼원과 중앙정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고종 말년에 왕정 복고를 주도했던 유경이 왕권 회복의 상징으로 왕사 책봉을 주도한 듯한데, 그도 원종 초에 김준 세력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면서 혼원을 지지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거의 소멸하였다. 이는 원종 2년에 江都 禪月社에서 一然이 開堂하게 된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원종 이후 수선사는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해지고 새롭게 가지산문이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주제어
高麗, 眞明國師 混元, 修禪社, 禪源社, 家系, 王師, 무신정권, 一然
1. 머리말
수선사는 고려후기 결사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불교의 사상적 근원으로서 중시되었고 승보사찰로 여겨지는 곳이다. 수선사가 승보사찰인 것은 16명의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이지만, 아직 그 16국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뿐만 아니라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16국사 이외에도 수선사 계열의 국사가 다수 존재하여 수선사 출신의 고승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며, 이들 승려를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16국사 중의 한명인 진명국사 혼원은 수선사 중 최초로 왕사에 임명된 인물이고 관련 자료도 몇 가지 존재하여 우선적으로 연구할만하다. 혼원과 관련한 자료로는 고려 후기 문인인 金坵에 의해서 지어진 비문이 止浦集과 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또 혼원을 대선사로 임명하는 敎書와 官誥는 崔滋에 의해 지어져 역시 東文選에 수록되었다. 그 외 혼원과 교류한 승려의 비문이나 문집에 그를 언급한 사례들이 있다.
혼원은 고종 46년(1259년)에 왕사로 책봉되어 원종 12년(1271년)에 입적하면서 진명국사로 추증되었다. 혼원은 무신정권에서 3번째로 임명된 왕사이자 마지막 왕사이다. 혼원보다 앞서 왕사로 책봉된 천태종의 德素와 선종의 志謙은 무신정권이 시작된 이후 교종 계열의 항쟁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되었다고 이해되며, 고려 전기에 국왕이 왕사를 선택했던 것과 달리 무신집권자의 추천을 받고 있었다. 한편 무신정권기에 국사 책봉은 없었고, 一然이 충렬왕 9년에 國尊으로 책봉받은 것이 고려 후기의 최초 사례이다. 또한 혼원보다 앞서 수선사주였던 知訥ㆍ惠諶ㆍ夢如는 모두 사후 국사로 추봉받았으므로 혼원은 수선사 내에서도 가장 먼저 살아서 왕사로 책봉된 인물이다.
혼원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면, 명종 21년(1191년)에 遂安李氏인 李師德을 아버지로 水州金氏인 金閱甫의 딸을 어머니로 태어났다. 13세가 되는 신종 6년(1203년)에 출가한 후 승과에 합격하였고 그 후 수선사의 2ㆍ3대 사주인 惠諶과 夢如에게 사사하였다. 고종과 최이에게 존경을 받아 수선사의 별원으로 禪源社가 창건될 때 혼원은 그 낙성회의 주맹이 되었고 이후 선원사의 사주가 되었다. 몽여가 입적한 후 수선사의 4대 사주가 되었으며, 고종 46년에 왕사로 책봉된 후 하산하여 원종 12년(1271년)에 입적하였다. 입적 후 眞明國師로 추봉되었다.
본고에서는 혼원의 가계와 사승 관계, 왕사 책봉과 그 당시 불교계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수선사 사주를 지방향리나 하급 관리 출신으로 파악해 왔던 것과 혼원의 가계가 일치하는지 확인하여 수선사 사주와의 공통성과 함께 개별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원의 가계와 사승관계는 혼원이 왕사로 임명되는 이유의 하나를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또한 혼원의 왕사 책봉을 전후로 한 정치 상황과 불교계의 변화를 정리하여 혼원과 수선사가 가졌던 당시 위상을 확인하려고 한다.
2. 혼원의 가계
혼원은 遂安李氏로 그의 집안은 황해도 수안군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李師德은 최종 관직이 정8품 京市署丞이므로 하급관료로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그런데 수안 이씨로 의종 5년(1151년)에 史官을 역임하고 의종 16년(1162년) 尙書戶部員外郎으로 사망한 李仁榮이라는 인물이 찾아진다.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태조대의 공신인 李堅雄으로부터 시작하여 李端-李象先-李子珍-李漸-李仁榮의 계보가 확인되고, 이들 중 이상선ㆍ이점ㆍ이인영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인영의 장남이 모두 과거 합격자이다. 氏族源流에서 혼원의 아버지인 이사덕의 직계로 확인되는 인물은 李端과 李象先이다. 「李仁榮墓誌銘」에 의하면 이단은 최종관직이 平章事이며, 이상선의 최종 관직은 戶部尙書이고 과거 합격자이다. 한편 이사덕의 직계 후손인 李連松과 그 두 아들이 新增東國輿地勝覽 황해도 수안군의 人物條에 실려 있는데 이연송은 충선왕 때 密直副使로 임명되었고 사망 당시 遂安君으로 봉군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보면 혼원의 부계는 개국공신의 후손이며, 대대로 과거 합격자나 고위관료를 배출한 집안이다. 반면 혼원의 아버지 이사덕이 하위 관료에 그친 것은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혼원 부계가 하급 관료 가문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혼원의 모계를 살펴보면, 외할아버지가 金閱甫인데 그의 묘지명이 남아 있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해당 묘지명에 의하면 김열보의 세 아들 중 두 명이 출가하였으며 그 법명이 宗軒과 惟元이라고 하였다. 혼원이 13살에 ‘舅氏品日雲孫禪師’ 宗軒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혼원의 외조부인 김열보의 묘지명을 통해 宗軒이 혼원의 ‘舅氏’ 즉 외삼촌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자신의 근친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여 세속의 혈연관계를 法系에서도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혼원과 그의 得度師인 宗軒에게서도 이러한 양상이 보인다.
또한 김열보와 관련해서는 그의 묘지명을 張自牧이 지어주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林椿이 읊고 있는 것을 통해 김열보의 성향을 유추할 수 있다. 장자목은 후에 寶文閣直學士로 치사한 인물로 무신정권기에 崔讜이 만든 耆老會의 일원이었으며, 국자감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임춘은 당대의 名儒라고 일컬어진 인물로 李仁老ㆍ吳世才 등과 교류하여 세상에서 江左七賢에 비견하였다. 김열보와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당대에 문장가로 알려진 인물이므로 김열보도 이들과 유사한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론된다. 물론 김열보는 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므로 조심스럽게 그의 학문적 역량을 짐작해봐야 한다. 그러나 김열보의 아버지가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중국의 과거까지 합격한 유학자이므로 김열보의 문장력이나 유학적 소양이 높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김열보의 아버지 金端은 예종 10년에 송나라 태학으로 유학하여 上舍及第를 한 후 귀국하여 尙書左僕射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김단은 금나라에 2차례 사신으로 파견되고, 금나라 사신이 왔을 때 館伴을 맡기도 했으며 同知貢擧를 역임하기도 했으므로 관료로 청요직을 역임하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판단된다. 게다가 김단은 자신의 자녀들을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定安任氏ㆍ坡平尹氏와 혼인시키고 있다. 정안임씨는 인종의 왕비이자 의종ㆍ명종ㆍ신종의 어머니인 공예태후로 인해 문벌가문으로 크게 성장하는데, 공예태후의 형제인 任克正의 아들과 김단의 딸이 결혼하였다. 그리고 김단은 자신의 아들과 딸 각각을 파평윤씨와 혼인시키는데, 자신의 딸은 尹惇信의 아들과, 아들인 김열보는 尹彦植의 딸과 결혼시켰다. 김단이 자신의 자녀를 정안임씨, 파평윤씨와 혼인을 시키고 있을 때는 이들 가문이 한창 번영하던 때이고, 그들도 각각 유력한 가문과 혼인을 통해서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였다. 그러므로 김단이 자신의 자녀들을 문벌귀족인 정안임씨, 파평윤씨과 결혼시킬 수 있었던 것은 김단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이들 가문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확대하여 혼원의 가문과 연결시켜보면 혼원의 아버지가 京市署丞에 그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조상들의 관직까지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이들 가문도 김단이나 정안임씨, 파평윤씨와 유사한 사회적 명성을 가진 가문이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혼원의 외할버지인 김열보가 윤언식의 딸과 결혼했으니 혼원에게 윤언식은 외증조부, 윤관은 외고조부가 된다. 고려시대는 부계뿐만 아니라 혈연으로 연결된 인물을 모두 자신의 조상으로 인식하는 ‘양측적 계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혼원에게 윤관은 중요한 조상 중 하나였을 것이다. 혼원이 생존하던 고종 40년(1253년)에 실시된 공신음서에 의하면, 배향공신의 자손은 外玄孫의 曾孫으로 挾5女까지 음서가 가능했다. 즉 배향공신의 후손으로 중간에 여자가 5명까지 끼어 있는 8세손 이내는 공신음서의 대상자가 된다는 것이다. 윤관은 예종의 배향공신으로 고종 40년 공신음서의 대상자이므로 혼원이나 그 일가도 이 내용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혼원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 혼원의 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와 그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파악해보았다. 혼원의 아버지 이사덕은 정8품직에 그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지 가문 자체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수안이씨 이사덕의 직계는 태조대의 개국공신이었으며, 평장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한 인물을 현종 대부터 배출하였고 과거 합격자도 다수 발견되었다. 또한 이사덕의 후손이 원간섭기에 밀직부사와 遂安君을 역임하였다. 이를 통해 혼원의 부계가 고려시대 대대로 고위 관인을 배출한 가문임이 확인되었다. 한편 외할아버지인 김열보는 叅上인 試閤門祗候를 역임한 중견 관료였으며 그가 교류한 인물들이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혹은 문관이어서 김열보도 그와 유사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유추되었다. 또 외증조부로는 김단과 윤언식이 확인되었는데, 김단은 송나라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와 左僕射까지 역임했으며 당대 문벌귀족인 정안임씨, 파평윤씨 등과 혼인할 정도의 家格을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가문으로 성장해 있었다. 윤언식은 윤관의 아들이 되므로 윤관과 혼원은 외고조부와 외현손의 관계가 되고 윤관의 음덕을 입을 수 있을 후손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혼원은 문벌귀족 혹은 그보다 조금 낮은 정도의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혼원이 출가한 후에도 그의 활동과 인적 관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득도사가 외삼촌인 宗軒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혼원이 혜심과 몽여의 제자가 된 후는 수선사의 영향력을 통해 승려로서 성장했겠지만, 그 가문의 위상도 고려사회의 특성상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혼원의 사승 관계와 관련 사원
진명국사 혼원은 13세의 나이로 자신의 외삼촌인 종헌을 득도사로 출가하였다. 종헌은 ‘品日雲孫’으로 禪師라는 승계를 가지고 있었다. ‘品日’은 사굴산문을 개창한 梵日을 가리키고 ‘雲孫’은 9대손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종헌과 혼원이 범일의 직계임을 표현한 듯하다.
출가 후 혼원이 수선사의 혜심을 찾아가기까지의 행적은 정확한 시간적 표현없이 「混元碑」에 간단히 나열되어 있는데, 승과에 합격한 것과 그 이후에도 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수행을 위해 유행하던 중 雙峯寺의 辯靑牛를 찾아가 수년간 공부하여 깊은 뜻을 얻었다는 것이다. 승과에 합격했지만, 뜻을 山林에 두고 名途 즉 名利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다른 고승들의 비문에서도 자주 찾아지는 문구이다. 혼원과 비슷한 시기에 생존한 고승인 承逈이나 混丘 등의 비문에서도 승과 합격 후 얻게 되는 명성과 여러 지위를 버린 후 선종 승려로서 수행을 계속했다는 표현이 있다. 승과 합격 후 僧階와 그에 부응하는 僧職을 받았던 승려들은 그들이 세속 지위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승비에는 名利를 떨쳐버리고 수행을 계속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고 「混元碑」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승과 이후에도 수행과 학습을 계속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때 처음 찾아간 인물이 雙峯寺 辯靑牛이고, 몇 년간 그를 섬겨 깊은 뜻을 얻었다고 한다. 辯靑牛는 다른 자료에서 찾아지지 않아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가 머물던 雙峯寺를 통해서만 정보를 유추할 수 있다. 쌍봉사는 신라말부터 유명 선승들이 머물던 선종 사원으로 고려 전기에는 사굴산문의 慧照國師 曇眞, 그의 제자 之印과 관련있는 사원이다. 또한 무신정권기 崔怡의 아들로 출가한 萬全이 환속하기 전까지 최씨정권의 경제력 구축과 수선사 장악을 기도하면서 주지로 있었던 곳이 쌍봉사이다. 그러므로 혼원이 辯靑牛를 찾아간 전후 시기 모두 쌍봉사는 사굴산문 승려가 머물고 있었던 만큼 辯靑牛도 사굴산문 소속 인물로 여겨진다.
쌍봉사의 辯靑牛 다음으로 혼원이 사사한 인물이 惠諶인데 「混元碑」를 통해서 혼원이 혜심을 찾아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혜심이 혼원의 사람됨을 인정하였다[大爲器許]는 말뿐이고, 혜심이 사망한 것이 고종 21년(1234년)으로 혼원의 정확한 이력인 고종 32년과 꽤 차이가 나므로 혼원이 혜심의 문하에서 오래 머문 것은 아니라고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원이 혜심의 지도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선대 고승과의 관련성을 강조함으로써 해당 승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좀 시기가 멀기는 하지만, 문종의 아들로 유가종으로 출가한 導生僧統 竀이 실제로는 慧德王師 韶顯에게 출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하산해 있던 智光國師 海麟의 제자라고 한 사실도 이와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혼원과 혜심의 실질적인 교류는 분명히 있었다. 이는 혜심의 無衣子詩集에 혼원에게 보내는 시가 남겨져있어 확인된다. 圓覺經의 각 章별로 꽤 길게 지어준 시로써 혼원에게 내려준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혼원이 스승으로 섬긴 이는 수선사의 3대 사주이자 淸眞國師로 추봉된 夢如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몽여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배움을 익혔다고 하므로 수선사 내에서의 혼원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은 몽여를 통해서 이루어진 듯하다. 또한 古人의 公案에 대해서 깊게 이해하였다[故於古人公案 洞曉其指歸]는 표현을 통해 수선사의 간화선 학풍을 혼원이 제대로 익히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혼원의 제자로는 수선사의 5대 사주인 慈眞圓悟國師 天英이 있다. 「混元碑」에 의하면 혼원이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천영에게 대신하도록 했고, 「天英碑」에서는 천영이 혼원을 좇아 法要를 자문하였으며 선원사 창건 때 혼원을 따라 왔다고 하므로 그들의 사자관계는 분명하다. 또한 수선사 6대 사주인 충지도 혼원과 오랜 기간 접촉했을 가능성이 크다. 「冲止碑」에서는 그의 스승으로 천영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충지가 출가하던 때가 고종 40년이므로 아직 혼원이 생존해 있을 때이고 그가 혼원을 위한 제문을 짓고 있으므로 충지는 혼원과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희종의 아들로 사후 圓靜國師로 추봉되는 鏡智도 혼원의 제자로 「混元碑」에 기록되어 있다. 경지는 처음 희양산문의 승형에게 출가했으나 「混元碑」에 의하면 혼원을 門人의 예로 섬기면서 朝旨로 사굴산문으로 移籍하였다고 한다. 「混元碑」에서 혼원을 ‘尊崇하여 敬重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고 특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혼원에 대한 특별한 대우의 일환으로 산문까지 변경하면서 왕자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혼원이 머물렀던 사원으로는 雙峯寺, 修禪社, 定慧社, 禪源社, 慈雲寺, 臥龍寺 등이 있다. 쌍봉사는 혼원이 승과 합격 후 처음 찾아간 辯靑牛가 있던 곳이다. 그에게서 몇 년간 있었다고 하니, 이 기간동안 혼원은 쌍봉사에서 머물렀다. 쌍봉사는 앞서 언급한대로 사굴산문의 주요 사원이었다. 혼원은 그후 혜심과 몽여를 찾아갔으므로 수선사에서도 머물렀다고 여겨진다. 또한 혼원이 고종 39년(1252년) 수선사의 4대 사주가 되어 고종 43년(1256년)에 천영에게 대신하도록 하기 전까지는 수선사의 주지였을테니 승려 생활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수선사에 머물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혼원은 崔怡에 의해서 定慧社의 주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하다. 「混元碑」에 의하면 혼원이 정혜사 주지가 된 후 대중을 이끄는 것을 사양하였다고 하고 주지는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불교의 교리를 알리는 일만 하므로 세상에서 法主라고 칭하고 어떠한 명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혼원이 주지직을 사양했고 그 일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만두었다는 표현은 없다. 게다가 三重大師가 되면서 정혜사 주지가 되었고, 주지직을 사양한 이후 선사로 임명되었음은 기록되었지만 주지직 사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冲止가 정혜사의 주지로 가면서 지은 원 황제의 장수를 기원한 䟽에 의하면, 정혜사는 혜소국사 담진에 의해 창건되어 청진국사 몽여가 禪風을 크게 떨치고, 충경 혼원 때에 祖道를 이어 흥하게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일정 기간은 혼원이 정혜사의 주지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혼원은 왕사로 책봉되면서 자운사로 옮겼는데, 그가 옮긴 날 저녁에 갑작스럽게 비가 와서 오랜 동안의 가뭄을 극복하게 하여 중외가 이를 경탄했다고 한다. 자운사는 개경 일대에 있었던 사원인데 혼원이 왕사로 책봉된 그 해에 고종이 사망할 징조가 자운사의 연못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江都에 개경과 동일한 사원을 창건할 때 자운사도 만들어졌고, 그곳에 혼원이 왕사 책봉을 위해 옮겨왔던 것이다. 그런데 「混元碑」의 제액이 「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幷序>」이다. 여기서 보면 혼원이 소속되어 있던 사원이 바로 慈雲寺이다. 게다가 충지의 여러 「祝聖䟽」 중에 ‘慈雲宗派의 道場은 冲鏡 스님의 음덕을 받은 땅이다’라는 구절이 있어 冲鏡인 혼원이 자운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운사를 중심으로 혼원의 문도가 강성하여 그들을 표현할 때 慈雲宗派라고 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원은 왕사 책봉을 기점으로 자운사를 자신의 본사로 삼았다고 이해된다.
다음 왕사 책봉이후 하산소로 臥龍寺가 지정이 되는데, 혼원은 원종 원년(1260년)에 하산하여 원종 12년(1271년) 사망할 때까지 와룡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혼원이 수선사의 사주를 천영에게 대신케 한 후 왕사로 책봉되기 직전에 머물렀던 곳도 와룡사인 듯하다. 고종이 혼원을 왕사로 책봉하기 위하여 封崇都監을 설치하고 斷俗寺로 하여금 왕사 책봉 의례를 일부 주관케 했다. 단속사가 왕사 책봉을 명령받게 된 것은 수선사의 주요 사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선 혼원이 머문 곳과 가까워야 했을 것이다. 단속사가 위치한 경상도 진주목에는 와룡사라는 사원이 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작성될 때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혼원이 사망한 후 晉州牧副使ㆍ戶部侍郞인 薛昻에게 장례를 맡긴 것을 참고하면 혼원의 하산소인 와룡사는 진주목 임내에 있었다. 이를 통해 와룡사는 왕사 책봉 이전에도 혼원이 일정 기간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하산 이후 입적 전까지 주지했던 곳임이 확인된다.
요컨대 혼원은 득도사로 자신의 외삼촌을 선택했지만 그도 사굴산문의 인물이었고 그후 혼원이 사사한 모든 인물은 사굴산문 나아가 수선사 출신이었다. 또한 혼원이 수선사의 4대 사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대인 혜심, 3대 몽여를 스승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한편 제자로는 5대 사주인 천영과 6대 충지가 있었고, 희종의 아들인 鏡智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즉 수선사의 사주답게 수선사의 중요 인물들과 사제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혼원은 수선사와 선원사를 포함한 사굴산문 혹은 수선사의 주요 사원의 주지직을 역임했으며, 왕사로 책봉되면서 慈雲寺를 본사로 삼아 사후 그의 문도들을 ‘慈雲宗派’라 지칭할 정도였다.
4. 혼원의 왕사 책봉과 불교계의 변화
혼원이 왕사로 임명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고종 45년에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자 封崇都監을 설치하고 혼원을 모셔오기 위해 中使가 파견되었다. 의례적인 사양 이후 혼원은 와룡사에서 수도인 강도의 慈雲寺로 옮겼다. 혼원이 자운사에 도착하던 날의 저녁 때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려 중외에서 경탄했다고 하니, 이는 혼원이 왕사로 책봉받을 만한 고승임을 강조하기 위한 일화이다. 「混元碑」에 의하면 왕사 책봉은 고종 46년(1259년) 5월 11일에 이루어졌는데, 곧 왕이 사망하고 원종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또한 원종이 자신의 아버지를 좇아 예우를 더하였지만 혼원이 하산하고자 하므로 친히 스승의 예를 한 후 원종 원년 10월에 하산하게 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면 고종은 혼원의 왕사 책봉 이후 한달이 조금 지난 후인 6월 30일에 사망하였고 원종은 태자로서 혼원의 왕사 책봉 전인 4월 21일에 몽골에 화친을 위해 이미 강도를 떠난 상태였다. 원종은 다음해인 원종 원년 3월 17일에 개경에 도착해서 4월 21일에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므로 고종은 혼원을 왕사로 책봉한 후 바로 사망했고, 원종이 귀국하기까지 얼마간의 공백기를 거쳐 원종의 즉위 이후 혼원은 5개월 남짓 수도에서 국왕과 대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혼원은 원종에게 다시 왕사로서 책봉을 받았다. 이는 「混元碑」에 혼원이 간절히 退休를 두세번에 이르도록 요구하므로 원종이 그를 大內로 불러들여 친히 師禮를 행하고 몸소 進饌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여기서는 재책봉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高麗史에서는 원종 원년 8월 28일에 前王師인 혼원을 맞이하여 스승으로 삼고 친히 進食하였다고 한다. 혼원을 前王師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고종에게서 왕사로 책봉받았으나 원종 당시에는 왕사는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날 원종이 다시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므로 왕사로 재책봉된 것이다. 또한 高麗史를 참고하여 「混元碑」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大內로 불러들여 친히 師禮를 행하고 몸소 進饌하였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즉 高麗史 뿐만 아니라 「混元碑」에도 혼원이 원종에 의해 재책봉되었음이 기록되었다.
혼원 뿐만 아니라 재책봉된 왕사의 사례는 다수 찾아진다. 이는 고려 전기이래 국왕과 왕사가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국왕이 바뀌면 왕사도 교체되어야 한다는 의식과 관련된다. 그러나 새로이 즉위한 국왕이 일반적으로 전왕의 아들이고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변화 없이 즉위하였으며 효심으로 부왕의 왕사를 부정할 수 없었던 분위기가 반영되면서 재책봉의 과정을 거치고 대개 왕사가 바로 하산하는 경향이 있었다. 혼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고, 원종에게 8월에 재책봉을 받은 후 10월에 하산하였다. 그러므로 혼원은 사망 직전의 고종에게 책봉되었고, 몽골에 갔던 원종이 귀국한 후 재책봉되어 2개월 정도 있다 하산한 것이다.
한편 혼원의 왕사 책봉은 고종 46년 5월에 이루어졌지만, 책봉의 준비는 한 해전인 고종 4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고종이 혼원을 존경하여 왕사로 삼고자 하여 封崇都監을 설치하고 혼원을 江都로 모셔오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 45년 3월에 大司成 柳璥과 別將 金仁俊 등에게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였던 최의가 주살되고 왕에게 정사가 돌려졌다[復政于王]. 혼원의 책봉이 시작된 것이 병오년 즉 고종 45년이라고 되어 있지만, 최의의 주살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 전기의 왕사와 국사 중 국왕과 더욱 밀접했던 인물은 왕사였고 최의의 주살과 함께 왕에게 정사가 돌려졌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보면, 국왕의 입장에서 권력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왕사의 책봉일 수 있다.
또한 혼원이 왕사로 선택된 이유로는 혼원의 개인적인 명망과 함께 당시 수선사의 영향력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왕사ㆍ국사의 임명은 당대 가장 융성한 종파에서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혼원 이전에 왕사로 임명된 德素와 志謙은 전기 이래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교종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임명된 이들이고, 혼원 이전에 국사 임명은 없었다. 또한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 혼원이 왕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추증된 국사들을 분석해보면, 왕사로 사망한 이들과 종실 출신 승려들로서 관례적으로 입적 후 국사로 추증된 이들을 제외하면 수선사의 知訥, 惠諶, 夢如와 백련사의 了世, 天因뿐이다. 즉 혼원이 왕사로 임명될 고종 말년에 가장 번성했던 불교 세력은 수선사와 백련사였고, 혼원이 오랜 기간 수도인 江都의 선원사에서 활약했던 만큼 왕정복고의 의미로 왕사를 임명할 때 가장 적합한 승려는 혼원이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최씨정권을 몰아낸 것은 김준 등의 무장세력이기는 하지만, 문관의 대표로 柳璥도 참여하였다. 유경은 문벌귀족 가문이었던 文化柳氏 출신으로 전기 이래의 통치 방식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경이 역시 전기 이래의 명문가 출신이자 수선사의 사주였던 혼원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경은 왕사 책봉이 시작된 고종 45년에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사 임명도 官誥 등 인사 행정에 속하므로 유경의 지지가 혼원을 책봉할 수 있게 한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또 고종이 혼원의 왕사 책봉 직전인 고종 46년 4월 18일에 유경의 집으로 移御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왕사 책봉도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왕사 책봉에 유경이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유경과 혼원의 관계를 쉽게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혼원의 사후 그 비명을 지은 김구를 유경이 추천하고 유경과 김구가 사이가 좋았다는 점도 혼원과 유경의 연관을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혼원이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혼원을 왕사로 책봉한 고종이 사망하였고 원종이 귀국한 후 고려전기의 관례대로 재책봉을 하고 하산하게 되었다. 재책봉된 이후는 새로운 국왕과의 관계가 전왕보다 소원해져서 대체로 하산을 했으므로 혼원도 하산했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선원사와 수선사의 사주가 되고 왕사로 책봉되는 등 승려로서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누리던 혼원은 왕사 책봉 이후 하산하여 와룡사에서 12년간을 지냈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 활동이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혼원이 원종에게 왕사로 재책봉된 후 하산한 다음해에 일연이 선원사에 주석하였다. 이러한 점은 혼원 더 나아가 수선사의 위상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혼원과 천영대에 수선사의 사세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기 때문이다.
혼원이 최씨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다양한 방면에서 확인된다. 「混元碑」에 의하면 최이가 혼원의 道行을 사모해서 三重大師를 제수하고 定慧社의 주지로 삼도록 임금에게 주청했다 하고 고종 33년(1246년) 선원사에 개당하도록 혼원에게 사람을 보낸 것도 최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최씨정권이 혼원을 지원한 것은 그를 대몽항쟁의 중심인물로 내세우려 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현재 혼원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보건대 올바른 해석인 듯하다. 혼원을 大禪師로 임명하는 敎書와 官誥를 살펴보면, ‘국가가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及國家危難之際]’ 혹은 ‘북조가 장차 우리 땅을 침탈하려할 때[近者彼虎翼之北朝 將魚肉乎東土]’라고 하여 혼원의 대선사 임명의 한가지 이유로 몽골의 침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混元碑」에서 혼원을 추천한 인물로 晋陽公 崔怡를 직접 언급한 것처럼 대선사 관고에서는 ‘朕과 대신이 혼원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朕及大臣 聞風慕望]’라고 하여 역시 최이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이처럼 최씨정권에 의해 선택되어 대몽항쟁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원나라와 화친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혼원의 제자인 천영의 활동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영은 최씨무신정권기 동안 수선사 역대 사주 중 최씨가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천영도 최씨집권기인 고종대에 승계가 승진하고 여러 사원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梁宅椿은 散秩로 고향에 머물다가 아들인 천영 덕분에 관직에 올라 禮賓卿으로 치사하였고 그의 아들이자 천영의 이복형제들도 나이에 비해 일찍 현달하였는데 이는 천영의 음덕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건대 천영은 최씨정권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와 같은 우대를 받았던 천영이 원종대와 충렬왕대에는 별다른 특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 「天英碑」에는 충렬왕이 왕사나 국사로 삼고자 했지만, 천영이 굳이 사양하고 나라에 변고가 많아 이루어지 못했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왕사나 국사가 될만한 승려였다는 미화일 뿐이다. 물론 사망 후 천영은 국사로 추봉받았지만, 이는 고종대에 큰 예우를 받았던 승려에 대한 관례이며 또한 무신정권기부터 이어진 수선사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였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고종대 불교계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혼원과 천영은 원종대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물론 혼원은 왕사였지만 하산한 상태로 중앙 정계와 별다른 연결이 없었던 듯하다. 천영도 마찬가지였다. 원종대 이후의 수선사의 몰락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찾아진다. 수선사는 전남 일대 여러 지역에 분산된 토지와 借貸 행위를 통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수선사의 6대 사주인 冲止 대에 이르러서는 수선사의 토지를 돌려달라고 원 황제에게 청원을 할 정도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었던 崔竩와 萬宗의 노비와 토지 등이 적몰되었다. 이는 최씨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국가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만종이 혜심의 제자로서 수선사의 일원이었던 만큼 만종 재산의 적몰은 수선사의 경제력 약화와도 관련되었을 것이다.
혼원이 왕사 책봉 이후 하산하여 지방에서 머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가지산문의 一然이 선월사 즉 선원사에 주석하면서 중앙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사굴산문의 수선사에서 가지산문으로 불교계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일연을 선원사로 초청한 것은 원종을 옹립한 세력이 정치적인 차원에서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되고 있으며 일연을 선월사로 불러들이고 중앙정치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인물은 최의 제거에 참여했던 朴松庇로 파악되고 있다. 최씨정권이 집권하면서 고려 전기의 교종을 제외하고 선종에서 새로운 불교 세력을 선택하고자 한 것처럼 원종 초에도 김준ㆍ임연 정권의 등장과 몽골과의 화해 속에서 이전 대몽항쟁의 중심으로 이용했던 수선사를 대신하여 가지산문을 중앙 정부가 지원하는 불교 세력으로 교체했다고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혼원은 왕사로 책봉되었지만 입적하기까지 12년동안 지방에서 별다른 활동없이 지냈던 것이다.
이상 혼원의 왕사 책봉 과정과 전후 불교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혼원은 국사 책봉이 없었던 무신정권기에 임명된 3명의 왕사 중 한명이고 수선사 출신으로 최초 왕사가 된 승려이므로 그가 가지는 위치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혼원이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것은 최씨집권기이고, 왕사로 책봉될 때는 최씨정권이 무너져 왕사로서 실제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 듯하다. 다만 고종의 입장에서 왕정 복고의 상징으로써, 당시까지 불교계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수선사의 대표로써 혼원을 왕사로 책봉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고종마저도 혼원을 왕사로 책봉한 후 사망하였고 원종 즉위이후 국내 정치적 사정뿐만 아니라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불교계에 대한 국가의 지원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어 혼원과 수선사는 그 이전에 비해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그러므로 혼원은 왕사 책봉 이후 12년간 지방에서 생활하다 입적하였고, 그의 제자 천영은 수선사 사주 등으로 활동할 뿐 왕사나 국사로 책봉받지 못한 채 사망하였던 것이다.
5. 맺음말
이상 수선사 4대 사주인 혼원의 인적 관계와 왕사 책봉을 전후로 한 상황을 살펴보았다. 혼원의 부계는 태조대의 개국공신으로 시작해서 현종대에 재상을 배출했으며 과거합격자도 다수 있었다. 그 후손들도 封君되는 등 고위 관료로 활약하였다. 한편 외할아버지인 김열보는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당시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또한 혼원의 외증조부인 金端은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한 계기로 가문을 성장시키고,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定安任氏ㆍ坡平尹氏 등과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있다. 그리고 혼원의 또다른 외증조부인 윤언식은 윤관의 아들로, 혼원은 배향공신이었던 윤관의 음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범위 안의 후손이었다. 이상을 통해 보면 혼원의 가문은 문벌귀족에 상당할 정도였다. 수선사나 백련사의 초기 주도층이 향리나 하급관리의 자제들이었다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는 수선사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문벌가문에서도 출가하게 되면서 나타난 양상으로 이해된다. 또한 혼원의 이러한 배경은 이후 정치권력과 유착될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혼원은 자신의 외삼촌이자 사굴산문 소속인 宗軒에게 출가하였으며 이후 雙峯寺의 辯靑牛와 惠諶ㆍ夢如를 스승으로 섬겼다. 수선사ㆍ선원사 뿐만 아니라 수선사의 주요 사원인 雙峯寺, 定慧社 등에 주석하였으며 왕사로 책봉받으면서 慈雲寺를 본사, 臥龍寺를 하산소로 지정받았다. 혼원의 제자들은 ‘慈雲宗派’라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던 듯한데, 구체적으로는 수선사의 사주가 되는 天英ㆍ冲止와 왕자 승려인 鏡智 등이 제자였다. 혼원의 사승 관계에서도 수선사의 중요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였음이 확인된다.
한편 혼원은 고종 46년에 왕사로 책봉되는데, 고종이 왕사 임명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원종으로부터 재책봉된 후 하산하였다. 혼원이 최씨정권과 고종 말년에 승려로서 최고의 승계와 다수의 승직, 나아가 왕사로 임명된 것에 비해 하산 이후는 중앙 정계와 별다른 관련없이 지냈다. 그 이유는 원종 초년의 정치적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최씨정권기에 혼원과 수선사를 대몽항쟁의 구심점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서 그 이전보다 정권과 밀접해지고 여러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그나마 혼원을 신앙하던 고종마저 혼원을 왕사로 책봉한 후 사망하게 되면서 혼원과 중앙정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고종 말년에 왕정 복고를 주도했던 유경이 왕권 회복의 상징으로 왕사 책봉을 주도한 듯한데, 그도 원종 초에 김준 세력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면서 혼원을 지지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거의 소멸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관행대로 재책봉된 왕사로서 하산한 혼원은 중앙 정계와 멀어져 지방 사원에서만 머물다가 입적하게 되었다. 이는 원종 2년에 江都 선원사에서 일연이 開堂하게 된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원종 이후 수선사는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해지고 새롭게 가지산문이 중앙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문벌귀족에 상당하는 가문 출신인 혼원은 국사 책봉이 없었던 무신정권기에 임명된 3명의 왕사 중 한명이고 수선사 16국사 중 왕사로 임명된 최초 인물이다. 그러므로 혼원의 왕사 책봉은 시기적으로나 수선사에서나 꽤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혼원이 왕사에 책봉되던 시기는 무신정권 붕괴와 원나라에 대한 항복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있었던 때로 일시적으로나마 수선사의 위상이 하락했다. 그러므로 혼원도 왕사로 임명되어 입적하기까지 12년간을 중앙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하산소에서 머물면서 수선사의 고승으로서만 활약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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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family line of Jinmyeongguksa(眞明國師) Honwon(混元), the 4th chief priest of Suseonsa(修禪社) and appointment as king's teacher
PARK YUN JIN
/ Research Professor of Korean History, Korea University
The paternal line of Jinmyeongguksa(眞明國師) Honwon(混元), the 4th chief priest of Suseonsa(修禪社) began from a meritorious retainer at the founding of a dynasty during the period of King Taejo, produce a prime minister during the period of King Hyeonjong, and included many successful applicants of state examinations. Some of the descendants also acted as high-ranked government officials and some were appointed as guns(封君). Meanwhile, Honwon's maternal grandfather Kim Yeol-Po(金閱甫) was appointed as a government official without any examination and was exchanging with famous literary persons at that time. Honwon's maternal great-grandfather Kim Dan(金端) grew his family after passing a state examination in China and had his children get married to representative distinguished families at that time such as Jeingan Ilm family(定安任氏) and Papyeong Yun family(坡平尹氏). Given these information, Honwon's family was comparable to distinguished families at that time. This is a little different from the fact that the initial leading classes of Suseonsa and Baekryeonsa were sons of local officials or low grade officials. This difference is understood as being attributable to the fact that as the status of Suseonsa was enhanced, sons of distinguished families became Buddhist monks of Suseonsa.
Meanwhile, Honwon was appointed as a king's teacher in the 46th year of King Gojong(高宗) and reappointed by King Wonjong(元宗) before he came down from the mountain because King Gojong died immediately after the appointment of him as a king's teacher. By the way, although Honwon was appointed to the highest monk's rank and many monk's positions, and even to the king's teacher, he did not have any particular relationship with the central political world. The reason is closely related to the political changes in the early years of King Wonjong. Whereas Honwon and Suseonsa were specially treated as a pivot of the anti-Mongol struggle during the period of the Choi family's government, Honwon could not but grow away from the central political world when the Choi family's government collapsed and King Gojong died. Yu Gyeong(柳璥) who led the recovery of the monarchy at the end of the period of King Gojong seems to have led the appointment of Honwon as a king's teacher. Yu Gyeong lost power by the power of Kim Jun in the early years of King Wonjong and this meant that political power that could support Honwon almost became extinct. This is in contrast with the appointment of Ilyeon(一然) as the chief priest of Seonwolsa(禪月社) in Gangdo(江都) in the second year of King Wonjong. Since the period of King Wonjong, Suseonsa lost some power temporarily and Gajisanmum(迦智山門) became to newly act actively in the central political world.
* Key Words
Goryeo, Jinmyeongguksa(眞明國師) Honwon(混元), Suseonsa(修禪社), Seonwonsa(禪源社), lineage, 王師(Wangsa), the Choi family's government, Ilyeon(一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