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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55
2월3일[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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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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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oxmdP-wJY4
[살레시오회 신철균 파스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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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극단적으로 양분화되고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식별력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인들, 그중에서도 지도자들, 나이 든 사람들은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가슴에는 지혜를 품고 살아가며, 이 무분별한 시대 균형추 역할에 충실해야 할것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이 슬픈 현실을. 좋은 머리에, 강한 학구열, 그에 못지않은 출세욕에, 줄까지 잘 서 승승장구하며, 그래서 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놨다 하는 집단 권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집단 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 예의범절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자신들의 견고한 성을 지키기 위해 파렴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떼처럼 전락해버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선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는 솔로몬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간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만일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주변 강대국들에게 당당히 맞설 강력한 군사력, 이를 바탕으로 한 천년 왕국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왕으로 살아가는 동안 백성들 모두 굶주리지 않고, 전쟁도 겪기 않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대답을 보십시오.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의 대답이 너무나 마음에 흡족하셨던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오늘 이 땅의 지도자들과 너무나 달라 슬픈 마음까지 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깊이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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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쉬면 도움이 되고 쉬지 못하면 짐이 된다>
활기 왕성한 20대 초반 겨울에 성당 청년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간 적이 있습니다. 2박3일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을 정상까지 뛰어서라도 올라갈 기세였기 때문에 남들의 짐까지 짊어지고 쌍계사에서 뱀사골까지 거뜬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틀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남에게 내 짐까지 맡기고 끝에 쳐져 한쪽 발을 질질 끌며 쫓아가야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기다려줘야 했던 이들이 이젠 저를 기다려줘야 했습니다. 그때 왜 산에 오르면 겸손해진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일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리고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하는 이들은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버는 것처럼 쉬는 날을 마련해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하면 오래 못 버팁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읽으며 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사제들이 좀 더 본당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십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피정하라’는 뜻입니다.
현재 교구사제의 연중피정은 길어야 5일입니다. 그것도 저녁에 들어와서 오전만 하고 가니 실제로는 3일 정도라 하겠습니다. 일 년에 3일 피정! 교황청에서 정한 피정기간은 일 년에 10일입니다.
그리고 피정에 들어가서도 강의를 듣고 전례를 공동으로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피정은 본래 광야에서 나 혼자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광야에서 하신 일이 피정입니다.
광야에서는 미사도 성경 읽는 것도 강의 듣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 대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침묵 중에 주님과만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정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정기간이 짧은 데는 신자들의 영향도 매우 큽니다. 평일미사를 빠치면 개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많은 신자들이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제자들의 피정을 방해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직접 그들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들이 없어 목말라 하는 수준의 신자들은 이미 주님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이들입니다. 목자들이 피정할 때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스미르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카르포스 교부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포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 불리시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포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자들이 쉴 시간이 부족하면 오히려 양들에게 피해가 갑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목자들에게 쉴 시간을 충분히 할애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더 많이 쉬어 보다 생기 있는 영으로 신자들을 대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너무 바쁘게 사목하셔서 지쳐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외국은 피정기간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이요 휴가도 일 년에 거의 1달이고 7년을 일하면 1년은 안식년을 합니다.
그러나 저희 교구 같은 경우는 평생 1번만 안식년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사제들에게 조금 더 쉬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님이 피곤하신 것을 보면 평일에는 우리가 공소예절이라도 하며 지낼 터이니 일주일 동안 조용하게 피정하며 쉬고 오시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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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입니다. 철학시간에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매일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물이 있는 사람은 배가 고프면 강가에 나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 물고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제게는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철학시간에 신부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를 구약성서는 이미 3000년 전에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권한입니다. 그것은 병자를 치유하는 권한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을 받아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병자를 치유해 주었고,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제게도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물’을 주신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은퇴하신 후에 모든 것을 혼자 하셨습니다. 혼자서 세탁하고, 청소하고, 식사준비하고, 장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장례 때 오는 사람들에게 국밥 한 그릇 대접할 만큼만 남겨두고, 모든 재산을 시골의 어려운 본당에 기부하였습니다. 첫 번째 본당의 주임 신부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기도 방에는 큰 초가 녹아내렸습니다. 제 방에는 작은 초도 늘 그대로 있었습니다. 기도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당의 주임 신부님은 언제나 저를 믿어 주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지지와 격려로 가족캠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교우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판단하였습니다. 중요한 일은 수녀님과도 상의하였습니다. 본당은 늘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았습니다. 주일학교를 위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연극반을 위해서 배우를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음악반을 위해서 악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잘 알았기에 본당 신축이라는 큰일도 잘 해 냈습니다. 네 번째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늘 책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제게도 ‘팡세, 중세 철학사, 준주성범’과 같은 책을 사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이외에도 미술, 음악,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수준의 소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33년 사제생활을 이어오는 것은 제게 ‘그물’을 주신 신부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0년 8월부터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상황에서 본당신부님이 한국으로 가셨는데 올 때까지만 미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본당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3년 6개월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일 미사를 끝으로 저는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후임 신부님도 브루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문홍보 때문에 출장을 가면 은퇴신부님들이 도와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부제서품을 받은 종신부제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브루클린 공동체에 좋은 사제들이 계속 올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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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이로써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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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이 모습은 올바르고 지혜로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 번째는 ‘섬김’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부여받은 왕권이 개인적 욕심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직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와 정의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백성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겨야’ 함을(1열왕 12,7 참조) 의미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을 위한 장수나 부나 원수들의 목숨을 바라지 않고, “당신(하느님) 백성”을 위한 지혜를 청합니다.
두 번째는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합니다. 그는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듣는 것’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다른 이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지혜의 원천입니다. 지도자는 하느님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지혜로운 이의 올바른 조언을 겸손하게 새겨 들으며, 고통과 어려움에 놓인 이들의 호소를 잘 들어주어야 합니다.
세계, 국가, 교회 등 크고 작은 모든 모임의 지도자들은 솔로몬처럼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신원 의식과 듣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결정에 사리사욕이 들어가고, 다른 이의 말에 귀를 닫은 독선적인 지도자는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구성원들을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선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를 보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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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피정>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영적으로 쉬는 일’이고, 주님 안에서 ‘새 힘’을 얻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들’로서 활동하느라고 무척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활동하는 동안 그들을 맞이해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만났을 텐데,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도 지쳐 있었겠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도들에게 ‘안식’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제자들만 보내시는 것 같은 말씀인데, 예수님도 함께 가셨기 때문에, 뜻으로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입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뒤에 혼자 남아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시면서, 그들보다 더 피곤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잠깐 쉴 틈도 없이 매우 바쁘게 일하시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활동을 마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온 사도들은 바로 그 상황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안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자체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어 누리는 생활이고, 신앙생활 자체가 피정입니다. <제대로, 또 온전히 집중할 수만 있다면, 미사와 각종 전례도,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들도, 성경 묵상이나 성체조배 등도 모두 안식을 얻어 누리는 일이고, 피정입니다. 성당은 주님 안에서 쉬는 곳,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힘을 빼앗기는 곳이 아니라 새 힘을 얻는 곳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지치기만 한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마치 무슨 노동을 하듯이 하기 때문인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즉 강제노동을 하듯이 한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외딴곳으로 가서’ 사도들과 함께 쉬려고 했던 예수님의 계획이 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안식을 방해하려고 따라간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을 얻기를 원해서 따라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피정하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모두 맞아들이셨고, 또다시 쉬시지도 못하고 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안식을 얻으셨고, 사도들과 군중은 그 가르침을 들으면서 안식을 얻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시편 23편이 연상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사실, 목자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인간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주님을 떠나 있었거나, 주님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었거나,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잃은 양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들’을 되찾으려고 오신 분이고, 당신이 바로 참된 목자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쳐 있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목적지가 없는 인생을 살면서 방황하고 있거나,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참된 목자이신 분이며, 참된 안식처이신 분이며,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내가 찾은 안식처에서 함께 쉬자고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고, 또 내가 얻은 ‘새 힘’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 선포이고, 사랑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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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소임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중점을 두는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더 나아가 사목적으로도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자신의 속이 뒤틀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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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군중들에게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기시고, 마치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양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던 것은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참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양인가?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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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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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제자들은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하느라 지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휴식을 취하는 근본 목적은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용한 곳에서, 나를 짓누르는 그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주님을 만나려 할 때 의외로 주님의 목소리가 쉽게 들려올 것입니다.
바쁜 나날의 연속이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내어 주님에 대해 명상하며 기도하고, 가족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산이나 바닷가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하면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늘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소홀하게 대했을지도 모를 가족과 이웃, 벗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께서 모처럼 쉬시려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는데,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쉬지도 못하시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이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내가 피곤하고 바쁘더라도, 나의 손길을 절실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를 보살펴 주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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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나와 함께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6,31)
실리콘 밸리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한 스토아주의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로마의 철인 황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의 명저인「명상록」에 오늘 복음의 의미를 일깨우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골이나 해변이나 산속에서 혼자 조용히 물러나 쉴 수 있는 곳을 갖기를 원하고, 너도 그런 곳을 무척 그리워하곤 한다. (중략) 사람이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서 고요하고 평안하게 쉬기에는 자신의 정신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세상이란 넓은 곳에서 인생이란 험한 길을 걷는 사람에게 쉼터, 쉴 곳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삶의 지혜이며 선택입니다. 얼마 전 도쿄를 둘러보고 온 서울 시장 오세훈은 “사람이 쉴 수 있는 공개 용지가 없는 강남은 실패한 도시계획”이라고 강조하면서 서울 도심 대개조를 선언했더군요. 부디 자신이 선언한 대로 재건축, 재개발을 위한 빌미를 위한 대개조가 아니라 쉴 곳이 없는 대도시 안에 사람이 쉴 공간을 회복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깊은 침묵과 고독의 시간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다시 걷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며 안식의 자리 곧 영적 쉼터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상의 바쁨과 과도한 일로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해 몸도 마음도 지친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너희는 나와 함께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6,31)고 권고하시면 함께 쉴 수 있는 외딴곳으로 떠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피정避靜의 가르침이며, 이 가르침을 토대로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저희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이 사는 곳을 수도원monastery이 아닌 피정집retreat house이라 칭하였습니다. 피정이란 이렇게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물러나 한적하고 조용한 침묵과 고독의 장소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혼 육신이 편히 쉬는 것입니다. 이 침묵 속의 쉼이 바로 피정입니다. 피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 멈추어 서게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들게 하고(=기도), 이로써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깨닫게 합니다. 세상에서 떠나온 사람만이 떠나온 그곳으로 되돌아가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구원의 도구와 친교의 연장으로 함께 사는 이들을 사랑하고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특히 저희 우이동 명상의 집이나 오상영성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권유하신 외딴곳이며 참된 쉼, 休가 보장되는 장소입니다.
쉴 곳이 없다고들 합니다. 물론 한적하고 고요한 곳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하고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 단지 사람이 일상의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참된 쉼을, 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쉴 곳으로 떠난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마음먹고 쉴 곳으로 막상 떠났지만, 자신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그곳에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도 한갓진 시골, 평안한 바닷가 숲, 조용한 산속에 혼자 있다고 우린 정말 쉴 수 있었으며 있을까요? 아직도 우리 마음에 두고 온 그곳과 사람들과 그리고 일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마음 한가득하다면, 특히 연락할 수 있고 어디서든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스마트 폰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곳이 물러나 쉴 곳이며 참된 쉼일까요? 아우렐리우스가 우려한 것처럼, 가장 이성적으로 적합한 쉴 곳에 가더라도, 내 마음이 고요하지 않는다면 참 쉴 곳이 아니며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피정이나 아우렐리우스가 지적한 대로 내가 편안히 물러가 쉴 곳은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기실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외적 조건이나 자리는 단지 일차적인 이동이나 장소의 전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으로 내적 여행이라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야말로 참된 쉴 곳입니다. “주님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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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1년 뉴욕 세계무역 센터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행기 테러로 자그마치 2,996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테러입니다. 이때 시민들은 많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빌딩 속을 나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들의 흐름을 거슬러서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빌딩을 향해 역주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관, 소방관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죽음이 있는 곳으로 역주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셨음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단순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을 위해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이라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따르는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나약함으로 그런 용기를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함께함으로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같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가르치셨고 세상에 전교 활동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히 모두 다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신 이유는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함께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가엾은 마음인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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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일지라도>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외딴곳일지라도>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사람에게
곁이 되어주려고
사람에게서
잠시 떨어져
홀로 쉬고픈
외딴곳에
애써 나를 찾는
사람 있다면
그 사람에게
곁이 되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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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 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으며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세2,2-3) 휴식은 꼭 필요합니다.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고(루카 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십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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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도자들은 물론 사람들의 필수 덕목>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말 둘이 “섬기다”와 “배우다”이고 명사형으로 하면 “섬김”과 “배움”이 되겠습니다. 비단 지도자는 물론이고 참된 삶을 지향한다면 두 기본적 삶의 요소가 섬김과 배움일 것입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섬기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섬김뿐 아니라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가 평생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겸손한 이들은 기도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늘 초보자라고 고백합니다. 농사짓든 이들을 대해도 늘 초보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배우는,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중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결국 배우다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니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머리45-48)
참 아름다운 규칙서 내용으로 수도생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배움터라는 것이요 여기서 평생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섬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온통 배움의 대상입니다.
학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배움터가 좋습니다.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 정문에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쓰여 있습니다. 배움터, 쉼터, 샘터, 일터 순수한 우리말이 참 정겹습니다.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같은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섬기는 지도자는 물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필수적 자질이 자비와 지혜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질인 자비와 지혜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불자들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임을 봅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연민의 사람이라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했을 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사도들의 피곤한 처지를 한눈에 직시한 배려와 공감의 자비하신 주님은 지혜롭게도 이들에게 관상적 휴식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일터에서 외딴곳의 쉼터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리듬입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내용이 또 흥미롭습니다. 외딴곳에 도착하니 이미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유연하게 현실의 필요에 임하시니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림같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군중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 휴식을 포기하고 이들의 구원활동에 전념하는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 자비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미사전례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말씀의 전례후에 이어질 오늘 복음에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같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사람들로, 또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에서 지금까지 맹활약했던 다윗 임금은 역사무대에서 퇴장하고 그 후계자로 솔로몬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 대해 베풀었던 애정이 그대로 솔로몬에게 계속되니 이것은 순전히 부왕 다윗 덕분입니다.
주님의 솔로몬을 향한 물음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물음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솔로몬의 대답은 통쾌할 정도로 정확했고 지혜로웠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경청과 분별의 지혜를 청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고, 이어 주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솔로몬에 대한 편애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나,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나는 네가 청하지도 않은 것,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로몬이 참으로 지혜로웠다면 부와 명예는 단연코 사양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의 유혹에서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들은 사람들을 타락과 부패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솔로몬의 삶에서 보다시피 그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다윗이 이루어 전해준 성취는 서서히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세우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만약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하나가 아닌 넷만 청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자세, 주님의 한결같은 “자비와 지혜”의 자질만 청했을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이 넷이야 말로 지도자들은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 모두의 기본적,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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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듣는 마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열왕기는 솔로몬의 청원 기도로서 듣는 마음과 분별 능력을 주십사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주십사고 청할까 생각해봅니다. 나도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해야 할까? 분별의 능력을 청하는 것은 안 좋지 않을까? 그리고 듣는 마음보다 사랑을 주십사고 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선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나 분별지를 안 좋은 것으로 얘기하지요.
이 분별심과 분별지에서 악이 발생하고 불행이 시작된다고 얘기하지요. 지어낸 얘기겠지만 인도에 어떤 사람이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종업원이 바닥을 닦던 걸레로 식탁을 닦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지니 그 종업원은 아직도 당신은 구별하느냐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하더랍니다.
유달리 더러운 것과 깨끗한 구별하는 사람, 그래서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조금의 더러움도 못 견디는 사람은 불행하지요.
그리고 다 좋은 사람이 행복하지 이것은 좋고 그래서 저것은 싫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니 이런 선악 분별심은 청할 것이 못 되고, 솔로몬이 청하는 선악 분별심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선악은 하느님의 선과 악입니다. 자기중심의 선악 곧 내가 좋아하는 선과 내가 싫어하는 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선과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주십사고 청하는 선악 분별력은 바로 하느님의 선과 악을 분별하고, 나의 선과 악이나 세상의 선과 악과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마약은 주십사고 청하고 약은 쓰니 싫다고 하잖습니까?
솔로몬은 또한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 참 훌륭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들으라고 하고, 통치자들은 더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귀가 너무 얇아서 하느님의 음성은 듣지 않고, 그저 인간의 이런저런 소리를 분별없이 듣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혹하는 소리와 달콤한 소리에 하느님의 선악 분별력을 잃게 되고 백성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의 소리를 가려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잘 믿는 사람 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도 알고, 기도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분별할 줄도 아는 사람이겠지요.
아무튼 듣는 마음을 달라는 솔로몬의 청원에서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들으려는 겸손과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사랑을 느끼며 이런 솔로몬에게서 배우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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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34)
<임금의 덕목!>
오늘 복음(마르 6,30-34)은 '예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군중을 향한, 또 하나의 군중인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인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향해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과 독서(1열왕 3,4-13)를 통해 전해지는 '솔로몬의 지혜'를 함께 묵상하면서, 오늘날 이 세상에 필요한 '임금의 덕목'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이 묵상을 통해 이 땅에 '예수님과 솔로몬을 닮은 지도자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사울과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임금으로 뽑힌 '솔로몬'이 제사를 드리러 기드온에 갔을 때,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3,5)
솔로몬이 대답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7.9)
솔로몬의 이 청원은 하느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1열왕 3,10-13 참조)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1열왕 3,12-13)
예수님을 닮은 지도자. 솔로몬의 지혜를 청하는 지도자. 백성을 갈라치기하지 말고 하나로 모으는 지도자. 지금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지도자.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마음이 향해 있는 지도자.
이런 지도자가 이 땅에 많아졌으면 좋겠고,
이런 지도자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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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ciWoVnm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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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발걸음을 멈추는
내려앉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딴곳에서
지쳐있는 우리의
울음소리를 또렷이
듣게됩니다.
때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쉬어 주어야
편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안과 바깥이
만나는 시간이
가벼워지는
쉼의 시간입니다.
쉬어야 심각하게
여긴 것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새들도 날개를
쉬어 주어야
더 날 수 있습니다.
쉬어 주는 것은
내어 주는 기쁨입니다.
여기 저기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휴식또한
겸손한 봉헌입니다.
외딴곳의 쉼또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명한
방식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은
오히려 주님 안에
가라앉을 때
더욱 빛나게 되는
쉼의 역설입니다.
휴식은 다시
우리가
온전하여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처럼
외딴곳에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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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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