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의사가 보호자를 병실 밖으로 불러내 보내드릴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 저는 아버지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음의 길로 내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뭐 하러 이깟 농사를 지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떨렸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당장 내놓으라고 성화셨습니다. 얼마 후에 아버지를 다시 뵈었습니다. 평소 때처럼 으레 잔소리를 퍼붓는 익숙한 당신의 모습을 비추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창문을 연달아 두드리는 빗소리에 아 버지의 잔상은 밀어젖히는 어둠과 슬몃슬몃 다가오는 빛의 징검다리 사이에서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물렀습니다.
시드러운 삶,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요량으로 탁주 서너 잔을 인생의 낙으로 삼으셨던 분. 살아생전 아버지는 요새 꾸준히 약을 먹어도 왜 그리 속이 부대 끼는지 모르겠다며 이것만 괜찮아지면 내 다시는 술 한 잔도 안 마실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습니다.
쉬이 몸이 낫지 않자 급기야 가까운 의료원에서 간 CT를 찍고 몇 가지 피검사를 했을 때쯤입니다. 용인에 사는 오빠가 시골 부모 님을 대신해 결과를 듣기 위해 연차를 내고 달려온 후 부터였을 겁니다. 아버지는 뜸하기만 했던 자식들이 빈번하게 집에 드나들고 연거푸 안부전화를 해대니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훔훔합니다.
저와 몇몇 식구들은 아버지에게 정확히 병명을 알려 드려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랐습니다. 하지만 중차대한 일이라 의견은 쉽게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칠순을 넘긴 아버지에게 '간암'이라는 시한부 선고가 치명적이라는 것이었죠. 어떡하든 조금이라도 시간을 붙들어 속도를 늦추고 싶었습니다.
지방 의료원 의사의 말만 믿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느냐, 설령 아버지가 힘드셔도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좀 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습니다. 오빠는 평소 병원을 극도로 혐오하신 분이라 큰 병원에 가서 복잡하게 검사하는 것도 여간해서 쉽지 않을 거라고, 검사 결과상 간암 말기라고 뚜렷이 나와 있고 당뇨가 있어 수술이 어려우며 항암치료마저 연세 드신 분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라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임종을 맞는 것보다 쉬엄 쉬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바깥바람을 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엄마가 적극 동조하는 눈치였습니다. 어쩌면 그마저도 옳은 선택이었기를 바랐습니다. 한평생 흙을 받고 너른 들판을 애틋하게 바라보셨던 당신입니다.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어느 틈에 밭고랑을 파고 있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온갖 동네 허드 렛일을 도맡아 하던 농사꾼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곡괭이질 몇 번에 금 세 숨이 거칠어집니다. 아버지는 다시 방안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오랜만에 친정에 들른 저의 굼뜬 행동에 여느 때처럼 호되게 야단치시는 호방함도 보이셨습니다. 퉁박이 싫지 않았습니다. 저는 상황에 맞지 않게 괜히 투정을 부려봅니다.
한 달여가 지났던가요. 오남매 중에 아직 아이가 없었던 저는 홀로 병간호를 하는 엄마의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을 찾았습니다. 옷 가지를 몇 벌 챙겨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여 만에 군산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찾아 병실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엄마가 먼저 손 인사를 합니다 유난히 수척해진 몸, 푹 꺼진 눈자위에 드리운 그늘 같은 흑 빛 얼굴, 한 푼의 돈이 아쉬워 듬성듬성 빠진 치아는 한없이 낯선 당신입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그러쥐며 잔잔하게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미 혀는 굳어져 입을 달싹거려도 빈약한 소리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빠, 왜 이리 손이 차요. 전에는 굉장히 따뜻했는데..." 저는 눈물을 삭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애먼 입술만 깨물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첫째 큰집 큰어머니, 엄마와 오빠, 저는 아버지 곁에서 포도당주사, 진통제 등 세 개의 링거에 의지해 간간이 신음 소리를 내뱉는 고통스러운 몸짓을 지켜보며 병원을 찾는 동네 이웃분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이름으로 대출을 받은 동네 아주머니가 찾아왔을 때였습니다.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는 안간힘을 써가며 아득바득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씁니다. 아버지의 눈빛은 간절했습니다. 온 힘을 그러모아 가을 추수 때까지 만이라도 돈을 갚아달라고 부탁하시는 듯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알았다고 꼭 그렇게 할 테니 빨리 일어서라고 아버지를 안심시켰었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손과 발을 주물러 드리며 배를 쓰다듬는 것뿐 이었습니다. 저녁식사가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부터 고통을 못 이 겨 아침 죽도 몇 숟갈 못 뜨시고 점심도 거르셨다고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저 녁은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받아 드셨습니다. 북어 국물도 제법 잘 드셔서 더 드시겠냐고 물으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셔서 내심 안심이 되었습니다.
간호사 가 저녁에 먹을 약 한 알을 가져왔습니다. 식사 후에 엄마가 약을 입안에 넣 으니 제대로 삼키기가 어렵나 봅니다. 물을 갖다 대 간신히 약을 삼키는 듯했습니다. 아버지의 위상이나 기개는 뒤로 한 채 고분고분 엄마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습니다.
당신이 점점 조용해집니다. 처연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숨결이 잦아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 아빠가... 아빠가 왜 눈을 뜨고 주무시는 거야? 눈에 초점이 없어." 저는 아버지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음의 길로 내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허나 엄마는 차츰 그것을 조금씩 느꼈다고 합니다. 담당 의사가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어왔을 때, 보호자를 병실 밖으로 불러내 보내드릴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픔은 실로 아득하고 깊었습니다. 암이라는 병마와 더불어 동정 심에 못 이겨 애면글면 모은 종잣돈을 잃은 절망과 상실감, 때아닌 오해와 갈등으로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가 끊겨 응어리진 가슴에 맺힌 한이 더더욱 사무 쳤을 겁니다. 물기가 어립니다. 연신 아버지 눈을 감아드리며 "아빠, 아빠가 그토록 바라시던 자식 낳아 잘 살게요. 걱정 말고 편안히 쉬세요." 눈가에 서린 묵직한 죽음의 무게를 덜어드릴 수 있는 저의 유일한 한 마디였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버지, 항상 추억담으로만 외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남매 쌍둥이들이 어 느덧 중학생이 되었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당신을 향한 발걸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서울시설공단 - 바람이 머무는 동안에 입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