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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지막 말(삼하23:1-7)-2023.12.31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자신의 마지막을 회고하며 고백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인 셈이지요. 다윗은 30세에 왕으로 등극하여 40년을 치리한 후에 7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명으로 말하면 그다지 오래 산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노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백전노장이지요. 그런 다윗이 자기죽음을 내다보며 인생을 회고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내용이 아쉬움이나 회한의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른바 죽음을 염두해 두고 남긴 마지막 말이라기보다는 삶의 가장 화려한 언저리에서 남길만한 어록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아주 멋진 인생을 살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가장 진실합니다. 젊은 날에는 무서운 것도 없이 당당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기 힘들어지는 법이지요. 그래서 대부분 겸손하고 진실해집니다. 다윗은 마지막 말이라는 화법을 인용하여 자신을 평가합니다. 물론 다윗이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기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 기준에서 자기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자도 있습니다. 둘 다 문제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자가 당착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우월주의나 열등감에 빠집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월감이나 열등감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월감은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고, 열등감은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절대 그런 평가는 온전치 못합니다.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평가하시면 좌우로 치우침이 없습니다. 온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평가를 오직 하나님의 시선에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 자기 평가를 맡긴 것이지요. 그는 스스로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왕들과의 기준으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은 역대 왕들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매력을 갖춘 왕이었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이나 공로를 볼 때 어느 왕들 못지않은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윗 왕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다윗이 그런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자기가 이룬 업적이나 공로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한다면 다윗은 오히려 평가절하를 면하기 어려웠을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기사를 보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퇴임직전에 셀프훈장을 수여한답니다.
대한민국 훈장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훈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궁화대훈장입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하여 무궁화대훈장을 서훈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 웃기잖아요? 자기가 물러나기 전에 자기 스스로 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훗날 후세대가 공로를 평가해서 서훈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셀프 훈장을 수여한다는 말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더라구요. 무궁화대훈장을 한 개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만도 무려 7천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부부동반으로 받는데 1억4천이 든답니다. 참으로 씁쓸한 기사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자기를 평가해서 셀프훈장을 수여하다니요!!!
그런데 그런 유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니까 평가하기가 쑥스럽습니다. 미안하지만 목사들도 교회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경우가 상당하거든요. 어떤 교회 목사는 성도님들의 의중과 상관없이 자기를 대접해달라고 무리수를 둡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해달라고 셀프논란을 벌이는 것이지요. 솔직히 추태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아서 대접을 받는 것은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여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거든요.
다윗은 자기를 돌아보되 세상 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자기를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이셨던 것이지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고 살았던 은혜를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당연히 자기 자신을 평가하되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다윗(1-2절)
그는 자신의 뿌리를 소개합니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저 평범한 신분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리 명예스러운 호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볼품없고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일 뿐이지요. 그래서 이새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정치적으로 다윗이 궁지에 몰릴 때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던 호칭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비난할 때 사용했습니다(삼상20:30). 그리고 악독한 부자 나발이 다윗을 비난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정세가 어지러울 때 세바가 다윗을 대항하여 난을 일으킬 때도 사용했습니다(삼하20:1).
때문에 다윗이 이새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만큼 높여주셨다는 것을 돋보이기 위하여 사용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부각시켜 하나님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하는 기법인 셈이지요. 사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지요. 이른바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강점만 드러내지만 겸손한 사람은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높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높이 올리운 자라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높은 곳으로 올려주셨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높이 올려주신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본문 1절에 나오는 단어는 모두 다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올려주셨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주셨으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 세워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유대 가정에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새의 가문을 택하사 다윗이라는 볼품없는 막내둥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새의 가문은 이스라엘 사회에 주류층이 아닙니다. 성골도 아니요, 진골도 아닌 것이지요. 베들레헴이라는 촌구석에서 이름 없는 가문이요, 가정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명문가문을 선택하셨다면 이새의 가문은 축에도 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잘나고 똑똑한 인물을 선택하셨다면 다윗은 이름조차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린도전서1장27절과2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비밀을 모른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자신을 결코 자랑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당당하게 자신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구속사의 핵심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야곱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태동시킨 인물이지요. 그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야곱이 일찍이 예언한 것처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 다윗에게서 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요, 과정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는 일반적인 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칭 목소리가 좋고 박자감각이나 리듬감이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 찬양을 잘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행위입니다. 찬양을 잘하는 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가대에 선다거나 목소리가 좋아 특송할 수준의 노래를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칭찬하고 높여드리는 일체의 행위가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찬양을 잘하는 자입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영감 받은 찬송시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별한 은사도 구비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는 악기를 연주하는데도 탁월한 은사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목동시절 음악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악신 들린 사울을 위해 수금을 연주함으로 평안을 찾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윗이 노래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평가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2절). 하나님의 신이 자신을 빙자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말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다윗의 말에나 일에나 완전하고 완벽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삶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종의 자기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이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살았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까지도 그 신앙이 축소되거나 약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의 근력이 쇠할 때 영적능력도 쇠하여 갑니다. 그래서 젊은날 가졌던 믿음이 오히려 퇴색되고 시들어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의 신앙은 나이가 들어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윗이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시점이 인생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그 옛날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당시 갈렙의 나이 85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먼저 요청합니다. 그의 고백은 지금도 믿는 자들에게 큰 울림이 되는 것이지요.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오니”(수14:11). 헤브론의 척박한 산지를 자기에게 주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산지를 말입니다.
그만큼 주안에서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성령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마지막을 회고하는 그 시간 다윗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다윗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믿음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쇠함이 영적 쇠함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인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육체는 쇠하여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육체는 쇠하여 갈지라도 영적으로는 더 성숙해갑니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입니다. 익어간다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익어감은 성숙함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을 참고 바라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압니다. 그것이 믿는 자의 품격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신앙을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2절). 하나님의 신이 자신을 빙자하여 말씀하심으로 그 말씀이 항상 자기 혀에 있다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말씀이 다윗의 고백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했다는 고백이거든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고백이지요. 이것이 바로 다윗이 신적권위를 갖고 살았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2)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다윗(3-7절)
3절 말씀을 보십시다. 노래 잘하는 다윗이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노래하듯이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다윗을 소개한 것을 다윗이 인용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동안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봉직했던 기원이 하나님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정국가의 초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친히 다윗을 그렇게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신정주의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다윗을 향한 평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묘사해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을 통해서 메시아를 보게 하시는 것이지요. 다윗 시대에 다윗은 메시아의 그림자 역할을 충분히 해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과분한 평가를 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3절)라고 말입니다. 다윗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 셈이지요. 솔직히 다윗도 왕권을 유지하면서 흠결이 너무나 많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그렇게 극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고대하시는 신정주의 국가 왕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공의로워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외심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교적 다윗이 그런 왕이었던 것이지요. 나름대로 다윗은 공의와 경외심을 통치철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백성을 공의롭게 다스렸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경외하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보시기에도 그런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대 유다 왕을 평가하실 때 다윗 왕을 기준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였던 것이지요. 다윗은 그런 역할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이 비유들은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주어질 신세계에 관한 묘사이지요. 메시아의 시대에는 고통과 어둠, 죄악과 부패가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치는 시대가 열릴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묘사인 것이지요. 그런데 완전치는 못하지만 다윗이 살아생전 받은 복들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자기의 삶 가운데 이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이요, 자기는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그런 고백을 한다면 다윗은 교만할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통해 의로우신 통치자 메시아가 나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5절). 만일 다윗이 자기 개인적으로 본문5절을 고백한다면 다윗은 감히 이런 표현을 이렇게 당당하게 사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7장18절의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은 자신의 비천함과 초라함을 스스로 잘 아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본문 5절은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침없이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자기 가문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자기 가문을 통해서 세우실 영원한 언약을 믿었던 것입니다. 비록 초라하고 볼품없을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시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다윗 집에 약속하신 구원과 장차 이루실 모든 소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던 것이지요.
다윗은 본문 4절을 통해서 이루어질 복된 언약도 인정하지만, 6절을 통해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자기 시대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정주의 국가의 왕으로서 자기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통치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큰 기능을 나타내주는 것이지요. 복된 영광을 보여줌(4절)과 동시에 냉혹한 심판이 있음(6-7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음 일보직전까지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았습니다.
(3) 내가 남길 마지막 말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소회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그래서 1절 서두를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시작합니다. 다윗은 아마 머잖은 시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옴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왕권을 이양하고, 장차 건축할 성전의 재물을 다 마련해 놓은 상태였지요. 그리고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마지막 말을 남긴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불효자도 유언은 지키려고 하지요. 마지막 말은 자기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이요, 자기가 다 이루지 못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말에는 아쉬움이 들어 있고, 간절함이 들어 있으며, 소원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말에는 농담이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고 간절함이 묻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 살았던 자기 인생의 흔적과 같은 말입니다. 비록 그 말이 특정한 사람이나 불특정한 사람을 향한 말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유언장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은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을 통해 자기 믿음을 점검해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줄 믿습니다. 자기를 평가하는 차원에서 남긴 다윗의 마지막 말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믿음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하는 복된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마지막 남긴 말에 자기 인생의 업적이나 공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후회 없이 살았다거나, 혹은 아쉬웠다거나 그런 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마지막 남긴 말은 보통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남긴 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반추해보고, 믿음의 후손들에게 나와 같은 인생을 살라고 당부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주문한 것처럼 말입니다. 절대 그것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다윗의 마지막 말을 통해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인간적으로 완전하여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모습을 본받으라는 말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넘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짐은 죄가 아닙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윗도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는 법을 잊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합한 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윗의 그런 모습을 충분히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남긴 말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마시고 내 인생의 좌표로 삼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다윗처럼 마지막 남길 말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굳이 인생의 마지막 남길 말이 아닐지라도 금년 한해를 보내면서 남길 마지막 말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남길 마지막 말은 어떤 것일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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