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솜씨
경상남도 거제도에 있는 外島에 가보셨습니까?
거제도에는 여러 섬 중에 內島와 外島가 있는데, 그중에서 外島는 거제에서 4km쯤 떨어져 있는 약 5만 평 정도 되는 섬입니다. (우리 고등학교 여자 동창의 언니와 형부가 수십 년 전에 섬 대부분을 사서 관광농원으로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거제나 통영에 있는 여러 항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한려해상공원을 구경하며 가다가 외도에 도착하면 입장권을 사서 섬을 구경합니다. 예전에 갔을 때는 뱃삯이 3천 원, 입장권이 3천 원이었는데 지금은 뱃삯이 왕복 2만 원, 입장권이 1만 원이라고 합니다.
외도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섬을 정말 아름답게 꾸며놓았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솜씨로는 더 이상 아름답게 할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예전에 목사님들과 남해 편백 휴양림으로 2박 3일 수련회를 갔다가 하루는 외도에 갔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놓았느냐고 모두가 감탄했습니다.
외도에 갔다 온 지 두어 달 후에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 끝난 후에 모두 삼성동 무역센터 수족관에 갔었습니다.
규모도 별로 크지 않은 수족관에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있고, 그중에 엄지손가락만 한 열대어들이 있는데, 몸통이 반은 노란색, 반은 빨간색인 것도 있고, 반은 보라색, 반은 노란색인 것도 있고, 몸통 가운데에 까만 띠가 있는 것도 있고.
외도의 규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 열대어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조만한 물고기를 저렇게 예쁘게 만드셨을까?
전에 오키나와에 있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츄라우미 수족관에 갔을 때도, 길이가 8m에서 15m까지 된다는 고래상어, 두 날개폭이 5m가 넘는다는 가오리를 보면서, 또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운 보라색 열대어와 각기 제 모습과 색깔을 뽐내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솜씨를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으로 따지자면 外島가 그 물고기들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외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두 부부가 사람을 사서 돌과 자재들을 육지에서 옮겨와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노고가 엄청났었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5만 평이나 되는 외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열대어와 상어와 가오리를 보고는 하나님의 기묘하신 솜씨를 느꼈는데 말입니다. (외도의 아름다움과 만든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닌 줄은 짐작하시겠죠?)
2. 선택의 기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난센스 퀴즈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수영할 줄 모르는 배우자와 자식이 물에 빠졌는데,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다면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어린 아기한테 아빠와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 것보다 더 난처한 질문입니다. 지혜로운 아기는 아빠 엄마 다 좋다고 대답하고 곤경을 면할 수도 있겠지만, 물에 빠진 배우자와 자식은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하니까 둘 다 구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배우자를 구하겠다고 하면 자식이 서운해할 테고, 자식을 구하겠다고 하면 배우자가 화를 낼지도 모르고,
당신이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난처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에 그런 일이 얼마나 일어날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든지 아마 한 번도 안 일어날 일일 겁니다. 일생에 한 번도 안 일어날 일을 왜 예상을 하며, 왜 그 대답을 찾느라고 고민을 합니까? 이런 선택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고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생에 한 번도 안 일어날 일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수시로 일어나면서, 또 그만큼 아주 중요한 선택들이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내 욕망을 좇을 것이냐 하나님의 욕망을 좇을 것이냐 하는 선택입니다.
내 욕심은 내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욕망이라는 말은 생소하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뜻을 가지고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그 바라시는 것이 그냥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식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음은 그냥 심심풀이로 한 번 해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우리 마음에 소원으로 삼아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 안에 소원으로 넣어두고 그대로 행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욕망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내 뜻에 따라 내 욕망을 이룰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욕망을 이룰 것인가?
이 선택은 물에 빠진 배우자와 자식 중에서 먼저 건질 사람을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선택인데도 우리는 오히려 이 선택이 더 어려운 것으로 치부하며 삽니다. 물에 빠진 배우자나 자식은 백 보를 양보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내 뜻이냐 하나님의 뜻이냐의 선택은 우리의 신앙이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영적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며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선택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믿음에 따라 결정되며, 또 그 선택에 따라 우리들의 믿음이 결정됩니다.
[누가복음 18장 7, 8절]을 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달라고 간청을 하면 결국 그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예수님은 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을까?
예수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그런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응답받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욕망대로 선택하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욕심을 앞세웁니다. 하나님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분이시지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로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내 기도를 이루어주는 도구로 여기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창조주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속으로, 영혼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의 창조주 –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들의 주인이시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심으로 온몸과 영혼을 다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고 믿고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이 우리들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과 욕심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들이 가게주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치킨집 주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동네 가게나 치킨집 주인은 우리가 주인이라고 불러도 그들은 자기 가게의 주인이지 우리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가게의 주인이라는 뜻이지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에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동네 가게주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게주인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이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분의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입으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결심의 고백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려는 모습 –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믿음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는 믿음은 쉽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고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