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 전설
창원 1
부처가 된 두 도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설화의 보물창고입니다. 이 책 ‘탑상(塔像)’편에 창원시 북면 월촌리 백월산(白月山)에 서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백월산 꼭대기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드러나 있습니다. 근처 마을에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라는 두 청년이 살았습니다. 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머리 깎은 중이 되어 각각 산의 북쪽과 남쪽에 암자를 짓고 도를 닦았습니다.
어느 날 밤 박박이 수행하는 북쪽 암자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찾아와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지만, 박박은 청정 도량에 속세 여인을 재워줄 수 없다며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자 아가씨는 어두운 밤 산을 넘어갔습니다. 그곳 산기슭엔 부득이 수행 중인 암자가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박박한테와 마찬가지로 하룻밤 묶고 가길 원해, 부득은 방 한쪽 구석에 아가씨를 재워주었습니다. 아가씨는 밤새 임부로 변신하여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득은 난감했지만 정성을 다해 출산을 도왔습니다.
부득이 물을 데워 여인의 몸을 씻겨주니, 여인은 물통 안에 부득을 들어오게 했습니다. 부득은 어쩔 수 없이 여인과 목욕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자 부득은 금빛 미륵부처가 되어 갑자기 나타난 연꽃좌대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자신은 관음보살이 잠시 변하여 나타난 몸이라면서 하늘 높이 훨훨 올라갔습니다.
이튿날 날이 새자 박박은 산을 넘어 부득한테 가보았습니다. 박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겼을 부득을 골려주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득이 금빛 찬란한 미륵부처로 변신 중이라 놀라웠습니다. 부득으로부터 그간 사정을 듣고 박박도 남은 목욕물에 자신의 몸을 씻으니, 박박은 무량수부처가 되었습니다.
산 아래 살던 사는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투어 몰려와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이다!”며 찬양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성인이 된 두 도반은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설명해주고는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도반(道伴) : 함께 도를 닦는 벗
창원 2
곰이 옮겨 놓은 통나무
불모산(佛母山) 서북쪽 골짜기 창원시 천성동에 성인이 머문다는 절이란 이름을 가진 성주사(聖住 寺)가 있습니다. 성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에 딸린 절입니다. 최근 찾아낸 동계스님이 남긴(1746년) ‘성주사사적문(聖住寺寺跡文)’에 따르면 신라 42대 흥덕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신라 적부터 우리나라 남쪽 해안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습니다. 왜구의 노략질에 고민이 되던 흥덕왕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이 나라 서쪽 지리산에 무염국사가 있으니, 그에게 왜구 침탈을 막도록 했습니다. 무염국사가 신통력을 발휘해 왜구를 물리치자 흥덕왕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은 창원 불모산에 성주사를 지어 스님한테 보답했다고 합니다.
불모산은 부처님의 어머니 산이란 뜻으로, 옛날 가야시대 인도 아유타에서 허황옥이 오라버니 장유화상 일행과 함께 진해 용원 망산도에 도착했습니다. 허황옥은 수로왕비가 되고 장유화상은 이 산으로 들어가 수행 정진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유입된 불교가 남방에서 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불모산입니다.
성주사는 한때 웅신사(熊神寺)라고 불렸답니다. 창원 토박이 사람들은 요새도 이 절을 ‘곰절’이라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선조 25년) 이 절은 불 타 버렸습니다. 이후 왜구가 물러가고 평화가 왔습니다. 1643년(선조 37년) 진경스님이 성주사가 불 타 없어진 자리에 절을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스님이 묵은 절터에다 절을 지을 목재를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새 여러 곰들이 나서서 절터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통나무를 옮겨 놓았답니다. 스님은 곰이 통나무를 옮겨 놓은 자리가 부처님 뜻이라 받아들이고 현재 절터에다 절을 새로 지었습니다. 불모산 계곡에는 지금 절터보다 500미터 위에 묵은 절터 돌층계가 남아 있습니다.
마산 1
한가위 만날 고개
마산합포구 월영동 경남대학 뒤편에서 감철골로 넘나드는 고개가 있습니다. 무학산 산세가 남쪽으로 뻗은 작은 봉우리가 대곡산입니다. 대곡산에서 밤밭고개로 이어진 능선에 있는 잘록한 고개가 만날 고개입니다.
합포 갯가 양반이지만 가세가 기운 이씨(李氏) 가문 편모슬하 삼남매가 살았습니다.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오던 홀어미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고개 너머 감천골에 살림이 넉넉한 윤(尹進士)가 살았습니다. 윤진사는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반신불수에 벙어리였습니다. 윤진사 아들은 나이가 많아도 장가를 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 마을 저 마을로 행상을 다니던 아낙이 있었습니다. 이 아낙은 두 집안 사정을 잘 아는지라 중매를 서게 되었습니다. 천석꾼 윤진사는 이씨 집안에 상당한 논밭을 보내주고 첫딸을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몸이 아픈 어머니와 어린 두 남매를 둔 첫딸은 다가올 시련을 각오하고 윤진사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남편은 남자다운 형세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윤진사 내외는 며느리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손자를 낳지 못한다는 구박도 심했습니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와 남편을 모셨습니다. 며느리는 시집 간 뒤 삼 년 만에 어렵게 친정나들이를 하였습니다. 시부모의 반대 속에 남편은 고개까지 함께 올라갔습니다.
며느리는 남편을 고개에 두고 친정집으로 달려 내려가 어머니와 어린 남매를 만났습니다. 시집갈 때 받은 논밭으로 그간 집안 형편이 좋아졌고 어머니 병환도 나았습니다. 며느리는 시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라 친정식구와 작별하고 고개로 오르니, 남편은 아내를 기다리다 못남을 스스로 탓한 유서를 남겨놓고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은 아내 가슴에 큰 한으로 남았습니다. 여자는 출가외인지라 며느리는 윤씨 집안에서 정절을 지켰습니다. 그러길 몇 해가 지난 팔월 열이렛날 친정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고개에 올랐습니다. 그때 마침 친정어머니와 두 동생도 고개로 올라와 있어, 가족은 얼싸 안고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마산 2
베 짜는 어미와 삼형제 바위
창원 서쪽 진동 진전 진북을 일러 삼진지역이라 이릅니다. 그곳 진북면 괴정마을 앞에 베틀산이 있습니다. 베틀산은 여항산 산세가 서북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선입니다. 금산마을과 부산마을 삼각 경계 지점입니다. 베틀산 정상에는 약 스무 평 가량 되는 평평한 바위가 있는 데 이 바위를 베틀산이라 부릅니다. 베틀산 정상의 바위가 베틀바위입니다.
베틀바위라 부르게 된 까닭은 괴정마을에서 바라보는 바위의 모습이 꼭 한 대의 베틀이 놓여 있는 모습과 비슷해서입니다. 까마득한 옛적 한 아낙이 이 바위에서 사시장철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는 우리네 의생활에서 소중한 옷감입니다. 여름에는 삼으로 옷감을 짠 삼베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목화로 짠 옷감인 무명옷을 입었습니다.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노아의 홍수 같이 천지개벽이 일어나 이 부근이 온통 바닷물에 잠긴 적 있었다고 합니다. 점점 불어난 바닷물은 마을을 덮고 베틀산 정상 부근까지 차오르게 되었답니다. 그때 마침 정상의 베틀바위에는 한 아낙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답니다. 정상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웬일인지 더 이상 불어나지 않고 베틀바위 근처에서 찰랑거리다가 차자 빠져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바위에는 그때 흔적으로 조개껍질이 붙은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 이 바위에서 마주 건너다보이는 산이 광려산입니다. 광려산 능선에 세 개 바위봉우리가 나란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바위봉우리를 가리켜 삼형제 바위라고 부릅니다. 아랫마을에서 바라본 이 바위는 마치 삼형제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건너편 베틀바위에서 베를 짜는 어미를 삼형제가 나란히 앉아 종일토록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삼형제는 자라 나중에 힘이 센 장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틀산은 예부터 가뭄이 심하면 베틀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합니다. 가뭄이 몹시 심하면 고을 현감은 몸을 깨끗이 씻고 베틀바위에 올라 비를 내려주십사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신령스럽게도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진해 1
왕이 나고 천자가 난 터
진해는 바닷가에 장복산, 불모산, 팔판산, 굴암산, 보배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친 고장입니다. 장복산과 불모산이 맞닿은 지점에서 한 줄기 산세가 남쪽으로 뻗어 시루봉을 이루면서 바다로 향하다가 멈춘 혈이 천자봉(天子峯)입니다. 명당으로 알려진 이곳은 풍수장이, 도승, 지리학박사 등이 나오는 이야기 여섯 갈래 가운데 하나가 이렇습니다.
옛날 함경도 땅에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명당에다 조상을 무덤을 만들려는 집념이 강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하인을 데리고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 몇 년이나 걸린 길을 나섰습니다. 자기 조상의 묘(墓)자리를 찾아 팔도강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함경도를 떠나 강원도를 거쳤습니다. 경상도 일대를 헤매다 웅천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웅천(熊川)은 ‘곰내’라고도 합니다.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천자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던 이씨의 눈은 갑자기 빛이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가 찾아 헤매던 명당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 바위 밑에는 구멍이 두 개 있었습니다. 첫째 구멍 묘를 쓰면 자손 가운에 왕이 나오고, 둘째 구멍에 묘를 쓰면 천자가 나올 천하 명당이었으니 이씨가 흥분할 만도 했습니다. 이씨는 함께 데리고 다닌 하인한테 즉시 선대의 묘를 둘째 구멍에다 옮겨 묻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분부를 받은 하인은 슬그머니 딴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인이 생각해도 주인이 짚어준 둘째 구멍은 명당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하인은 이씨 선대 묘를 첫째 구멍에 묻고, 둘째 구멍에다 자신의 선대 뼈를 묻어 놓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이 흘러 두 집안에 보통이 넘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이씨 가문에는 이성계(李成桂)라는 인물이 태어나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되었습니다. 하인이었던 주씨 집안에서도 한 인물이 태어났느니, 그가 바로 명나라 천자가 된 주원장(朱元障)이라고 합니다.
진해 2
갈바위 - 행암(行岩)
진해 갯가에 낚싯배가 드나드는 행암(行岩) 포구가 있습니다. 이곳은 소가 된 중과 함께 사라진 바위에 서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이곳 지명은 행암동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사백여 년 전입니다. 진해 행암에 심성 곱고 부지전한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 아내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정씨 부부는 밭을 일구어 수수를 심어 거두어 식량으로 삼았습니다. 산비탈을 개간해 밭으로 만드는 일은 정씨 부부에게 몹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바위 하나는 치우지 못하고 밭 가운데 두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마을을 지나다가 정씨 밭 바위 앉아 쉬게 되었습니다. 수숫대는 바위에 닿은 만큼 높이 자랐습니다. 마침 스님은 심심한지라 장난삼아 손에 닿는 수수열매를 훑어버렸습니다. 젊은 스님의 철없는 행동에 애써 지은 정씨 수수밭은 많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젊은 스님이 절간으로 돌아가자 노스님이 불러 하루를 어찌 보냈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 스님은 바위에 앉아 수수열매를 훑은 일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은 젊은 스님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식량에 손실을 입혔으니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젊은 스님보고 소가 되어 삼 년 동안 일을 해준 뒤 다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정씨 집 문간에 황소 한 마리가 들어서더니 나가질 않았습니다. 정씨는 소 임자를 찾아보았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씨는 그 소로 밭을 가는데 부렸습니다. 손으로만 하던 일을 소의 힘을 빌리니 농사를 수월하게 지었습니다. 그러길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일을 부려 먹던 소가 간 곳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밭 가운데 있던 바위도 함께 없어졌습니다.
훗날 정씨가 수소문해보니 바위는 십 리나 떨어진 죽곡마을에 옮겨져 있었답니다. 그 바위를 갈바위- 행암(行岩)이라 부릅니다. 정씨가 수수를 심었던 골짜기는 수수밭골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