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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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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풍양조씨 의암고택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212 15.02.05 1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의암고택(依巖古宅)
소 재 지 :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41-1(운곡)
(원소재지 :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41-1)
건 축 주 :  연안이씨(延安李氏), 조식(趙?)
건축시기 :  1800년경
중건시기 :  1910년
소 유 자 :  조준희(趙浚熙)
문 화 재 :  문화재자료 제177호, 1986.12.11. 지정


건축 이야기
의암고택은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 141-1번지에 있는 검간종파(黔澗宗派)의 극암(克庵) 조식(趙?)의 종택이다.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안채, 사랑채, 도장채, 뒤주채, 사당, 대문채, 장독대 등 약 200여평의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정침(안채)은 모임당(慕任堂) 연안이씨(延安李氏)와 장자 식(?)이 1800년경 건축하였다.

현재 정침 이외의 건물들은 만당(晩堂) 태연(泰衍)이 1910년경 당시의 낡은 사랑채와 몇몇 건물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개축한 건물들이다.

현 종손 준희(浚熙)의 고조부인 의암(依巖) 범구(範九)는 당대에 널리 알려진 유학자이다. 그가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의암고택’이라 불려졌다. 사랑채만을 별도로 일우당(逸憂堂)으로 부른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7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특징
마을 중간에 공동우물을 돌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골목 끝에 의암고택이 자리하고, 대문 앞에 탕건모양의 큰 바위가 있어 탕건석 혹은 의암이라 부른다. 의암고택의 당호는 후대인이 조범구선생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건물들의 전체 배치와 각 건물의 구조를 통해 3대로 구성된 대가족과 집사 및 하인들이 주거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주거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건축 구성
대문칸과 평행하여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배치되었고, 전면 좌측에 설치된 일각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곡간채와 ㅡ 자형의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안채 왼쪽 2m 지점에 뒤주가 있으며, 사랑채 뒤편에 가묘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5칸, 좌측2칸인 팔작지붕이며, 사랑채는 ㄴ형 정면 7칸, 측면 6칸인 팔작지붕이며, 도장채는 ㄴ형 정면 6칸, 측면 3칸인 박공지붕이고, 대문채는 정면5칸, 측면1칸인 우진각기와지붕이며, 뒤주는 단간 우진각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현판
의암고택(依巖古宅)
의암(依巖)은 조범구(趙範九, 1834~1896)의 호이다. ‘의암고택’이라는 당호는 후대인이 조범구 선생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현판 글씨는 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 1863~1941)의 작품이다.
일우당(逸憂堂)
현판 글씨는 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의 작품이다.
일우당기(逸憂堂記)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 1887~1934)께서 사랑채의 당호를 ‘일우당’으로 정하고 일우당기를 지었다. 일우당이라는 당호에는 “항상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항상 학문과 도덕이 없음을 근심하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국은(?隱)
국은(?隱)은 조동계(趙東啓, 1812~1881)의 호이다.
만간당(晩澗堂)
중문채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현판의 유래를 알 수 없다. 1910년 사랑채를 개축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건물에 달려있던 현판으로 추정된다.

 

문중 이야기
- 풍양 조씨, 조선 후기 안동김씨와 쌍벽이룬 세도가
풍양조씨의 발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풍양현(?壤縣)이었기 때문에 풍양조씨로 불린다. 시조 조맹(趙孟)은 70세 때 왕건(王建)의 눈에 띄어 남쪽 정벌에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는 등 여러 차례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후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풍양조씨는 크게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구분되는데, 영남지역에 세거한 풍양조씨들은 호군공파에 속한다. 호군공 사충(思忠)이 고려 공민왕 당시의 신돈의 횡포를 피해 상주지역으로 내려왔는데, 조선초기에는 한양과 상주 양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주로 한양지역의 조선 개국공신인 훈구파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높은 벼슬을 한 분이 많았다.

운평리는 운곡(갈가실)마을, 신평마을, 금천마을 셋으로 구성되어있다. 운평리의 운곡마을에는 호군공의 6대손인 직장(直長) 조희(趙禧)께서 1565년 처음으로 입향하였다. 경상도에 있는 풍양조씨의 대표적인 세거지가 상주시 낙동면의 승곡리와 운평리인데, 호군공의 8대손이며 직장공의 손자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후손들이다. 검간공의 후손들은 종파(宗派), 제이파(第二派), 포두파(浦頭派), 어헌파(漁軒派)로 나뉘며, 상주지역에 세거하면서, 상주지역의 유학을 주도하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1800년경부터 운곡마을을 계속 지키고 살아온 풍양조씨들은 검간공 종파이며 검간공의 8대손인 극암(克庵) 조식(趙?)의 자손들이 대부분이다. 극암공의 자손들은 조선 후기까지 거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영남지역의 유림을 대표할만한 인물들이 많았고, 상당한 부를 유지하였으며, 영남의 타 문중들의 저명한 유림인사들과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하고 현실의 시국문제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1900년경부터 1970년대까지의 기간에는 신교육을 위한 여러 교육기관들을 설립하신 분들이 많았다. 특히 의암고택을 크게 증축하신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은 일제치하에서 운창조합(雲昌組合)을 세워서 농민들의 자활운동을 하였고, 신교육을 위한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운평리 운곡마을을 고향으로 하는 풍양조씨들은 겨우 면복(免服)한 촌수임에도 2009년 현재 생존자가 9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많다. 60년대 이후 도시화에 따라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거주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을 찾고 있으며, 자긍심을 갖고 학계, 의료계, 약학계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풍양조씨 문중은 후손들에 대한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국의 중고생,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주 낙동면 승곡리의 고택 양진당에서 매년 여름 개최하는 ‘풍양조씨 뿌리교육’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0년 이상 이어져온 이 뿌리교육 행사를 통해 가문의 전통과 자긍심이 제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들도 양성되고 있다.

 

관련인물
- 모임당(慕任堂) 연안이씨(延安李氏)
1749~1826. 군위(軍威) 형연(衡然, 1750~1783)의 부인이다. 34세에 부군이 별세하고 매우 가난하였으나 온갖 고초를 이겨내면서 가세를 크게 일구었으며, 장자인 식과 더불어 1800년경 의암고택의 정침을 지었다.
- 극암(克庵) 조식(趙?)
1774~1837. 형연(衡然)의 맏아들이다. 어릴 때 엄부를 여의고, 어머니의 지체를 극진이 봉양하였으며 병환에는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드렸다. 장례에는 지극히 슬퍼하며 곡읍하니 인근 마을 모두가 감동하였다. 묘지를 구하는데 혹 밤에 다니게 되면 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밝히고 호위를 하니 이 모두 효성의 감천으로 생한 기적이라 하여 향중의 사림에서 정표를 청하는 상장을 여러 번 내었다. 문헌공(文憲公)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가 묘갈명을 지어 찬미하였다.
- 의암(依巖) 조범구(趙範九)
1834~1896. 극암(克庵) 식(?)의 손자이고, 국은(國隱) 동계(東啓)의 장자이다. 1866년의 병인양요 때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穆)과 더불어 상주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1875년 회시(會試)에 나아갔다가 선비들의 풍습이 매우 피폐함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1894년 동학의 소란시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병환중이라 사양하고 장자인 남극(南極)을 소모영(召募營)에 참여시켰다. 재상이 서찰을 보내 여러차례 벼슬길에 오르길 권유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 전원(田園) 류도헌(柳道獻, 1835~1909)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여씨향약(呂氏鄕約)도 강(講)하고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널리 펴는 등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 학풍을 진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극암공 자손의 의건소(依建所)를 조직하여 경모재(敬慕齋)를 짓고, 화락재(和樂齋)를 형제들과 더불어 지었고, 청간정(聽澗亭)을 보수하였다. 행장이 남아있으며, 의암고택의 명칭은 그의 호에서 유래한다.
- 운초(雲樵) 조남극(趙南極)
1855~1906. 의암(依巖) 범구(範九)의 장자이다. 젊은 시기에 부친인 의암(依巖)공과 장인인 농암(聾巖) 이상석(李相奭, 1835~1921)의 가르침으로 학문적 성취를 얻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사림의 많은 분들이 따랐으며, 어려운 처지의 농민들과 나병 환자들을 구휼하는데 힘써 평민들로 부터도 존경받았다. 어수선한 시국으로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1894년 상주지역의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소모영의 장재도감(掌財都監)을 맡았다.
-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
1877~1934. 운초(雲樵) 남극(南極)의 장자이다. 운창조합(雲昌組合)을 세워서 농민들의 자활운동을 하였고, 신교육을 위한 조명강습소(朝明講習所)를 설립하여 완도(莞島) 출신의 소남(小南) 김영현(金榮炫), 낙재(樂齋) 조태연(趙台衍), 백담(白潭) 조상연(趙相衍) 등 우국지사들을 교사로 채용하였으며, 운곡 저택인 의암고택을 크게 증축하였다.

상주 > 남동권 > 낙동면 운평리
- 낙동면은 상주시의 동단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의성군, 구미시, 상주시 중동면에 접하고, 서쪽은 국사봉을 경계로 상주시 동성동, 신흥동과 인접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외동면과 장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동면으로 개칭했다.
운평리는 운곡(雲谷), 신평(新坪) 및 금천(琴川) 3개 마을로 구성된다. 운곡마을은 아침에 마을의 양 옆 계울 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하다하여 운곡(雲谷)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신평마을은 일제시대 때 금광제련소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신평(新坪)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금천마을은 마을 앞의 장천 냇물의 물소리가 거문고 소리 같다고 하여 금천(琴川)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혹은 마을 앞의 장천에 사금(砂金)이 많았다하여 금천(金川)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운평리의 3개 마을중의 하나인 운곡마을은 풍양조씨들의 전통적인 세거지로서 일명 “갈가실”이라고도 한다. 취지재(吹?齋) 조위경(趙緯經)이 지은 『운곡세장기(雲谷世莊記)』에 의하면 조희(趙禧)가 1565년 雲谷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백원산(百元山) 정상의 국사봉(國士峰)으로부터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 지형을 삼태기혈이라 하여 예로부터 이 마을은 부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풍수설이 전해온다.

또한 운곡세장기에서 “구름과 개울물이 맑고 동천은 넓고 평평해서 뜻 높은 군자가 터를 잡아 서식할만한 곳이다”라 하였으며 운곡의 명칭이 주자가 살던 곳의 이름과 부합한다.”고 하였다.

“갈가실”의 명칭의 유래는 불확실하다. “갈가실”의 명칭이 “칡(葛)이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실제 주변 산에 칡나무가 많으며 청간정(聽澗亭)의 기둥 하나가 수백 년 된 칡뿌리(葛根)라는 설이 전해져 온다.

또 다른 설로는 “갈가실”의 명칭이 영남지역의 방언인 “갈가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갈가지”는 “범의 새끼”라는 뜻인데, 산세가 높아 범(호랑이)의 출현이 자주 있었다는 구전의 내용과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가 지은 조식의 묘갈명에서 “호랑이가 모임당(慕任堂) 연안이씨(延安李氏)의 묘터를 잡아주었다”고 기록한 것에서 추정하기도 한다.

1900년경까지 이 마을은 조씨 가구가 100여 호나 되는 동족마을이었으나 현재는 25호중 10여 가구 만 남아있다. 이 운곡마을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예법과 규범이 정연한 양반촌이었다. 만석에 가까운 도조를 받아들이는 마을이라 인심이 순후하였고 풍요로웠으며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하는 예절은 널리 알려져 운곡범절(雲谷凡節)의 명성이 높았다.

의암고택과 청간정 이외에도 유신당(維新堂), 양교당(養敎堂), 경신당(敬愼堂) 등의 古家들과 송동재(松洞齋), 경모재(敬慕齋), 만송재(晩松齋) 등의 재실들이 있다.

수령 500년 이상의 고목들(은행나무와 팽나무), 공동 우물 등이 남아있으며, 마을 입구에 성황당을 구성하는 석단과 서낭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마을의 뒷골 계곡에는 천연기념물 69호로 지정된 일명 거북돌로 불리는 구상화강암(球狀花崗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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