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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축제, 마린스키 극장 / 110분>
=== 프로덕션 노트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 '죽은 자의 노래'>
츠지이 노부유키(피아노)
올가 세르게예바(소프라노)
유리 보로비에프(베이스)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연주 &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
맹인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의 감동적인 백야축제 실황
손열음이 은메달을 차지했던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중국의 장 하오첸과 함께 공동우승의 영예를 안았던 츠지이 노부유키(辻井伸行). 그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라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부단한 노력과 남다른 재능으로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써나가고 있다.
본 영상은 201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축제에 초빙되어서 가졌던 감동적인 콘서트 실황을 담은 것으로, 게르기에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협연한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독주 리사이틀과 달리, 지휘자/오케스트라와의 긴밀한 호흡과 조화가 요구되는 협주곡은 앞을 볼 수 없는 그에게 있어서 더 힘든 도전과제임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노부유키는 게르기에프의 사려 깊은 반주에 힘입어서 기대 이상의 놀라운 연주성과를 펼쳐 보이고 있다. 앙코르로 들려준 자신의 자작곡 '쓰나미 희생자들을 위한 엘레지'의 잔잔한 감동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콘서트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 중에서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장 파격적인 작품인 <교향곡 14번 '죽은 자의 노래'>가 장식하고 있다.
=== 작품 해설 === <2010년 7월 11일 네이버캐스트 / 박제성 글>
명곡 명연주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차이콥스키가 남긴 3개의 피아노협주곡중 가장 유명한 작품
1874년 작곡, 1875년 10월 미국 보스톤에서 초연
아마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어느 새 15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유명세는 점점 더 증폭되어왔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이 대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응당 연주할 수 있고, 연주해야만 하며, 이 곡을 통해 비로소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을 정도로 프로 연주자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총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1번 협주곡만이 유독 유명하다. 흥분에 들뜬 회상이든, 괴롭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체념이든 간에 이 곡의 가장 큰 주제는 ‘향수’다. 이 ‘향수’가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항상 느껴왔듯이, 러시아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바로 절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피아니스트들의 시작이자 끝인 거대한 협주곡
차이콥스키는 절망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엔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작품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철인 3종경기에 맞먹을 만한 강인한 지구력과 원자폭탄과 같은 폭발력, 목가적이고 가요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러시아적인 멜랑콜리가 이 곡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의 마법적인 음색과 초인적 비르투오시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이 곡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발매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우 다른 음반사나 자사의 레퍼토리와 겹치는 경우 레코딩을 회피하곤 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상업적 비즈니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만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물론 슈나벨이나 폴리니, 브렌델과 같은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을 받고 있다. CD로 발매된 종류만 해도 무려 150종이 넘는 음반이 발매되었으니(복각되지 않은 LP시대의 녹음까지 합하면 더 많을 듯하다),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레퍼토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레코딩이 발명된 이후 셀락이나 왁스를 재료로 한 디스크들이 상업적으로 널리 판매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부터 이 작품은 초미의 관심사였다.전기녹음이 도입되기 이전인 1925년까지는 녹음 기술에 문제가 많았으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가 어쿠스틱 레코딩을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남겼다.
그러나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한계상 이 녹음과 작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전기녹음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마크 함부르크(Mark Hambourg)의 녹음이 등장했고, 비로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레코드 필청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함부르크는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 피아노 교육의 양대산맥이었던 레셰티츠키의 제자였다. 그는 러시아 출신다운 화려한 테크닉과 탁월한 힘, 빼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였다. 1926년 함부르크는 HMV 음반사에서 로얄 알버트 홀 오케스트라와 랜던 로날드의 지휘로 지금의 버짓 프라이스에 해당하는 ‘블랙 라벨’로 음반을 녹음했고, 이 음반은 삽시간에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현재 일본 Greendoor 레이블로 발매되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감상해볼 수 있는데, 극심한 루바토와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을 뿜는 듯한 테크닉,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터치, 안정된 호흡으로 훌륭한 비르투오시티의 정석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크 함부르크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열정과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전설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고 나서야 차이콥스키의 이 괴물같은 대곡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불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구제불능의 2류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다
차이콥스키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콥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y Rubinst ein)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 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치 않았다. 문제는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악정들은 너무 잘게 조각 나 있으며 서투르게 취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런 2류 작품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자신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차이콥스키가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에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적혀 있다.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독일의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low)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던 뷜로는 이 곡을 미국 연주회 도중 1875년 10월 25일 벤저민 존슨 랑의 지휘와 함께 보스턴에서 초연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3년 뒤에는 루빈스타인이 직접 화해를 구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에 수정을 가하여 모스크바의 유르겐슨 출판사를 통해 세 개의 판본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1875년에 완성한 ‘오케스트라 반주의, 혹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고, 두 번째는 1879년 9월 개정된 판본, 마지막 세 번째는 1889~90년에 개정된 판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차이콥스키는 분명 루빈스타인의 비평에 “나는 음표 하나라도 고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고치고야 말았다. 차이콥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 작품을 최초로 본 루빈스타인의 비판은 무시했다. “진정 하나의 진주와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한 초연자 뷜로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1876년 런던 초연의 협연자로 나선 에드워드 댄로이터(Edward Dannreuther)의 수정이 두 번째 판본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댄로이터는 초연 당시 프로그램 노트에 해설을 쓰기도 했다. 1969년 발견된 댄로이터의 가필 판본은 그의 수정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특히 차이콥스키는 1876년 댄로이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현명하고 실제적인 제안들’에 감사를 표했고, 재출판될 경우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썼다. 차이콥스키는 루빈스타인의 감정에 찬 비판은 거부한 채, 댄로이터의 건설적인 제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피아노를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는 듯한 장대한 스펙터클
최종본에서 가장 창조적인 변화는 바로 1악장 도입부 4분의 3 지점에서 폭발하는 거대하고 자유롭게 낙하하는 ‘화음의 폭포’다. 이는 두 번째 판본까지는 등장하지 않던 대목이다. 이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알렉산더 질로티(Alexander Siloti)의 조언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이 추가된 장대한 화음의 클러스터와 조성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의 스타일과 비슷한 만큼, 차이콥스키와 막역한 사이였던 질로티의 영향을 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최종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피날레 악장의 두 번째 주제인 그란드 몰토 메노 모소(grand molto meno mosso)의 비상하는 에피소드에 앞서 등장하는 두 마디의 이중 옥타브들이다. 첫 번째, 두 번째 판본에서는 이 부분들이 같은 음역대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세 번째 판본에서는 안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의 피날레의 예를 따르면서, 전체적으로 페달을 사용해 피아노를 들끓는 듯한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는 위험한 효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 외에도 차이콥스키가 질로티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이 최종본의 몇몇 부분을 수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
웅장하고 풍부한 색채로 시작하는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조성과 전개가 자유로운 편이다. 오히려 환상곡적인 느낌까지는 이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함과 화려하고 육중한 피아노가 서로 대결하는 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특징으로서, 장대한 1주제와 낭만적인 2주제의 뚜렷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2악장 -안단티노 셈플리체
느린 안단테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을 뒤섞어놓은 듯한 혁신적인 악장.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드는 아기의 평온함으로 시작하여, 프레스티시모로 질주하는 환상 속의 동화를 꿈꾸다가 첫 자장가로 돌아오는 모습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3악장 -알레그로 콘 푸코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스펙타클한 악장으로 손꼽힌다. 오케스트라의 네 마디 서주 후부터 펼쳐지는 피아노의 굵고 거친 슬라브 무곡풍의 론도 주제와 이어지는 간결한 가요적인 부주제가 잇달아 펼쳐지며 서정과 기교의 긴박감 넘치는 조화와 대비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피아노 코다 부분에서의 빠르고 강렬하며 비르투오시티 넘치는 옥타브와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총주의 터질 듯 벅차오르는 사운드는 러시아의 호방함과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추천음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장인인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의 협연에서 느껴지는 힘과 초절기교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와 흡인력을 담고 있다. 이들은 두 번의 녹음을 남겼는데 1943년 라이브 녹음(RCA)이 가장 대표적인 녹음으로서, 호로비츠의 강력한 힘과 마법적인 색채의 향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테크닉과 지구력, 다이내믹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키릴 콘드라신의 협연(Philips)도 실황 특유의 열기에 힘입어 호로비츠에 비견할 만한 스피드와 공격적인 성향이 인상적이다.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연주(EMI)는 협주곡으로서의 고전주의적 견고함과 음표 그 자체에의 몰입이 강렬함을 발산하는 명연으로 손꼽히며,
에밀 길렐스와 주빈 메타와의 실황(SONY)은 길렐스의 여러 차이콥스키 협주곡 녹음 가운데 가장 시원하고 정력적이며 음질 또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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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최진영 글>
교향곡 14번 '죽은 자의 노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총 15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14번째 교향곡인 이 곡은 1969년 봄에 완성되어 같은 해에 초연되었다. 소편성의 현악 오케스트라와 타악기, 소프라노, 베이스를 위한 작품이다. 벤자민 브리튼에게 헌정.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저항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완성했을 때인 1969년 그는 심장 상태의 악화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친구인 이삭 글릭만에게 자신이 오라토리오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 오라토리오의 가사는 로르카(Federico Garca Lorka, 1889~1936),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윌게름 큐헬베커(Wilhelm Küchelbecker, 1797~1846),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등의 시를 바탕으로 하였고 실내악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 베이스를 위한 곡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완성하면서 ‘교향곡’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교향곡 14번〉이 되었다. 이 곡에 대해 인터뷰를 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이 죽음에 대한 저항이라고 강조했고, 더 나아가서 모든 형태의 독재와 박해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그가 선택한 여러 시인들의 텍스트는 매우 적합해 보인다. 〈교향곡 14번〉에 등장하는 4명의 시인은 각각 다른 역사적, 민족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인 격동기를 살았던 이들이다. 특히 쇼스타코비치가 선택했던 시들은 큐헬베커가 1820년 대 러시아의 12월 혁명기간에, 아폴리네르와 릴케가 1차 대전의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의 기간 중에, 로르카가 스페인 내전의 기간 중에 쓴 시들이었던 것이다.
무소륵스키를 통해 들은 죽음의 음악 - 교향곡으로 만들어진 종교적이지 않은 수난곡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쓰면서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자신의 조국의 위대한 작곡가 무소륵스키였다. 1962년 쇼스타코비치는 무소륵스키의 〈죽음의 노래와 춤〉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다.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에 들었던 음악도 바로 이 곡이었다. 또한 이 작품을 헌정 받은 벤쟈민 브리튼도 이 곡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60년 런던에서 처음 만나 그 이후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철의 장막"을 넘어 음악으로 교류하며 서로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이들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4번〉이 그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에 대해서 철학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쇼스타코비치는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을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했지만, 이 곡이 죽음에 대해 너무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굳건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죽음에는 ‘망각’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시각은 쇼스타코비치의 거의 말년에 쓰인 이 곡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브리튼은 자신의 고향 알데버러 페스티벌에서 1970년 소련 바깥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이 곡의 연주회의 지휘를 맡았다.
작품 구성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4번〉은 11곡이 중단되지 않고 연주된다.
제1곡 심연에서
제2곡 말라게냐(이상 로르카의 시)
제3곡 로렐라이
제4곡 자살
제5곡 귀 기울이는 사람들 1: 조심스럽게
제6곡 귀 기울이는 사람들 2: 마담 보십시오
제7곡 라 산테 감옥에서
제8곡 콘스탄티노플 군주에게 보내는 자포로제 농노들의 답장(이상 아폴리네르의 시)
제9곡 오오 델위크, 델위크(퀴헬베케의 시)
제10곡 시인의 죽음
제11곡 관계(이상 릴케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