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 대니엘 C. 데닛 (바다출판사, 2022)
서문
- 나는 이 책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리고 우리 뇌가 그 모든 경이로운 일들을 어떻게 해내는지에 대한, 또 특히 우리를 유혹하는 철학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우리 마음과 뇌에 관해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현재까지의 최고의 과학이론의 중추이자 스케치라고 주장.
1부 우리 세계를 아래위로 뒤집어 보기
3장 이유의 기원에 관하여
- 다윈은 종종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 또는 “끝”이 있다는, 지나치게 영향력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들을 모두 타도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목적론은 프랑스어로 레종 데트르, 즉 존재의 이유.
- 생물학자들은 기능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흔하게 사용. 먹이 찾기나 영역 표시 등과 같은 행위들의 기능, 눈이나 지느러미의 기능, 리보솜 같은 세포내 기관들의 기능, 헤모글로빈의 기능.
그러나 사려 깊은 몇몇 생물학자들과 생물철학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불편해하며, 기능과 목적을 거론하는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는 약칭이나 편리한 은유일 뿐,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기능 같은 것은 없고, 목적도 목적론도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 이전의 개념들(영혼이나 정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감염될 위험이 조금이라도 생길 경우 반드시 절제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
- 인간이 직접 설계하여 만든 것이 아닌 한, 생물권 안의 그 어떠한 것도 엄밀히 말해서 설계되지 않았다고 주장.
- 우리는 더 쪼개질 수 없다는 의미로 명명된 원자가 더는 쪼개질 수 없는 존재가 아님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전 세계에 설득시켜왔다. 그런데 왜 설계자 없는 설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이는 교육적인 과제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가.
-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그 자체가 설계된 것도, 목적을 가진 행위자도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사물들이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방식으로 배열된 이유들을 찾고, 추적하는 과정들의 집합인 것. 진화가 찾아낸 이유들과 인간 설계자가 찾아낸 이유들의 큰 차이점은, 후자는 일반적으로 설계자의 마음속에 표상되는 반면, 자연선택에 의해 밝혀진 이유들은 대자연의 생산을 역설계하여 규명하는 데 성공한 인간 탐구자에 의해 처음 표상된다는 것.
- ‘왜’라는 단어는 다의적인데, ‘왜’의 자리에 무엇을 위해(what for)와 어떻게 해서(how come)라는 2가지의 익숙한 어구로 대체해보면 주된 모호함이 잘 드러난다. (너 왜 네 카메라를 내게 건너는 거야?는 무엇을 위해 그 행동을 하는지 묻는 말. 얼음은 왜 물에 뜨지?는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가 묻는 말)
어떻게 해서를 묻는 질문은 그것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배제된, 그 현상을 설명할 과정 서사를 요구한다. (하늘은 왜 파란가? 방금 왜 땅이 흔들렸지?)
-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는 어떻게 해서에서 출발하여 무엇을 위해에 이른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도 어떠한 목적도 없는 무생명의 세계에서 출발하지만, 그 과정 중 어떤 것들은 다른 과정을 생성하기도 하고, 이런 일들이 계속되다 보면 마침내 어떤 사물들이 지금의 상태처럼 배열된 이유들을 기술하기에 적절한 때라고 생각되는 모종의 지점에 이르게 된다.
- 인간 반응의 중심 특성이자 우리 종에게만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상대에게 스스로 설명할 것을, 그리고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얻은 설명과 정당화를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보증하고 반박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활동은 순환적인 “왜”게임 안에서 이루어진다.(널빤지를 왜 잘라요? 문짝 망가져서 새 문짝 만드려고. 새 문짝은 왜 만드는데요? 그래야 우리가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갈 수 있으니까. 왜 외출할 때 잠그고 나가야 하는데요? ...)
- 이 상호 이유 점검(reason-checking)에는 우리 모두 참여하며, 모두 능수능란하게 이것을 해낸다. 이 사실은 상호 이유 점검이 우리 삶을 영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 이유 점검 활동에서 적절히 대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책임의 뿌리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타인이 제안한 이유들에 의거해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충고자들의 설득에 귀 막은 사람들은 책임감이 적다고 판정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법적으로 다른 취급을 받는다.
- 행위의 이유들은 서로 요구하고 평가하는 행위가 인간이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활동들을 조직화하고 청소년들이 어른의 역할을 시작하게 하는 데,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판단할 규범을 확립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다. 이 연습은 우리 삶의 방식에서 매우 중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회적 종은 어떻게 이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 때가 종종 있다.
- 철학자 윌프리드 셀러스는 인간이 서로의 이유를 추론하는, 이 행위를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1962)을 창조하거나 구성하는 것이라고 묘사. 이에 영감을 얻은 한 세대의 피츠버그 철학자들은 이 주체를 자세히 파고듬. 허용될 수 있는 움직임은 무엇이며, 왜 그런가? 새로운 고려 사항들은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에 어떻게 진입하며, 위반 행위들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이유들의 공간은 규범들(norms)에 의해 제약된다. 여기서 규범이란, 이유 대기 게임을 진행할 때 틀린 길이 아닌 옳은 길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에 대한 상호 인식을 뜻한다.
- 규범성은 윤리의 기초다. 이유 대기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능력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 이 연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그 규칙들은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존재한다. 어떻게 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 피츠버그 철학자들은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묻은 이 질문은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유 대기 게임의 진화에 관한 우리 자신의 신중한 추측을 이용하여 그들의 분석을 보충해야만 한다.
나는 피츠버그의 철학자들이 이 질문을 무시함으로써, 상이한 2가지 규범 및 그와 연관된 교정 유형들을, 즉 내가 사회적 규범성(social normativity)과 도구적 규범성(instrumental normativity)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들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사회적 규범성은 피츠버그에서 분석되고 유명해진 것으로, 소통과 협력의 연습에서 생겨난 사회적 규범들과 관련된다. 도구적 규범성은 품질관리나 효율에 관련된 것으로, 자연발생적인 실패나 시장의 힘 등에 의해 드러난다. 선행(good deed)과 좋은 도구(good tool)를 구분해보면 이 점이 훌륭하게 묘사. 선한 행위라도 서툴게 실행될 수 있고, 목적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으며, 좋은 도구는 효과적인 고문 장비나 악마의 무기가 될 수 있다.
- 색각과 색은 공진화해왔지만, 이유 이해력과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공진화해오지 않았다. 이유 이해력은 이유보다 늦게 출현한 더 발달 된 진화의 산물이다.
이유가 있는 곳마다 암묵적인 규범이 호출될 수 있다. 실제 이유는 언제나 좋은 이유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논의되고 있는 특성을 정당화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가정되는 것이다.
- <다윈의 위험한 생각>(1995)에서 나는, 자연선택이 알고리즘의 과정, 즉 정렬(분급)sorting 알고리즘들과 일종의 무심한 품질관리 시험 단계의 집합체라고 주장. 이때 정렬 알고리즘들은 그 자체가 생성 단계에서 사용되는 무작위성을 이용하는 생성과 시험(generate-and-test) 알고리즘들로 구성되고, 품질관리 시험은 더 많은 자손을 가지는 쪽이 토너먼트에서 승리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 비생물 세계에는 차별적인 반복 생산은 없지만, 다양한 차등 존속은 존재한다. 어떤 조합은 다른 조합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그로 인해 개정되고 조정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성립한다. 차등 존속은 어떻게 해서든 차등 재생산으로 점진적으로 변한다. 화학적 조합들이 차등적 “생존”이라는 원다윈주의적 알고리즘은 자기촉매 반응 사이클이 생겨나게 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차등 복제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
- 자연선택은 자동 이유탐색기다. 이것은 많은 세대에 걸쳐 이유를 “발견하고” “승인하며” 이유들에 “초점을 맞춘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의 큰따옴표는, 자연선택은 마음이 없으며 그 자체로 어떤 이유를 가지지 않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지만, 그럼에도 자연선택은 설계 개선이라는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
- 이유들은, 이유 표상자(인간)가 존재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흰개미 성과 가우디의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의 비슷한 구조를 떠올려보라, 둘은 형태면에서 매우 유사하지만, 기원과 건설의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다르다. 흰개미 성의 구조와 형태에는 이유들이 있지만, 성을 건축한 그 어떤 흰개미도 그 이유를 표상하지 않는다. 구조를 계획한 건축가 흰개미는 없으며, 자신들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짓고 있는지를 눈치채는 흰개미 개체 또한 없다. 이것은 이해력 없는 능력(competence without comprehension)이다.
- 지금까지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윈이 목적론을 소멸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목적론을 자연화시켰다. 그러나 이 평결은 응당 수용되어야 할 만큼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했고, 막연한 거부감은 몇몇 과학자로 하여금 설계 이야기와 이유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기피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4장 두 가지 추론이 기묘하게 뒤집히다
- 다윈 전의 세계는 과학이 아닌 전통에 의해 뭉쳐져 있었다. 가장 지위가 높은 것부터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것이, 훨씬 더 위대한 존재이자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피조물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적하적 창조이론(trickle-down theory of creation)이라 부르자. 다윈은 이를 포상적 창조 이론(bubble-up theory of creation)으로 대체.
- 다윈으로부터 거의 한 세기 후에 또 다른 영국인인 성취한 2번째 기묘한 뒤집기, 앨런 튜링. 튜링의 뒤집기에 대한 베벌리의 표현 : 완벽하고 아름다운 계산 기계가 되고자 할 때, 산수가 무엇인지 그 기계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 어떤 순간에서든 컴퓨터의 행위는 컴퓨터가 관찰하고 있는 기호와 그 순간 컴퓨터의 ‘마음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 마음 상태란 if-then 명령어들로 이루어진 간단한 집합인데, 이 명령어들은 무엇을 할지, 다음 단계엔 어떤 “마음 상태”로 들어갈 것인지를 지시한다. 절대무지 상태지만 기계적인 시행을 통해 “명령들”을 따름으로써 산수 계산을 완벽하게 해내는, 마음 없는 기계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함을 튜링은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명령어가 조건분기를 포함하다면, 그 기계는 명령어들에 의해 결정된 무한정 복잡한 경로들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디지털 컴퓨터는 범용튜링기계, 즉 특수 목적의 컴퓨터를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명령어 집합을 따름으로써 그 어떤 특수 목적의 디지털 컴퓨터든 모두 흉내 낼 수 있는 장치이다. 정보 처리의 거대한 설계공간은 튜링에 의해 접근 가능한 것이 되었고, 그는 절대무지에서 출발하여 인공지능까지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경로가 그 설계공간 안에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 많은 이들이 다윈의 기묘한 뒤집기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 이들을 창조론자라 부른다. 생물권의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특성들이 다윈의 과정에 의해 진화되어왔을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튜링의 기묘한 뒤집기를 견디지 못하는데, 그들의 이유는 창조론자들의 이유와 비슷하다. 그들은 마음의 경이들이 한낱 물질적인 과정으로는 접근 불가능할 것이라 믿고 싶어 하고, 자연과학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들은 데카르트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 그들의 속내에 있는 이유들을 우리는 지적한 바 있다. 두려움, 자부심, 그리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대한 잘못된 사랑. 그리고 이에 더해, 다른 이유(어떻게 해서일까, 무엇을 위해일까?)도 있다. 다윈과 튜링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 매우 불편한 것 - 이해력 없는 능력 - 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비판자인) 베벌리는 자신의 분노를 열정적으로 표출. “지능 없는 창조적 기술이라는 그 발상이라니!”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발상이 우리 교육 정책과 관행에 새겨진 ‘능력의 (최고) 원천은 이해력’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거스르는지 생각해보라.
우리가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은, 세계가 작동하는 모든 방식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심어준 값진 이해력 저장소에서 필요한 능력들을 생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그들의 인생 전반에 걸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해력을 갖춘다면 능력이 따라올 것이다!
- 군대는 가장 효율적인 교육을 시키는 기관으로, 평균적 고등학생을 제트엔진 정비공으로, 레이더 기사로, 항해사로, 다양한 기술 전문가로 양성한다. 바로 훈련과 반복연습으로. 이러한 숙련된 현역병에게 주입된 능력으로부터 가치 있고 다양한 이해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이 이해력에 언제나 의존하지는 않으며 때로는 능력이 이해력의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좋은 경험적 증거를 얻는다.
다윈과 튜링의 작업은 이 요점의 가장 극단적인 버전을 그려낸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탁월함과 이해력은 궁극적으로는 이해력 없는 능력으로부터 발생하고, 이 이해력 없는 능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층 더 능력 있는(따라서 이해력을 갖춘) 체계로 합성된다. 이는 실로 기묘한 뒤집기로서 다윈주의 이전의 창조론의 ‘마음 먼저’ 관점을 전복시켜, 지성적 설계자는 가장 나중에 온다고 말하는 우리의 궁극적인 진화 이론인 ‘마음 나중’ 관점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 이해력 없는 능력에 대한 회의론에는 합당한 근거는 없다.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는 “합당한 이유에 따른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옳은 듯 느껴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이 옳은 듯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걸어둔 주문을 깬 사람이 바로 다윈이고 튜링이다. 새로운 생각이란 능력의 연쇄로부터 이해력이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해력 없는 능력이 놀랍도록 다산적이라면, 왜 이해력이 필요한가? 인간의 것과 같은 유형의 이해력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 현장에 도달했는가?
- 상의하달식 지성적 설계는 분명 작동한다. 계획을 미리 세우고 문제를 명확히 하고 과제를 개선하고 각 단계의 이유를 분명하게 나타낸다는 행동 수칙은 수천 년 동안 발명가들과 문제 해결자들에게 확실해 보였던 방책. 인간이 노력해온 모든 분야에서 독창성과 선견지명이라는 무수한 승리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 전략.
다윈 전에는 이것이 성취 가능한 유일한 설계 방식이라고 여겼다. 지성적인 설계자가 없는 설계는 불가능하다고 간주.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의하달식 설계가 우리 세계에 기여한 바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다윈과 튜링의 뒤집기는 이해력 없는 능력이라는 한 가지 발견의 두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은 모든 설계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라는 신적인 재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력 없는 능력을 지닌 시스템들로부터 출현하는 결과다.
5장 이해의 진화
- 엘리베이터 제어 설계와 그것의 인공물 친족에 관한 우리의 막간극의 성과 중 하나는, 그 덕분에 우리가 R&D 과정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와 어떻게 다른가에 관해 한층 날카로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 설계자들(프로그래머들)이 자신의 해법을 시험하고 구동할 때 사용하는 컴퓨터는 그것 자체가 지성의 산물이며, 그 빌딩 블록이 되는 능력들의 초기 집합은 모든 프로그래머 지망자로 하여금 과제를 상의하달적 방식으로 통상적인 문제 해결의 방식처럼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 진화에는 미리 정의된 문제들도 없고 그 과업에 도입할 이해력도 없다. 진화는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과 함께, 방향성 없이 근시안적으로 뒤죽박죽 진행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비틀기와 변형을 시도하면서, 그리고 유용하거나 적어도 뚜렷하게 해롭지 않다고 판명된 것들을 고수하면서.
- 느리고 무심한 과정이 느리고 무심한 과정만으로 만들 수 없어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이 답변 불가능한 질문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다윈이 깨어버린 그 주문에 아직 사로잡혀 있는 것이며, 다윈의 기묘한 추론 뒤집기를 수용할 수 없는 상태다.
-지향계로서의 고등 동물: 이해력의 출현. 이해력 없는 능력은 자연의 방식이다. 자연의 R&D 방법들에서 작동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자연의 가장 작고 가장 단순한 생산물에서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시기적절하게 조직화 되는 과정들을 기술하고 설명할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행위라고 부르며 우리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이란, 응답을 촉발하고 조절하고 종료시키는 정보의 유입을 지각적으로 모니터링하는 듯한 어떤 것이 그 과정들을 인도한다고 가장하고 그 이유들을 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능력만을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 능력과 일반적으로 함께 가는 이해력까지 귀속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대부분의 독자는 식물과 미생물이 그저 타고났을 뿐이라는 나의 관찰을, 잘 설계된 능력이라는 축복을 받았을 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고등” 동물에 대해 이와 똑같은 주장을 시도하면 나는 흥을 깨는 못된 놈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동물(포유류나 새)로 관심을 돌릴 때면, 그들의 능력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해력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적절하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정말로 이해한다.
- 이 행성의 생물 총중량 중 절반 이상은 박테리아를 비롯한 단세포 “로봇”들이 차지하고, “로봇 같은” 식물들이 그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와 우리 가축이 된 동물들이 육상 척추동물 총 중량의 98%를 차지하고 있지만, 육상 척추동물 자체가 지구 생명 중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니 이해력 없는 능력이야말로 지구 생물의 압도적 다수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기본 전제.
- 생물체들의 설계는 언제, 그리고 왜 자기 생존 기계의 부유하는 합리적 근거를 표상하기 시작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려면 우리의 상상력을 개편해야 한다. “고등 동물”에서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면 반드시 모종의 이해가 동반되리라 가정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 관행.
- 이해력 진화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 이해력 없는 능력이라는 슬로건을 재고할 때가 왔다. 능력이 먼저다. 이해력은 능력의 원천이나 능력의 유효성분이 아니다. 이해력은 능력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스템에 아주 약간의 이해력 한두 방울을 부여할 가능성을 이미 고려해 보았다. 이때, 시스템은 그 능력을 결집시키고 정돈시킨다는 점에서는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이해력에 대한 오도된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해력이나 이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별개의 정신적 경이라는 생각은 유구하지만 구식이다. 이해가 부가적이고 분리 가능한 어떤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착각은 아하! 현상 또는 유레카 효과(이해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 순간)에 의해 배양된다. 이 심리학적 현상은 완벽하게 실재하며 심리학자들에 의해 수십 년간 연구되어왔다. 갑작스러운 이해의 시작과 같은 그러한 경험은, 이해가 일종의 경험임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잘못 해석되기 쉬우며, 이로 인해 몇몇 사상가들은 의식 없이는 진정한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이해력 진화는 단계적. 한쪽 극단에는 정족수 감지 신호에 반응하는 박테리아의 이해력-비슷한 것, 즉 이해력인 셈인 것과 컴퓨터 이해력-비슷한 것이 있고, 다른 쪽 극단에는 개인적 영향력과 사회적 영향력의 상호작용이 사람의 정서적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이해력과 상대성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해력이 있다.
그러나 이해력의 최고 수준에서마저 이해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누구의 마음에서든, 개념이나 주제에 통달하는 데서 파악하지 못한 함축들과 인식하지 못한 가정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이해력은 다 이해력-비슷한 것, 즉 이해력인 셈인 것이다.
- 이해력의 구성요소로서 능력을 모형화하는 과제로 돌아가자. 컴퓨터 과학에서 생성과 시험이라 알려진 전술을 연속 적용하면, 우리는 능력에 따라 생물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가장 하위 단계인 다윈 생물. 자연선택에 따라 진화의 R&D에 의해 창조된 이 생물들은 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상태로 태어난다. 그들은 타고난 존재이지 학습자는 아니다. 각 세대는 자연의 시험을 받고, 승자들은 다음 라운드에서 더 자주 복제된다.
(2) 스키너 생물. 고정 배선된 기질에다가 강화되는 반응 행동을 조정할 핵심 기술이 추가. 이들 세계에서 시험 될 새로운 행동들은 어느 정도 무작위로 생성. 강화된 행동들은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되면 더 잘 되풀이. 이러한 조작적 조건형성에 의해 개체의 설계를 개선하는 역량은 많은 상황에서 적합도를 향상시키는 형질.
(3) 포퍼 생물. 잔인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추출하여 꺼내 쓰기 편한 곳에 보관하고, 실제 세계가 아닌 오프라인에서 가상의 행동들을 사전 테스트하는 데 그 정보를 사용. 그들도 결국 실제 세계에서 행동해야 하지만,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은 무작위가 아니라, 그들 내부의 환경 모형 안에서 시행착오 시험 가동을 거친 후 살아남은 선택지.
(4) 그레고리 생물. 심리학자 리처드 그레고리를 기리는 의미에서 명명. 그는 자신이 “잠재적 지능”이라 이름 붙인 것이 사고자에게 제공될 때 생각 도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강조. 그레고리 생물의 환경세계는 생각 도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생각 도구들에는 산수, 민주주의, 이중 맹검 연구 같은 추상적인 것도 있고, 현미경, 지도, 컴퓨터 같은 구체적인 것도 있다.
- 다윈 생물은 고정 배선되어 있는 존재로 똑똑한 설계자들의 수혜자일 뿐이며, 그들은 그 설계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 생물들은 조건들에 새로운 변형을 가하여 변화된 환경에 직면하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허둥거리며 멍청함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
- 스키너 생물은 어느 정도의 가소성으로 행동 레퍼토리 내의 몇몇 선택지들을 가지고 시작. 이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며, 강화되는 결과를 산출하는 시행을 선호하도록 고정 배선.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하면서 자기 왜 지금 바로 그 시행유효적 행동을 선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 포퍼 생물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뇌에 그럭저럭 저장해둔 세계에 대한 정보에 비추어 보며 행동의 후보들을 시험해보기 때문. 이들의 선택 과정은 정보에 민감하고 미래지향적. 이러한 양상들은 이해력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포퍼 생물 역시 자신들이 왜, 그러고 어떻게 이 사전 시험에 종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세계에 관한 앞으로의 모형들을 만들어, 그것을 결정에 사용하고 행위를 조절하는 당신의 습관은 행위 주체인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든 그렇지 않든 좋은 습관.
- 생각 도구들의 의도적 도입과 사용, 문제를 풀 가능한 해결책에 대한 체계적 탐구, 정신적 탐색의 고차원적 통제는 그레고리 생물 단계에 와서야 찾아볼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그레고리 생물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가 바로 인간 예외주의라는 뜨거운 쟁점에 불이 붙는 지점. 어느 종의 동물이 또는 어떤 동물 개체가 얼마나 많은 이해력을 드러내느냐에 대해 낭만주의 진영과 흥 깨기 진영 간의 치열한 불일치가 발생하는 지점.
오늘날 동물 지능 연구자들에게 우세하지만 잠정적인 결론은, 가장 영리한 동물들은 스키너 생물이 아니라 포퍼 생물이라는 것이다. 야생동물 중 까마귀과 동물들, 돌고래를 비롯한 고래목의 동물들, 영장류는, 반려동물의 선두를 차지하는 개, 고양이, 앵무새와 함께,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인 동물. 그들은 탐색 행동을 한다. 지형과 지세를 살피고, 때로는 랜드마크를 만들어 기억을 짐을 덜기도 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국지 정보들로 머릿속을 채우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지만,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측의 힘을 확장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능력을 향상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
- 의식 없는 마음(unconscious mind)은 더 이상 모순적 용어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의식적인 마음인 것 같다. 무의식적 과정들이 지각과 통제의 인지적 작용을 수행할 온전한 능력이 있다면, 오늘날 풀어야 할 퍼즐은 “마음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