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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마음 속의 십자가
요한복음 2:13~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18~22)
교회 절기상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으로서 고난 주간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주님의 마음속에 고난의 십자가, 그의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염두에 두고 계셨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속에서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려는 마음을 늘 갖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가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염두에 두고 가르치셨던 몇 가지 말씀을 찾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 직후에 장차 자기의 육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중 첫 번째 유월절 명절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을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적 생애를 시작한 후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보니 예수님의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에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바깥 뜰인 이방인의 뜰에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소란을 피우면서 제단에 바치는 제물인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아주 비싼 값으로 팔고 성전 헌금함에 바칠 동전도 환율을 몇 배로 올려서 받으면서 성전 안을 더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뜰 역시 저 이방인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경배하러 먼 나라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예배하러 올라온 하나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는 엄연한 성전인데, 그곳을 온통 시장바닥으로 만들어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게 만들었으니 예수님으로서는 거룩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휘둘러서 소와 양과 염소들을 내쫓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나가라고 하시고 동전을 바꾸는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외치시기를,
“이것을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서 뒤를 봐주며 그들과 결탁한 대제사장 측근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와서 항의를 합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께서 그 크고 빛나는 대리석과 은금으로 꾸며진 성전을 가리키시면서 이 성전을 그들이 헐면 자기가 사흘 동안에 다시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성전은 예수님이 태어나기전부터 헤롯 대왕 시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 때까지 약 46년간이나 지어온 엄청난 규모의 성전이었기 때문에 그 성전을 허물기도 어렵고 그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유대인들이 성전을 헐면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고 태연하고 확고하게 그 성전을 헐면 자기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으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헛웃음을 치고 조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보이는 성전은 완전한 성전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본체요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이나 헤롯 성전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성전의 본체가 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와서 보니, 그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당이 온통 시장터 같고 그곳에서 불법과 탐욕과 불신앙과 불경건한 예배가 가득하니, 예수님께서 비통하시고 분노하셔서 과거 솔로몬 성전 안에서 온갖 우상 숭배가 가득하므로 바벨론 군대로 무너뜨리신 것처럼 이제 로마 군대로 그 성전을 무너뜨릴 때가 가까이 왔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 보이는 성전은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요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성전을 헐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쏟고 죽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성전의 본체가 되신 예수님의 몸을 매로 때리고 채찍질하고 대못으로 찌르고 창으로 찔러서 결국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무너뜨린 후에 사흘만에 예수님께서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 예수님께서 그 성전 바깥뜰을 채찍으로 깨끗하게 하신 날 이르신 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로 성취된 일인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공적 생애 초기 단계부터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궁극적인 구원 사역이 자신이 죽으신 후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계셨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다른 사역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육체된 성전이 유대인들로부터 무너뜨려짐을 당할 것이고 사흘만에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완전한 영광의 성전으로 세워지는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이 핵심적인 사역임을 알고서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성전, 완전한 제물, 완전한 제사장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 몸을 죽기까지 깨뜨려서 우리의 완전한 성전이 되어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불완전한 성전을 깨뜨리시고 완전한 성전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구주를 찬양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세웠던 놋뱀을 예를 들면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초기 사역 때에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 지도자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찾아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고 난 후에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적인 의미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적 무지함을 책망하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니고데모와 같이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일지라도 그의 영혼이 거듭나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만을 통하여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구원의 도리를 예수님께서 증언해주시는데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로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니고데모에게 일러주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4,15)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에, 그들이 불평의 범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께서 불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여 죽게 했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라면서 놋뱀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천막에서 나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치유받고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그토록 비참하게 죽으실 때에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저주가 속량되고 영혼의 죄가 속량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영생을 얻게 되는 일은 사람의 지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 올라간 후에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놋뱀처럼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죽어야 하고 그가 보내신 성령을 받은 자만이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사람들 몰래 찾아와서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 곧 자기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는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장대에 매달려 높이 들려진 것처럼 자신도 뜨거운 불에 그을린 놋으로 만든 뱀처럼 십자가 나무에 못박혀 처참하게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주받은 놋뱀처럼, 자기가 하늘로부터도 버림당하고 땅에서도 외면당한채 그 사이에 비참하게 내쫓긴 채 매달려 있을 때에 그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영혼의 죄가 해결되고 그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삶의 저주가 풀리고 아브라함의 축복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의 운명이 자기에게 장차 임할 것을 그렇게 처음부터 알고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길, 거듭남의 길을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처참하게 저주받고 하늘과 땅 모두에게서 버림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 값은 속량될 수 없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수도 없고 우리가 결코 거듭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놋뱀의 운명을 처음부터 받아들이신 우리 구주의 희생적인 사랑을 찬양합니다. 옛 뱀 마귀에 물려 독이 올라 퉁퉁 부어 지옥 불로 떨어지는 우리를 살리려고 친히 불에 달궈진 놋뱀처럼 장대에 매달려서 우리를 살리신 구주를 찬양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언급함으로써 자기의 죽음을 가장 중요한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 이하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정색하고 거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39,40)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수많은 표적과 기적을 행하셨지 않습니까?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벙어리의 입으로 말하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듣게 해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뛰게 해주시고, 귀신에 결박된 자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 다시 살려주셨으니, 장례 행렬 중에 있던 청년도 다시 살려주고 무덤에 묻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무덤 밖에까지 진동하던 자도 살려주셨습니다. 무서운 풍랑과 바람도 말씀 한 마디로 잔잔하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다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가득 남을 정도로 풍성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고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믿음이 갖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눈이 어둡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굳어 있어서 아무리 크고 놀라운 표적을 줄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더 죽이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큰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을 향하여 한 가지의 가장 완전한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여기서 말씀합니다. 이 표적은 그 동안의 모든 표적들의 궁극적인 완성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표적들 역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표적이었으나,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고 되돌릴 수 없이 인치는 완전한 표적이니 그것이 곧 요나의 표적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그에게 동쪽 이방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읍에 가서 회개를 전하라고 명하셨을 때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서쪽 끝 나라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가 타고 가던 배를 풍랑으로 뒤흔들어서 배 밑창에서 잠을 자던 요나를 깨어나게 하시고 배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풍랑을 일으킨 자로 지목을 받아 바다에 내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중해 바다에 커다란 물고기 곧 고래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는데, 그가 그 고래 뱃속에서 사흘 동안 고생하는 중에 간절히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고래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에 순종하여 앗수르 니느웨 성읍으로 가서 회개를 외치며 전도함으로 그 성읍의 왕으로부터 가축들까지 금식하고 회개함으로 화를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요나 선지자 이야기 속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동안 캄캄한 뱃속에 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상에 살아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삼일 동안 땅 속 깊고 캄캄한 곳에 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표적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표적입니다. 사망을 이기고 생명을 얻되 그 생명은 사망의 권세를 영원히 삼켜버리는 위대한 승리의 표적입니다. 이 생명은 다시는 늙음이나 썩음으나 사망과 영벌이 이길 수 없는 완전하고 찬란하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기 때문에, 이 표적은 그 동안의 모든 인간을 괴롭히던 모든 죄의 결과들인 저주와 사망과 영벌의 권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승리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과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께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더 큰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다른 표적은 보일 필요 없고 오직 요나의 표적만 보여주겠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하신 뒤에도 병자들이 자기들을 고쳐달라고 찾아왔을 때에 계속하여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눈을 뜨게 해주셨고, 베다니의 나사로도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되었는데 다시 살려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에 처참하게 완전히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되 영원히 썩지 않는 불멸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신 이 완전한 표적, 최고의 표적을 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성령의 각양 은사를 통하여 오늘날도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 삶에 기이하고 신비로운 체험들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표적도, 그 어떤 이적도 선지자 요나가 미리 앞서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본체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친히 온 몸으로 보여주신 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만의 그의 부활하신 이 표적만큼 완전하고 위대한 표적은 다시 없는 것입니다. 이 완전하고 위대한 표적을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또 다른 표적과 기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것으로 구원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이렇게 마음에 깊이 품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걸음씩 이 위대한 표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아가셨으니, 이 모든 것은 택한 주의 백성들을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표적으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기를 내어주신 우리 구주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넷째로, 예수님께서는 사명의 여정 끝에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31 이하의 말씀을 보면,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르기를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바리새인들은 헤롯 안디바를 싫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 정권에 의하여 권력을 유지하면서 자기들을 다스리는 에돔 혈통의 헤롯 왕가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나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점에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활동하던 예수님을 협박하여 바리새인들이 주로 세력을 쥔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으로 예수님이 옮겨와서 자기들의 손아귀에 좀 더 빨리 잡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협박하여 갈릴리 지역을 떠나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자기들의 손에 용이하게 잡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잘 아시기에 이렇게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32~33)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위협을 전하여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을 떠나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더 강한 유다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예수님을 자기들 손아귀에 잡아 넣어 죽이려는 속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이 헤롯 안디바하고도 잘 알고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인 것을 알기에 헤롯에게도 경고합니다.
“저 여우 같은 헤롯에게 가서 나는 여전히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할 것이고 제 삼일 곧 내 사역의 절정이 되는 그 때에 내가 그러한 일을 완전히 성취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간교하고 음흉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 갈릴리 지역의 전도 사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헤롯에게 잡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죽을 장소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죽을 장소는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자기가 가야 할 길, 사명의 그 길을 계속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상 사역의 끝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써 일단락을 짓게 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곧 유대인들의 성전과 대제사장의 관저가 있는 그 바리새파의 심장부를 향하여 무서운 경고를 날리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3:34~35)
그들의 완악함을 강력하게 고발하면서 장차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의 궁극적인 지상 사명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그토록 암탉이 병아리 새끼를 품듯이 간절히 불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끝내 완악하게 거부하였던 그들은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백성들은 거의 다 죽음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도 이천년 동안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자기의 때를 알았고 그 지상 사역의 마지막 종착지도 어디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사명의 여로 오늘과 내일 동안 어떤 반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으니 그는 자기의 죽을 때도 알았고 자기가 죽는 장소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과정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 곧 지상 사역의 여로에서 그는 갈 길을 꿋꿋이 걸어갔고 그 여로의 끝에 예루살렘에서 육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도 지상의 사명의 여로가 있고 그 여로의 끝이 언제이고 어디서 그 끝을 맺을 것인가도 주님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그 장소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고백한 것처럼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어떤 반대와 시련이 가로막더라도 꿋꿋하게 우리의 갈 길 곧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갑시다. 비록 그 끝에 십자가가 기다릴지라도 그 외롭고 두려운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주님처럼 우리도 묵묵히 주님이 걸어가신 사명의 길을 따라 가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을 맞아 주님의 마음 속에 품으셨던 골고다의 십자가의 생각들을 더듬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던 초기부터 이미 당신의 사역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가를 잘 알면서 그 길을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축구 선수가 패스를 앞으로도 하고 뒤로도 하고 옆으로도 하고 롱패스도 하고 티키타카로 하기도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상대방 골문에 골을 넣는 것을 항상 잊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그 모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는 그 십자가가 곧 부활 영생의 구원을 주의 백성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 땅에서 얼마든지 많은 지혜의 말씀을 풍성히 가르칠 수 있었고,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베풀 수도 있어서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구원 사역이 바로 자기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역임을 아시고, 그 일을 항상 마음 중심에 두고 그렇게 행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품었던 이 십자가를 향한 마음을 항상 기억하고 품도록 합시다. 진정한 영광의 길은 주님을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삶임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고 말씀하신 대로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헬라인들이 자기를 초대하는 말을 들을 때에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쉽고 편한 길을 외면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택하신 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살고자 하면 그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우리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 알의 썩고 죽는 밀알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서 무슨 일이든지 생각하고 우리의 길을 선택합시다. 자주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영원히 사는 길인가, 아니면 잠시는 좋지만 나중에는 망하는 길인가를 점검합시다. 늘 마음에 십자가를 두고 살아가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마음에 주님이 죽으신 골고다의 십자가를 마음 중심에 늘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악취가 더 이상 풍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향취가 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저 영원한 나라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