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래끼, 천평 그리고 지평
공식처럼 방학 때면 아이들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간다. 할머니 댁이든 외할머니 댁이든 어쩌면 ‘보내진다’가 더 적절한 것 같고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간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긴 하지만 관용처럼 굳어진 표현 같기도 하다.
“이 집은 할아버지 꺼야. 왜 자꾸 할머니 집이라 그래!”
할아버지의 질투 섞인 투정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남성이 기준점이었고 가정 경제 실권도 남성에게 주어져 대부분 집은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을 것이다. 허나 아이들은 ‘집(house)’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home)’으로 가는 것이기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여성의 일’로 여겨지기에 ‘할머니 집’ 혹은 ‘외할머니 집’이 당연하고 자연스레 굳어져 왔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도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들을 기억하며 할머니와 함께 한 추억을 단단히 뭉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대부분의 할머니 집은 시골이 아닐 테고 삼시세끼에 나온 것 같은 아궁이도 없는 아파트인 경우가 많을 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고 할머니 품에서 잠들며 할머니와 함께 한 기억을 안고 있을 테다. 할머니 집이라는 단어 속에는 할머니에 관한 기억을 더욱 더 각인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그만큼 할아버지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려서 할아버지들은 아이들 일기 속에 어떤 형태로 그려져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의 할아버지 또한 내 일기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일이 몇 번이었을까. 할아버지는 말수가 많으신 편은 아니었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 일에서도 ‘허허’하고 얕게 내뱉으시는 웃음소리뿐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물가물하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잠에서 깨었을 때 반쯤 뜬 눈을 하고 어영부영 일어나 걷는 내 모습이다. 눈꺼풀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들리는 소리, 다래끼네!
아이가 아프면 아픔을 낫게 해 줄 듯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아픈 부위를 살피며 약을 찾거나 하지 않고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진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어른들. 그저 그 자리에서 이미 웃음이 만발한 어른들 모습은 ‘다래끼’라는 것이 이름은 좀 요상스러운 것 같아도 딱히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벌어지는 부산스러움이란 싸인펜을 찾는 일 정도였으니까.
싸인펜의 쓰임이 내 발바닥에서 이루어짐을 알았을 때, 어릴 적 알약을 삼키는 일을 힘들어하던 나로선 약을 먹지 않아도 되어 좋았지만, 꽤 우습게 느껴졌다.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던 건, 그저 아픈 아이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을 뿐이다. 의사가 청진기를 들이대면 진단하듯 눈을 살펴보고 써내려가는 글자는 천평(天平) 혹은 지평(地平)이었다. 발바닥을 들어서 내 발에 쓰인 글자를 쳐다보기도 전, 아버지는 일찌감치 무엇을 어디에 적을지를 이야기하셨고 다 쓰고 나서도 또 한번 한자를 읽으셨다.
펜을 쥐고 글을 쓰신 건 아버지였는데 기억 속에 할아버지가 더 자리하는 건,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물어보는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글자가 다 새겨지고 나면 지워질까 조심스럽게 걷기도 했는데 정말 다래끼는 곧 사라졌다. 며칠이면 자연치유 되는 것이 본래 다래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험의 힘을 빌려 다래끼에 관한 한 이 주술 행위의 결과를 믿었다. 중학생이던가, 안대를 하고 나타난 친구가 말하길 병원에서 ‘째고 왔다’고 했다. 눈에 ‘다래끼’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그때 나는 안대를 버리고 양말을 벗겨 내고는 발바닥에 글을 써주고 싶었다.
천평(天平) 혹은 지평(地平), 한글이 아닌 한자로 휘갈길 수 있을 듯했다. 또한 어디에 어떻게 적을지도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오른쪽 위쪽 눈에 생겼다면 왼쪽 발바닥에 지평(地平)이라 쓰고 왼쪽 아래에 생겼다면 오른쪽 발바닥에 천평(天平)이라 쓴다. 어쩌면 내가 처음 배운 한자는 내 이름 자 외에 천평과 지평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진 이 다래끼 치료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유년 시절 이후로는 다래끼에 걸린 경험이 없기에 아이들만 걸리는 병인 줄 알았는데, 성인도 제법 걸리는 모양이다. 성인이 되어서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다래끼로 눈이 뻘겋게 부어 있다면 아버지에게로 가 펜을 내밀었을까.
언제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다래끼’ 치료에 관한 어느 지역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천평!지평! 외쳤건만 낯선 이야기만이 흘렀다. 그 지역에선 다래끼가 났을 때 눈썹을 뽑아 돌멩이에 얹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 놓아둔다. 누군가 그 돌멩이를 치고 가면 그 사람에게 다래끼가 옮아가는 거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 믿음, 그 바람은 누군가 내 대신 병이 걸리기를 비는 거였다. 새삼, 내 발바닥에 나를 좀 간지럽게 할 뿐인 글자가 쓰이는 주술이 우리 집의 믿음이라 좋았다. 남이 해가 되기를 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에 반해 천평과 지평이라는 단어는 세상이 평평해지는 느낌이었다. 혹처럼 튀어나온 내 눈꺼풀이, 심술궂게 자리한 이 병인이 조용히 사그라지게 만드는 게 어떤 위해도 없는 글자라는 것도 좋았다. 세상이 평평하다는 것만큼 마음 편한 게 어디 있으랴. 조화롭고 더없이 공정한 세상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듯했다. 발바닥에 새겨진 천평과 지평 주술이 내게 새긴 건, 세상은 공평하고 정당하게 흘러가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입추는 지났지만 아직 가을로 흘러가지 않은 이 계절, ‘다래끼’에 걸린 듯 잔뜩 부은 눈두덩이로 곳곳에 다래끼 난 눈썹을 버리고 있는 이의 발바닥을 번쩍 들어 천평(天平)지평(地平) 글자를 새겨넣고 싶다. 세상 모든 주술을 끼고서도, ‘다래끼’에 최적인 천평(天平)지평(地平)을 사용할 줄 모르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에게. 타인에게 내 고통을 전가하는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