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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황제 김염(金焰)
한국인 출신 김염은 1930년대 상해영화계의 별일뿐더러 중국영화 황제이기도 하다. 1932년5월1일 상해 <전성일보(電聲日報)>에서 영화 황제를 뽑는 인기투표가 있었다. 여자 배우로는 호접(胡蝶)이 “영화 황후”로 뽑혔고, 남자 배우로는 22세에 나는 김염은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이 세 질문에 모두 1위를 차지하여 “영화 황제”로 당선되었다. 그의 매력적인 외모와 단련된 몸매도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편지봉투에 주소 없이 ‘중국 상해 김염과 진이(秦怡)’라고만 써도 그에게 편지가 전달될 정도로 김염은 중국의 우상이었다.
1930년대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김염의 행동, 김염의 모든 것이 전 중국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다. 그 후 그와 비견되는 배우가 없어, <영화 황제>라는 호칭을 가진 배우는 김염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영화 황제 김염의 삶과 예술을 감쪽같은 망각으로부터 건져낸 사람은 일본인 스즈끼 쓰네카스(鈴木常勝)이라고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 오랜 시간동안 김염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끄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염의 원명은 김덕린(金德麟)이다. 그는 1911년 4월 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독립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의사(醫師)였던 김필순(金弼淳)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에서 수학한 조선 최초의 양의사이며 신민회 활동에 참여한 항일투사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신민회사건)을 피해 1912년 서울을 떠나 서간도로 갔고, 이상촌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중국으로 떠날 때 김염은 두 살도 채 안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제의 침략세력이 이곳에도 뻗치게 되자 김필순은 1915년 일본침략자들의 눈을 피해 멀리 치치할(齊齊哈爾)로 들어갔다. 산 설고 물 선 이곳에서 그의 일가는 어느 한 사당에서 한동안 지냈다. 당시 조선으로부터 10여 세대 되는 농민이 이곳으로 이사하여왔다. 김필순은 그들을 치치할에서 백여리 떨어진 농촌에 농토를 얻어 안착시켰다. 김필순은 진료소를 꾸려놓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럭저럭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었을 때 김염이네 가정에는 큰 불행이 일어났다. 김염이 여덟 살 나던 해 그의 부친은 광란병으로 많은 식구를 남겨놓고 사망하였다(일본특무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할머니, 어머니, 두 형님, 두 동생, 두 누이동생, 김염까지 하면 아홉 식구나 되는 이 가정에 막대한 생활난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김필순 일가를 은근히 감시하고 있던 일본영사관에서는 군인들을 파견하여 수색까지 하였다. 다행히도 김필순이 유리궤짝 밑에 깊이 간수해두었던 비밀문건이 발각되지 않았다. 그 비밀문건이란 20여명의 혁명지사들이 서명한 <<조선독립운동 맹세서>>이다.
생활난으로 고심 끝에 식구들은 헤어지기로 결정하였다. 어머니와 둘째 형님은 아버지가 꾸리던 진료소를 계속 꾸려나가면서 할머니와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을 데리고 생활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큰형은 큰고모부의 도움을 받아 산동 제남(山東 濟南)에 있는 산동성 제로대학(濟魯大學) 의학공부를 하고, 김염과 넷째동생은 각기 상해에 있는 둘째고모와 셋째고모네 집에 각기 얹혀살기로 하였다.
둘째고모네 집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김염까지 얹혀살다보니 살림은 더욱 어려웠다. 그때 조선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고모는 하숙집을 꾸려 살림을 보탰고 김염은 학교를 다니면서 하숙생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하숙방을 소제하면서 일을 도왔다.
김염은 둘째고모네 집에서 2년 동안 얹혀살다가 열세 살 나던 해 큰형을 따라 제남에 가서 제미(지금은 제로)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학교에서 학비는 면제하여주었지만 살림이 넉넉지 못한 형과 함께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계제가 못되었다. 때마침 상해에 있던 둘째고모부가 천진 북양대학(天津 北洋大學)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김염은 다시 고모네 집으로 찾아가서 천진 남개(南開)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둘째고모는 여전히 살림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하였다. 김염은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학교에서 상학, 하학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아침, 저녁으로 사무실청소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김염은 자신의 손으로 길을 개척하려고 결심하였다. 1927년 17세에 나는 김염은 둘째고모 몰래 상해로 가는 배에 올랐다. 이때로부터 김염은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염이 생활하던 당시는 배우들을 스타로 모시는 지금과는 달리 배우를 천하게 여겨 지어 부자들의 노리개로 삼았다. 그러기에 배우들은 별호를 지어 불렀다. 김염은 중학생 시절부터 예술인이 되려는 꿈을 꾸었는지라 일찍 별호를 생각해 두었다. 그는 평소에 노신(魯迅)선생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노신선생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김신(金迅)이라는 별호를 쓰려고 하였다. 한데 천진한 그의 생각에도 너무나 당돌한 감이 들어 다시 그럴듯한 글자를 찾던 차 불꽃처럼 청년들의 정열을 상징하는 <염(焰)>자가 마음에 들어 김염이란 별호를 달았다.
천대받던 예술인들의 운명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상해로 간 김염은 영화 단역부터 출연하고, 기록계원 등의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일했다. 김염은 배우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곡절을 겪었다. 그가 단역으로 출연한 두 번째 영화 <열혈남아>를 찍고 나서 해고당했다. 다행이 <열혈남아>의 감독을 맡아보던 상해영화계의 명배우 만뢰천(萬籟天)이 그를 가긍히 여겨 전한(田漢,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작사)감독이 꾸리고 있던 <남국예술극사(南國藝術劇社)>에 소개하였다.
중국현대연극의 정초자이며 걸출한 희곡작가인 전한은 김염의 세계관, 예술관, 연기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전한은 김염을 한국인이라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그는 짬만 있으면 김염에게 어떻게 배우생활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더욱이는 인생을 어떻게 대하여야 한다는 도리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김염은 전한의 교양 하에서 예술인으로서의 수양뿐 만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덕수양도 갖추게 되였다. 김염이 늘 말하다시피 전한은 예술의 길에 들어선 그의 첫 스승이었다. 그의 지도로 김염은 <살로메(莎樂美)>, <카르멘(卡門)> 등 연극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어서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자신을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을 손유(孫瑜)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손유감독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영화연구소에서 수학한 실력파 감독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하고, 전격적으로 <풍류검객(風流劍客)>이란 첫 영화에 주인공역을 맡겼다. 세 도둑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풍류검객>은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내용적 평가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손유
처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실패하자 김염은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손유감독은 두 번째 영화 <야초한화(野草閑花)> (1930)의 주인공으로 다시 김염을 발탁했다. 영화는 부잣집 청년이 봉건사회의 계급질서를 뛰어넘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봉건적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형상해 낸 김염과 하층계급 처녀 역을 잘 연기한 완영옥(阮玲玉)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된다. 기존의 부르조아적이고 낡은 내용이 아닌 진보적이고 새로운 내용에다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야초한화> 이후 손유감독은 중국의 하층민들을 그리거나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작품들에서 대부분 김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야초한화>의 한 장면.
1930년대 상해시절은 김염의 영화인생에서 절정에 해당한다. ‘영화 황제’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때다. 이 시절 김염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진보적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 청년이 현실을 인식하고 항일에 나서는 이야기인 손유감독의 <들장미(野玫瑰)>(1932), 한 여성의 운명을 통해 낡은 생활방식을 비판한 <모성지광(母性之光)>(1933), 중국인민들의 항일염원을 도로건설 청년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보여준 김염-손유의 대표작 <대로(大路)>(1934), 일제를 비유하는 도적떼를 맞아 마을주민들이 단결된 힘으로 격퇴한다는 내용의 항일영화인 오영강(吳永剛)감독의 <장지릉운(壯志凌雲)>(1936) 등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모성지광> DVD
그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영화는 <대로>이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타나자 관중들 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특히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聶耳,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작곡)는 이 영화의 <대로가(大路歌)>와 <선봉가(先鋒歌)>에 작곡을 하였는데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 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가곡으로 되었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었다. 섭이는 이 두수의 노래를 창작하기 위하여 당시 건축 중에 있던 대상해영화관의 건축현장으로 가서 노동자들을 직접 관찰하고 자기가 실제에서 체험한 후 예술적 구상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확대되고 국민당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중국인민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대로> DVD
김염은 193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 김염은 7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40년 중국 최초의 공군영화인 <장공만리(長空萬里)>에서 김염은 중국 공군병사의 애국심과 항일투쟁을 잘 연기하며 영화로나마 평소의 꿈인 비행사가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염은 1941년 12월 8일 다시 홍콩에서 내륙으로 들어간다. 일제패망 후 찍은 <승룡쾌서(乘龍快婿)>(1948)는 국민당 관리들의 실정과 부정부패를 폭로한 내용으로 국민당일파를 강하게 풍자, 비판했다. 1944년 성도(成都)의 사천극장에 올린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羅密歐與朱麗葉)>. 당시 연극을 본 사람들은 로미오 역을 완벽하게 창조한 김염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까지 중국연극 역사상 로미오 역을 가장 잘 연기해냈다고 평가한다.
<들장미>와 <장공만리>의 한 장면.
1949년 마침내 국민당은 패전하여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었다. 아내 진이가 열렬한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던 반면 김염은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방 후 상해영화제작소 예술위원회 부주임, 상해 정치협상회의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 영화예술인, 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했고 새 중국 건설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 무렵 중년의 김염은 왕일(王逸)감독의 역작 <폭풍속의 매(暴風雨中的雄鹰)>(1957)에 출연한다.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민당세력에 맞서는 순결한 청년혁명가들을 형상하며, 홍군과 마을사람들의 단결로 항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품이다. 영화에서 김염은 원숙하고 중후한 연기를 잘 보여줬다. 김염은 건국 후 6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황제>라는 명성에 비해 김염은 오직 42편의 작품에서만 주인공으로 연기했다. 그는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았다. 항상 정의로운 사상이 들어있는 극본에만 관심을 두었고 뜻이 좋지 못한 작품은 절대 출연하지 않았다. 손유감독도 김염의 그런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언제나 정의롭고 진취적인 청년, 억울한 민중들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청년, 신분을 뛰어넘어 고상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 청년 등 ‘김염다운 영화’만을 제안했다.
앞서 말하다시피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신민회 활동에 참여한 항일투사이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 절친한 친구였다. 지어 안창호는 아들 이름을 김필순의 영어이름인 필립으로 지을 정도로 가까웠다. 김필순의 누이 김순애, 처남 서병호와 김규식, 조카 김마리아 그리고 서병호의 아들 서재현 등 여섯 명의 항일 운동가들이 같은 집안이다. 김덕홍, 김위, 김로, 서재현 등 김염의 형제자매들도 대부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항일운동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김염이 항일의식과 진보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던 김염은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항상 약자와 빈곤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따뜻했다.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 민중들에게 각별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김염의 민중적 품성은 그가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과 너무나 닮아있다. <대로>의 청년노동자, <일전매(一剪梅)>의 정의로운 경비대장(나중에 의적이 된다), <장지릉운>의 도적을 물리치는 청년지도자, <폭풍속의 매>의 홍군과 연합해 마을을 지키는 장년지도자. 모두가 김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김염은 자신의 항일의식과 진보성, 민중성을 모두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시켜 연기했다. 생활과 사상을 반영한 김염의 연기는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웠고 관객은 그의 연기와 영화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장지릉운> DVD
집안 어른들, 형제들과 달리 그의 항일운동은 영화였다. 항일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공군비행사 시험에 응시했다가 불합격한 적이 있는 김염은 결국 영화를 통해 이 꿈을 이뤄냈다. 김염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사회현실을 보여주며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진보적인 사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1933년 2월. 상해에서 중국전영문화협회가 설립되자, 전한선생의 지도를 받은 김염은 자신의 예술관이 그대로 드러난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배우는 자신의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하고, 항일반제투쟁을 불러일으키는데 힘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손유감독, 오영강감독도 항일영화를 만들기 위해 김염과 많은 시간 토론을 하며 극본을 만들어 냈다.
그는 영화 황제로서, 예술가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운동하고 스스로를 단련한 건강한 청년이었고,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뒤돌아서서 험담하지 않았다. 강직한 성격에 고지식하고 말이 없는 사람. 후배들은 영화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그런 사상과 인격, 그리고 고상한 정신세계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하기에 오늘 13억 중국인과 중국영화계가 ‘영화 황제’로 회고하는 김염은 배우를 넘어 ‘진보적인 예술가’인 것이다.
<김염 주요 출연작>
<풍류검객>(1929) <야초한화>(1930) <연애와 의무>(1931)
<일전매>(1931) <은한쌍성>(1931) <도화읍혈기>(1932)
<들장미>(1932) <인도>(1932) <해외견혼>(1932)
<공부국난>(1932) <속고도춘몽>(1932) <세 명의 모던 여성>(1932)
<당명황>(1933) <모성지광>(1933) <성시지야>(1933)
<대로>(1934) <황금시대>(1934) <신도화선>(1935)
<장지릉운>(1936) <랑도사>(1936) <도자연거>(1936)
<장공만리>(1940) <승룡쾌서>(1948) <대지중광>(1950)
<위대한 기점>(1954)<어머니>(1956) <폭풍속의 매>(1957)
<해상홍기>(1958) <애창여가>(1958)
퍼온 글
첫댓글 당시 대단한 한인 배우가 중국에 있었네요^^
한류의 원조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