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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일 화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할렐루야 !!
- 9월의 첫날 화요일 태풍9호 마이삭이 곧 올라온다는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아침입니다.
- 그러나 9월은 주님의 한없는 은총이 함께 하시므로 생애의 최고의 달이 되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변함없이 새 힘을 드리며 말씀을 이어갑니다.
- 코로나19 바이러스 재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격고 있기에 위로를 드리며 잘 극복하고 인내함으로 잘 이겨 내시며 영적으로 대각성 골방 기도의 계절을 만들어 봅시다.
- 어떤 역경과 힘겨운 상황 속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처음 사랑과 열정적인 신앙으로 긍휼과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여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는 초가을의 9월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전도서 4장1-9절 }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 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 제 목 ◑◑◑◑
◗◗ 인간의 헛된 노력
◑◑◑ 본문 이해와 요약 ◑◑◑
◗ 4장에서는 솔로몬의 개인적인 체험의 소산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찰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 허무의식을 더욱 부추긴 것은 바로 이 세상에 두루 만연해 있는 불의와 불법으로 억울한 사연들과 부조리를 본 것입니다.
- 특히 소외계층과 고아와 같이 외로운 자들이 그 대표적인 모습과 삶의 다양한 모습을 잘 관찰하여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인생의 허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인간 삶의 요체인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사항인 정치와 경제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개인적 이기적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 지금 '코로나19 ' 바이러스로 위기단계에서 병원에 의사의 의료 전공의들의 파업을 보면 집단이기주의적인 행동이라 보고 앞으로 속히 본연 위치에서 일하면서 조정하면 좋겠습니다.
- 그래서 본문의 구성면에서 1-3절에서 힘 없는 자의 학대받는 자의 눈물을 보았고, 4-6절에서 성공한 인생이 이웃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인한 이웃의 시기와 우매자의 게으름을 보았으며, 7-8절에서 이기적으로 살아온 인생의 결과는 무익한 욕심으로 끝남으로 헛된 인생임을 말씀합니다.
- 그리고 9-12절에서 친교와 상호부조의 유익을 말해 주고 있으며, 13-16절에서 지혜로운 소년이 늙고 둔한 왕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각 절에 의미와 이해를 돕는다면, 먼저 1절에서 사람의 지혜와 수고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뒤 바꿀 수 없으며, 인생의 참된 위로 자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 그리고 2,3절에서 죽음이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의 대안이 되지는 못합니다.
- 한편 5절에서 성도는 지난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항상 성실과 최선의 자세로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 그리고 6절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은 만족과 자족의 삶과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 때, 가장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또한 7,8절에서 제물의 축적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은 삶의 참된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 그리고 9절에 혼자 일하는 것보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아름다우며 거기에 상급 또한 있습니다.
- 세상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 것만 같은 환경들이 많이 있는데, 전도자는 부와 권력 등이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 이러한 것들은 인생을 결코 가치 있게 만들지 못하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 너무 많은 부와 재물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라는 모순된 삶의 모습들이 인생의 허무를 예증하고 있음을 전도자는 지적합니다.
◗ 결론적으로 개인주의의 고독과 내적 불안정, 공동체의 친교와 상부상조의 유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상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분쟁을 일으키고, 개인적으로는 고립감과 허무한 마음뿐이라서 성도는 서로를 돌보며 서로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함께 나누고 섬기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 또한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지혜로써 입신출세한 자도 개인적 이기적으로 인해 참된 인생의 낙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결국 교만한 자는 결국 어리석게 되며 외롭고 비참하게 되므로, 남의 충고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겸손은 성도들이 주 안에서 배워 가야 할 덕성이며, 삼겹줄 즉 협력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서로 연결되는 삶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시다.(전도서4장1절)
▶ 인간 개인의 지혜와 수고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뒤 바꿀 수 없으며, 인생의 참된 위로 자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살펴보면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 여기서 “내가 다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라고 말하였는데, 힘 있고 가진자들의 행패를 말하고 있으며 특히 여기서 ‘보았도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성경에서 1,300회 이상 사용 된 단어입니다.
- 특히 ‘보았도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를 보고 발견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단순히 보는 정도가 아니라 ‘깊이 관찰하고 깊이 고심했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솔로몬이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높은 궁궐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각가지 살아가는 풍경일 것입니다.
- 그런데 그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의 정겨운 풍경을 점점 가까이 다가가 깊이 관찰하고 숙고할수록 그 이면에는 모든 인생이 어떤 권력과 힘으로 아랫 사람들이 고생으로 인한 비참함과 치열함, 온갖 암투와 어둡고 그늘진 상처들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 여기서 솔로몬은 그 자신이 세상을 통찰하며 발견한 바를 다름 아닌 이 땅에 모든 인생이 무엇으로부터 억압받고 눌림을 받고 사는 ‘학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 ‘학대’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나 인격을 무참하게 짓밟고 부당한 방법을 통해 권리나 이익을 빼앗는 일련의 행동들의 아픔을 일컫는 것입니다.
-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타인을 돕고 약한 자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으로 약한 자들을 압제하고 그들을 괴롭게 하며 자기 힘을 더욱 크게 하는 것입니다.
- 또한 1절 후반부를 보면 해 아래 세상을 궁구하며 살피던 중 그 안에 존재하는 불법과 악행을 발견하게 된 솔로몬은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 사람들이 저마다 갖은 학대와 고초에 시달리며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을 위로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 그들의 최소한의 권리와 편익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도, 나라의 지도자들도 이처럼 학대받고 핍박받는 자들을 위로해 주지 못하였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악순환이 연속 된 삶의 모습뿐이었습니다.
- 사실 오늘날에야 그나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 복지차원에서 기초생활을 재공하고 있으며, 각종 시민단체가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기에 아무라도 그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역시 모든 일에 있어 가장 큰 피해자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며 평범한 서민 계층입니다.
-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함에도 그 누구도 그들의 진정으로 위로가 될 수 없고, 근심을 덜어줄 수 없으며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한 것은 과거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 사실 이는 어떤 특정한 계층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수많은 상처와 슬픔, 절망과 비애 속에서 사람들이 깨닫는 한 가지는 누구도 자신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며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도, 부모도, 형제도, 자녀도 자신을 이해 해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 이것을 반대로 바꾸어 말해 본다면, 인간이 사람들로부터 위로 받고 이해받고자 행하는 모든 노력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종종 이를 해결하고자 성적 쾌락에 탐닉하기도 하고 술과 마약 등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방편일 뿐이고 고독과 아픔, 외로움과 슬픔 등 위로받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더욱 비참하고 심각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 이사야51장 3절에서 “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솔로몬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 그거 상처 받고 어둡고 절망하며 비애 속에서 살다가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 솔로몬은 해 아래 인생에 그 어떤 위로도 희망도 없음을 말하면서 해 위의 하나님만이 인생의 참 위로 자되시며, 소망이 되신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일을 잘 증거 해 주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엘리야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 선지자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왕 야합과 왕비 이세벨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으며,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혈혈단신으로 맞서 일전을 벌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그들을 모두 멸하는 대승리를 얻었습니다.
- 하지만 그 일로 그는 왕비 이세벨의 미움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아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 그래서 도망친 엘리야는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곧 죽여 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심한 불안감과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다 잠든 엘리야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어루만지시고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어 먹게 하시고 위로와 힘을 내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 그리고 거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주시고 다시 일어서게 되었고 선지학교를 세우고 선지생도를 훈련하고 어두운 한 시대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 결국 엘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하심, 자신의 연약함을 하감하시면서 동시에 그의 심령을 싸매시고 치료하시며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얻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바 남은 사명을 끝까지 성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그는 마지막 순간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나님께로 들리움을 받는 영예를 얻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것을 봅니다.
- 고린도후서1장 3-4절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하심, 힘주심, 능력과 권세로 붙드시는 사역은 오늘날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환란과 많은 고난과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 가운데도 여전히 위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누구로부터 학대 즉 고난과 고통을 받고 있는지? 나는 내가 편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학대를 가하는 것은 없는지? 내가 고난과 고통 받고 있을 때에 위로받기 위하여 누구를 찾고 속 시원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는지? 진정으로 나의 모든 형편을 알고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지? 그분의 진정한 위로를 받는 통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지는 순간 붙잡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기억합시다.
- 그분만이 우리의 참 위로가 되시며, 힘이 되시며 다시 일어설 능력이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는 부모나 연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결단코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 로마서8장 26절에서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런즉 우리의 보혜사 되신 성령 하나님만이 진정한 위로와 힘을 베푸십니다.
-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재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걸어가는 답답함과 두려움과 공포로 눌리고 학대받는 현실이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위로를 구하며, 모든 염려와 걱정을 다 믿음으로 맡기고, 이 험하고 거센 풍랑을 만난 세상에, 어둡고 혼돈 된 세상, 각가지 상처 많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과 기도로 인내하며 살아내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