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한 사랑에 무소유라. 가슴이 뭉클하네요.
어찌 기생에 얽힌 사랑이야기는 이처럼 가슴앓이를 동반하는지!
너무 아름답네요.
서봉 배상
기생 진향과 길상사
아!! ~ 아름답다. 어찌 저리도 고울 수가 있을까?
첫 눈에 반한 사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옆으로 다가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여인에게 말하였어요.
“나 당신에게 반했어요!!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는 우리의 사랑을 막을 길이 없을 거야 ~ 알았지요?”
이렇게 첫눈에 반한 사랑은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영원불멸의 꽃이 되어 지금도 피어 있지요.
기생 진향(眞 香)은 가세가 기울어 방년 16세에 조선 권번(기생학교)에 들어가 금하 하 일규 스승 밑에서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배웠어요. 그는 타고난 성품이 있어 아악과 가무에도 능통했지만 특히 시예(詩藝)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스승 하 일규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라고 하였지요.
그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 이니 만치 일본 유학을 다녀와야 알아주던 시대였어요.
그러나 일본 유학을 떠난 지 1년도 안 돼 하 일규 스승이 함흥에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일본에서 접하고
무작정 귀국선에 몸을 싣고 함흥으로 달려갔어요.
그러나 일개 기생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스승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함흥기생이 되었는데 이때 함흥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장소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졌어요.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한 사람은 기생 진향(眞 香)으로, 또 한 사람은 함흥영
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만났는데, 기생 진향(眞 香)의 본명은 김 영한(金 英韓1912~1999)이고, 함흥 여고
교사의 이름은 백석(白石) 백 기행(1912-1995) 이었어요.
함흥에서 시작된 사랑은 진향이 먼저 서울로 오고 뒤이어 백석이 서울로 와 지금의 종로구 청진동에 신방을
차렸는데,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 여섯, 김영한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하지요.
두 사람은 맑은 물 한 그릇 앞에 놓고 서로의 마음을 언약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는 뜻에서 맞절을
하고 초야(初夜)를 맞이했지요. 기생 진향은 스물 두 해 고이 간직한 처녀성을 백석에게 주었으며 백석 또한
첫사랑의 고귀한 마음을 듬뿍 주었어요.
두 사람의 불같은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초야를 치룬 후 몇 날 며칠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깊고 깊은
환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어느 날 시인 백석은 그녀가 사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자야오가
(子夜吳歌)”를 발견하고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진향에게 지어 주었어요.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적군을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였지요.
그러나 기생과의 사랑이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백석의 고향 부모들은 기생과의 사랑을 막으려고 고향으로 불러내려 강제로 결혼을 시키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초야만 치르고는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길 3번씩이나 했다 하지요.
그러나 백석은 부모님을 생각하며 장남인 자신과 봉건적 사고에서 많이 괴로워하면서도 자야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자야에게 아무도 모르는 만주로 도망가자고 설득했지만, 백석의 앞길을 막을까 두려워 하는
자야는 이를 거절하며 괴로워 했다고 하네요.
세월은 흘러 1939년 백석은 부모님의 낙향 종용을 뿌리치고 사랑하는 자야를 두고 시 백 편을 써오겠다며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드디어 해방을 맞아 백석은 이것저것을 정리한 후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휴전선이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되었어요.
그 뒤 시인 백석은 북한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지냈으며 자야는 남한에서 성북동의 청 암 장이라는
한식당을 사들여 이를 요정으로 꾸미고, 그 동안 갈고 닦은 재주를 마음껏 뽐내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서울 장안에서 삼청 각, 청운 각과 함께 3대 요정 "대원 각"을 만들었지요.
이 대원 각 요정이 훗날 1000억 원대의 부를 창출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평생 동안 밤낮으로 백석을 그리워했으며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고 그님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하네요.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 幕)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원천 수였다"고 말하였지요.
김 영한(金 英韓1912~1999) 기명: 진향(眞 香)
호(號):자야(子夜), 법명(法名):길상 화(吉祥 華)
시인白石(본명 : 백 기행1912 ~1995)
그럼 여기서 백석이 자야를 위해 지은 시를 보기로 해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 이(멧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 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 곤이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 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으앙으앙 울을 것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가 오랜 기다림의 이야기를 (내 사랑 백석) 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무렵(1995년 1월)
백석은 북녘 하늘 아래 어느 초라한 산골마을에서 83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지요.
그 뒤 1988년 백석이 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있은 후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에 대해 배운 적이 없지요)
그녀는 1997년 현금 2억 원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하여 "백석문화상"을 제정하였고, 매년 시집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1999년부터 시상했는데 상금은 천만 원으로 지금도 매년 백석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자야는 법정(法 頂)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시가 천억 대의 대원각을 시주
할 테니 사찰로 만들어 달라고 법정스님에게 부탁했어요.
그러나 법정스님은 너무 큰 재산에 놀라고 또 기생들이 몸 파는 요정이라 줄곧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조계종에 등록하고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지어
같은 해 12월14일 창건 법회를 열게 되었지요.
길상사 창건 법회 날 자야 김 영한 보살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 화(吉祥 華)라는 법명을 받았어요.
그날 그는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기생들이 옷을 갈아
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법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하네요.
길상 화 김 영한 보살은 1999년 11월14일 목욕 재계하고 본인이 기부한 길상사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사내에 있는 길상 헌 에서 백석을 그리워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요.
그래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오직 두 가지가 있다 하는데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 시켜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하지요.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하나는 자비의 길이라 하는군요.
남자건 여자건 누구나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사는 연인 하나쯤은 있을 수 있지요.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그 연인이란 영화나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일
수도 있으나 간혹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한 애틋한 정인(情人)일 수도 있으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아릿한
아픔이 될 수도 있어요.
물론 이런 아픔은 어떤 면에서 '내 안의 행복'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요.
옛말에 "추억이 많은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고 했어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어린 시절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부녀 “롯데"를 잊지 않고
있다가 회사 창업 시 기업 이름으로 썼으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어릴 적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소떼를 몰고 3.8선을 넘어 찾아 갔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지요.
피카소는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연인들을 곧잘 그의 아름다운 화폭에 담기도 했어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여인들의 지고한 사랑이야기는 많지만, 기생 진향의 곧은 절개는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지요.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지켜낸 여인!!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여인!!
그 여인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어요.
마지막 불꽃을 "무소유"라는 크고 깊은 법문으로 승화스킨 기생 진향의 숭고한 뜻을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길상사를 창건하시고 무소유를 설파하신 법정스님 또한 고매한 큰 스님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
보다 단순하게 살아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나눔의 기쁨을 누리는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라“고 하셨던
큰 스님의 가르침은 기생 진향의 숭고한 뜻과 함께 우리들의 가슴에
싱그럽고 향기로운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어요.
참고로 법정 스님이 입적한 날은 2010년 3월11일이나 음력 날자(1월26일)로 추모를 하는 불교 전통에 따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는 매년 법정 스님의 추모 법회를 음력 1월 26일 날 봉행한다 하네요.
길상사(대원각)는 3공화국 시절 삼청 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의 하나였지요.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 영한 여사가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길상사가 만들어 졌어요.
<받은 글 옮김?
첫댓글 길상사 다녀오셨군요 항상 이 카폐에서 인기글로 올라옴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생을 바르게 평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옛 이야기에는 기생과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많아요.
진향 그녀는 어쩌면 노후에 법정 스님을 만나 이렇게 위대한 베품을 남기고 갔을까요?
참된 사랑을 함께 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