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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2일 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나니,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라고 한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라고 권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청하거나 기도할 때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볼 수 없는 하느님, 들을 수 없는 하느님,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기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지요. 굳은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며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일축해 버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것도, 빵을 많게 하신 기적도 보았지요. 그런데도 계속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요. 아침이면 어김없이 날이 밝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실 세계 안의 기적이 아닙니까? 이런 현상들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현실 속의 기적들을 대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늘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우연히 작년 가을 방영된 ‘인간 극장’에 등장한 중2 농부 한태웅 군의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기특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해서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해맑은 사춘기 소년이지만, 새마을 모자에, 농사용 장화에, 느릿느릿한 말투에, 영락없는 중견 농사꾼이었습니다. 장래 희망은 ‘할아버지 같은 멋진 농부’랍니다. 꼭 갖고 싶은 것은 ‘힘좋은 트랙터’랍니다. 피곤해서 잠시 드러누워 있는 아버지를 향해, 일거리가 저렇게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있으면 어떡하냐며 호통을 칩니다. 직접 기른 닭과 계란을 동네 어르신들에게 배달해드리고, 팔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용돈도 드립니다. 다음의 말을 중2 짜리가 한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돈만 많으면 뭐해요? 행복해야지.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면서 대농(大農)이 되고 결혼해서 지금 계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거, 그게 제 목표예요.” “한 2백평, 한 마지기 논으로도 대농이 될 수 있고, 염소 다섯 마리로도 대농이 될 수도 있어요. 혼자 돈 갖고 혼자 살면 뭐해요? 저는 먹고 살 만큼만 벌고, 남한테 욕 안 듣고, 제가 남들에게 베풀면서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자신도 모르게 경제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푹 젖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듯이 은연 중에 ‘돈이면 다’라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의 덫에 묶여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말입니다. 어떻게든 이웃을 밟고 올라서겠다는 살벌한 야수의 눈빛으로, 바벨탑 쌓아올라가듯, 끝도 없는 재물의 탑을 쌓아가는 사람들, 정말이지 귀여겨 들을 말입니다. 그 모든 수모 당해가면서, 청춘과 평생을 바쳐가면서 쌓아올린 그 허황된 탑, 그러나 그 재물 한번 마음 놓고 써보지도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탑을 쌓아올리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절대로 이웃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우리들의 폐부를 깊숙히 찌릅니다.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9~11절)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카인 죽이기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다우트(Doubt: 의심)’란 영화는 ‘의심을 왜 하게 되는가’, 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의심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제시하려 합니다.
한 학교의 엄한 원장 수녀님이 그 학교에 파견된 신부님이 흑인 아이를 사제관에 불러 들였다는 사실 하나로 끊임없이 의심하여 그 아이와 신부님을 결국 쫓아내게 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줄거리를 신부님은 강론 하나로 다 설명해 냅니다.
“배가 난파되었습니다. 다행히 한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구조보트에 탄 그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노를 열심히 저어서 집에 들어와 편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를 젓다가 ‘이 방향이 맞나?’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는 그 혼란 속에서 바다를 헤매다 죽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이라 부르는데, 여러분 가운데 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수녀님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수녀님은 신부님의 강론보다는 졸거나 떠드는 아이들을 혼내려 다니는 것에 온 정신을 쏟습니다.
물론 수녀님이 의심하는 것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님을 만난 아이는 유일하게 흑인이기 때문에 신부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고, 신부님의 방에 다녀온 후로 학교에서 조금 이상할 정도의 행동을 보였고, 평상시에 신부님은 만년필 대신 볼펜을 쓰는 개혁적인 사람이어서 아이들에게 ‘꼬마 눈사람’과 같은 교회 밖의 노래를 부르게 했고,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설탕을 세 스푼씩이나 커피에 넣는 이상한 행동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녀님의 의심을 꺾지 못했고 그래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수녀님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교님조차도 그럴 신부님이 아니라며 더 큰 성당으로 발령을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원장 수녀님은 자신의 의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근거를 거짓으로 꾸며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정도 빗나가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의 마지막 대사는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는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내 안에 의심이 있어요. 내안에 엄청난 의심이 있어요.”
의심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뱀이 주는 것입니다. 뱀은 자아입니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게 합니다. 이 ‘뱀’이 오늘 독서에서는 ‘카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오늘 독서를 통해 뱀을 어떻게 내쫓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뱀을 내쫓은 유일한 방법은 그 뱀이 얼마나 나쁜지를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뱀이 죽인 누군가의 피가 우리 마음에 떨어져야만 합니다. 뱀이 죽인 희생자를 보아야만 뱀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되고 나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죽인 것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의 피는 그 땅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습니다. 카인은 죽을 수 없습니다. 카인이 죽으면 인간에게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인이 쫓겨나면 그 자신 안에는 아벨에 대한 사랑만이 남습니다.
위 영화에서 의심으로 사제를 쫓아낸 수녀님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신의 의심이 너무 강해서 죄도 없는 신부님을 모함하여 쫓아냈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수녀님이 자신의 의심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신부님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게 되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낀다면 앞으로는 더 겸손해 질 것입니다. 의심을 쫓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아니면 끊임없이 의심으로 죄 없는 이들을 죽일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죄 없는 그리스도를, 또 죄 없는 다른 이들을 죽였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내 안의 카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땅이 하느님께 제발 카인을 내쫓아 달라고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 땅에는 그리스도의 피와 내가 상처 입힌 많은 이들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 피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마음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겸손한 땅이 되게 됩니다. 다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을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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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에울랄리아(Eulalia)
축일 : 2월 12일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바르셀로나(Barcelona)
활동연도 : 290-303년
같은이름 : 에우랄리아, 에울라리아, 오레르, 울랄라
성녀 에울랄리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박해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자행되던 시기에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박해자들은 13살의 어린 소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낸 에울랄리아는 결국 X자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바르셀로나의 산타 마리아 델 마르(Santa Maria del Mar)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339년에 새로 건립된 산타 에울랄리아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졌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매년 그녀의 축일이 있는 주간에 성녀 에울랄리아 축제를 열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에울랄리아는 프랑스에서 오레르(Aulaire)로 불리는데, 메리다(Merida)의 에울랄리아(12월 10일)와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오레르, 올랄라(Ollala), 에울라리아(Eularia)로도 불린다.
성인이름 : 마리나 (Marina)
축일 : 2월 12일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녀 마리나는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에우게니우스(Eugenius)란 사람의 딸이다. 그녀의 부친은 홀아비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자 친척집에 맡겨둔 어린 딸 마리나 생각에 마음이 헷갈리게 되자, 원장에게 그 아이는 마리누스(Marinus)라는 남자 아이이니 자신과 함께 수도원에서 살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부친과 사별할 때까지 그러니까 17세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 후에도 그녀는 남자 수도자로서 계속하여 생활했는데, 어느 여인숙 주인의 딸이 마리누스가 자신에게 임신시켰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수도원 밖에서 걸식을 하며 살았고, 그 처녀는 아이를 낳아서 마리누스의 아들이니 돌보라고 맡기고 떠났다.
성녀 마리나는 그 모든 것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끝까지 인내하였다. 5년 후 원장은 마리누스의 놀라운 인내와 겸손을 인정하여 5세 된 아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다시금 살게 했으나 매우 힘든 일만 시켰다. 그 얼마 후 마리누스는 운명하였고, 시신을 수습하던 중에 마리누스가 여성임이 밝혀졌다. 원장 이하 모든 수도자들과 시민들은 그녀의 위대한 용덕과 인내심을 찬양하였고 엄숙한 장례가 거행되었다.
성인:율리아노 자선가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귀족이었는데, 실수로 인하여 그는 부친과 모친을 죽였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이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그는 아내와 함께 강을 건너는 여울 곁에 살면서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였다.
어느 날, 추위로 인하여 동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었더니,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죄를 사했노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자기의 침대에 나환자를 잠 재우기도 하였다.
그는 호텔 경영자, 여행자, 그리고 뱃사공의 수호 성인이다.
[성 줄리앵의 전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가 배출한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 플로베르가
그의 만년에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심혈을 기울인 끝에
1876년에 탈고한 단편소설입니다.
플로베르는 한 가지 사물에는 오직 한 가지 표현만이 가장 적확하다는 신념을 갖고 그러한 표현을 찾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몇날며칠이라도 골방에 틀어박혀 고심하였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만큼 성실한 리얼리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짧은 단편소설 하나를 탈고하는 데에도 반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는 작가 고향에 있는 어느 교회의 그림유리를 보고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그 줄거리는 자끄 드 보라진의 [황금전설]이라고 합니다.
저는 예수회에 들어 오기 전에 이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 소설을 축약하여 전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번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다시 이 소설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전설 따라 구만리를 떠나는 이 여정을 통해 많은 분들이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뜻 깊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리라고 믿고 희망합니다.
(성 이냐시오의 영성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