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9
5월28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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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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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yX8Otq1ilY
(방성수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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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오래전 연로하신 한 자매님께서 제게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기도 지향을 두고 기도 바치면서 너무나 웃겼습니다.
시장통에 작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장사하기가 힘들어서 내놓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매수자가 없어 답답해 죽겠다. 신부님 기도빨 세다니, 부탁드린다. 팔리기만 하면 섭섭지 않게 후사하겠다고 하십니다.
다행인지, 제 기도빨이 셌던 탓인지, 일주일 뒤에 자매님께서 환한 얼굴로 미사에 오셔서 아이들한테 아이스크림 한턱 제대로 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지향을 두고 바치는 기도, 하느님께서 보시고 깔깔 웃으시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했는데, 꼭 당첨되기는 바라는 청원기도,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강요요 억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바람직한 청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성령께서 항상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 함께 기도해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더 꿋꿋이 더 당당히 사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기꺼이 맞설 의로움과 의연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을 위한 지향도 필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 바쳐야겠습니다. 더 이상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 더 이상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그 누구도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청원기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청원 기도의 지향이 좀더 폭넓어질 때, 생기는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큰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사소한 청들은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기도 지향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폭과 지평을 좀 더 확장시켜나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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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원기도로 드러나는 하느님과의 친밀감>
기도는 감사가 핵심일까요, 청원이 핵심일까요? ‘그림 읽어주는 신부’란 블로그에서 그 신부님의 강론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품피정 때 피정지도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도 중에서 가장 기도다운 기도는 청원기도이다.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와 아빠에게 이것저것을 달라고 졸라대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청원기도가 진정한 기도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라고 배웠기에, 피정지도신부님의 다른 주장에 약간은 당황했다.
그런데 우연히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발견했다. 하루는 한 아이가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엄마가 다가갔을 때, 우유병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아이가 우유병을 자기 엄마에게 내밀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그분의 자녀로서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도 모든 문제를 그분께 맡기는 것이로구나.’
아이가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로서 얼마나 기뻤을까?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만일 그 아이가 계속해서 자기의 힘으로만 우유병을 열려고 했다면, 엄마는 안타깝다 못해 엄마를 신뢰하지 않는 아이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열리지 않는 우유병을 꽉 쥐고 있는 아이처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를 갖고 끝까지 혼자 풀겠다고 우기지 말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야겠다. [출처: 그림 읽어주는 신부, 2011년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
어떤 분이 올해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꾸준히 드리던 청원기도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좀 이기적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기도를 포기했으니 이 포기를 보시고 청했던 것들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지만 청하기는 좀 죄스럽고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닌 아주 복잡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청원기도를 계속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고민된다고 저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아이가 부모님께 무언가를 청할 것인지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면 이미 부모님과 관계가 멀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부모님입니다.
나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이것저것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말을 꺼내기가 무서워서 뒷걸음질 친다는 것은 부모를 부모로 보지 못하고 무섭고 불편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감사와 찬미를 드려도 그것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어려워하고 또 가까이 느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참다운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감사와 찬미가 기도의 완성이기는 하지만 청원에서 시작하지 않는 감사는 위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청하라고 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청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것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빈도가 줄어들면 그것을 통해 얻는 기쁨의 빈도도 줄어들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관상기도와 묵상기도만을 바친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청원기도도 바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님에게 기도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받은 편지는 한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이러한 청원기도를 바칠 때 비오 신부님은 고통 속에서 희생과 보속을 바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짊어지고서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실제로 자신이 고통 받으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오상의 비오 신부님 어록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고통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고통을 하느님께 구하는 이유는 고통의 열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귀양살이하는 형제를 구원하며 연옥 불에서 영혼을 건져냅니다. 고통은 보속입니다. 고통은 나의 일용할 양식이고 기쁨입니다.” [참조: 비오 신부님의 청원기도와 고통, 피앗사랑, 다음 카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청해서 얻고 못 얻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가 무언가를 청할 수 있는 분인가 그렇지 못한 분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청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을 가까이 느끼는 것이므로 이미 기쁨은 청할 때부터 나에게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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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3-28 :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베푸시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구원과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라고 하신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기쁨 말고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줄 때가 온다.”(2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때’는 우리가 그분을 마주 뵙게 될 미래의 삶을 의미한다.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본다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비유’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같은 곳) 같은 말이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라는 것은 아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즉,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26절)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나라에서 살 미래의 세상에서 좋은 것들로 이미 우리의 소망이 다 이루어질 텐데 우리가 청할 것이 있을까?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육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이 아들이 아버지께 청하시지 않고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으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당신이 하느님이시기에 당신이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시고도 “너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라고 한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이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받으신 육체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육체를 거두심으로써 세상을 떠나셨고, 인간으로써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로 가셨지만, 그분의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영광 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에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주신다. 성령 안에서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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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퀸즈 성당의 신부님들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주 나눔을 하였고, 지금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캠핑도 같이 다녔습니다. 퀸즈 성당의 봉사자들은 매달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십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토요일에 가서 하루 머물기도 하고, 일찍 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늑한 방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LA에도 제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부부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인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제자들처럼 제가 LA로 갈 기회가 있으면 저를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작년에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LA에 만들었습니다. 기꺼이 사무실을 내어주고, 지국장을 맡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제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본당에서의 사목경험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표를 듣고 교구 사목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첫 본당신부를 마치고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업무를 맡았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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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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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 이름이 가진 권위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과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3-4세기에, 예수님을 한낱 인간으로 여기고 다만 하느님의 능력을 얻으신 분이라고 폄하해 온 아리우스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단과 투쟁하며 많은 교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라는 신앙을 지켜 냈습니다.
그 바탕에 단순하면서도 간절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살아온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 감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보았고, 자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게 해 주신 분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고,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나의 관심과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지향과 마음’으로 기도할 때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지닌 달변과 성경에 정통한 능력을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전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하여 성장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능력을 내 이익의 도구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힘으로 청할 때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보이지 않는 힘이 되는 내 배우자와 가족, 형제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용기를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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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적대자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준비하신 하느님>
한편 에페소(로마 제국 아시아 주의 수도)에는 알렉산드리아(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해양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이며,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에서 온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와 있었다.
그는 천부적인 언변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는 그가 복음의 진수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아폴로는 복음의 핵심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후 아폴로는 아카이아 지방으로 가서 코린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코린토의 유다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며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코린토에 온 아폴로는 능통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유다인들의 주장을 논박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더욱더 설득력 있게 유다인들에게 전하였다.
코린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살았고, 율법을 주신 하느님까지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그처럼 율법에 매어있는 완고한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아폴로를 선택하셨다.
아폴로는 철학과 성경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뛰어난 언변과 박학한 학식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도 능통하였다. 때문에 그는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심을 이내 알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로 에페소에 가서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났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전하여들은 다음 복음전파의 열정에 불타 코린토로 갔다.
그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코린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고, 성경이 전하는 주님을 선포하였다. 성경을 통하여 그들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당신을 거부하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성서에 능통한 아폴로를 그처럼 준비하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던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는 변함이 없다. 어떤 악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죄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울을 미리부터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고, 아폴로를 예비하셔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다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셨다.
오늘,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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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도정호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지금 우리는 부활의 막바지 즈음에 와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복음은 예수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 이전의 상황입니다.
굳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전의 복음을 부활기간 마지막 즈음에 와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내일이면 우리가 기념하게 될 주님의 승천을 미리 준비하게 도와주면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기에 교회가 들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임을 당할 때까지, 또 부활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지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는 기도할 줄은 알았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예수님께는 기도할 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영성 상태를, 당신을 향한 신앙을 헤아리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치면서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벌하시는 분으로, 세상과 인간의 죄에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무서운 분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인간을 영원토록 살게 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인자하고 기다려주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인데, 비유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비유의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들과,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로...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내용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고, 완전히 사로잡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로 알려주신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는 수난과 죽음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이 명백히 알게 될 것이기에 비유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지금껏 하느님께만 청했던 기도들도 이제부터는 당신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청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지 교회를 통해서 알게 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기도해야 할지도 알고, 성인들과 함께 기도할 줄도 알고,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인식시켜주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고 원래 계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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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비유가 필요 없겠지>
요한 16,23ㄴ-28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비유가 필요 없겠지>
빛에게
빛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물에게
물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바람에게
바람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길에게
길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생명에게
생명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사람에게
사람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하느님 닮은 이에게
하느님의 비유가
필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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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 철부지이니 떼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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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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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 기쁨 충만한 삶 -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나이 40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싶으면 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평생공부입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정말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함없이 기도 잘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평생 배워야 할 기도요, 무엇보다 기도의 필수 전제 조건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바로 오늘 본기도가 청원기도의 모범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요! 한마디로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정말 이런 기도는 그대로 응답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오래전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은, 자주 인용했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지금도 묻는 다면 역시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삶이었는지, 참 성인의 삶이었는지, 참 행복한 삶이었는지는 죽음에 직면해서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환상이나 거품이나 거짓은 말끔히 걷히고 진실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착한 자매들이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을 때는 답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먹을 것을 묻습니다만 저는 이런 경우 “자매님을 좋아합니다. 하느님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에둘러 대답하곤 합니다. 언젠가는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부끄러워하는 분에게 주신 글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좋은 분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 분 자체가 최고의 선물로 생각됩니다. 아마 하느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한 수사가 문틈으로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썼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당신 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만으로 족합니다!”
요지의 문답이요, 수차례 인용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저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주님이신 당신을 한결같이 간절히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하나뿐이겠습니다. 당신의 전사戰士답게 죽는 그날까지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즉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는 것뿐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미사와 강론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며 걷는 것 하나뿐이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청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 보면 필요한 것 한가지는 주님뿐임을 깨달아 알 것이며, 사랑의 눈만 열리면 다 받은 것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여기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항구히 간절히 사랑하는 것 하나만이 참 필요한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이래서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제멋대로, 제생각대로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요,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의 이름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하는대로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 충만한 기쁨이란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제가 볼 때 사도행전의 혜성같이 등장한 신비의 인물, 아폴로도 성령께서 교회에, 바오로에게 보내 주신 뜻밖의 기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며 공공연히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니 교회에, 바오로에게 천군만마의 역할을 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복자福者도 부자富者도 자유인自由人도 아닙니다. 마음은 참 어둡고 허전할 것입니다. 참으로 꼭 필요한 주님만을 청할 때 기쁨과 평화, 희망의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주님 자체가 기쁨이자 평화요 희망이기에 기쁨 충만한, 희망찬 평화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내 이름으로 청하라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가 해야 할 바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복福된 운명의 인생 여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며칠전 나눈 짧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웃는 얼굴은
다 꽃이다
주님은
다 예뻐하신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주님 사랑에 더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평생 노력이요 평생 훈련입니다. 무엇보다 참 필요하고 참 좋으신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선물이신 주님을 모시는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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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X2beEqfIw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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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믿음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이다.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만나는
믿음의
시간이다.
믿음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올바른
방향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흠숭이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우리 영혼을
다시 은총으로
깨어나게 한다.
만남을 여는
믿음의 현존이
기도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이며
우리들
삶 자체이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실천하기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의
실천인 것이다.
기도의 실천이
곧 자기정화이며
공동체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서로 나누고
서로 존중하는
믿음의 진실한
공동체를
꿈꾸어본다.
미룰 수 없는
믿음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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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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