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철학적 사유는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낭비를 가장 철저히 거부하는 부류는 아마도 철학자들일 것이다. 이때 낭비는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보다는 철학자들의 사유에 박혀 있는 근본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다. 철학자들이 가계부를 꼼꼼히 쓰면서 수입과 지출을 확인하며 소비하는 것이 잘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근대의 철학자들은 철저하게 낭비에 대해서 거부감을 지닌다.
이때 낭비란 찌꺼기를 남긴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주문해서 남기는 것을 낭비라고 한다. 철학자들에게 찌꺼기란 필요 이상으로 주문해서 남긴 음식이 아닌 이유나 근거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즉 인간의 사유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찌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찌꺼기를 제거하는 것, 즉 만물의 존재 이유나 근거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만약 인간의 사유로 설명할 수 없는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이는 곧 사유의 실패를 의미한다.
철학자에게 무의미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이러한 무의미를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엄숙주의자들이며,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자들이다. 이는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반듯한 생활을 하는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의 철학적 태도 자체가 금욕주의인 것이다.
바타유는 헤겔의 철학에 집착하는데, 그 이유는 헤겔의 철학이 가장 철저한 금욕주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은 한마디로 변증법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변증법적 사유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부분도 남기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찌꺼기가 남는다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미완성을 의미하며, 만약 영원히 사유가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변증법적 사유의 실패를 의미한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은 어떠한 무의미함이나 낭비도 배제하려는 철저한 금욕주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타유는 헤겔 변증법적 사유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이란 한마디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상태, 즉 궁극적인 부정의 상태일 것이다. 낭비를 거부하고 우연한 존재는 없으며 모든 존재에서 존재 근거를 발견하고자 한 변증법을 죽음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헤겔의 철학이 죽음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타유의 해석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의 지성계에 헤겔의 철학을 소개하고 전파하였던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1968)의 해석에서 유래한다.
코제브가 헤겔의 철학에서 죽음에 초점을 맞춘 것은 죽음이 무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죽음은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부정(nég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란 살아 있는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보며 삶의 모든 의미가 제거된 단절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코제브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빌려 죽음이 삶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적어도 인간에게만큼은 죽음이 단순한 삶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앞질러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많을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삶과 단절되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공포감으로 불쑥불쑥 등장한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경험하는 것이다.
다소 실존철학의 뉘앙스가 풍기는 이 죽음에 대한 해석을 코제브는 헤겔의 철학에 적용한다. 죽음이란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만드는 계기이다. 가령 돌이나 책상과 같은 사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없이 그저 돌과 책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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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란 인간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것은 세포의 분열이나 노화에 의해서 생기는 외관상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돌이나 책상 또한 조금씩 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제의 책상과 오늘의 책상이 다르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은 항상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물이란 항상 자기동일성에 머무는 존재다. 이에 반해서 인간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넘어서고자 한다. 즉 자신의 현재 상태를 벗어나고자 한다. 만약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에 머물러 있다면 그러한 인간 존재는 책상이나 돌과 다름없을 것이다.
인간을 현재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스스로 유한함을 인지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렇게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함은 현재 상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죽음과 부정은 일맥상통한다. 비록 현재 죽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느낀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선다. 죽음이란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과 연결되며 이는 곧 인간의 현재 상태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변증법적 운동의 추동력을 제공한다. ‘부정’이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넘어서는 변증법적 힘의 원동력이라면, 거꾸로 헤겔의 변증법은 죽음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헤겔의 철학에서는 삶과 가장 무관한 죽음이라는 요소까지 삶의 의미로 통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엄숙한 철학적 사유는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