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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이스라엘의 역사 』를 보고 친것 입니다.
연대표
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아메네히트 1세(Amenemhet) 주전 1991-1962
센보스레트 1세(Senwosret) 주전 1971-1926
아메네헤트 2세 주전 1929-1892
센보스레트 2세 주전 1897-1878
센보스레트 3세 주전 1878-1841
아메네헤트 3세 주전 1844-1797
아메네헤트 4세 주전 1799-1787
네푸르소벡(Nefrusobek) 주전 1787-1783
신왕국
제18왕조
아흐모세(Ahmoses) 주전 1550-1525
아멘호텝 1세(Amenhotep) 주전 1525-1504
투트모세 1세(Tuthmoses) 주전 1504-1492
투트모세 2세 주전 1492-1479
하쳅수트(Hatshepsut) 주전 1479-1425
투트모세 3세 주전 1479-1425
아멘호텝 2세 주전 1427-1401
투트모셉 4세 주전 1401-1391
아멘호텝 3세 주전 1391-1353
아멘호텝 4세 주전 1353-1335
스멘하카레(Smenkhakare) 주전 1335-1333
투탄하문(Tutankhamun) 주전 1333-1323
이야(Aja) 주전 1323-1319
호렘헵(Horemheb) 주전 1319-1307
제19왕조
람세스 1세(Ramses) 주전 1307-1306
세티 1세(seti) 주전 1306-1290
람세스 2세 주전 1290-1224
메르넵타(Merneptah) 주전 1224-1214
제20왕조
람세스 3세 주전 1194-1163
람세스 4세 주전 1163-1156
람세스 5세 주전 1156-1151
람세스 6세 주전 1151-1143
람세스 7세 주전 1143-1136
람세스 8세 주전 1136-1131
람세스 9세 주전 1131-1112
람세스 10세 주전 1112-1100
람세스 11세 주전 1100-1070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나람-신(Naram-Sin) 주전 2213-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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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슘(Erishum)
샴시-아다드 1세(Shamshi-Adad) 주전 1808-1776
이쉬메-다간(Ishme-Dagan) 주전 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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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우발르트 1세(Assur-uballit) 주전 1363-1328
엔릴-니라리 1세(Enlil-nirari) 주전 1327-1318
어락-덴-일리(Arik-den-ili) 주전 1317-1306
아다드-니라리 1세(Adad-nirari) 주전 1305-1274
살만에셀 1세(Shalmaneser) 주전 1273-1244
투쿨티-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 주전 1243-1207
앗수르-나딘-아플리(Assur-nadin-apli) 주전 1206-1203
앗수르-니라리 3세(Assur-nirari) 주전 1202-1197
엔릴-루두리-우쭈루(Enlil-kudurri-usur) 주전 1196-1192
니누르타-아필-에쿠르(Ninurta-apil-Ekur) 주전 1191-1179
앗수르-단 1세(Assur-dan) 주전 1178-1133
무타킬-누스쿠(Mutakkil-Nusku)
앗수르-레샤-이쉬 1세(Assur-resha-ishi) 주전 1132-1115
디글랏빌레셀 1세(Tiglath-pileser) 주전 1114-1076
아샤리드-아필-에쿠르(Asharid-apil-Ekur) 주전 1075-1074
앗수르-벨-칼라(Assur-bel-kalra) 주전 1073-1056
에리바-아다드 2세(Eriba-Adad) 주전 1055-1054
샴시-아다드 4세 주전 1053-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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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제국
앗수르나찌르팔 1세(Assurnasirpal) 주전 1049-1031
살만에셀 2세 주전 1030-1019
앗수르-니라리 4세 주전 1018-1013
앗수르-라비 2세(Assur-rabi) 주전 1012-972
앗수르-레샤-이쉬(Assur-resha-Ishi) 주전 971-967
다글랏빌레셀 2세 주전 966-935
앗수르-단 2세 주전 934-912
아다드-나라리 2세 주전 911-891
투쿨티-니누르타 2세 주전 890-884
앗수르나찌르팔 2세 주전 883-859
살만에셀 3세 주전 859-824
샴시-아다드 5세 주전 823-811
아다드-니라리 3세 주전 810-783
살만에셀 4세 주전 782-773
앗수르-단 2세 주전 772-755
앗수르-니라리 5세 주전 754-745
디글랏빌레셀 3세 주전 745-727
살만에셀 5세 주전 727-722
사르곤 2세 주전 722-705
산헤립(Sennacherib) 주전 705-681
에살하돈(Esarhaddon) 주전 680-669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 주전 668-627
앗수르-에틸-일라니(Assur-etil-ilani) 주전 627-623
신-샤-이쉬쿤(Sin-sar-ishkun) 주전 622-612
앗수르-우발리트 2세 주전 611-?
바벨론
수무아붐(Sumuabum) 주전 1894-1881
수무라엘(Sumulael) 주전 1880-1845
사비움(Sabium) 주전 1844-1831
아필-신(Apil-Sin) 주전 1830-1813
신-무발리트(Sin-muballit) 주전 1812-1793
함무라비(Hammurabi) 주전 1792-1750
삼수일루나(Samsuiluna) 주전 1749-1712
아비-에슈(Abi-eshuh) 주전 1711-1684
암미디타나(Ammisitana) 주전 1683-1647
암미사두카(Ammisaduqa) 주전 1646-1626
삼수디타나(Samsuditana) 주전 1625-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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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쉬만-엔릴 1세(Kadashman-Enlil) 주전 1374?-1360
부르나부리아쉬 3세(Burnaburiash) 주전 1359-1333
카라-하다쉬(Kara-hardash) 주전 1333
나지-부가쉬(Nazi-Bugash) 주전 1333
쿠리갈주 2세(Kurigalzu) 주전 1332-1308
나지-마루타쉬(Nazi-Maruttash) 주전 1307-1282
카다쉬만-투르구(Kadashman-Turgu) 주전 1281-1264
카다쉬만-엔릴 2세 주전 1263-1255
쿠드르-엔릴(Kudur-Enlil) 주전 1254-1246
샤가라크티-슈리아쉬(Shagarakti-Shuriash) 주전 1245-1233
카쉬틸리아슈 4세(Kashtiliashu) 주전 1232-1225
엔릴-나딘-슈미(enlil-nadin-shumi) 주전 1224
카다쉬만-하르베 2세(Kadashman-Harbe) 주전 1223
아다드-슈마-이디나(Adad-shuma-usus) 주전 1216-1187
멜리-시파크(Meli-Shipak) 주전 1186-1172
마르둑-아플라이디나 1세(Marduk-apla-iddna) 주전 1171-1159
자바바-슈마-이디나(Zababa-shuma-idda) 주전 1158
엔릴-나딘-아히(Enlil-nadin-ahi) 주전 1157-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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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제국
나보폴라사스(Nabopolassar) 주전 625-605
느부갓네살(Nebuchadrezzar) 주전 605-562
에윌므로닥(Evil-Merodach) 주전 562-560
네르글리살(Neriglissar) 주전 559-556
라바쉬-마르둑(Labashi-Marduk) 주전 556(3개월)
나보니두스(Nabonidus) 주전 555-539
페르시아제국
테이스페스(Teispes) 대략 주전 650-620
고레스 1세(Cyrus) 대략 주전 620-590
캄비세스 1세(Cambyses) 대략 주전 590-559
고레스 2세 주전 538-530
캄비세스 2세 주전 529-522
바르디야(Bardiya) 주전 522(6개월)
느부갓네살 3세 주전 522(2개월)
느부갓네살 4세 주전 522(3개월)
다리우스 1세 주전 522-486
크세르세스 주전 486-465
아르닥사스다 1세 주전 465-424/3
다리우스 2세 주전 423-405
아르닥사스다 2세 주전 405-359
아르닥사스다 3세 주전 359-338
아르닥사스다 4세 주전 338-336
다리우스 3세 주전 336-330
고대 이스라엘
통일왕국
사울 주전 11세기 말
다윗 주전 1004(0)-965
솔로몬 섭정 주전 967-965, 주전 965-928
유다 왕국
르호보암 주전 928-911
아비얌 주전 911-908
아사 주전 908-867
여호사밧 섭정 주전 870-867, 주전 867-846
여호람 섭정 주전 851-846, 주전 846-843
아하시야 주전 843-842
(아달랴) 주전 842-836
요아스 주전 836-798
아마샤 주전 798-769
아사랴 주전 785-769
요담 주전 758-743
아하스 섭정 743-733, 주전 733-727
히스기야 주전 727-698
므낫세 주전 698-642
아몬 주전 641-640
요시야 주전 639-609
여호아하스 주전 609
여호야김 주전 628-598
여호야긴 주전 597
시드기야 주전 596-586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왕조 여로보암 주전 928-907
나답 주전 907-906
바아사 왕조 바아사 주전 906-883
엘라 주전 883-882
오므리 왕조 오므리 주전 882-871
아합 섭정 주전 873-871, 주전 871-852
아하시야 주전 852-851
여호람 주전 851-842
예후 왕조 예후 주전 842-814
여호아하스 섭정 주전 817-814 , 주전 814-800
요아스 주전 800-784
여로보암 섭정 주전 789-784, 주전 789-748
스가랴 주전 748/7
살룸 주전 748/7
므나헴 왕조 므나헴 주전 747-737
브가히야 주전 737-735
베가 주전 735-733
호세아 주전 733-724
고고학 연대표
신석기 토기 이전시대 A 주전 8300-7300
신석기 토기 이전시대 B 주전 7300-6000/5800
신석기 토기시대 주전 6000/5800-5000/4800
금석병용기 전기시대 주전 5000/4800-4200
금석병용기 중기·후기시대 주전 4200-3200/3100 (금석병용 시대 주전 4300-3300)
초기 청동기 1 주전 3200/3100-2950/2900
초기 청동기 2 주전 2950/2900-2700/2650
초기 청동기 3 주전 2700/2650-2350
초기 청동기 4 주전 2350-2200
중기 청동기 주전 2200-2000
중기 청동기 2 A 주전 2000-1750 족장시대
중기 청동기 2 B 주전 1750-1600/1550
후기 청동기 1 주전 1600/1550-1400 이집트 입국 및 이집트 체류시기
후기 청동기 2 주전 1400-1300
후기 청동기 3 주전 1300-1200/1150 출애굽시대
철기시대 1 주전 1200/1150-100 사사시대
철기시대 2 A 주전 1000-800
철기시대 2 B 주전 800-700 이스라엘 왕국시대 / 아시리아 제국
철기시대 3 A 주전 700-586 바벨론 제국
철기시대 3 B 주전 586-520 페르시아 제국
고대 근동의 달력
고대 근동에는 두 가지 종류의 월력이 있었다. 가을에서 시작하여 가을로 끝나는 ‘티슈리(가을)-티슈리(가을)’Tshuri-Tshuri 형과 메소포타미아처럼 봄에 시작하여 봄에 끝나는 ‘니산(봄)-니산(봄)’Nisan-Nisan형 달력이 있다.
민수기 29:1에는 “7월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7월은 현대인이 사용하는 월력의 7월이 아니라 단지 서수로서 일곱 번째 달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 달력 구약의 달력 오늘날 달력
니산(Nisannu) 월 첫째 달 (정월) 3월
아야르 월 둘째 달 4월
시마누 월 셋째 달 5월
타무즈 월 넷째 달 6월
아부 월 다섯째 달 7월
엘룰 월 여섯째 달 8월
타슈리투 월 일섯째 달 9월
아라흐삼누 반 여덟째 달 10월
키슬리무 월 알홉째 달 11월
테베투 월 열째 달 12월
샤바투 월 열한째 달 1월
아다르 월 열두째 달 2월
고대 근동에서는 태음력과 태양력 사이의 11간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윤달을 첨가하였다. 일반적으로 윤달은 ‘엘률 월’(여섯 번째 달)과 ‘아다르 월’(일곱번째 달) 사이에 첨가된다. 아시리아 제국에서 윤달은 오늘날과 같이 일정한 기간마다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천체 관측자들과 상의하여 엘룰 월이나 아다르 월에 한달을 더 첨가하였다. 이렇게 윤달로 첨가된 달은 ‘제2엘룰 월’ 혹은 ‘제2아다르 월’이라고 불렸다. 비록 구약의 기록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윤달을 지켰다는기록은 없지만 지켰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즉위한 날부터 다음 첫 신년축제까지를 즉위해(즉위년, 즉위한 원년)라고 부르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하였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비슈나트(그가) 말코(통치할 때)’나 ‘비슈나트(그가) 말쿠토(다스릴때)’는 아카드 어, ‘라쉬 샤루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이다.
즉, ‘비슈나트 말쿠토’라는 표현은 ‘그의 즉위한 해’라는 의미의 아카드어를 히브리어로 옮겨 적은 것이다.
잠깐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고려시대에는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사용하여 새 왕이 즉위한 당해 그 다음달부터 원년으로 계산하였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한 그 달부터 원년을 계산 하는 방식을 유월칭원법, 혹 훙(임금의 죽음)월칭원법(薨月稱元法)이라고 한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새 왕의 즉위년에도 그대로 전왕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태조와 세조와 중종과 같이 반란을 일으킨 왕은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다. 한국사에도 유년칭원법을 사용할 때 원년 이전의 기간은 일반적으로 ‘즉위년’이라 부르고 그 다음해를 ‘원년’이라고 한다. (민병하)
에포님eponym: 아시리아 제국은 왕실비문을 기록할 때 주전 910년부터 612년까지 에포님이라는 독특한 연대 기술 방식을 사용하였다. 에포니은 리무limmu라는 관직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특정 해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리무라는 게 왕이란 지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에포님 연대는 리무 관직을 가진 사람의 이름과 그의 관직명 그리고 그 해에 있었더 중요한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주전 743년에 해당하는 리무 관리의 이름은 디글랏빌레셀 3세이고, 그의 직책은 아시리아의 왕이며,그가 즉위한 해에 아르파드Arpad와 우라르트Urartu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전 743년부터 612년까지 아시리아의 에포님은 다음과 같다.
연도 리무 관직명 사건
743년 디글랏빌레셀 아르파드와 우라르트를 격파함
742년 나부-다아이나이 군대장관 아르파도로
741년 벨-하란-벨루-우수르(Bel-arran-belu-usur) Palace Herald 아르파드로, 3년 걸림
740년 나부-에테라니(Nabu-eteranni) Chieg Butler 아르파드로
739년 산-타크라크 Chamberlain 울루바(Ulluba)로 성채를 빼앗음
738년 아다드-벨루-키아인(Adad-velu-..) 총독 쿨라니(Kullani)를 점령함
737년 벨-에무라니(Bel-emuranni) Rasappa의 총독 메디아로
736년 니누르타-일라야(Nunurta-ilaya) Nisibin의 총독 날산(Mt. Nal)의 어귀로
735년 앗수르-샬리만니(Assur-shallmanni) Arrapha의 총독 우라르투로
734년 벨-단(Bel-dan) Kalah의 총독 블레셋으로
733년 앗수르-다이나니 Mazamua의 총독 다마스쿠스로
732년 나부-벨루-우쭈르 Simme의 총독 다마수쿠스로
731년 네르갈-우발리트(Nergal-uballit) Ahi-zuhia의 총독 샤피야(Shapiya)로
730년 벨-루-다리 Tille의 총독 in the land
729년 리푸르-일루(Liphur-ilu) Habruri의 총독, 왕이 벨(마르둑)의 손을 가짐
728년 두르-앗수르 Tussn의 총독, 힐[...]로 왕이 벨의 손을 가짐
....
690년 나부-케누-우쭈루 사마리아의 총독
....
679년 이시-아다드0아네누 므깃도의 총독
....
645년 나부-샤르-아헤슈 사마리아의 총독
기루와 팔루
에포님 외에도 연대를 기록하는 또 다른 방법에는 기루라는 방식이다. 기루방식은 산헤립 왕 때에만 나타나며, 그것은 산헤립 시대의 사가들은 산헤립 왕이 치렀던 전쟁을 기준으로 제위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따라서 기루는 통치 연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기루가 통치 1년을 의히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 역사 재구성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 왜나하면 언제 전쟁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팔루는 기루와 갈리 통치 연한을 나타낸다. 그래서 팔루는 곧 통치 1년과 같다. 아시리아 제국에서 기루와 팔루의 사용에 있어서 어떤 규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서기관에 의하여 독특하게 사용되었다.
라쉬 샤루타 혹은 슈라트 샤르티아 (모두 유년칭원법을 가리킴)
이스라엘의 지리, 기후, 환경
이스라엘은 가운데가 산악지대 이고 지중해 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요단 강 계곡 쪽으로는 급한 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지중해 쪽으로는 충적토가 발달하여 비옥한 지역과 평야지대를 이루지만 요단 강 계곡쪽으로는 급격한 절벽을 이룬다.
지중해변을 따라 270여 km의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해안선의 평원들은 북쪽에서에서 남으로, 악고에서 갈멜 산까지의 악고평야, 갈멜 산에서 야르콘 강까지의 샤론 평야, 그리고 야르콘 강에서 가자까지의 블레셋 평야로 세분화할 수 있다. 해안 평야지대는 북쪽지역의 폭이 약 10km 미만이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넓어져 약 30km까지 된다.
해안 평양지대에 형성되어 있는 쿠르카르라는 단단한 토양은 중앙 산악지대로부터 흘러내린 강물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 샤론 평야 부근에 늪지대를 만들었다.이러한 습지가 육상 이동의 장애가 되어 지중해 해안을 따라 형성되던 도로는 이 근처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바꾼다. 해안 평야 지대에는 많은 항구가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악고 평야에 위치한 악고는 가나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 특히 남부의 블레셋 평야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해발 200-300m의 낮은 지역을 만나는데 이곳을 쉐펠라Shephelah라고 부른다. 이 지역에서는 주로 감람나무와 뽕나무가 재배되었다.
중앙 산악지대의 강수량은 북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한다. 왜냐하면 중앙 산악지대 북쪽지역이 남쪽지역에 비하여 낮아 지중해에서 많은 비구름이 몰려오기 때무이다. 강수량이 풍부하 중앙 산악지대에는 주로 올리브를 재배한다.
갈릴리 산악지대 중간에 북쪽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있는 이스르엘 평원은 이스라엘 최대의 곡창지여이다. 이곳은 강수량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한 테라로사이기 때문에 많은 농작물을 재배한다.
요단 강 계곡지대는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으로 갈릴리 호수 근처는 -210m, 여리고는 -250m 그리고 사해는 -400m 이다. 이 지역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연간 약 400mm가량의 비가 내려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요단 동편지역은 요단 강을 중심으로 내륙(동쪽)으로 갈수록 산악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요단 동편지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요단 계곡 지역, 산악지역 그리고 사막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길르앗, 암몬 모압, 에돔을 그 사이에 흐르는 강들로 구분해보면 아래와 같다.
길르앗
------얍보 강
암몬·모압
------아르논 강
에돔
길르앗 지역은 높은 고산지로서 옛날부터 발삼 향료재배와 삼림이 우거져 있었다. 비교적 기름진 토양과 풍부한 강우량(연 500~700mm) 때문에 길르앗 지역은 북이스라엘 왕국과 아람 다메섹의 주요한 목표가 되어 두 나라 사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반면에 암몬-모압 지역은 해발 800-100m 지역으로서 교통의 중심지였다. 에돔 지역은 산악지대 1000-1700m 로 평균 1200m 이상이다.
석회암은 성벽과 건축재료로 많이 사용되어 오느날 예루살렘 건축에 사용되는 돌의 대부분이 이 석회암이다.
현무암은 요단 강 동편지역의 바산 고원과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볼 수 있는데 현무암이 풍화한 황갈색의 토양은 점성이 강해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다.
누비아 사암과 요르단 동편지역에 많이 나타나며 석회암 처럼 단단하고 풍화 침식에 강하여 높은 산지를 이루었다. 사암지대의 특징은 빗물이 잘스며들지 않아 상시 천을 이루는 것이다.
석회암이 변하여 형성된 테라로사 토양은 짙은 붉은색을 띠며, 매우 비옥하여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재배되고 잇다. 이 테라로서 지역은 이스르엘 평야지대와 요단 강 동편의 중앙지대이다.
이스르엘 평야지대와 해안 평야지대는 바람의 영향으로 충적토가 쌓여 토양이 비옥하다. 이곳에서는 많은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요단 강 동편지역의 주된 토양은 두껍고, 단단한 모래 토양인 누비아 사토이다. 붉은색 때문에 요단 동편의 남쪽지역을 에돔(‘붉음’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부른다.
건기는 대체로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정도이고 낮에는 고온 건조하며(32~38도) 밤에는 추워 일교차가 크다. 반대로 우기는 주로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약 6개월 간이다. 우기에는 1년 강우량의 80%이상이 쏙아지며 특히 1-2월에 집중된다. 비가 올 때는 대체로 강한 바람을 동반한다.
갈릴리 호수 주변은 연 강수량이 1000mm 이상이 되며, 이스르엘 평원 역시 풍부한 강수량으로 이스라엘 최대 곡창지대로 꼽힌다.
이집트 제 6왕조 왕이었던 페피Pepi(주전 2354~2310년경) 시대의 상부 이집트 관리였던 웨니Weni, 산에하트Sanehat 두루마리,
포도 수확은 주로 7-8월에 한다.
종려나무는 가나안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는 나무 가운데 하나로 향기로운 하얀 색 꽂을 맺으며 대추야자라 부리는 열매를 맺는다. 대추야자는 대체로 8월 말-9월 초에 수확한다. 대추야자는 기본적인 식량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꿀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보리와 함께 밀은 겨울이 시작되면서 뿌리를 내린다. 그렇지만 보리보다 성장 속도가 더이다. 그래서 보리를 추수한 뒤 두달 정도 후에 밀은 수확한다.
주전 7세기 에글론의 올리브 생산 산업은 매우 발달하였다.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에글론을 중심으로 한 블레셋의 해안지역은 올리브기름을 생산 수출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에글론에서 발견된 올리브기름 생산 공장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초기 금석병용기 시대의 구리 제품은 러시아와 터키 국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산지에서 생산된 것을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청동기 시대인 주전 3000년대에 구리는 여전히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기류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초기 청동기 제4기 혹은 중기 청동기 제1기인 주전 2300-2000년에 구리로 만든 무기류가 등장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갈릴리 지역에서 처음 청동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시리아의 영향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주 철산지는 요단 동편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중기 청동기 제1기(주전2300/2250-2000)시대부터 발견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값을 지불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은이었다.
은은 값을 치를 때 무게를 달아 계산하였다. 구약에 나타난 세겔은 모두 은의 무게를 나타낸다. 은 1세겔은 약 11.3그램이다.
금은 은보다 뒤인 중기 청동기 제2기 BC시대(주전 1800/1750-1550)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따르면 오빌이 금의 산지였다고 한다.
이스라엘, 유다 왕 년도 관련한 성경 기록 중 모순 되는 부분
열왕기상 8:25에 의하면 아하시야는 요람 왕 제12년에 즉위하였으나 열왕기하 9:29에서는 요람 왕 11년에 즉위하였다. 열왕기상 16:23에서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12년 통치)가 유다 왕 아사 제 31년(41년간 통치)에 즉위 하였으며, 12년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오므리의 통치는 41년간 통치한 아사 왕 다음에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상 16:28-29에 의하면 오므리가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이 된 것은 아사 왕 제 38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열왕기상 16장의 기록이 맞다면 오므리의 통치기간은 12년이 아니라 7년이 된다.
유다의 르호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과 같은 년도에 즉위하였고, 유다의 아하시야 와의 죽음은 북이스라엘의 요람(여호람)왕과 같은 년도에 죽었다고 한다. 유다의 르호보암 왕에서 아하시야 의 죽음까지 95년이라고 한다. 그럼 이 기간동안의 북이스라엘 왕들의 제위기간도 유다와 같이 95년 이어야 하지만 실제 왕들의 제위 년수를 계산해보면 약간 기간의 차이가 난다. 후자는 95년이 아니고 98년 7일이다.
산헤립의 비문에 의하면 산헤립이 예루살렘 침략은 주전 701년에 있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바탕으로추정한 히스기야 제 14년은 주전 714년으로 산헤립이 왕이 되기 전이다.(산헤립은 주전 705년 왕이 됨)
성경에서는 유다의 여호람, 아하스때에도 섭정기간이 있었지만 따로 왕의 통치 연한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열왕기하 18:1을 보면 이스라엘 왕 호세아 3년에 유대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열왕기하 17:1에는 유다 왕 아하스 12년에 북 이스라엘에선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왕이 되어 9년을 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해볼때 이스라엘의 호세아가 즉위한 해는 주전 731/0년(722/1+9)이며 히스기야가 즉위한 해는 주전 728/7년이다.
M. Greenberg는열왕기 사가의 마지막 편집연대가 주전 6세기 후반이며 에스게서는 바벨로 포로기 때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1983)
북이스라엘 왕과는 달리 유다 왕의 경우 즉위 당시 왕의 나이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북이스라엘 왕에 대해서는 통치 연한만 제시하고 있다.
열왕기하 역사를 살펴보면 열왕기하 사가는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양식을 사용하고 잇다. 특히 유다 왕의 업적을 기록하는 것에는 다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치 개요:즉위 당시 나이, 통치 기간, 어머니 이름을 적는다.
종교적인 평가:여호와 보시기에.....
업적:정치 군사적 업적
기록:업적에 관한 다른 기록 언급
계승:선왕의 죽음과 계승
의순으로 기록한다.
열왕기상 15:8에서는 아사를 아비얌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열왕기상 5:10에 의하 아사는 아비얌과 형제관계가 되낟.
히브리어 ‘벧’ 혹은 ‘베이트’는 집을 뜻한다
고대 이집트·아시리아·이스라엘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고왕국 제6왕조(주전24세기 후반) 부터이다. 제 6왕조에 대해서는 Cambridge Ancient History에서 2345-2218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왕국 제 6왕조의 왕 웨니Weni(주전 2323-2275)의 묘비에 따르면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이집트 군대가 다섯 차례 이집트 동쪽지역, 가나안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돌아왔고 웨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배로 갈멜 산 근처에 도착한 후 악고 평야 쪽으로 상륙하여 이스르엘 평야 쪽으로 공격하였다. 웨니의 군대가 이스르엘 평야를 공격한 흔적은 므깃도 제16층의 파괴층에 남아 있다.
(이집트 제 6왕조 왕이었던 페피Pepi(주전 2354~2310년경) 시대의 상부 이집트 관리였던 웨니Weni, 산에하트Sanehat 두루마리)
시누헤는 이집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암미-엔시Ammi-ensi의 설득으로 이집트에 반대하여 귀국하지 않고 레테누(Retenu,가나안)에 남게 된다. 암미-엔시의 군대장관이 된 시누헤는 가축, 소, 올리브 등 풍부한 재산을 소유하여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야라는 곳에 살았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부를 얻은 시누헤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죽기를 원하였고 이집트 바로의 초청을 받아 고향에서 죽는다.
제12왕조의 왕인 센-우저르트 2세(크눔호텝 3세라고도 불림)
센-우저르트 3세 시대의 이집트 관리였던 후-세벡Khu-sebek의 비문
주전 20-18세기 동안 가나안 지역 사회체제는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화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제도에 있어서는 3-4명의 족장 중심의 통치체계에서 1명의 지도자에 의한 통치로 변화하였다.
므깃도에는 이집트의 관리인 투트-호텝Thut-hotep이 거주하고 있었다.
투트모세 3세때인 1468년 미타니왕국의 사주를 받은 카데스와 므깃도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시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공하였다.
이집트 군대가 가자에서 야함Yaham까지 약 120km의 거리를 12일에 걸쳐 이동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약 10km 정도의 행군 속도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므깃도에서의 이 전쟁은 전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야함에 도착한 이집트 군대가 므깃도로 가는 길에는 세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북족의 제프티Djefti를 통과하여 욕느암을 거챠 므깃도로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갈멜 산의 남쪽을 따라 이스르엘 평원의 다아낙을 통하여 므깃도로 가능 것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아루나Aruna를 통과하는 것으로 가장 길이 짧다. 그러나 이 길은 협소하여 이집트 군대가 통고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파라오는 바로 이 길을 통과하여 므깃도의 연합군을 무찔렀다. 이러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확한 정보 수집이었다.
1460년 투트모세는는 다시 오론테스 강가에 있는 카데스를 정복하였다. 카데스는 미타니의 도움을 받아 이즙트에 대한 반란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정복의 목적은 카데스가 아니라 미타니 왕국을 정복하는 것이었으며 1457년 투트모세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가나안의 다아낙의 통치자 탈바슐 Talwashur
아만하트파(Amanhatpa뒤의 아멘호텝 2세가 됨)는 당시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이었다.
아멘호텝 3세와 4세때에는 이집트와 미타니 왕국이 서로 평화관계를 지속하였기 때무에 이집트의 바로가 더 이상 가나안에 대한 군사적 충돌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벧산에서 발견된 세티 1세(주전 1306-1290)의 비문은 그가 당시 가나안 북쪽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메르넵타Merneptah(주전 1224-1214)는 팔레스틴 지역을 원정하였다.
메르넵타 시대에는 에게 해 쪽에서 이동한 많은 해양민족들이 등장하였다. 메르넵타 통치 5년에 메레예Mereye의 통치자인 레부Rebu의 영도 아래 리비아 연합군이 이집트를 공격해왔으나 메르넵타는 이를 무찔렀다. 이집트에 대항하는 리비아 연합군에는 다음과 같은 민족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데 몇몇 해양민족이 있다. 에크베쉬(Ekwesh), 테레쉬(Teresh), 루카(luka), 쉐르덴(Sherden), 쉐켈레쉬(Shekelesh)등이다. 그런데 이들을 “모든 지역에서 온 북쪽 사람들” 이라고 부르고 있다. (Barnett)
람세스 3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을 담은 벽화에는 블레셋 사람의 전사들이 깃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람세스 8년에 그는 나일 지역으로 들어오는 해양족을 맞아 이들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펠레세트Peleset[블레셋], 체커Tjeker,쉐켈레쉬, 다누나Danuna, 쉐르덴Sherden, 그리고 웨세스Weshesh => 시리아 북주지역을 정복한 집단
“바다의 테레쉬Teresh”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해양족인 테레쉬가 람세스 3세 때 시리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람세스 2세 시대 호리Hori가 아메네모페트Amenemopet에게 보낸 서신
창세기 30:12-13절에 등장하는 아셀 사람들의 영토는 므깃도 남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욥바를 중심으로 북쪽 지중해변에는 체커라 불리는 해양족이 잇었다.
원래 힉소스의 뜻은 ‘이방인의 통치자’이란 뜻으로 히카우-호스베트(Hikau-khoswet)라고 불렀다. 이들은 원래 아시아에 있는 가나안 부족드을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주전 17세기를 지나면서 이집트의 가나안 출신군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헬레니즘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 역사가인 마네토는 이 단어를 잘못 이해하여 이것이 ‘유목민의 왕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히랍어로 Hyksos로 옮겼다.
힉소스에 관한 기록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의 이집트 제사장이면서 역사가인 마네토Manetho의 기록을 요세푸스가 재인용하면서 이다. 제 15왕조(주전 1650-1570)을 세웠으나, 100여년 후 이집트 제18왕조의 첫 파라오였던 아흐모세에 의해 추방되어 유다 지방에서 예루살렘을 건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네토의 기록에 기초하여 그는 힉소스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이해하였다.
세겜의 라바유Labayu가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아무르 왕국의 건설은 곧 미타니 왕국과 하티 왕국 사이의 세력 다툼이 가나안 땅에서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겜의 왕 라바유의 세력 확장은 가나안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벧산의 왕으로부텀 많은 미움을 샀다. 뿐만 아니라 라바유는 게셀과 북쪽의 갓-갈멜Gath-Carmel을 포함하는 강력한 연합체제를 구축하였다.
아마르나 시대에 이집트와 북쪽의 미타니 왕국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미타니 왕국의 쇠퇴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집트는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원정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는 동안 팔레스틴 내부의 도시국가들과 작은 왕국들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바르다타Shuwardata 왕국:Milkilu와 킬투(Qiltu)의 왕 수바르다타가 게겔, 김투(Gimtu), 그리고 킬투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루부트(Rubutu:게젤의 왕)를 점령하였고, 이어서 예루살렘에 속해 있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주전 14세기경 가나안에서 중요한 지역은 게셀, 세겜, 그리고 하솔이었다. 이 외에도 아스글론, 라기스, 갓, 예루살렘, 르홉, 므깃도, 시므온Shimon, 악고 등인데 세겜과 하솔만이 영토를 가지고 있는 왕국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집트는 가나안에서 가자, 욥바, 울라사Ullasa, 쭈무르, 벧산 그리고 쿠미디 등 여섯 곳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들 여섯 요새들은 주변에 있는 경작지를 관리하였다. 이들 요새화된 도시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므깃도, 악고, 비블로스 등 중요한 지역에 주둔군을 주둔시켰다. 이들 군대 규모는 50여 미만에서 많이는 300여 명까지 되었다.
가나안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관리들이 파견되었는데 총독들은 각 지역에 한 명씩 배정되어 그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의 명칭은 ‘이방을 위한 왕의 사신’이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모든 봉신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군대가 원정을 갈 때, 군사와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비루는 주전 2000년대의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사회적, 정치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아마르나 문서에는 이들 하비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한다. 하비루란 이집트 세력에 저항을 하는 일군의 사람드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때로 강도 집단으로 또 때로는 용병을 하는 지단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들은 도시국가간의 부쟁에 관여하였다. 또한 이들은 투슐티Tushulti에 거주하면서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도 볼수 있다. 또 문서에는 수투Sutu라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수투는 아카드어로 방랑하는 유목민의 집단을 뜻하는 말이며 아마르나 시대에 방랑하는 유모민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들은 때에 따라서 위험한 집단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유목민들 가운데 유프라테스 강 중류지역에서 방랑하던 유목민드을 특별히 알라마유alamayyu라고 불렀다.
아마르나 문서에는 또 해양족인 에르덴Erden 과 루키Lukki가 언급된다. 쉐르덴은 비블로스 지역의 왕실 경호원이나 용병으로 활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루키는 알라시야를 약탈하는 약탈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봐서 해양족들이 이미 주전 15-14세기에 팔레스틴의 지중해 해안에서 활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르나 시대 헤브론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
애굽에서 쫒겨난 힉소스는 가나안의 사루헨Sharuhen:Tell el-Fahrsh에서 애굽 군대와 세 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패하게 된다. 아흐모세 이후 아멘호텝,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3세도 지속적으로 힉소스를 못아냈다.
아마르나 문서에는 기브온, 벧엘, 헤브론 그리고 여리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곳들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숙곳Succoth은 나일 강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요한 경로인 와디 투밀라트Wadi Tumilat에 있는 테쿠Theku, 오늘날 텔 엘-마스후티Tell el-Maskhutah로 간주된다.
만약 출애굽 한 인구의 수가 250만~300만 명 정도라면 그 대열의 길이는 16열 횡대로 앞 사람과의 간격을 50cm로 가정했을 때, 대력 78-93km 정도 된다. (3만 1000명의 길이는 1km정도 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가나안 및 국제 정세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다. 특히 가나안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히타이트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가나안은 힘의 공백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힘의 공백상태 속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가나안의 여러나라들이 왕국을 형성하였다.
이집트 신왕국시대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간섭이 활발하던 시대였다.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팔레스틴과 더 나아가 미타니 왕국에까지 15차례나 원정을 감행하였고,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 역시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 세 번의 군사원정을 하여 미타니 왕국과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으나, 빈번한 원정으로 이집트와 미타니 왕국 모두 많은 국력을 소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멘호텝 2세의 후계자인 투트모세 4세와 아멘호텝 3세는 가나안 원정을 몇 차례만 감행하였다.
주전 1275년 가데쉬에서 중요한 결전을 치렀다. 이처럼 갈등관계에 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주전 1259년에 조약을 맺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집트가 쇠퇴기로 접어든 것은 므넵타 부터였고, 이때부터 70년 후에는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집트가 당장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는 몰려오는 해양족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람세스 3세이후 부터 이집트 세력은 가나안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바벨론 지역에서 주전 16세기경에 새로운 왕조인 카스kassite 왕국이 탄생하여, 주전 1530-1155년까지 4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주전 13세기부터는 아시리아와 엘람 와욱이 카스 왕국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카스 왕국의 결정적인 쇠퇴는 주전 13세기 말 바벨론의 카쉬틸리아슈 4세Kashtiliashu(주전 1232-1225)가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주전 1243-1207)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많은 지역이 아시리아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면서부터이다.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슈필룰리우마 1세(주전 1380경-1346경)가 미탄니 왕국을 공격하여 미타니의 투쉬라타Tushratta를 죽이자 이 지역은 정치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시리아의 앗수르-우발리트 2세는 이것을 이용하여 세력을 장악하고 아시라의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아시리아가 세력을 확장하자 바벨론의 부르나부리아쉬Burnaburiash 왕이 앗수르-우발리트의 딸인 무발리테트-쉐루아Muballitat-Sherua와 결혼한다. 그 후 즉위한 이들의 아들인 카라-하다쉬가 반란으롲 죽자 앗수르-우발리트는 바벨론의 내정을 간섭하여 쿠리갈주 2세(주전 1332-1308)을 왕으로 세웠다.
앗수르-우발리트가 죽은 후 일시적인 공백기를 지낸 후 주전 13세기에 세 명의 왕에 의하여 아시리아는 다시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다드-니라리 1세(주전 1305-1274), 살만에셀 1세(주전 1273-1244) 그리고 투쿨티-니누르타 1세이다.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서쪽의 시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전에 미타니 왕국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아시리아 영토로 합병하였다. 비로소 아시리아는 아다드-니라리 1세 때에 열강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히타이트 왕이 아다드-니라리 1세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난다. 히타이트의 왕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너에게 형제라고 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와 내가 한 어머니에게서 낳았느냐?” 이러한 사실은 히타이트 왕으로서도 아시리아 왕을 형제로 부르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우라르투 지역을 포함하여 시리아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을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후 아시리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 1세(주전 1114-1076)가 즉위하면서, 전 왕들의 정복전쟁을 계승하여 서쪽의 아람과 무쉬쿠Mushku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게 된다. 또한 북쪽으로는 반 호수 지역까지 다다렀다. 그러나 그는 단명하고 말았다. 결국 주전 1050년 이후 아시리아 세력은 매우 축소되어 메소포타미아 북족지역은 아람이 통치하게 된다.
욥바
아스돗
아스글론
가자
위의 지명들은 모두 블레셋의 해안가의 지명을 남쪽(가자)에서 부터 북쪽의 욥바까지 적은 것이다.
샤론 평화와 돌의 해안 지대는 주전 1090년경 해양종족인 체커에 의해 점령당했다.
가나안에서는 후기 청동기시대(주전 1400-1200)의 거주지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성경의 정복전과 관련된 도시들을 발굴한 결과 후기 청동기 시대의 지층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곳이 많다. 그리고 중앙 산악지대를 벗어나서 더 서쪽에 잇는 거주지들은 주전 11세기 말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거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리고 지역 발굴을 해보았으나 후기 청동기시대 지층 자체가 없다.
요단 강 서편지방에 새로 나타난 거주지들은 숫자적으로 비교해보면 주로 예루살렘 북쪽 이스르엘 평야 남쪽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앙 산악지대가 정착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게 한다. 중앙산악지 에서도 초기에는 동쪽에 거주지가 몰려 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쪽으로 확산된것을 알수 있다.
철기 시대의 주저지의 약 93%가 새로운 주거지이며, 대부분은 성벽이 없고, 소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새로운 주거지는 산지에 위치하고, 요단 강 양쪽의 고원지대에 거주하였다. 철기시대 제1기 정착촌의 밀도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 지역에 집중적으로 위치한다.
므낫세 지파의 마길Magil 부족은 바산과 상부 갈릴리 지역으로 건너 갔었다. 야일과 노바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할수 있다.
르우벤은 대체로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르논 강까지의 지역을 부여받았다.
블레셋 민족은 가나안 남쪽지역에 정착하면서부터 가나안과 토착 문화를 급속도로 받아들였다. 이러한것은 블레셋의 토기 발굴로 분명히 나타난다. 주전 12-11세기에 사용됐던 블레셋 토기는 미케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전 10세기 전후에 이르면 블레셋만의 독특한 토기류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블레셋이 팔레스틴에 정착한 이후 토착 문화의 영향으로 자신의 문화를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드른 자신들의 독특한 미케네 무명을 150여 년간만 유지하였고 그후에는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다.
살만에셀 3세의 비문을 보면...하다드(hadad) 가 나오고 앗수르-라비 2세(주전1012-972)때 아시리아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다윗을 소년이라고 한것은 나이 어린 남자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 관직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첫댓글 이렇게 말하는것이 좀 웃길수도 있겠지만...제가 하는 행동이 심하다 싶으면 강력 지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주의하겠지만...(표현이 좀 그렇지만) 상호 견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전..다른분들 께서도 글 많이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기분 상하실지도 모르겠지만..다른 게시판의 경우에는 한분만 장기간 글을 올린 경우를 봤습니다. 카페가 예전같아 보이지 않는것 같기도 하고...그리고...아래 제가 꽤 길게 댓글 달았었는데 솔직히 그 댓글들 올리고 두려웠습니다.
이것에 대해 그냥 제 맘대로 해석하겠습니다. 그냥 아무일 없이 넘어가준신것에 대해 매우 고마웠습니다. 그냥 네 할때로 해라며 포기한것인데 저 혼자 다른 생각하는것이라고 하실수도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올린글들 반응을 자주 확인 하는 편입니다. 먼저 올린글과 다음글간의 조회수도 보고...제가 올린것에 대한 스크랩 한분의 수도 봤습니다. ..제가 올린글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앞에 누가 누구를 낳았고 ㅡㅡ. 심한대 이정도야 애교죠 ^^ 좋은글 감사합니다 퍼가기도 할꼐요 ㅋ